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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에 베팅하는 투자


투자(Investment)는 사전적으로 '이익을 얻기 위하여 어떤 일이나 사업에 자본을 대거나 시간이나 정성을 쏟음'을 의미한다. 시간과 정성(노동) 역시 비용으로 수치화가 가능하니 결국 이익을 위해 자본, 곧 돈을 대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1981년 에드 프렌데빌은 미국 네브래스카주(州) 동부에 있는 오마하를 운전해 지나가던 중 워렌 버핏이 오마하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자연스럽게 당시 1,300달러였던 버크셔 해서웨이 주식을 구입했다. 1962년 버핏의 투자 파트너들이 처음 사들인 버크셔 해서웨이 7~8달러짜리 주식은 이미 200배나 올라있었던 상황. 하지만 그는 버핏이 이끄는 버크셔 해서웨이의 성공을 확신했다. 현재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당 가격(2016년 2월 26일 종가기준)은 19만 8,190달러(한화로 2억 3,780만 원)가 되었고, 에드 프렌데빌은 돈방석에 올라앉았다.


'오마하의 현인', '가치투자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워렌 버핏(Warren Buffett)은 1965년 별 볼 일 없는 섬유회사였던 버크셔 해서웨이(Berkshire Hathaway Inc.)를 인수해 지주회사(주식을 소유함으로써 다른 회사 경영을 지배, 관리하는 회사)로 재설립했다. 1967년 보험사업에 진출, 이를 통해 1970년부터 1억 달러 상당의 포트폴리오 운용자금을 굴리기 시작한다. 1921년 설립된 초콜릿 제조업체인 시즈 캔디스(See’s Candies)가 버핏의 눈에 들어온 것은 1972년이었다. 그는 장부가치 800만 달러였던 시즈 캔디스를 2,500만 달러에 인수한다. 버핏은 시즈 캔디스의 '가치'를 확신했으나 많은 이들은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시즈 캔디스는 인수 당해연도에 420만 달러의 이익을 내면서 인수 비용에 대한 불안을 잠식시켰고, 2007년에는 8,300만 달러의 이익을 내면서 버핏이 내세운 가치에 '확신'이라는 이름을 새겼다. 이 확신은 코카콜라(The Coca-Cola Company)로 이어진다. 버핏은 1988년, 1989년, 1994년에 걸쳐 코카콜라의 주식 2억 주를 주당 평균 6.50달러에 매수했다. 버핏은 저렴한 타이밍에 맞춰 가치를 내다보고 투자한다는 자신의 원칙대로 1980년대 말 블랙 먼데이라 불리는 주가 대폭락 이후 저렴하게 코카콜라 주식을 매수하기 시작했고, 버핏이 3년에 걸쳐 주당 평균 6.50달러에 매수한 코카콜라 주식은 현재(2016년 3월 11일) 45.20달러가 되었다. 버핏은 코카콜라 주식을 매수한 뒤로 단 한 주도 매도하지 않았다.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질레트, 코스트코 매수 역시 같은 방식이었다. 그렇게 버핏은 빌 게이츠와 1~2위를 다투는 세계 최고 갑부, 모든 투자자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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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렌 버핏 (1930~)


1969년 헤지 펀드 산업이 태동하던 시기, 단순한 주식 트레이더의 역할뿐 아니라 상품시장과 채권시장, 외환시장을 두루 섭렵하며 무대를 자국이 아닌 세계로 확장한 역사적인 퀀텀 펀드(Quantum Fund)를 조지 소로스와 함께 창업한 짐 로저스(Jim Rogers) 역시 성공과 가치에 베팅했다. 그는 소로스와 함께 재귀 이론(Theory of Reflexivity)을 기반으로 펀드를 운용하던 1973년 중요한 포인트를 하나 포착한다. 그해 시작된 4차 중동전에서 이집트가 사용한 소련제 무기들의 성능이 예상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이 이에 위기를 느끼고 신무기 개발에 나설 것이라 예상했고, 미국 최대 방위산업체 중 하나인 록히드마틴사(Lockheed Martin Corporation)의 단일 최대 외부 주주가 되기로 한다. 이 선택은 3년 뒤 주가 8배 상승이라는 잭팟을 안겨준다. 퀀텀 펀드는 1980년에 이르는 10년 동안 3,365퍼센트라는 경이로운 실적을 선보였다. 같은 기간 동안 S&P500(국제 신용평가기관 Standard and Poors가 500개의 우량주를 기반으로 작성한 주가지수)은 47퍼센트 상승했을 뿐이었다. 퀀텀 펀드의 자산이 1,200만 달러에서 2억 5,000만 달러러 수직상승한 바로 그때 짐 로저스는 자신의 지분을 챙겨 퀀텀 펀드를 떠나 세계 일주와 각종 강연, 그리고 자신의 운용하는 펀드로 꾸준히 수익을 올리는 평온한 삶을 선택한다. 그는 가장 혹독하고 치열하고 냉정한 시장에서 자신이 설립한 헤지펀드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떠날 때 처분한 그의 자산은 600달러에서 23,333배가 오른 1,400만 달러였다. 그로 인해 짐 로저스는 신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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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로저스 (1942~)


워렌 버핏과 짐 로저스는 각각 시즈 캔디스와 록히드마틴사의 성공을 예측해 투자했고, 투자는 상상도 못 할 수익으로 그들에게 돌아왔다.




실패에 베팅하는 투자


늘 그러했듯 자본은 성공에 기반을 둔 정직하고 지루한 투자 방식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위험하고, 더 매력적인 투자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공매도, 선물, 옵션 등을 포함하는 다양한 파생상품들이다. 이 방식들은 성공에 베팅할 수도 있으나 실패나, 가치하락에 베팅해 투자의 수익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짐 로저스와 함께 재귀이론에 기반한 투자를 선보였던 조지 소로스(George Soros)는 짐 로저스가 떠난 퀀텀 펀드를 지구 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헤지 펀드로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1992년 영국 파운드화를 공격, 2주 만에 10억 달러(한 달 동안 총 20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유유히 빠져나간 사건 때문이었다. 그가 파운화를 공격한 방식은 바로 공매도였다. 공매도(Short Selling)는 주식이나 채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담보 설정, 이자, 수수료 지불을 통해 빌려서 행사하는 매도주문이다. 조지 소로스는 이러한 공매도 방식을 환투기에 적용해 영국 파운드화를 공격했다. 1달러=0.5파운드였다고 가정해보자. 1달러를 담보로 맡긴 뒤 0.5파운드를 빌린다. 빌린 0.5파운드를 바로 1달러에 판다. 그것도 단시간에, 아주 많이. 소로스가 직접 움직이는 헤지펀드가 약 3조 원 정도의 규모인 데다가 이렇게 대형 헤지펀드가 거대한 베팅을 하면, 돈 냄새를 맡은 다른 헤지펀드와 투기꾼들까지 달려들게 되어 규모가 점점 더 커지게 된다. 결국, 자본세력의 집중적인 공매도의 공격으로 인하여 영국 외환시장 달러의 씨가 마르게 되고(모두가 파운드화로 빌린 뒤, 달러화를 긁어갔다.) 결국 달러의 가치는 상승, 파운드화의 가치는 떨어지게 된다. 결제 등의 이유로 달러화의 수요가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1달러=1.0파운드가 되면 가지고 있던 1달러를 1.0파운드에 판뒤 빌린 0.5파운드를 갚고 담보로 맡긴 1달러를 찾아 남은 0.5파운드의 수익을 들고 홀연히 떠나는 것이다. 이 방식을 조 단위로 하면 단 2주 만에 10억 달러의 수익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당연히 이 일로 인해 영국 경제는 순식간에 혼동에 빠져들게 됐고, 1997년 같은 방식으로 태국 바트화를 공격해 성공했다. 1997년 태국의 여파로 외환위기가 대두한 한국과 홍콩을 공격해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올해 1월엔 위안화와 홍콩달러 공매도를 진행 중이라며 3조 3천억 달러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에 선전포고하는 패기도 보여줬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헤지펀드의 유동성 자금은 이미 중국의 위안화 가치 하락으로 인한 혼란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2007년 미국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자국의 통화가치가 순식간에 떨어지면 우째 되는지 우리도 경험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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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소로스 (1930~)


방식의 차이는 있으나 워렌 버핏, 짐 로저스, 조지 소로스는 전 세계 투자 3대장이라 불린다. 물론 짐 로저스 대신 '시간과 노력을 들인 정보만이 살 길이다'라는 투자의 신념을 설파한 피터 린치나, 펀드 운용 13년 동안 2,700퍼센트의 경이로운 누적 수익률을 올린 앤서니 볼턴의 이름이 떠오를 수도 있다. 조지 소로스 대신 월가의 저승사자 혹은 행동주의 투자자(보유한 주식의 의결권을 적극 활용, 배당을 늘리거나 경영진을 갈아치우는 식으로 수익을 창출함)라 불리는 칼 아이칸을 대신 채워 넣고 싶은 이들도 있을 테고, 누군가는 워렌 버핏의 이름 대신 가치투자의 아버지라 불리는(버핏의 스승이기도 한) 벤저민 그레이엄의 이름을 떠올릴 수도 있다. 누구든지 간에 이들 모두는 자본의 습성을 가장 잘 이해해 환상적인 자본 증식을 이뤄낸 '투자 대장'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공통으로 모든 투자가에게 신중한 판단과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요구한다. 일종의 경고다. 하지만 투자가들에겐 이들의 존재가 곧 '확신'이요 '믿음'이다. 그들의 투자가 결과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자 대장들의 존재 자체가 '위험'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의 성공 이면에 감춰진 실패자들의 이름, 예를 들어 시장을 호령하던 펀드 매니저에서 이젠 그 이름조차 생소해진 빅터 니더호퍼(그는 1997년 S&P지수 옵션을 대량으로 매도했다가 한방에 1억 3,000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같은 이름을 우린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모든 투자는 기본적으로 위험하고 불안하며, 언제든 투자가들이 인식론적 오만(Epsitemic Arrogance : 지식의 한계에 교만한 것, 지식의 증가에 비해 더 큰 확신에 빠지는 것)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제롬 키르비엘


런던 빈민가 출신의 닉 리슨(Nick Leeson)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최종학력은 고졸, 그의 첫 직장은 코우츠컴퍼니(Coutts & Co.)라는 영국의 한 금융회사였다. 그는 곧 미국의 투자은행 모건스탠리(Mogan Stanley)로 이직하게 되는데 이직 사유는 업무의 지루함이었다. 모건스탠리의 분쟁팀 사무원으로 이직에 성공한 닉 리슨은 트레이더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꿈을 키운다. 그는 모건 스탠리의 트레이더가 되고자 했으나 거부당한다. 그리고 이때 기회가 온다. 그는 영국의 베어링스 은행(Barings Bank) 결제부로 이직했고, 1989년 막 설립한 싱가포르 지사에 발령, 꿈에 그리던 선물 및 옵션거래를 진행할 수 있는 트레이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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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리슨 (1967~)


싱가포르 지사 발령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닉 리슨을 일약 세계적인 슈퍼스타로 발돋움하게 해준 2가지 호재가 발생한다. 첫 번째 호재는 오사카 거래소와 싱가포르 거래소의 시세 반영 차이였다. 싱가포르 거래소가 규모가 작았던 탓에 오사카보다 시세반영이 늦었다. 그는 이 시세 반영의 차이에 기반을 둔 니케이 지수 선물 거래(미래 지수 포인트를 예측해 미리 사고파는 것)를 통해 안정적인 단기차익을 올릴 수 있었다. 두 번째 호재는 휴면 계좌 88888의 등장이다. (중국에서 행운을 뜻하는 8을 무려 다섯 개나 때려 넣은 단순무식한 의미의 계좌) 베어링스 싱가포르 지점이 막 생길 때 거래 미스로 발생하는 손실을 기록하던 계좌가 하나 있었는데, 이놈의 계좌가 시스템이 바뀌면서 아무도 모르는 휴면 계좌가 된 것이다. 이 계좌가 바로 88888계좌. 이 계좌를 알고 있던 닉 리슨은 이때부터 수익은 정상적으로 기록하고 손실은 88888계좌에 숨기기 시작한다. 이렇게 닉 리슨은 한 때 싱가포르 지사 수익의 20%를 담당하는 스타가 됐고, 파생상품을 직접 거래할 수 있는 권한은 물론 팀의 지휘권까지 얻게 된다.


88888계좌는 닉 리슨에게 손실에 따른 위험과 공포를 거세해 주었다. 자잘한 손실을 숨기던 계좌에는 어느덧 부하직원의 실수로 발생한 15만 파운드(2억4천 만원)가 담기기 시작했고, 급기야 2천만 파운드(320억)까지 때려 넣는 상황이 되고야 말았다. 닉 리슨은 하루에 500만 파운드(80억)를 벌기도 하고 잃기도 했지만, 손실은 88888계좌에 감춘 채 수익만 보고함으로써 스타 매니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덕분에 본사에서 진행하는 정기적인 감사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눌러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중장부를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서는 마진콜(Magine Call : 선물 계약 기간 중 선물가격 변화에 따른 추가 증거금 납부 요구)등을 위해 현금을 맞춰야 했는데, 부족한 현금을 메꾸기 위해 닉 리슨은 단기 스트래들(Straddle) 매도포지션을 취했다. 스트래들 매도포지션이란 동일한 기초자산에 대하여 풋 옵션(Put Option : 가치가 떨어지면 돈을 벎) 과 콜 옵션(Call Option : 가치가 올라가면 돈을 벎) 두 가지를 동시에 파는 포지션으로, 옵션 두 개를 동시에 판매한 대금을 쏠쏠하게 챙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오르든 내리든 주가가 크게 움직이면 손해를 보게 되는 포지션이다. 이 투기적인 포지션으로 닉 리슨은 상당히 재미를 봐오던 상태였는데, 고베 대지진(1995년 1월 18일)으로 인해 니케이 지수가 하루 만에 6퍼센트나 떨어지는 사건이 터지고 만다. 주가가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에 베팅한 닉 리슨은 떡실신이 되어야 마땅하나 오히려 피해복구에 재정이 투입되면서 증시가 회복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본사에 추가 자금지원을 요청, 자신의 베팅 역사상 최대 베팅을 이번엔 선물시장에서 하고야 만다. 하지만 결과는 며칠 후 2차 대폭락. 결국 88888계좌와 함께 한 손실이 13억 파운드(2조 80억)로 늘어나면서 닉 리슨의 모든 것이 뽀롱난다. 닉 리슨 개인의 투자로 인해 233년 역사의 베어링스 은행은 파산 후 ING은행에 단돈 1파운드에 매각된다. 사기와 서류위조로 6년 6개월 형을 받은 닉 리슨은 3년 6개월 만에 모범수로 석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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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Barings Bank Goes Bust!!!


전 세계를 경악시킨 닉 리슨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14년 뒤인 2009년 진정한 투자왕이 탄생한다. 프랑스 소시에테 제네랄 은행(Societe Generlae)의 주가지수 선물거래 담당이자 무려 49억 유로(7조 2천 억원)의 손실을 안겨준 제롬 케르비엘(Jerome Kerviel)이다.


제롬 케르비엘은 1977년 1월 프랑스 브루타뉴 지방의 소도시 퐁라베에서 태어난다. 어머니는 미용사였고, 아버지는 침대에 쓰이는 철재 구조물을 만드는 주물 장인이었다. 그의 유년기는 별다를 거 없이 평범했다. 낭트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 주요 은행들이 거래의 처리와 모니터링을 하는 중간급 지원 인력 양성을 위해 설립한 리옹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평범한 학생 그 자체였다. 2000년 소시에테 제네랄 은행에 입사하면서부터 제롬 케르비엘은 투자왕 다운 비범함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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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 케르비엘 (1977~)


닉 리슨이 엄청난 손실을 발생시키면서도 88888계좌를 이용해 위험한 투자를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백오피스에서의 경험이었다. 투자은행들은 투자를 담당하는 프론트오피스와 이들의 투자 위험도를 측정하고 관리하는 백오피스를 분리하여 운영한다. 닉 리슨은 결제부 근무 기간 동안 파생상품의 계약, 결제, 정산 등의 백오피스 업무 내용을 완벽하게 학습했다.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손실을 숨길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2000년 소시에테 제네랄에 입사한 제롬 케르비엘의 첫 업무도 금융상품 계약을 점검하는 중앙사무소에서 시작됐다. 2005년 백오피스에서 각종 계약에 대한 경험을 쌓고 있던 제롬 케르비엘에게 운명적인 인사발령이 난다. 선물거래팀인 '델타원'에 합류하라는 지시였다.


델타원은 유럽 주가지수 선물거래를 통해 위험을 헤지(Hedge : 분산)하는 매우 기초적인 선물거래팀이었다. 예컨대 은행이 유망 기업의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경우 선물은 주가가 내려가는 쪽으로 거래함(매도포지션)으로써 이익과 손실의 균형을 맞추는 단순한 투자였다. 제롬 케르비엘은 이렇듯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선물거래팀의 구성원이었다. 하지만 제롬 케르비엘은 팀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 팀에 합류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분산투자가 아닌 공격적이고 집중적인 투자를 하기 시작한다. 닉 리슨과 마찬가지로 로그 트레이더(Rogue Trader : 회사 허가 없이 투기하는 악당 주식 중개인을 뜻하며, 닉 리슨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를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델타원으로 발령받은 2005년 여름, 유럽증시의 하락을 예측하고 주가지수 선물 매도 포지션을 취하게 된다.


그의 투자는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에 의해 적중한다. 2005년 7월 7일 영국 런던에서 지하철과 버스에 동시다발 테러가 발생한 것이다. 테러의 공포는 곧 경기침체로 이어졌고 유럽 증시는 폭락했다. 전 유럽이 테러로 비통해하는 순간 제롬 케르비엘이 얻은 이익은 50만 유로(6억5천 만원)였다. 이 성과를 통해 그는 자신의 투자를 2년여간 지속하며 회사가 정한 거래 한도인 2,900만 달러의 1000배인 250억 달러까지 거래할 수 있게 된다. 그에겐 5년간의 백오피스 업무를 통해 체득한 파생상품의 운용과 절차, 허점 등에 대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악용되기 시작한다.


2007년 제롬 케르비엘은 독일증시가 하락할 것으로 예측하고 또다시 주가지수 선물 매도포지션을 취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독일증시는 상승했다. 이때부터 제롬 케르비엘은 손실을 감추는 스킬을 갈고 닦기 시작한다. 당장의 손실을 감추기 위해 허위 자료를 작성해 보고하기도 했으며, 은행정보시스템을 해킹해 거래 관련 내용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부정한 행위를 통해 손실에 대한 불안을 지워낸 자리에 채워진 건 다름 아닌 자신감이었다. 게다가 독일 증시가 하락세로 돌아서면서 수익이 발생하자 그의 투자는 연료 걱정 없는 '폭주기관차'가 되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였다. 사태는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으나 그는 이 사태가 단기 악재로 끝날 것이라 예측했다. 제롬 케르비엘은 많은 이들이 장기적인 불황과 침체를 예상하던 순간, 유럽 주가지수 상승에 거액의 베팅을 시작한다. 선물 거래 등의 파생상품은 보유 현금이 많지 않아도 신용으로 대규모 거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롬 케르비엘의 위험한 확신이 무참히 깨지는 데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는 주가지수 하락에 따른 손실에도 불구하고 베팅을 멈추지 않았다. 또다시 손실을 감추기 위한 자신만의 불법 스킬이 동원되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회사 내에 가상 사업체를 설립해 회사 기밀 정보를 빼낸 것은 물론 다른 이의 명의로 대규모 베팅을 서슴지 않았다. 2007년에 시작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2008년에 이르러 전 세계의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제롬 케르비엘의 손실은 상상 이상으로 불어나 있었고, 결국 ‘뽀롱’으로 이어진다. 2008년 1월 19일 냄새를 맡은 은행 측은 제롬 케르비엘을 불러들여 6시간 동안 조사했다. 은행 측은 조사를 통해 제롬 케르비엘의 불법 행위와 동시에 그의 거침없는 투자로 인해 리스크에 노출되어 있는 금액이 무려 500억 유로임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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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땠다.


사실 제롬 케르비엘이 역사적인 투자실패를 선보이고 난 뒤 전 세계가 미국발 금융위기에 휘청거렸으나 프랑스만은 유독 건재했다. 많은 이들은 신중함과 엄격함으로 표현되는 프랑스 금융 시스템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프랑스 은행들은 위험을 적게 떠안는 경영에 충실하다 알려져 있다. 대출 대상을 엄격하게 선정하며, 분산투자의 폭도 넓다. 전체 금융업에서 상대적으로 위험수위가 높은 투자은행과 중개업이 차지하는 비중(25%)이 작으며, 가계 부채 규모(2011년 기준)도 국내총생산(GDP)의 47퍼센트로, 영국의 절반 수준이다. 게다가 금융감독기구는 은행·보험 부문과 증권 부문으로 이원화돼 철저하게 감시·감독한다. 행정력이 강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나 철저하게 전관예우를 금기시해 투명함과 엄중함이 유지된다. 제롬 케르비엘의 투자는 이런 엄격한 프랑스 금융 시스템하에서 일궈낸 쾌거이기에 왕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투자 중의 투자'라 할 수 있겠다.


은행은 제롬 케르비엘의 조사가 끝난 뒤 즉각적인 조치에 들어갔으며 결국 최종 49억 유로라는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된다. 닉 리슨이 베어링스 은행을 초토화 시킨 후로 각 은행에 다양한 위험 관리 시스템이 만들졌음에도 불구하고 설립 144년을 자랑하는 소시에테 제네랄은 가장 위험한 순간에 봉착하게 된다. 홀연히 나타난 한 명이 발생시킨 손실액 세계 기록을 세운 제롬 케르비엘은 그를 심문했던 장-클로드 마랭 파리 검찰청 검사에게 "은행의 수익을 올려 능력을 인정받고, 금융계의 스타가 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2014년 9월 구속수감 4개월여 만에 가석방되었고 여전히 재판 중이다. 닉 리슨이 수감, 석방 후 책과 영화 판권, 강연 등을 통해 그럴싸한 수익을 올리고 있는 반면 제롬 케르비엘은 투자왕답게 그것마저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은행이 책이나 영화를 통해 발생하는 수익에 대해 저당권을 보전할 만발의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릭 리슨을 통해 소시에테 제네럴이 얻은 가장 교훈은 아마도 '저당권'인 듯하다.




왕의 시대


"불법 거래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도록 강요하는 은행 시스템의 희생자였다."

제롬 케르비엘


닉 리슨이 13억 파운드로 233년 역사를 자랑하는 베어링스 은행을 날려버렸던 1995년으로부터 8년 전 워렌 버핏은 블랙먼데이라는 핵폭탄급 악재를 틈타 코카콜라 주식으로 대량으로 매수했다. 단 하루 동안 다우존스지수(미국의 다운존스사가 뉴욕증권시장에 상장된 우량기업 주식 30개 종목을 표본으로 하여 시장가격을 평균하여 산출하는 세계적인 주가지수)가 22.6퍼센트나 하락했고, 주식시장에서 미국 국민총샌산(GNP)의 1/8에 해당하는 5,000억 달러가 증발했다. 대표적인 우량주였던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주가가 33.1퍼센트, 에이티앤티(AT&T)의 주가가 29.5퍼센트나 하락했으며 코카콜라의 주가 역시 36.5퍼센트나 하락했다. 미국은 70년대부터 인플레이션률과 실업률이 동시에 고공행진을 하고, 달러의 가치는 한 해 평균 12퍼센트씩 하락하던 상황이었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한 후 경기회복을 위해 정부의 통제와 간섭을 완화, 거액의 국제자금이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와 때아닌 호황을 누리기도 했지만, 정부의 대규모 군비 확장으로 인한 적자 재정의 심화, 무역적자가 계속 늘고 있다는 지표 발표, 그리고 걸프만에서 미국 군함 한 척이 이란에게 격침되었다는 헛소문이 끼어들면서 과도했던 호황은 단 하루만에 무너져 내렸다. 수많은 주식투자자가 빈털터리가 되었고, 블랙먼데이 이후 1년 사이에 미국인들의 소비지출액은 500억 달러나 감소했다. 닉 리슨이 고베 지진이라는 악재를 낙관한 채 고수익과 위험을 동반한 선물 거래에 베팅을 한 결과가 '폭망'이었다면, 블랙먼데이라는 악재를 낙관한 워렌 버핏의 코카콜라 베팅은 '대박'이었다. 이 둘의 결과는 참혹하리만큼 달랐지만, 닉 리슨이 고베 지진이라는, 워렌 버핏이 블랙먼데이라는 비극에 기반을 두고 베팅했다는 사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닉 리슨이 고베 지진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과 워렌 버핏이 블랙먼데이를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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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Monday


제롬 케르비엘이 49억 유로라는 경이로운 손실액으로 투자왕에 등극하기 1년 전인 2007년부터 프랑스와 땔래야 땔 수 없는 독일에서는 독일 가정의 소비지출이 증가하고 아시아 시장이 확대되면서 경제가 활성화될 것이라는 장밋빛 청사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쏟아져나오는 각종 보고서와, 연일 신문지면과 방송을 통해 전파된 전문가들의 발언들이 장밋빛 미래를 더욱 생동감 있게 덧칠했다. 2007년 말 DAX(독일 주가지수)는 8,067포인트였다. 독일의 WGZ-뱅크는 2008년 말 8,250포인트까지 오를 것이라 예측했고, 도이체 방크는 8,200~8,600포인트 상승 전망을 내놓았다. 가장 비관적인 전망을 한 미국의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의 예측은 7,700포인트였다. 하지만 결과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를 강타했고, DAX는 무려 4,810포인트까지 하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선물거래를 멈추지 않았던 제롬 케르비엘은 한 인간이 투자 한방으로 어디까지 파묻힐 수 있는지를 전세계에 생생하게 증명했고,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밝은 미래를 그리고 있던 수많은 투자자가 맞이한 건 뿌연 황사폭탄이었다. 하지만 진짜 비극은 모든 옵션, 선물 계약엔 상대방(Counterparty)이 존재하듯 이 와중에도 엄청난 수익을 올린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2007~2008년 당시 제롬 케르비엘의 유럽주가지수 상승에 기반을 두고 취한 선물 매도포지션을 거래한 이들은 돈방석에 앉게 된다. 영화 《빅쇼트의 실제 주인공들처럼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폭망을 예상하고 공매도한 이들도 벼락부자가 됐다. 비슷한 예로 1998년 한 시대를 풍미했던 헤지펀드인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ong Term Capital Management)가 있다. 1998년 당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는 시장이 안정될 거라는 분석결과를 믿고 엄청난 양의 옵션을 팔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뜬금없이 러시아 정부가 국채에 대해 지급불능을 선언하는 바람에 주가가 폭락했고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당연히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의 옵션을 산 이들은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잃는 이가 있어야 얻는 이가 있다는 단순명료한 도식이 증명된 것이다. 말콤 글래드웰은 그의 책《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What The Dog War》에서 이 도식에 대해 나심 탈레브(헤지펀드 임피리카의 매니저이자 《블랙스완Black Swan》의 저자) 의 생각을 빌어 이렇게 표현했다.


만 명의 펀드매니저가 있다고 치자. 해마다 순전히 운 때문에 절반은 돈을 따고 절반은 돈을 잃는다. 그러면 돈을 잃은 절반은 밀려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투자 게임을 벌인다. 이렇게 10년이 지나면 9명이 순전히 운 때문에 해마다 돈을 번다. 워렌 버핏, 조지 소로스처럼...


1999년 나스닥(NASDAQ)이 연간 44퍼센트가 오른 그해 클린턴 행정부는 금융서비스현대화법(그램-리치-블라일리법 Gramm-Leach-Bliley Act)을 승인했다. 다음 해인 2000년 상품선물현대법(Commodity Futures Modernisation Act)을 내놓았고, 상원은 만장일치로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금융서비스현대화법은 그동안 엄격하게 분리되어왔던 시중은행과 투자은행 간의 벽을 허물었다. 투자은행이 일반인의 예금을 받을 수 있게 했으며, 은행들이 보험 업무를 겸할 수 있게 했고, 빈민, 흑인, 라틴계 미국인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는 기존의 조항을 유지했다. 상품선물현대법은 선물 거래와 파생금융상품을 투기로 분류할 수 있는 기존의 법규들을 수정했으며, 에너지 선물거래를 특별히 금융 규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조항을 만들었다. 이 두 법안은 투자은행의 규제를 풀고 빈민들에게까지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을 확장할 수 있게 함으로써 2007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결정적 단초를 제공했다. 게다가 에너지 선물 거래에 날개를 달아줌으로서 엔론(Enron)이라는 괴물 에너지기업을 만들어냈다. 엔론은 2000년 매출 1천 10억 달러, 전 세계 2만1천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가장 전도유망하고 존경받았던 기업에서 2001년 하루아침에 파산한 기업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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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론의 경이로움


이 재앙과도 같은 두 법안을 탄생시킨 공화당 상원의원 필 그램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금융계로부터 460만 달러, 파산하기 전 엔론으로부터 9만7천 달러를 선거 운동자금으로 기부받았고 아내는 엔론의 이사가 되었다. 공매도의 대부 제임스 채노스(James Chanos)는 엔론의 과도한 에너지 선물거래, 회계 부정을 다룬 기사를 유심히 본 뒤 엔론 주에 대한 매도옵션을 팔기 시작해 수익을 올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미국에서만 금융손실 최대 1천억 달러(91조 7천억 원)가 발생했으며, 시가총액 8백억 달러의 엔론은 미국에서만 4천5백 명의 실업자를 내며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1999년과 2000년에 승인된 두 법안을 두고 이런 대참상을 예측해 경고한 이는 거의 없었다. 


요기 베라(Yogi Berra)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말로 유명한 야구선수다. 이 말은 주로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말로 통용되지만 끝나기 전의 예측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로 요기 베라는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고도 말했으니 예측의 부질없음으로 이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결과로서의 미래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확실한 건 경기가 끝나면 명확하게 승자와 패자로 나뉜다는 사실뿐이다. 앞서 말한 세상의 모든 투자가가 발 담그고 있는 이 바닥이 그러하다. 패자가 존재해야 승자가 존재하듯 손실이 있어야 수익이 가능해진다. 선물과 옵션 등의 파생상품이 바로 그 증거다. 자본만이 아무 일 없다는 듯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빠져나가 누군가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며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스포츠에선 '다음 경기'라는 기회가 존재한다. 하지만 위험천만한 금융시장에서 다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여전히 위험하며 불투명하다.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라는 말이 얼마나 허망한 슬로건인지는 자본주의 시대가 직접 증명한 지 오래고 '투자'는 자본이 만들어낸 '도박과 내기'의 또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투자왕이 되기위해 시장에 뛰어들지만 누구나 투자왕이 될 수는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투자왕 제롬 케르비엘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다.






[추신]


미국 어디쯤에서 바쁘신 와중에도 꼼꼼히 감수해주신 씻퐈님께 감사드린다.




[참고 문헌]


블랙스완 :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 말콤 글래드웰

탐욕의 종말 : 폴 메이슨

투자전쟁 : 바턴 빅스

월가와 연준을 장악한 유대인들 : 홍익희

워렌 버핏의 포트폴리오 투자전략 : 메리 버릿, 데이비드 클라크

거버넌스 리스크 관리 컴플라이언스 : 리처드 M. 스타인버그

언론이 말하지 않는 경제 위기의 진실 : 디어크 뮐러

지금 생각이 답이다 : 게르트 기거렌처

오류의 시대 : 조지 소로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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