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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고대사에 대해서는 사실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상고사에 대해서는 그나마 12세기, 고려 시대에 편찬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제대로 된 최초의 역사서이니 할 말이 없다. 주로 중국의 역사서, 일본의 역사서에 의지하거나 삼국사기 이후의 역사서들에 의지해서 한반도 고대사를 설명하다 보니 앞뒤가 안 맞거나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은 편이다.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흥망성쇠에 관한 내용은 이미 국내 사학계에 의해 정설이 굳어진 상태이고, 그 내용은 정확한 사료나 고고학적 증거로 밝혀진 것이 아니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국 등의 자료에 기반한 것이기에 훗날 발굴되는 고고학 증거들이 기존의 정설을 뒷받침하는 용도로 끼워 맞추기 해석이 되는 예가 종종 있다.

 

여기서 한가지 가정을 해본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백제, 고구려가 멸망한 지 무려 5세기가 지난 이후에 승리자 측인 중국의 사료, 그리고 신라인의 시각이 편협하게 반영된 결과물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우리네 사료가 전혀 없이 중국, 일본의 간략한 사료만 가지고 재구성한다면 그것이 정확할까?"


얼마 전 향토사학자 A씨와 짧은 시간이지만 백제 문명에 대한 여러 가지 고고학적 증거들과 향토적 의견(백제계의 시각)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평소 잡다한 역사학에 관심이 있던 터라, 짧은 지식이지만 7세기 백제 멸망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멸망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국내 사학계의 정설을 찌르는 딴지 역사론을 주장해 볼 터이다.

 

필자는 과거 정세와 상황을 유추하기 위해 기존의 사학계가 사서에 주로 의지하는 방식과는 달리, 고고학적 증거들을 토대로 현대에 규명된 고대국가들의 경제력, 정치체제, 군사력과 세력의 흐름을 바탕으로 역추정하는 방식을 사용하겠다. 현대의 상식에 기반한, 증거를 놓고 재조립하는 것이다. 기존의 역사관 따위는 머릿속에서 지우고 전혀 색다른 시각으로 접근하기에 독자 제위께서는 이 내용이 반드시 사실은 아님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1. 4~5세기 한반도의 정세. 고구려의 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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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고대 국가들의 세력판도와 전쟁 양상에 대해서 현대인들은 정말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자. 고대국가들은 현대와 같이 치밀한 지역통제가 불가능했고, 교통수단 등의 문제로 거점세력을 형성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여러분들은 어려서 국사 시간에 삼국의 율령반포에 대해서 배웠으리라. 율령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바로 율령을 통해서 중앙집권적인 초기국가의 형태를 갖췄다는 뜻이다. 삼국은 모두 부족국가들에 기반한 국가연합체였으나 차차 발전하여 원시적인 국가형태를 이룬 뒤, 율령의 반포 뒤에야 왕권에 권력을 집중한 중앙집권적 국가형태로 진화했다. 율령은 백제가 3세기, 고구려가 4세기, 신라가 다소 늦은 6세기에 반포하였다. 정치적으론 백제가 가장 선진국이었음을 이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위 그림은 4세기 무렵에 광개토대왕-장수왕 시기를 거치면서 고구려 세력이 남하하던 한반도의 정세도이다. (발 그림 이해 바란다. 언젠가 웹툰 작가를 섭외하든지 해야 좀 그림답게 뽑을 수 있을 듯)

 

국내성을 기반으로 하던 고구려 세력은 한성(지금의 서울 인근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백제를 억누르기 시작한다. 당시 백제는 한반도에서 고구려에 버금가는 강대국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백제를 누르기 위해 고구려는 수도를 남쪽의 평양으로 천도하고 평양 지역의 광활한 평야 지대에서 나오는 생산력과 인구를 이용하여 남하정책의 전진기지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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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고대국가들은 수도의 위치가 공세 하려는 지역을 향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고대국가 체제의 특징이기도 하다."


고대 전쟁에서 백제를 침공하기 위해 요동의 군대를 동원하거나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백제의 핵심지역인 한성 지역은 넓은 평야와 생산력을 갖추고 많은 인구를 갖춘 곳이었을 것이다. 또한, 교통의 요지이기에 중국과의 교류에 용이했다. (산둥성과 최단거리인 지역이 어디인지 잘 살펴보라)

 

고구려는 또한 저 남쪽의 약소국이던 신라가 인근의 강국인 가야 6국 연합체에 자주 시달리자 지원하기도 한다. 당시 고구려의 행보는 어디까지나 남쪽의 최대 적수였던 백제를 견제하는 행동이었을 거라는 게 당연한 추론이다. 즉, 신라는 백제를 견제할 세력이 되기도 했으며, 가야는 백제와 친분이 있는 세력이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가야는 왜국과 강한 유대관계에 있었던 것이 각종 고고학 증거에서 거론되고 있다)




2. 6세기 한반도. 한강유역을 둘러싼 쟁탈전.


5세기에 백제는 자신들의 주된 세력기반이던 한강유역을 상실하게 된다. 즉, 백제의 정치세력은 그 여파로 인해서 남하해서 지금의 금강유역인 공주 지역에 임시수도를 건설한다. 하지만 원래 이 지역은 마한의 50여 개 부족국가 중에서 일부 세력이 득세하고 있던 지역이다. 어디까지나 백제의 정치적 지배층은 한강유역에 세력을 두고 있었다. 여기에서 비류 백제, 온조 백제에 대한 설화가 나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본진 털리고 남하하여 다른 지역 세력이 점거하고 있던 지역에 새롭게 자리 잡는 게 쉬운지 아닌지는 여기서는 따지지 않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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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51년, 오로지 한강유역 수복만을 꿈꾸던 백제는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한다. 당시 신라는 백제-고구려의 다툼 속에서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성장을 거듭하여 율령의 반포와 함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성립하여 크게 국력이 강화된다. 주로 험준한 지형 속에 위치하여 넓은 평야 지대를 확보하지 못하여 경제력과 인구 면에서 백제에 밀렸던 것을, 인근의 가야국들을 차례로 합병하면서 극복해 나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 성왕은 신라와 협공하여 한강 하류의 알짜배기 지역을 차지한다. 신라는 한강 상류의 비교적 안 좋은 지역을 차지하는데... 연합한 지 고작 2년이 지난 553년에 신라가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 백제군의 뒤통수를 쳐서 한강유역을 몽땅 차지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들지 않는가? 왜 고구려는 신라가 혼자 알짜배기 한강유역을 꿀꺽하는 걸 방조했을까?

 

그 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지난 시절에 백제-고구려의 관계는 매우 험악했다. 반면에 신라와 고구려는 한때 지원군을 보내줄 정도로 역사적으로 유대가 있었다. 만약 적이 두 명이라면 한 번에 상대하긴 힘들다. 그러나 비교적 약한 녀석이 강한 녀석을 배신하면 나중에 약한 녀석을 따로 처리하기가 쉽다. 강한 녀석이 한강의 알짜배기 지역을 먹고 승승장구하면 오히려 뒷감당하기 어려워지는 게 상식이 아닌가? 그래서 고구려는 신라에 한강 지역을 양보한다.

 

"나(고구려) 대신 백제를 견제해라~"


 

신라에게 어이없이 뒤통수를 맞고 자신들의 오랜 원산지(?)였던 한강을 수복하자마자 다시 빼앗긴 백제. 그리고 백제의 성왕은 화가 엄청 나서 정말 대규모로 한강의 신라군을 공격한다. 그런데 백제군은 신라군에게 제대로 당해서 왕을 비롯해 4명의 좌평(지금으로 치면 부총리급 이상), 3만 명의 군사가 전사했다고 전한다.

 

'고대 전쟁에서 정확한 병력과 전사자 수 등은 사실 매우 추론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료들도 대부분 개뻥이 많다. 그러나 왕이 전사했다는 사실은 거의 확실하고 그런 치명적인 패전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고고학적인 발견으로도 6세기 무렵의 신라는 강력한 군사국가를 지향하는, 정복국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후 백제의 정치성향은 크게 바뀐다. 더이상 고구려가 백제의 숙적이 아니고, 신라가 원수가 된다. 이후 무왕, 의자왕 시기를 거치면서 백제의 정치형태와 군사적 방향, 심지어 경제 또한 오로지 신라와 대결하려는 듯한 구조로 재편이 된다.




3. 7세기, 운명의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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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에는 고구려가 주로 중국세력과 다투느라 정신이 없던 시기이다. 수나라가 7세기가 시작함과 동시에 고구려를 침공하더니, 이윽고 그 후계자인 당나라까지도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7세기 내내 고구려는 중국의 공격을 막느라 국력을 소진한다. 반면에 남쪽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숙적이었던 백제를 의식했으나, 다행히도 비교적 적대관계가 덜한(?) 약소국 신라가 한강을 차지해서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런 정세적 판단은 고구려 지도층으로서는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훗날 얼마나 치명적인 사태를 불러오는지 그들을 전혀 몰랐으리라."



신라는 가야 6국을 병합하고, 심지어 가야의 지배층마저도 흡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통상적으로 고대국가에서의 병합이란 상대국 지배층의 몰살을 뜻하는데 다소 이례적이다. 삼국 통일에 있어서 신라 군부의 최고위 장수였던 김유신과 그의 일파들은 다름 아닌 가야계라는 사실을 직시하자. 무튼 신라는 가야의 생산력(지리적으로 평야 지대를 끼고 있어서 신라가 가장 탐내던 곡창지대 역할을 할 수 있다) 등을 기반으로 강력한 군대를 건설하고, 인구를 늘릴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위성지도를 보면 한반도의 평야 지대가 한눈에 확인이 된다. 고작 2천 년도 안되는 사이에 산맥이 솟아나거나 하진 않는다. 고대에 산악지대에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살 수 있었을까? 지금처럼 고속도로가 없고, 한반도 전체의 인구가 수백만 명도 안되는 시기에 사람들은 어떻게 모여 살았을까 궁금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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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다음 편에 신나게 써먹을 한반도 남부의 위성사진이다. 이걸 보면 무슨 생각이 드나? 고대 전쟁의 양상에 대해서도 한번 추리해보고 싶지 않은가? 산맥 틈새로 대규모 병력(그래 봤자 피하 수천~만 명 정도?)이 전투를 벌이는 과정을 생각해봤나? 도로도 없는데 원시적 수송수단으로 군량미를 전선으로 나르는 상황, 전장 인접 지대에는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가 없어서 고작해야 자급자족 정도만 생산하는 상황 등등.


7세기 내내 백제는 신라를 수천 회 공격한다. 당시 백제의 인구에 대한 추론은 여러 가지 이지만, 삼국사기에서 밝힌 내용을 그대로 차용하면 인구가 최소한 350만을 넘는 초강대국이다. 당시 중국 수나라의 인구가 5천만 명에 육박했다고 하지만, 현재의 충청남도, 전라도 일대를 차지한 백제의 인구가 무려 350만 명이라면 엄청난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셈이다. 제대로 징집했다면 아마도 30만 대군은 족히 가능했을 것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개뻥이라는 단편적인 증거이다. 고대국가의 인구수, 군사력의 상관관계를 알면 김부식은 저런 거짓 사료를 인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문관이면서 무관이기도 했다. 알고도 헛소리한 건가?)


여러 정황과 고고학적 증거들, 일부 사료에서도 당시 백제의 세력은 신라보다 결코 뒤처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경제력과 인구 면에서 신라를 압도하는 듯한 정황이 많이 보인다.


고구려는 광활한 만주벌판을 유목민식으로 통치했으리라. 유목민들의 국경의 너비와 한계는 농경민족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압록강 이남, 특히 수도인 평양 인근에서는 농경을 기반으로 안정적인 거점세력을 형성하여 중앙정치를 실현했을 것이다.


신라는 지형적으로 험준한 산세에 둘러싸여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가야를 병합(내지는 일부 협력?)하여 세력을 키우고, 그 국력을 바탕으로 한강을 놓고 백제와 다툴 수준까지 이르렀다. 한마디로 가야와 합병한 덕분에 인구가 늘고, 생산력이 향상하여 군대를 증강시킬 수 있었다는 뜻이다. 군대를 한강유역까지 파견했다고 해도 그 지역에 농민들을 모아서 쌀을 생산하고 그걸로 자급자족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구? 백제군이 맨날 쳐들어오는 전선 지역인데 무슨 수로 안정적인 농경과 행정기구를 운영하나? 고로 본진인 서라벌에서 모은 군량미가 끊임없이 한강유역으로 배달되었을 것이다. 또한, 군사들과 무기, 피복 등의 물자가 전선으로 운반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백제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 한복판이 바로 부여 백제의 중심지역이다. 적어도 수십만에 이르는 농부들이 집결되어 농사를 지었고, 각지에서 징발된 병사들이 정예군으로 훈련받았다. 이것에 대한 명확한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굴되었으나 지금 우리 사학계에서는 그것이 간과되고 있다고 한다. 왜냐구? 나중에 백제 패망의 과정을 설명하는데 김부식의 삼국사기 위주로 형성된 정론에 어긋나기 때문이지.

 

아무튼 백제의 수십 년에 걸쳐 지속된 침공으로 신라는 매우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고, 고구려는 중국과 다투느라 정신이 없던 틈에 신라가 외교적으로 혁신을 일으켰다. 그 결과로 백제는 무너지는데, 그 과정에 알려지지 않는 역사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편에 그 부분을 중점으로 다뤄보자. 계백의 5천 결사대의 정체, 그리고 의자왕과 3천 궁녀의 실체에 대해서도...



커밍 쑤~운!



엘랑


편집 : 딴지일보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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