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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딴지 배너광고를 클릭하는 편이다. 별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혹시 서버비에 손톱 끝만큼이라도 도움이 되려나 싶어서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는 딴지 사이트의 광고가 온통 중고차 광고 일색이 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게 보이는 광고가 그런 거였다. 언젠가 내가 중고차 관련 검색을 한 흔적이 온라인에 남아, 맞춤형 광고인지 뭐니 하는 시스템으로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정작은 중고차 검색을 한 건 아니었고 중고차 딜러 검색을 했었다. 오래전에 소식이 끊긴 지인이 문득 떠올라 근황이 궁금했다. 예전에 중고차 사업을 시작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기억이 나, 혹시나 싶어 아무개, 중고차 하는 검색어를 무턱대고 포털에 입력해본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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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지인과 연락이 닿아 회포를 푸는데 낯선 번호의 전화를 두 통 받았다. 한 통은 부동산 중개업자였고 한 통은 보험설계사였다. 혹은 보이스피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옆자리에선 직장인들 너덧이 어느 여배우의 한참 철 지난 가십 거리를 안주 삼아 킬킬거리고 있었다. 무기중개상이자 연예기획사 대표와 갈등을 빚던 여배우가 된통 당했네, 어쩌네 하는 얘기였다. 


귀담아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자연스레 엿듣게 됐다. 옆자리 사람들은 보아하니, 어느 호텔의 카지노 딜러들인 모양이었다. 남들 나누는 한담을 나도 모르게 주의 깊게 듣는 버릇, 말하자면 관음증청음증(?)이랄까, 혹시 이거 일종의 직업병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때 광고업에 종사했었다. 트렌드니, 원츠니, 니즈니 하는 것들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냈는데, 지금은 트렌드는커녕 퇴행하는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그 버릇은 남은 모양이다.


딜러 혹은 거간꾼, 브로커, 나까마, 삐끼, 유통업자, 대행업자, 중개업자, 로비스트, 코디네이터, 컨설턴트, 플래너, 설계사...... 등등을 둥쳐서 부를만한 어떤 직군의 사람들과 알게 모르게 인연이 많이 스친 하루가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새퉁맞게 떠올랐다. 게다가 '인공지능 광고 코디네이터'까지. 따지고 보면, 한때 광고업 종사자였던 나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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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농공상이란 말이 대변하듯, 조선 시대는 상업이 괄시받던 시대였다. 조선 초중기 때 실록을 읽다 보면, 장터가 늘어난다는 보고를 받고 임금이 우려하는 내용의 기사를 종종 볼 수 있다. 본을 멀리하고 말을 좇는 세태를 두고 군신이 한 목소리로 탄식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임금도 권신도 바꾸지 못했다. 경향의 여러 수령으로 하여금 농사를 더욱 독려하여 본을 돈독게 하고, 어린 백성을 힘써 교화하여 말을 경계토록 하라는 칙유는 결국 사관의 기록으로만 남았다. 그리고 알다시피, 끝내 본말은 전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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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상업이 발달한 조선 후기에 이르러 당연히 중개업 역시 활발했다. 객주처럼 숙박시설과 창고를 갖춘 대형 중개상이 있던 반면, 여리꾼 같은 중개상도 있었다. 여리꾼은 점포 앞에 서서 호객과 거래를 알선하던 중개인을 말한다. 여리꾼이 손님을 끌어들이는 걸 '여립켜다'라고 했다. 성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지금으로 치면 삐끼쯤 될 법하다. 유흥업소의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을 삐끼라고 속칭한다면, 여리꾼은 주로 시전에서 활동했다. 한편, 예전에 유흥 혹은 매춘을 주선하던 이들은 조방꾸니라고 했다. 여리꾼이 '열립군列立軍'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여리꾼을 이두 식 한자로 열립군이라고 표기했는지, 아니면 열립군이 여리꾼이란 말로 변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 옛날 운종가 시전 앞에 '죽 늘어서서' 지나는 손님을 여립켜던 여리꾼들을 상상해보면, 그럴듯하기는 하다. 지금도 많이 보는 광경 아닌가.

 

송기숙의 소설, '녹두장군'에는 "동상전 여리꾼처럼 비슬비슬 웃으며 노려보고 있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동상전은 종각 뒤편에 있던, 시전이었다. 바늘, 실, 빗 따위의 잡화를 취급했다. 송기숙 선생에 의하면, 동상전 여리꾼은 '비슬비슬 웃는' 이의 대명사 격인 듯하다. 또 우리 속담에는 "동상전에 들어갔나." 하는 말이 있다. 사전에는 "먼저 말을 하여야 할 경우에 말없이 그저 웃기만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돼 있다. 그러니까 동상전은 여리꾼이나 손님이나 선뜻 말을 못 꺼내고 배슬배슬 웃던 데였던 모양이다.

 

남자 손님이라면, 바늘이나 색실, 빗 같은 물건을 선뜻 달라고 못 하고 배슬배슬 멋쩍은 웃음을 먼저 내보이지 않았을까. 지금으로 말하자면, 드라마에 종종 나오는 여친이나 아내의 선물을 사려고 속옷 가게에 간 남자가 주뼛 주뼛하는 클리셰 같은 장면 말이다. 아니면 생리대 심부름 간 남친이나 남편이 얼쯤 얼쯤하는 모습이라든지. 어쩌면 좀 더 은밀한 물건을 찾느라 그러진 않았을까. 손님이나 여리꾼이나 말없이 배시시 웃음과 눈짓으로 흥정과 거래가 이뤄지던 물건이 있었을 만도 하지 않은가 말이다. 상전床廛은 상판 위에 물건을 벌여놓고 파는 전포를 의미하니 동상전의 진열대 위에 벌여놓지 못 할 물건들이 있기 마련이다. 가령 각좆이나 춘화 같은 것 말이다. 사전풀이에 의하면, 각좆은 '뿔 따위로 남자의 생식기처럼 만든 장난감'이다. 물론 나른한 봄날 오후, 하품하다가 한번 해본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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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개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부동산중개 아닐까 싶다. 중개업자를 우리말로는 주릅이라고 한다. 집주릅, 땅주릅. 전에 올린 불초의 글 '독투강호-검계'에서 언급한 적 있는 데, 기억하시는 횽들 있을지 모르겠다. 조선후기 영·정조 때 문인 이규상의 문집에 보면, "서울에서 집을 사고파는데 집주릅이 거간하지 않으면 거래가 성사되지 않는다(京城人舍 非駔驓居間不能成價)"고 할 정도였으니 당시 도성 집주릅의 상세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집주릅의 중개수수료는 얼마나 됐을까? 이규상이 취재한, 젊어서 왈짜였다가 늘그막에 집주릅으로 연명했다는 표철주에 의하면, "1,000전을 거래할 때 10전 정도를 '구전'이라는 명목으로 집주릅이 받는다(千錢授十錢於駔驓 名曰口錢)"고 했다. 거래가의 약 1%가 중개수수료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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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철주에 의하면, 집주릅은 대체로 두 부류가 있다고 한다. 사대부가 집주릅과 중로가中路家 집주릅. 말 그대로 사대부가 집주릅은 지체 높은 양반을 상대하는 주릅이고 중로가 집주릅은 여염집을 주로 상대하는 주릅이었다. 고객이 고객인 만큼, 사대부가 집주릅은 예모를 갖춰야 하는 고역이 따른다는 게 표철주의 설명이다. 이어 표철주는 건달기 다분한 표현으로 중로가 집주릅은 술과 밥을 "뜯어 먹기 쉽다(討酒食易)"고 했다. 검계 출신 표철주는 중로가 집주릅이었다. 한편, 역시 영·정조 때의 문인 유만주의 일기문집인 '흠영欽英'에는 유만주가 집을 사서 이사한 내용이 적혀있다. 유만주는 집주릅에게 구문, 그러니까 중개수수료 이외에도 먹, 생선, 초 등을 선사했다. 중로가 집주릅인 표철주는 술, 밥 등을 '뜯어' 먹었지만, 사대부가 집주릅은 먹이나, 생선, 초 같은 고가품을 챙겼다. 어쨌든 집주릅은 거래수수료 외에도 과외 수입이 적잖았던 모양이었다.

 

유만주는 당시 31,000문(310냥)의 전세를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세 탈출, 자기 집 마련의 꿈을 안고 새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집을 구매하기로 하면서 유만주는 여러 곳의 집을 물색했다. 동쪽 집, 돌밭 집, 소나무 집, 항전동, 수서, 창동, 난동, 공동, 낙동, 명동, 북동의 집 등, 수많은 집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유만주는 곳곳의 이런 매물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집주릅을 통해서였다. 유만주는 하인을 집주릅과 보내 집을 보게 하거나, 직접 동행해서 집을 보았다. 유만주는 집을 둘러보고 그 집의 단점과 장점 등을 그날그날의 일기에 적어놓았다. 또한 집에 대한 비평을 하기도 했는데, "저 치들은 돈이 많아서 허다한 집을 가지고 있지만, 전혀 가꾸고 쓸 줄을 몰라 웅장하고 깊은 맛도 없고 우아하고 그윽한 맛도 없으니, 당최 논할만한 게 되지 못한다(伊輩徒以多錢故做得許多屋子 然全不識所以作用 無當於雄深 無當於雅遠 元無足徵也)"는 등, 집주인의 낮은 미적 안목을 탓하기도 했다. 한편, 유만주는 집을 보러 다니며 집주릅에게 귀동냥으로 들었을 만한 이야기를 일기에 적어 놓기도 했다. 흠영에 의하면, 당시 서울에서 가장 비싼 집은 입동에 있는 이은의 집인데 20,000냥이 넘었다고 한다. 황윤석의 문집 '이재난고'에는 당시 서울 집값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초가집은 한 칸에 10냥, 기와집은 20냥 정도의 시세였다고 한다.

 

유만주의 주택구매과정은 대체로 다음의 과정을 통해 이뤄졌다. 집주릅이 먼저 도면을 작성해오면 유만주가 먼저 검토했다. 혹은 집주릅과 함께 가서 도면을 그리기도 했다. 그 도면을 가지고 집안 어른이나 사촌들과 상의를 하기도 하면서 집을 결정하면, 그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했다. 경비가 마련되면 집주릅에게 통보하면서부터 구체적인 거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유만주의 주택 구매는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1,200냥에 계약한 집이 갑자기 100냥을 더 올려달라고 해서 거래가 무산되기도 하고, 이사 날까지 잡은 거래가 돌연 엎어지기도 했다. 가격이 안 맞아서 유만주가 거래를 중단한 적도 있었다. 


자세한 속사정을 기록하지 않아서 내막을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내가 보기엔 집주릅의 농간(?)도 한몫한 거 같다. 1,200냥에 계약하고 계약금을 보낸 다음 날 갑자기 집주릅이 찾아와 100냥을 올려 달란다고 하더니, 그 이튿날은 2,000냥짜리 다른 집을 보여 준다. 분통을 터뜨리던 유만주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기에는 "집주릅이 찾아와 의혹을 해소했다. 돈을 보태 낙동 집과 교환하기로 했다(儈至辨疑 約添換駱舍)"고 적혀 있다. 그런데 이건 뉴스에서도 가끔 보는 중고차 거래의 '미끼매물' 방식이 아닌가. 물론 삐딱한 내 눈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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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릅은 단순히 매물을 소개하고 안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거래 과정에 상당히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뒤뜰의 가격을 100냥 깎아 볼 테니, 거래를 해보자는 제안을 먼저 하기도 하고, 비용 때문에 고민하는 유만주에게 구입할 집의 대지 일부를 잘라 팔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거래가 성사되지 않으면, 유만주가 머뭇거리는 바람에 거래를 놓쳤다고 핑계를 대면서 또한 다음 거래에 대한 심리적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유만주는 집주릅에 대한 배신감 토로와 힐난하는 말을 일기 곳곳에 남겼지만, 대놓고 화를 내거나하진 않은 듯하다. "이제 와서 무익하게 화를 내면 일에 심히 불리하고 마땅치 않을 것이다(而至於無益之嗔患 則甚不利於事 無當於事)"라는 말을 봐선, 행여 거래에 악영향을 미칠까 싶어 꾹 눌러 참은 모양이었다. 유만주는 이런 심경을 일기에 남겼다.

 

이 나이가 되도록 집 한 채 사는데 이토록 쩔쩔매다니. 

만약 아랫사람에게 사기라도 당한다면, 앞으로 세상 살기가 좀체 어려울 것이다. 

영웅호걸에 대해 아무리 많이 이야기한들 덜떨어진 놈 취급 받을 게 뻔하다.


年入矣 乃不能作用一舍

而若受下流欺騙 亦難矣

侈談英雄 殊涉賤格


집 한 채 사는 게 이다지도 어려울 줄이야. 

모두 이와 같다면 뉘라서 집 사는 일을 물어 볼 수 있단 말인가.


事舍其難 盡若是 則人孰有問舍者

 

예나 지금이나 집 장만은 수월치 않은 일이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 스트레스야 얼마든지 감당할 테니, 2,000냥짜리 새집을 살 수 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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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이 한시에 문외한이라도 백탑시파는 한 번쯤 들어봤음직 하다. 박지원을 좌장으로 하는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홍대용, 성대중 등의 우정과 학문교류는 지금에 와서는 그들의 시보다 더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이덕무의 문집 '아정유고雅亭遺稿'에는 이덕무가 그의 절친 이서구에게 보낸 재미있는 편지 한 통이 수록돼있다.

 

집안에 남은 값나가는 물건이라곤 '맹자 7편'뿐인데, 

오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200전에 팔고 말았소. 

그걸로 밥을 지어 배를 든든하게 채웠다오. 

영재(유득공)에게 가서 시시덕거리며 자랑했더니 

영재도 굶주린 지 오래라, 내 말을 듣더니 바로 좌전을 팔았다오. 

쌀 사고 남은 돈으로 영재가 술을 받아 주었소. 

이야말로 맹자께서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 선생이 손수 술을 따라준 것이나 다를 바 없지 않겠소. 

하여 나는 맹자와 좌 씨를 천 번 만 번 기렸다오.


家中長物 只孟子七篇 

不堪長飢 賣得二百錢 

爲飯健噉 嬉嬉然赴泠齋大夸之. 

泠齋之飢亦已多時 聞余言 立賣左氏傳 

以餘錢沽酒以飮我 

是何異子輿氏親炊飯以食我 

左丘生手斟酒以勸我 

於是頌讚孟左千千萬萬.

 

유쾌하지만, 짠하다. 누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그리고 나는 스스럼없는 이들의 우정이 부러웠다. 그런데 이덕무와 유득공은 어떻게 책을 팔았을까? 글에 자세한 것은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 중개상을 통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농공상의 조선 시대에, 특이하게도, 서점이 없었다. 앞서 말한, 잡화점인 동상전에서 간혹 소설류를 취급했지만 서점은 아니었다. 서원이 있긴 했지만, 역시 서점은 아니었다. 아! 어쩌면 사농공상의 시대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서점 설치에 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종 때 몇 차례에 걸쳐 서점 설치가 조정에서 논의되었다. 삼정승을 비롯해 중신들은 대체로 반대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뜻은 공감하지만, 우리 풍습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태껏 없이도 잘 살았는데 이제 와서 구태여 뭐하러 만드느냐, 하는 말이다. 순전히 기득권의 시각이다. 중종은 서점 설치에 호의적이고 보다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명종실록에, 사헌부가 다시금 서점설치를 건의하며 "중종조에서 이미 그 법을 세웠었는데 폐지되고 시행하지 않았으므로 거듭 밝히고자 할 뿐입니다(在中宗朝 已立其法 而廢閣不行 故只欲申明而已)"라고 한 기록으로 봐서는 중종 때의 서점 설치 건은 흐지부지 끝난 것으로 보인다. 명종 역시 사헌부의 간언에 윤허했지만, 역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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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의 편지에도 '집안에 남은 값나가는 물건'이라는 언급이 있듯이 예전에 책은 고가품이었다. 유통이 제한적이었으니 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흠영에는 유만주가 '패문운부佩文韻府'라는 책을 80냥에 산 기록이 있다. 이덕무가 맹자를 200전(20냥)에 팔았으니, 청나라에서 수입한 음조어휘집인 패문운부는 무척 비싼 책이었나 보다. 유만주의 일기에는 당시 쌀 3되가 10문이라는 기록이 있다. 평석, 전석, 지역별 차이, 가격 변동폭 등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단순계산하자면, 10냥은 쌀 3섬 가격이었다.

 

정약용의 문집에는 '조신선전'이라는 전이 실려 있다. 조신선은 늙은 나이에 비해 하도 젊어보여서 별명이 조신선인데, 책 중개상, 일테면 '책주릅'이었다. 정약용은 조신선에 대해 "제자백가의 온갖 책에 대해 그 목록과 목차를 모르는 게 없어, 술술 이야기하는 모습이 마치 박식하고 우아한 군자 같았다(凡九流百家之書 其門目義例 無不領略 纚纚然譚論 如博雅君子)"라고 적었다. 말하자면, '컨텐츠'가 책주릅 조신선의 컨텐츠였던 셈이었다.

 

조신선의 장사 수완은 어땠는지 몰라도 세평은 그를 박하게 대한 모양이었다. "욕심이 많아, 과부와 고아의 집에 있는 장서를 헐값에 사들이고 팔 때는 곱절로 비싸게 팔아 많은 이문을 남겼다. 하여 책을 판 많은 이들이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而性多慾 凡孤兒寡妻之家所藏書帙 輒以輕賈取之 及其賣之也 倍讎焉 故賣書者多短之)"고 정약용은 기록했다. 당시 책을 파는 집은 몰락한 양반가가 많았다. 그러니 과부와 고아가 주로 매입 대상이었을 것이다. 조신선은 이들의 절박한 처지를 이용하여 매입가를 많이 후려친 모양이었다. 조신선전은 책주릅 조신선에 대한 정약용의 빈정거림과 조소로 끝을 맺는다.

 

도가에서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버리는 것을 신선이 되는 근본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조신선은 욕심이 많으면서도 오히려 이처럼 늙지 않았으니, 

세상이 혼탁해서 신선도 그 시속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단 말인가


道家以淸心寡慾 爲飛昇之本 

乃曺神仙多慾 猶能不老如此 

豈世降俗渝 神仙猶不能免俗耶

 

조신선이 지금 시대에 있었다면, 그의 장기를 발휘해 '리더스 다이제스트'나 '읽어본 척 매뉴얼' 같은 책을 펴냈으면 어땠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유능한 출판 기획자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조신선이 전하는 보톡스 없이 젊음을 유지하는 101가지 방법' 같은 책을 냈으면 대박 났으려나. 역시 나른한 봄날 오후 하품하다가 한번 해본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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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쩌다 선거 현장을 두어 번, 가까이에서 겪어본 적이 있었다. 당시엔 선거캠프가 꾸려질 무렵이면 찾아오는 사람 중엔 어김없이 이른바 선거브로커가 있었다. 지역의 각종 조직의 명단을 가지고 있으며, 어디 어디를 통해 몇 표를 끌어올 수 있노라, 호언장담한다. 공천 확정 전이라면 요로에 힘을 써 공천을 도와줄 수도 있다고 허세를 부린다. 물론 요구하는 것은 돈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세월이 꽤 지났으니 설마 예전 같을까 싶다. 다시 생각해 보니, 국가기관이 나서서 선거브로커를 하는 마당에 하기야 어디 웬만한 브로커가 명함인들 내밀겠는가. '공인 국가기관 선거브로커 법'까지 통과시킨 -아, 삐딱한 누구의 눈에 그렇다는 것이다- 마당에 또 어디가 해킹당했느니 하는 뉴스를 연일 쏟아낸다. 내가 겪어본 어느 브로커보다 낯짝도 두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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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 - 조선일보

 

나는 그런데 요즘 가끔 착각에 빠진다. 공당의 공식조직에서 그 옛날 선거브로커의 행태를 목격한다고 느끼니 말이다. 정치를 가치와 철학 보다 게임이론으로 분석하려는 이들은 지금 상황이 흥미로울지 모르겠다. 마치 바둑 해설하듯, 다단계 조직표 같은 계파를 그려두고 파워게임의 수순을 내다보기도 한다. 내 눈에는 어지럽고 덧없어 보인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는 비극인가. 혹은 멀리서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희극일까. 내 눈이 삐딱해서 보이는 착시이길 바란다.

 

친구 몇이 가치와 이념을 내세워 출마한단 소식을 들었다. 선뜻 연락하기에 앞서 얄팍한 지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다는 뜻일까. 가치와 철학이라. 역시 어렵다. 내 책장의 책을 다 팔면 무게로 달아 얼마나 쳐주려나. 맹자가 밥 지어 먹이고 좌씨가 술잔을 권할 만큼은 될까. 그래도 멀리서 보이는 비극이 가까이서도 비극이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편집부 주


위의 글은 독자투고에서 납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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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투불패 및 자유게시판(그외 딴지스 커뮤니티)에 쓴 필자의 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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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 해민海旻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

사니까, 또 살아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