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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긴 시간 동안 고민을 하던 주제와 또 만나게 되었다. 그 고민은 대략 이런 것이다.


어떤 커다란 프로젝트가 가동될 때, 실무 엔지니어들은 어떻게 해서든 문제를 찾아낸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낸 문제는 의사결정권자들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 더 심한 경우는, 실무 엔지니어들에게는 그들의 기술적 관점에서는 해서는 안 될 일들이 임무로 주어지는 경우도 많다.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배후에는 이런 '조직의 문제'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규정을 위반할 수밖에 없는 근무환경, 무리한 일정, 강요되는 비용절감, 그리고 안전을 비용으로 인식하고, 그 비용마저도 아끼려는 비뚤어진 배금주의 같은 문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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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걸까? 이러한 '시스템의 실패'를 어떻게 미연에 막을 수 있을까?

 

일선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기술자, 엔지니어들의 의견이 조직 내에 잘 반영이 된다면 그 조직은 안전해진다. 그러나 엔지니어들의 문제의식을 그들만의 '곤조'로 오해하고 잘 받아들이지 않는 조직이거나, 애초에 그런 문제 제기의 통로를 열어놓지 않은 조직은 매우 위험해진다.

 

그리고 확률적으로 조만간 커다란 비극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와우 아파트가 그랬고 삼풍백화점이 그랬고 성수대교가 그랬다. 경주 마오나오션리조트 붕괴사고가 그랬고, 최종적으로 가장 비극적이었던 세월호 사건도 그랬다.

 

그 모든 대형사고들이 어떻게 한결같이 인재로 분류되고, 제대로 된 관리감독만 있었어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는 얘기를 듣는 걸까? 그 희생자들의 죽음, 그리고 살아남은 가족들의 슬픔은 도대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걸까?

 

벌써 30년이 넘었다. 1986년 1월 28일에 발사되었던 스페이스 셔틀 챌린저호는 발사 직후 73초 만에 공중에서 폭발했고 탑승했던 승무원 7명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스페이스 셔틀 사고가 이것 한 번만은 아니었다. 그 후에 2003년 2월 1일,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던 컬럼비아호 역시 공중분해 되는 사고가 있었고, 역시 승무원 7명이 전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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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챌린저호의 발사를 앞두고, 폭발의 원인이 되었던 밸브 고무링의 결함을 미리 알았던 엔지니어가 있었다. 그 결함은 실제로 상온에서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86년 1월의 케네디 우주센터 발사 기지는 뜻밖의 한파가 몰아쳤고, 온도가 내려가자 고무 성분이 경화되어 밀폐기능을 다하지 못했고 로켓의 연료가 누출되어 폭발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 엔지니어는 위험성을 사전에 경고했고, 발사를 연기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나사의 결정권자들은 그 의견을 묵살했다. 그리고 챌린저호는 폭발했고, 7인의 생명이 사라졌으며, 그중에는 여성 우주인이 2명이 있었고, 금전적 손해는 4,865억 원에 달했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였던 리처드 파인만의 글을 통해 상세하게 읽었던 적이 있어 그 내용을 꽤 자세히 알고 있었다. 파인만은 실제로 사고가 터진 후 조사위원회가 결성될 때 참여했었으며, 그 위원회의 다른 위원들과 달리 독자적인 조사를 감행함으로써 정확한 사고의 원인을 밝혀내는 공헌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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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보고서에서 파인만은 나사의 경직된 관료주의의 폐해를 매우 정확하게, 그리고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었고, 그 글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미국 사회는 사고가 터진 이후에라도 이렇게 제대로 객관적으로 사고의 원인을 파헤칠 수 있는 저력이 있구나, 하고 부러움을 느꼈었다는 점은 얘기해 두기로 하자.

 

그러나, 파인만의 글에서도, 그 결함을 미리 알고 경고했던 엔지니어가 느껴야 했던 좌절은 나와 있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 엔지니어는 이제 전립선암으로 인해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그는 사고 이후 회사를 그만두었고 무려 30년간을 죄책감에 시달려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엔지니어에 관한 이야기를 챌린저호 사고 30주기를 맞이하여 미국의 NPR이 보도를 했고, 그 보도가 나가자 전국의 수많은 독자, 청취자들이 그 엔지니어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 얘기가 다시 NPR에 실렸다.

 

그 엔지니어의 좌절감과 그 좌절감이 어떻게 해소되어 가는지, 그리고 그런 개인의 감정에 대해 미국 사회는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 다소 미화된 부분도 없지 않겠지만 한 번씩 보시라는 뜻에서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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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아래의 번역에 오역이 있다면 전적으로 물뚝심송 옹의 영어 실력을 탓해주시기 바란다. 


번역권을 정식으로 획득하지 못했으므로 저작권자인 NPR 측에서 문제를 제기할 경우, 뭐 우리가 우짜겠냐, 내려야겠지만서도 좋은 거 소개하는 거니까 걍 넘어갔으면 한다.


당신들의 편지가 챌린저호 셔틀 엔지니어의 30년 묵은 죄책감을 털어내다

 

NPR(National Public Radio)이 스페이스 셔틀 챌린저호 폭발 30주기를 맞아 밥 에벌링의 이야기를 리포트하자 수백 명의 청취자들이 편지와 이메일로 상심과 공감의 뜻을 보내왔다.

 

1986년 1월 27일, 스페이스 셔틀 하청업체 모턴 시오콜의 전직 엔지니어가 챌린저호의 발사를 연기시키려는 네 명의 동료들과 합류했다. 그들은 그 다음날로 예정된 발사일이 사상 가장 추 운날이라고 여러 시간 동안 주장을 했다. 그들의 데이터에 의하면 그렇게 추운 날에는 셔틀 부스터에 있는 연결부위에 장착되어 로켓의 연료가 새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원형의 고무링이 얼어 경직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사는 그들의 데이터를 무시했고, 시오콜의 사장은 에벌링과 다른 엔지니어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터져 버릴 거야."

 

심란함과 실망감에 가득찬 에벌링은 그날 밤 집에 와서 자신의 부인 달린에게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터졌다. 이륙한지 73초만에 7명의 우주인이 사망했다. 추운 날씨와 오링이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에벌링은 30년간의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신의 실수였어요." 라고 89세가 된 에벌링은 그의 집이 있는 유타, 브리검에서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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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그 자리에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 다음에 제가 말했죠. 신께 물어볼 겁니다. 왜 나였냐고. 실패자를 고른 거라고."

 

노스 캐롤라이나, 잭슨빌의 짐 사이즈는 자신의 차안에서 NPR의 방송을 들었다.

 

"30년 동안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는 얘기를 듣고, 제 가슴이 무너졌죠." 엔지니어로 일하는 사이즈가 말했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에 앉아 울었습니다."

 

에벌링의 이야기에 반응한 다른 많은 엔지니어들과 마찬가지로, 사이즈는 데이터에 근거한 주장이 어떤 저항에 부딪히게 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결정에 대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확신하고 있었다.

 

"그와 동료들은 아주 명확하게 설명을 했죠. 발사하기에 위험한 날이었거든요. 그러나 에벌링은 결정권자가 아니었고, 엔지니어의 역할을 다 한 겁니다.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됩니다."

 

사이즈는 시오콜 소속의 동료였으며 챌린저호 발사에 반대했던 로져 보이스졸리(2012년에 사망)를 에벌링에게 보내는 편지에 인용했다. 보이스졸리는 챌린저호 사건에 대한 윤리적 결정에 관한 연구에서 자신이 겪었던 실망과 죄책감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에벌링에게 편지를 쓴 다른 많은 엔지니어들 역시 챌린저호 사건에 관련된 엔지니어링 교육과정에서의 토론에 관련해서 보이스졸리를 언급했다.

 

사이즈는 에벌링에게 "사람에 대한 염려가 당신에게 제일 중요했음을 당신의 노력이 보여주는 겁니다. 저는 당신의 동료였던 로저 보이스졸리에게 동의해요. 당신과 보이스졸리와 기타 동료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한 겁니다."

 

사이즈는 자신을 종교적인 인물로 설명했고, 신에 관해서는 에벌링이 틀렸다고 말한다.

 

"신은 실패자를 고른 게 아닙니다. 밥 에벌링을 고른 거에요."

 

에벌링은 시력이 약해져서 직접 편지를 읽을 수는 없기에 딸인 케이시가 사이즈의 얘기들을 모두 크게 읽어 주었다.

 

"말하기야 쉽지." 에벌링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들어도 죄책감은 여기에 남아 있어." 라면서 자신의 가슴을 가르켰다.

 

챌린저호 폭발 30주기 기사가 나간지 일주일 쯤 후였다. 에벌링은 플란넬 셔츠와 파자마를 입고 식탁 앞에 휠체어를 타고 앉아 있었고, 그의 앞에는 편지들과 이메일 출력본이 쌓여 있었다. 케이시는 또 다른 것을 골라 읽어 주었다.


"당신은 정확한 데이터를 보여줬고, 휘슬을 분 겁니다." 또 다른 청취자가 쓴 글이다. "당신은 실패자가 아니에요. 도전자입니다."

 

에벌링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에게 뭔가 더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냐고 물어봤다.

 

"당신은 나사가 아니야, 시오콜도 아니지. 난 그들에게서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어."

 

케이시는 챌린저 사건 직후 그녀의 아버지가 은퇴하면서 깊은 실망감을 표출했을 때, NASA나 시오콜에서 아무런 연락도 없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맡은 바 임무를 완수했고, 훌륭한 노동자였으며 진실을 말했다는 것에 대한 어떤 확인도 받지 못한 거에요."

 

시오콜은 다른 회사에 흡수 합병되었고, 이제는 NASA나 그 주변에 발사 결정에 관련된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걸로 보인다.

 

하지만 그 결정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몇몇은 은퇴해서 생존해 있고, 에벌링의 직속상관이자 발사를 연기하려던 사람들의 리더였던 78세의 알란 맥도널드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는 에벌링에게 바로 연락을 취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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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널드는 에벌링에게 자신이 아는 루저라는 것은 '실제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더 나쁜 것은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이라고 정의했고, "당신은 실제로 뭔가를 했고, 진심으로 염려를 했다. 그것은 승리자(winner)의 정의에 부합한다"고 얘기해 줬다.

 

맥도널드는 에벌링에게 이 점도 일깨워줬다. 에벌링이야말로 자신이 시오콜을 대표해 참여하고 있었던 케네디 스페이스 센터에 연락을 함으로써 최초로 알람을 울렸다는 점이다. 그 연락은 엔지니어들이 나사에게 발사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는 주장을 펼 수 있는 원격회의를 열게 했다.

 

맥도널드는 "당신이 내게 연락을 안 했더라면, 그들은 무조건 해야 된다는 분위기 속에서 멈추고자 하는 시도를 해 볼 기회도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에벌링에게 말했다.

 

맥도널드는 에벌링과 다른 시오콜의 엔지니어들에게 공감하지 않는 NPR의 청취자들에게 이런 반응도 보였다. 그 청취자들은 엔지니어들이 뭔가 추가적인 수단을 썼어야 한다며, 나사의 발사 책임자에게 최후의 긴급 전화를 하거나 심지어 백악관에라도 전화를 했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맥도널드는 이렇게 말헀다. "그러지 마세요. 그들은 아마 흰 가운 입은 사람들이 탄 밴을 보내 당신을 어디론가 데려갔을지도 모릅니다. (정신병자 취급을 했을 거라는 뜻?) 심지어 발사 책임자는 그런 외부의 전화를 받지도 않아요."

 

발사결정에 참여한 또 다른 핵심인물인 로버트 룬드, 당시 시오콜의 부사장이 있다. 그는 에벌링, 보이스졸리, 맥도널드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챌린저 호의 발사를 승인한 책임자 중의 한 명이었다.

 

룬드는 녹음 인터뷰를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걸 다시 겪고 싶지 않아요." 그는 시오콜에 의해 재임명 되었고, "이웃들 보기 부끄러워" 이사를 갈 수 밖에 없었기도 했다. '그건 악몽입니다."

 

하지만 룬드는 에벌링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얘길 했다.

 

"당신은 할 수 있는 걸 다 한 겁니다."

 

챌린저호 발사에 관련된 NASA의 전 공식책임자 역시 인터뷰를 거절했다. 죠지 하디는 마샬 스페이스 센터의 부소장이었으며 셔틀 부스터 로켓에 들어가는 시오콜의 제품들에 대한 감독책임자였다. 에벌링과 다른 엔지니어들이 챌린저는 이렇게 추운 날씨에서 발사되면 안된다는 주장을 듣고 '간담이 서늘해졌다'는 유명한 발언을 남긴 사람이다.

 

하디는 이제 자신은 그날 밤에 대해 여러번 반복해서 생각을 해 봤다고 한다.

 

"저는 그게 이제 누구에게나 무슨 다른 가치가 있겠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에벌링에 편지를 써야 할 가치는 있다고 판단했다.

 

"당신과 동료들은 해야 할 일을 모두 했습니다." 하디는 편지에 썼다. "발사결정은 NASA와 시오콜의 여러 사람들에 의해 침착하게 내려진 것이었어요. 자신이 떠맡은 책임으로 스스로를 고문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디는 에벌링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기도하겠다고 약속하면서 편지를 마무리했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하디의 편지와 맥도널드의 전화가 변화의 포인트가 된 것처럼 보였다. 챌린저호 이야기가 나간지 두 주가 지났고, 케이시는 매일 편지들을 하나하나 계속 읽어 주었다. 자신의 거실에 있는 편안한 큰 의자에 앉아 있는 에벌링의 눈빛은 점점 밝아졌다.

 

"큰 변화가 있어 보여요." 딸이 설명했다. "이제 아버지는 전처럼 마음이 무겁지 않아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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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벌링이 갑자기 끼어 들었다. "내 짐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오. 그게 모두 사라지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분명히 줄어 들었어요."

 

바로 전날, NASA는 에벌링이 아직 듣지 못한 소식을 전해왔다. 그 소식은 전직 우주비행사였던 나사의 국장 찰리 볼든의 여성 대변인이 이메일로 보내온 것이다. 그는 챌린저 바로 직전에 스페이스 셔틀에 탑승했었고, 그 후에는 셔틀 비행의 안전을 복구하는 작업을 지휘한 사람이다. 

 

"우리는 챌린저호의 승무원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 상실에 대한 짐을 지기 보다는, 항상 우리 모두가 경각심을 가지고자 합니다. 또한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녔던 에벌링씨 같은 분들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우리의 우주비행사들이 안전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게 되길 빕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에벌링은 한참 동안을 크게 박수를 친 다음에 외쳤다. "브라보!"

 

"정말 수도 없이 이렇게 되기를 꿈꿔 왔어요."

 

에벌링은 이제 내가 지난 30년간 그를 만나고 얘기를 해온 그 어느 때보다 더 들떠 있었다. 고통스러운 30년이었고, 전혀 나아지지도 않았었다. 그는 전립선암으로 인해 예견된 기대수명의 막바지에 도달해 있었고, 집에서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고 있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이제 신의 판단을 위해 기도한다고 얘길 했다.

 

난 그에게 한가지 질문을 더 했다. "편지를 보내온 그 모든 사람들에게 뭐라고 얘기하시겠습니까?"

 

"고마워요. 당신들은 내 마음의 짐을 덜어 줬어요.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이죠."

 

에벌링은 웃음을 지었고, 손을 머리위로 들어올려 박수를 다시 쳤다. 케이시는 이것을 기적이라고 불렀다.

 



아래는 독자들이 보내온 '정부의 외압이 있지 않았냐'는 의견에 관한 보조 기사다.


백악관은 발사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는가?

 

많은 독자들이 우리의 챌린저호 기념 기사에 대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백악관이 NASA에게 1986년 1월 28일의 챌린저호 발사에 압력을 넣었다는 주장으로 응답을 해 왔다.

 

그 날은 대통령의 국회연설이 예정된 날이었기도 하다.

 

백악관 대변인 래리 스픽스는 "우리가 들어본 가장 악의적이고 왜곡된 루머입니다." 라고 챌린저호의 비극이 발생한지 한 달 뒤에 공식 답변을 했었다.  

 

스페이스 셔틀 챌린저호 사고 조사를 위한 대통령 직속 위원회는 "발사 결정을 한 사람들에게 외부에서 압력이 가해졌다는 증거는 전체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고 결론을 내렸다.

위원회는 대통령 연설 중에 스페이스 셔틀에 직접 위성연결 중계방송을 하려는 계획이 있었다는 증거도 찾지 못했다.

 

위원회 소속의 비판적 위원이었던 리처드 파인만은 그 자신이 수행한 은밀한 조사의 결과를 담은 별도의 보고서를 냈었다. 그 역시 외부의 압력이 있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비현실적인 발사 일정을 짰습니다." 나사의 안전관리 문화에 대한 비판자로 활동하기 이전에 22년간 존슨 스페이스 센터에서 미션 컨트롤에 종사했던 제임스 오버그는 말했다.

 

오버그는 예전에 있던 발사 지연을 예로 들면서 정확한 행성 정렬에 의존하는 행성 탐사 프로그램과 우주 군사 프로그램의 경쟁에 따른 두가지의 발사 계획을 인용했다.




아래는 딸 케이시가 보내 온 감사의 편지를 번역한 것이다.  


케이시 에벌링의 언급

 

우리 아버지 로버트 에벌링에게 NPR의 청취자들이 해 주신 일에 감사드리고 싶어요. 아버지는 그 모든 이메일과 편지와 노트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챌린저호 승무원들의 죽음에 관해 느끼던 죄책감이 많이 줄어들고 있어요. 그 분의 가족으로서 우리는 당신들 모두를 사랑하고, 우리에게 연락을 주셔서 감사해 하고 있어요. 저는 여러분의 모든 메시지를 전부 아버지께 읽어 드렸어요. 아버지는 30년간 겪어 오던 죄책감을 떠나 보냈습니다. 그야말로 신과, 편지를 써주신 여러분들이 함께 만들어낸 기적입니다. 이 놀라운 선물에 대해 모든 NPR 청취자들에게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이제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여러분의 이야기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신 겁니다.




NASA의 총 책임자의 대변인이 보내온 성명, 기사 본문 중에 일부가 언급되었다. 에벌링은 이 공식 성명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죄책감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자신이 맡은 바 책임을 완수했으며, 사고에 대한 책임이 없으니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스테파니 L. 쉬어홀즈 NASA 홍보비서관의 성명

 

우리는 우주비행이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언제나 위험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매년, 민간인 종사자와 하청업체를 포함한 나사의 모든 임직원은 인류의 이익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분들에게 경의를 표해 왔습니다.

 

우리는 챌린저호의 승무원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 상실에 대한 짐을 지기 보다는, 항상 우리 모두가 경각심을 가지고자 합니다. 또한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녔던 에벌링씨 같은 분들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우리의 우주비행사들이 안전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 결과 NASA는 더 많은 실수를 예방할 수 있는 보다 견고한 관리체계와 개별적인 판단이 표출될 수 있는 기회를 포함하여 매우 많은 방식으로 변화해왔습니다. 챌린저호 사고를 조사한 대통령 직속 위원회의 권고는 NASA가 안전에 관한 이슈를 최고결정권자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별도의 안전 관리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나사는 임무와 안전의 보장에 관한 부서를 새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우주 비행의 위험요소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자문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챌린저호와 컬럼비아호의 승무원들은 탐사와 발견에 동반되는 위험을 감수한 것입니다. 우리는 보다 더 나은 내일에 관한 꿈을 현실화 시키고, 모든 곳의 인류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결과를 취함으로써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에벌링씨는 우리 NASA의 일원입니다. 우리는 에벌링씨에게 그들의 희생에 경의를 표하고, 그들의 삶이 만들어낸 변화, 특히 안전에 대한 NASA의 발전을 함께 인식해 주시기를 권하는 바입니다. 추모의 날에 열리는 행사들에 참석해 주신다면 언제든지 환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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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된 사회란 무엇일까?

 

우리는 아직도 세월호가 왜 침몰을 했는지, 그리고 왜 어린 생명들을 구해내지 못했는지 정확한 원인도 규명하지 못했다. 무려 2년이 다 되어가는 오늘날까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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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자꾸 숨기려고만 하고, 희생자 가족들의 입을 막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또 이 쪽에서는 온갖 음모론이 생산되고 소비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확실한 것은 우리들 중 아무도 아직 진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 뿐이다.

 

엄청난 사고가 터지고 모두가 책임질 것이 두려워 입을 닫고 있는 상황에서도 정확한 원인이 조사되고 밝혀지는 사회가 있다. 심지어 그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을 미리 알고 경고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막지 못해 30년을 죄책감에 시달리고 이제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엔지니어의 이야기가 보도가 되고, 그의 실망과 좌절,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NASA의 공식 대변인이 성명까지 보내주는 그런 사회가 있다.

 

선한 의지가 권장되고, 책임질 것은 책임지는 사회가 문명사회다. 단 한 사람이라도 죄책감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두가 나서서 위로의 편지를 보내는 곳이 문명사회 아닌가?

 

수백 명의 어린 생명이 사라지고 그 부모들이 피눈물을 흘리는데도, 자식 팔아 돈 벌려고 한다고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힘든 모욕과 저주를 던지는 곳은 절대 문명사회가 아니다. 말 그대로 야만이 지배하는 사회다.

 

문제를 알고 막고자 했던 사람은 직장을 잃고, 아이들을 구하려고 노력했던 잠수부들은 병을 얻고 버림을 당하는 사회는 야만 사회인 것이다. 아이들을 구하지 못하고 자신만 살아남은 고통으로 교감선생님이 자살을 하는 사회, 그리고 그 선생님을 아무도 구하지 못하는 사회는 절대 문명 사회가 아니다.

 

정치가 뭔지 권력이 뭔지 그리고 돈이 뭔지 하는 것은 모두가 그 다음의 일이다.

 

우리는 사람이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싶다는 것 뿐이다.

 

이게 그렇게 이루기 힘든 소망인가?





물뚝심송

트위터 : @murutukus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