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1.11.08.화요일
필독


문학은 세계, 혹은 현실이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문학은 작가가 세계를 어느 정도 이해한 후 자신의 이해를 인정받기 위해 짓는 사고의
건축물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작가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문학이라는 장치를 통해서라도 이해하기 위해 짓는 상상의 건축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가해한 세계를 설명하려는 노력의 산물인 신화는 최초의 문학이라고 해도 되리라.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척이나마 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던가. 결론적으로 문학은 일차적으로 작가 자신을 위해 쓰여진다.


그리하여 나는 작금의 FTA와 가카를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한 편 쓰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현실의 한미 FTA에서는 나의 이해가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을 만나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실화정치소설은 팩션으로써, 실존인물과 실제의 사건을 다룬다. 다만 나는
그 내막이나 인물의 심중, 의도를 파악 내지는 상상해내야 한다.






국가의 지도자가 외국에 나가서 자국에 극도로 불리한 협상을 하고 왔다. 최단기 협상시간 기록을 갱신하며 전직 대통령이 끝까지
지키려고 한 것을 모두 화끈하게 던져주고 왔다. 위험한 쇠고기 수입, 자동차 관세, 개성공단. 레칫과 스냅백, 비위반제소 등
악랄한 독소조항을 다 내주면서 지키려고 했던 마지막 보루. 그걸 상대의 전리품으로 바치면서 백기투항했다. 그렇다고 독소조항내역이 좀
부드러워진 것도 아니다. 


그것도 모자라 디트로이트에 가서 오바마 선거유세를 대신 해 주고 왔다. 제가 책임지고 여러분의 생계를 보장하겠습니다! 보았는가, 미국 노동자들의 환한 얼굴을. 들리는가, 그들의 함성소리가.


설명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왜 그랬을까. 가카가 정신이 나갔거나 사람이 너무 좋아서? 에이, 그럴 리가 없다. 가카가 협상력이
너무 없어서, 오마바가 흑형답게 랩에 준하는 말빨을 갖고 있어서 탈탈 털렸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건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아닌가. 전쟁에 지지도 않았는데 항복문서에 서명한 이유가 겨우 상대국 지도자의 뛰어난 협상능력 때문이라니. 이걸 소설이라고 써
놓고 어디가서 글밥 먹는단 소리하면 안 되는 거다.


어쩌면 가카는 FTA 백기투항이 정말로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착각했을 수 있다. FTA는 그 내용과 상관없이 무조건 진리라고 믿었을
수 있다. 그것도 아니면 협상 내용과 상관없이, FTA를 빨리 체결하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지도자의 척도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긴 마찬가지. 소설가의 기본적인 자질을 의심케 하는 성의없는 설명이다. 소설은 때로 현실보다 논리적이어야 한다. 


물론 슬프게도 저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현실로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소설을 쓰고 있는 중이므로, 작품 속에서 가카의
뒷덜미를 잡고 있는 게 뭔지를 밝혀내야 한다. 아아, 창작의 고통이여. 결국 나는 국익 따위는 한푼어치도 중요치 않은 가카의
저렴한 도덕성을 고발해야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현실의 가카가 아니라 작중 가카 말이다.


작중 가카가 오바마에게 잡힌 멱살은 BBK다. 가카의 악취나는 속살을 드러내며 미국 법원에 계류중인 BBK 사건. 판사가 가카에게
불리한 입장을 고수하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도 설명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 이렇게 써야겠다. 가카는 미국 법원에서
금융사기사건의 면죄부를 받기 위해 국익은 헌금으로 바친 거다.


그물에 걸린 미역처럼 다른 이야기들도 딸려나온다. 저축은행 사건이 터진 이유도, 기껏 터드린 사건의 수사가 미적지근한 이유도
가카께서 정치권을 압박하기 위해서다. FTA 비준안 처리를 위한 한나라당 의원들의 맹목적인 태도를 보라. 이게 코가 꿰어있지
않으면 가능하냔 말이다. 언론이야 가카와 이익을 함께하기로 한 지 오래고.


그런데도 나는 소설을 완성할 수가 없다. 미국측이 먼저 ISD조항 철회를 제안했지만 가카가 거절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사우론의 안구마냥 그 악명의 깃발을 드높이 펄럭이는 투자자-국가 소송제. 야권이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핏대를 높이는, 한나라당도 방어논리를 개발하기에 급급한, 그것도 좋다고는 차마 못하고 그렇게 나쁜 건
아니라고 변명을 둘러대야 하는 ISD를 미국측이 먼저 독소조항에서 빼자고 했단 말이다. 


오바마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만 했다. 부시가 만 원짜리 물건을 5천 원까지 내렸다. 7천 원은 받아야겠다고 한 노무현은 결국 물건을 팔지 못했다. 물론 밑지는 장사에 물건을 내놓은 노무현 대통령도 현명하진 못했지만...

근데 가카는 헐값에라도 넘길 테세다. 이때다. 제대로 장사할 수 있겠구나. 오바마는 3천 원까지 값을 후려쳤다. ISD 철회는 겨우
남은 3천 원에 끼워준 떡고물이다. 오바마는 경제규모 세계 10위권 국가의 백기투항을 무혈접수할 절호의 기회를 만났다. ISD
정도는 재빨리 좌판에 내놔도 될 정도로 수지맞는 장사다. 그런데...


가카는 거절했다. 천 원에 가져가세여. 아니 왜.

뭐땜에.



청와대는 "ISD는 우리가 싸워 지켜야 할 가치"라고 선언했다. ISD가 무슨 독립이냐, 아님 민주주의냐. 그건 미국 투기자본이
대한민국 국민의 재산과 세금을 영원히 삥뜯을 수 있는 잭나이프라고. 작중 가카가 아무리 무능해도 그렇지, 아무리 친미라도 그렇지... 아니지 아니지, 뼛속까지(to the core) 친미라면 오히려 천조국이 먼저 제안한 걸 감사히 받아들이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래, 소설적인 상상을 해보자면 어쩌면 가카는 최면에 걸렸거나 CIA가 몰래 먹인 약물에 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집필 중에 작품의 장르를 바꿀 순 없는 노릇이다. 내가 쓰는 소설은 SF나 스릴러가 아니라 본격 실화정치소설이다.

소설에는 개연성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 여기서 개연성은 가카 본인의 개인적 의지일 수밖에 없다. 하여 나는 작가의 표현의 자유가
과연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 자문할 정도로 불충한 소설을 쓰고 말았다. 가카는 ISD를 탐했다. ISD와 관련한 일부 내용의
골자를 여기 공개한다. 내 부족한 상상력은 이 이상을 생각해낼 수가 없다.


가카가 ISD를 고집한 이유는 인천국제공항을 매입하려 하시기 때문이다. 가카에게 대한민국 대통령직 따위는 과정에 불과할 뿐. 가카의
궁극적인 꿈은 재벌이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국제투기자본의 수괴다. 일단 인천국제공항 매입에 성공하고 나면, 대한민국 국민은
다시는 인천국제공항을 회수할 수 없다. 회수하려는 시늉만 해도 ISD 조항 때문에 벌금조로 세금만 더 갖다바쳐야 한다. 회수는커녕 항의하기도 곤란하다. 

안녕, 인천국제공항. 그동한 싸고 편리해서 고마웠어.


투자자-국가 소송제가 가카의 이익을 지켜준다. 가카가 망명을 가시든, 아니면 차명으로
공항을 관리하시든 인천국제공항은 가카의 사적 소유물이 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제1 국제공항이자 동아시아 물류항공의 허브로
발돋움하는 세계 1위의 공항에서 발생하는 모든 수익을 영원히 슈킹할 수 있는 기회다.
 전지적 가카시점에 따르면 가카에게 대한민국이
미국의 경제식민지가 되는 것따윈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고로 ISD는 가카가 싸워 지켜야 할 지갑이다.



몹시도 우울한 소설이었다. 이 잿빛 소설이 현실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나는, 소설을 써야 할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했으면 좋겠다. 이 모든 게 가카와 정부의 근거없는 FTA 사랑에 도무지 납득하지 못해 저지른 불충이니 말이다.



트위터 : @DDanziFieldD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