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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제 밥벌이를 할지...?'


모든 부모들이 자식에게 하는 걱정이다. 연재가 끝나고 후기까지 올린 시점에 외전을 써가며 이런 얘기를 푸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인디밴드 Mot의 리더인 이이언의 아버지가 곧잘 하던 이야기라는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시드니에 사는 늙은 잉여가 인디 가수 이이언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그런 이야기를 꺼내느냐고? 글쎄 내일 모레면 70인 필자가 못인지 망치인지 하는 인디 가수와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지난 달 연재 후기 바로 밑에 내 기사의 담당 편집자인 퍼그맨이 무슨 크리틱 기사를 썼길래 "이건 뭐여?" 하고 우연히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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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읽다 보니 내용은 모르겠는데 소개하는 이이언이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이 교수'의 아들이 아닌가? 가끔 만나면 서로 간에 자식들의 안부를 물을 때 음악을 하는 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언제나 후렴처럼 붙이던 말이 바로 "언제나 제 밥벌이를 할 수 있을지?"이었던 것이다.

 

퍼그맨의 글을 읽고 "이이언이가 내 친구 아들이다."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평소에 업무상 필요해서 문자를 보내면 반나절이 지나도 연락이 없던 퍼그맨이 단번에 입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한편으로 얄밉기도 했지만 하마터면 친구의 아들이 하는 음악에 대해 평생 모를 뻔했던 것에 대하여 다행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라면서 한 번이라도 부모 속을 썩이기는커녕 상을 찡그릴 일도 하지 않고 공부를 잘해서 연세대 전산과를 특차로 들어가는 등 장래가 촉망되던 이언이 컴퓨터 음악을 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저 취미 생활을 하는 줄로 알았다. 그 후로도 음악을 정식으로 공부 해 본 적이 없는 녀석이 가수가 되어 앨범도 내고 연예계를 다루는 잡지에도 나고 했다지만 우리는 도대체 그게 뭐 하는 것인줄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이언이 여전히 백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교수와 나는 아들들 이야기를 하면서 정상적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내 아들에 비하여 이언이는 모라토리엄(moratorium) 인간형'이라고 농담을 하곤 했었다. '인디'란 것은 'independent'의 줄임말일 터인데 독립은커녕 모라토리엄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라토리엄 인간이란 일본 게이오 대학의 오코노키(小此木)교수가 '모라토리엄 인간의 시대'라는 책에서 소개하면서 유명해진 말이다. 모라토리엄이란 다들 잘 알고 있듯이 채무상환을 유예하는 기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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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이 땅의 대부분의 백수는 모라토리움 인간형이다. 그런데 나는 우연히 퍼그맨 덕분에 술잔을 기울이면서 모라토리움 인간이라고 자조 섞인 농담을 주고받던 이언의 노래를 듣게 된 것이다. 나로선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뭔가 있는 것 같은 노래를. 그래서 여기 저기 귀동냥을 해보니 이언이 하는 음악이 목소리로 노래만 잘 부르면 되는 것이 아니고 과학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설계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하여간에 잘 알 수 없는 이언이 이야기는 그 정도 하고 여기서는 이언의 아버지 이 교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교수와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바로 앞뒤 번호로 서게 된 이후 늘 붙어 다녔다.


이 교수와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았는데 한 번은 그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해온 일이 있다.


"야! 너희 기독교에 UFO라는 단체가 있지? 도대체 그게 뭐냐?" 


"UFO라니?" 


"그거 있잖아? 뭐 대학생 선교회인가 뭔가 하는?" 


나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아! UFO가 아니고 UBF! 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라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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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야기는 이랬다. 자기 강의를 듣는 여학생 하나가 신경쇠약을 앓다가 자살을 했는데 그 학생의 일기 어딘가에 '이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충격을 받았네. 어저꾸 저쩌구........' 하는 내용이 있었단다. 이 여학생은 대학생성경읽기 선교회의 회원이었는데 같은 UBF 선교회의 회원들이 문제의 일기 내용 때문에 항의(?) 성격의 방문을 왔단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항의의 내용이 아니고 항의의 자격문제였다. 아무래도 친족인 것 같지가 않아서, 


"실례지만 고인과는 어떤 사이들이신지?" 


"OOO는 저희들의 자매입니다." 


"자매라니? 여러분들인데 어떻게 자매가 되시는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자매입니다."


"뭐요? 혈연적 자매라면 혹시 내가 댁들과 대화를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지만 종교적 관계의 사람들과는 내가 할 말이 없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형제자매로서 마땅히……." 


"그런 관계는 당신네들 조직 안에서 내부적으로 성립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회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하오. 그만 돌아가시오." 


라며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이 교수의 논리는 특정 신앙체계 안에서 서로를 형제자매로 규정하고 그 논리를 바깥 세상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것은 조폭에서 형제를 맺은 사람들이 문제가 생겼다고 시비를 거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럴 듯한 말이었다. 


이 얘기만 놓고 보면 이 교수가 이성만 앞세우는 사람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댁들은 한평생 돈 낼 일이 생길 때마다 나서주는 친구가 있는가? 이 교수는 나에게 그런 친구이다. 고등학생 때는 가난한 고학생이었던 나에 비해서 시골 면장의 아들로 유학을 온 이 교수가 형편이 나보다는 나아서 그랬고 학교를 졸업 후에는 나는 돈과는 인연이 먼 업계로 진출을 하고 이 교수는 박봉이라도 받는 교사가 되어 밥을 사게 된 것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어떻든 이 교수가 나보다는 수입이 나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교수는 친구를 만나면 밥값은 항상 자기가 내는 스타일이기는 하다.)

 

신세 진 것을 갚기는커녕 계속 이런 관계가 지속되는 까닭은 연재를 하며 언급한 바대로 내가 빈민운동을 한 탓이 크다고 하겠다. 1986년 빈민운동을 할 때 나의 담당 구역은 4000여 가구가 철거되기로 예상된 광명시 하안동의 대규모 철거민촌으로 굳어졌다. 철거촌에 들어가면 제일 처음 하는 일이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다. 구체적인 활동내역에 대하여 쓰려면 조정래의 대하소설 못지 않게 쓸 것이 많겠지만 오늘은 이 교수와 내가 다른 길을 걷게 만든 원인, 즉 두 선배 얘기만 살짝 끼워 넣고 넘어가겠다.


한때 잠깐 빈민운동가였던 나에게 두 사람의 잊지 못할 선배가 있는데 한 사람은 '영원한 촌놈' 허병섭 씨이고 다른 사람이 바로 김진홍이다. 나는 항상 '어떻게 하면 병섭이 형처럼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고 김진홍을 보면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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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이 허병섭, 오른쪽이 김진홍


김진홍이 쓴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30만 권이 넘게 팔린 책이 있다. 자신이 활동했던 청계천 빈민촌의 이야기를 자세히 써서 영화화되기도 했던 책이었다. 나도 젊은 시절 그 책을 읽고 눈물 깨나 흘렸었다. (그러나 김진홍은 그 후에 변절에 변절을 거듭해서 나중에는 망령이 나기까지 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절대로 내가 경험한 것들을 객관적이 아닌 주관적이거나 감상적으로 쓰지 않도록 스스로 제어를 하려고 노력한다.)


두 사람은 WCC(세계 교회 협의회)의 '도시산업선교회' 활동가 양성 프로그램으로 6개월간 훈련을 받고 청계천 빈민가로 들어가 빈민운동을 시작함으로 한국의 기독교 빈민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두 사람의 행보는 대조적이었다. 병섭이 형은 청계천에서, 달동네에서, 차가운 유치장 바닥에서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30~40대를 보냈다. 병섭이 형은 신학을 공부한 이후 항상 내 목회의 사표가 되었다. 병섭이 형이 빈민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빈민들과 함께 하는 운동의 원칙을 지킬 때 김진홍은 일단의 사람들을 이끌고 돌을 떡으로 만들기 위하여 남양만으로 출발했다. 그 후 이것저것 다 실패하고 그 자신은 빈민의 현장을 떠나서 약장사가 되어 보수적인 한국 기독교 대중을 상대로 간증이라는 형식으로 약을 팔았다.

 

그 후 김진홍은 계속 돌을 떡으로 만드는 사업을 하며 잘 나간 반면 병섭이 형의 인생 말로는 비참하게 끝났지만 그래도 나는 병섭이 형이 간 길을 따르고 싶다. 그까짓 것!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이 아닌가?


당시의 내 활동에 대해서는 사진 몇 장으로 대신 설명드린다. (흑백 사진 두 장은 사진작가 김문호 선생이 찍은 사진이다.) 


이교수와함께공부중.jpg 우리방시간표.jpg 우리방전체사진.jpg 전통놀이중.jpg 물 주는 중.jpg 철거촌아이들.jpg 쌀씻는아이들.jpg


그런데 이 중 첫 번째 사진, 우리 방에서 모의(?)를 하고 있는 사람 중 가운데에 있는 이가 이 교수다.

 

다른 길을 걷게 된 친구와는 멀어질 수도 있는 법이지만 이 교수는 그러지 않았다. 넓은 일터를 만나자 나는 도와줄 학생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인천 교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이 교수는 학생들이나 졸업을 하고 발령을 기다리던 제자들을 모아서 보내주었다. 나중에는 교사가 모자라서 내가 직접 서울 교대를 찾아가서 봉사를 할 학생들을 모집해 충원을 해야 했을 정도였으니 이렇게 보내준 학생들은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87, 1988년 두 해 동안 수십 명의 학생들이 하안동을 2명 씩 매일 교대로 찾아와서 활동을 해주었다. 이 교수는 틈틈이 하안동 현장을 찾아서 제자들이 잘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격려를 하기도 했었는데 그건 이 교수의 기우였다. 그때 와서 활동을 하던 학생들은 (지금은 대부분이 일선 교단에서 교감이나 고참 교사로 활약하고 있을 나이이지만 당시는) 순수한 정의감과 희생정신으로 무장된 투사들이었다. 이 교수는 정말 좋은 제자들을 보내줬던 것이다. 

 

그 중에 특별히 기억이 나는 학생은 얼굴이 유난히 귀여운, 초등학생처럼 생긴 P였다. P가 어느 무더운 여름날 버스에서 내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안양천 뚝방길을 20여 분은 걸어야 올 수 있는 공부방에 들어오자마자 "아이, 목말라!" 하기에 내가 얼른 냉수를 가져다주었다. 그랬더니 같이 온 그 날의 당번이었던 친구가 웃으면서 "그 애는 그것으로 안돼요. 소주를 마셔야 돼요."라고 했다. 내가 "정말이야?"하고 장난삼아 가게가 가서 소주를 한 병 사다 주었다. P는 큰 물 컵에 소주를 붓더니 단숨에 꿀꺽꿀꺽 한 잔을 들이켰다. 내가 기겁을 해서 "아니 무슨 여자애가 술을 그렇게 마시냐?"라고 하니까 손으로 입술을 닦으면서 수줍게 웃었다.


그 후에 학교에 발령을 받고 난 다음에 토요일 오후에 공부방을 찾아온 P에게 학교생활이 어떠냐고 묻자 회식을 할 때가 제일 괴롭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기는 술을 마시고 싶은데 신임 여교사 처지에 자기가 스스로 따라 마시기에는 어색해서 마음속으로 누가 권하지 않나 하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젊은 남선생이 "이제 P선생도 한잔 해야지?"하면서 잔을 내밀면 옆에 있던 교감이나 나이 많은 남선생이 "어이? 무슨 짓이야? P선생에게 술을 권하다니?" 하면서 말려서 번번이 술을 마실 기회를 놓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P는 누구도 그녀가 술을 마실 줄 안다고 생각하기가 힘든 외모였기 때문이다. P가 술을 마시지 못 해 침만 꼴깍 삼키고 있을 장면을 상상하니 배꼽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 한 번은 발령을 받아서 교장에게 인사를 갔더니 교장이 인사기록을 보더니 "운동을 하셨다고 하는데 무슨 운동을 하셨나?"라고 물었다고 해서 폭소를 터트린 적도 있었다.


이 교수는 이런 유쾌한 제자들을 보내 줄 뿐만 아니라 내가 매달 발행하던 '빈들의 소리'에 가명으로 권두언을 썼다. 국립대학의 교수로서 운동권 인사가 발행하는 간행물에 글을 연재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신분상의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필명으로 써야 했던 것이다. 


또한 우리가 사무실로 쓸 집이 없어서 전전긍긍할 때 박사학위 논문 출판을 준비하기 위해서 마련한 돈 170만 원을 빌려주어 단칸방이지만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돈은 나중에 철거보상비를 받아서 갚을 수가 있었고 덕분에 나도 철거민이 되어 아파트 분양입주권이 나왔다.


그 입주권을 팔지 않고 끝까지 가지고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아파트 분양을 받고 아파트를 팔아 지금 살고 있는 시드니의 집을 살 수 있었으니 결국 이 모든 것이 이 교수 덕인 셈이다. 


이 교수와의 일들을 돌아보면 저 어려웠던 시절을 버텨낼 수 있었던 건 좋은 우정이 함께 해준 덕분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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