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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옛 초나라 지역, 회계군 소속 오(吳) 일대.


광대한 지역인데다가 중앙정부와 멀리 떨어져 있어 군수는 지방정부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회계 군수의 이름은 은통(殷通)이었다.


항량은 암흑가의 거물로서가 아니라 드러내놓고 성장했다. 얼핏 보면 미스테리하다. 첫째, 항씨 가문이 진시황의 강제이주정책의 대상이 되었다면 이주 지역이 초나라 땅일 수가 없다. 둘째는 역시 현상수배 문제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셋째, 천하통일이 완수되면서 제국에 반감을 가진 무장 세력에 대한 감시가 느슨해지거나 흐지부지됐다. 진시황은 호구가 아니다. 그리고 진 제국은 심지어 현재 베트남인들의 선조들을 정복하고 있었다. 초 남쪽의 거대한 야생지대를 공백으로 남겨둔 채긴 했지만, 초나라보다 훨씬 남쪽이다.


항량을 가만 둘 리가 없는 제국이다. 이미 왕족인 미씨 가문은 초나라 바깥에 분산배치 되었다. 서열 2위인 항씨가 결집해 성장하는데 그건 괜찮다? 말도 안 된다.


미스테리는 항씨 일족과 초나라 유민들의 관계로 푸는 수밖에 없다. 초나라 사람들에게 진나라 관료와 그 수하는 외부인이다. 항씨 가문은 ‘우리 편’이다. 항량과 주민들은 단합해 진시황을 대리해 왕처럼 군림하는 회계군수를 속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의 정황을 보면 그렇다.


항량과 초나라 유민들이 어느 정도로 대담했냐 하면, 항량은 아예 요역(役)에 전면적으로 나섰다. 요역은 지금 말로 부역이다. 장정들이 징집되어 국가 기반공사에 투입되는 것이다.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럴 때 현지의 유력자가 나서서 도와준다면 어떨까? 그 덕에 막힌 둑이 터지듯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되면? 이역만리 오지에 부임한 은통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 항량은 오 일대의 요역 문제를 처리해주는 지역의 ‘대장’이었다.


겉으로 보면 항량이 압제자의 부역자가 된 모양새다. 그러나 항량은 요역업무를 통해 강제노동에 동원된 젊은이들을 관리하며 그들의 군사적 재능을 파악해두고 있었다. 젊은이들 입장에서도, 이왕 하는 일이라면 존경하는 항연의 아들 밑에서 하는 게 낫다. 그러면서 항량은 비밀리에 준군사조직을 키워냈다.


항량이 한 또 한 가지 굵직한 일은 장례 일이었다. 항씨 가문은 광대한 오 일대를 책임지는 유일한 상조회사 혹은 상조조직이 되었다. 항량에게 상조는 지역에 대한 봉사면서 사업이었다. 장례는 죽은 자를 적절히 떠나보냄으로서 산 자가 부활하는 축제다. 명절은 일 년에 몇 번 없지만 노인들은 여기저기서 계속 죽는다. 산 자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룬다. 상갓집은 만남의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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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족의 전통 장례


장례는 일반인의 기준으로는 막대한 돈과 인력이 든다. 해 낼 수 있고, 또 해 내는 일이지만 누군가 그럴듯한 모양새로 도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다. 항량은 아버지의 명성과 요역을 통해 구축한 인력 네트워크를 통해 장례를 지원했다. 이것은 초나라 사람들끼리의 품앗이이기도 했다. 진시황에 의해 쑥대밭이 된 지역 커뮤니티가 재건되는 과정이었다.


이 정점에 항씨 가문이 있다. 요역과 장례는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면서, 반란의 기가 막힌 토대였다. 항량은 요역을 통해 젊은이들을 관리한 것과 마찬가지로, 중장년층에게 돌아가면서 장례를 주관시켜 그들의 능력을 심사했다. 사마천은 말한다. 이때 오(吳)의 인재 중에 항량의 밑에서 나오지 않은 이가 없다고. 회계 군수 은통의 신임을 얻으며 이러한 시스템을 구축한 항량의 아이디어와 실행력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의 영향력은 오 일대를 벗어나 회계군 전체로 뻗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흔히 민-관-군이라는 말을 쓴다. 당시의 중국에서 관과 군은 거의 하나였으므로, 우리는 민-관이라고 하자. 회계군은 두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관의 은통, 민의 항량. 은통은 회계군이야말로 민과 관이 협동하는 모범적인 군이라고 착각했다. 이러한 그림을 이뤄낸 자신의 정치력을 과대평가한 건 물론이다. 그러면서 항량이 자기 사람이라고 시원하게 착각했다.




2


이런 조건 속에서 항량은 항우를 아들처럼 키우기 시작한다.


항량은 항우에게 글과 검술을 가르쳤다. 항우는 학습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그런 만큼 빨리 지루해했다. 글공부는 하다 말았다. 항량이 혼을 냈지만 항우는 당당했다.


"글이라는 것은 자기 이름만 쓸 줄 알면 그만 아닙니까?"


이런 얘기를 아버지 대신 자신을 키우는 숙부이자 양아버지에게 한 것이다. 검술도 마찬가지였다. 항우는 검술의 기본과 실전을 금방 깨우쳤다. 그러자 검술의 깊은 교리까지 깨우치는 데는 흥미가 없어졌다. 항우는 또 이렇게 말했다.


"검술이란 것은 한 사람을 베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이상하다. 앞으로 항우는 한 사람은커녕 자신에게 달려드는 수십, 수백 명의 목을 떨어뜨린다. 따라서 여기서 항우의 ‘한 사람’은 ‘당장 눈앞의 적’이라는, 실적적인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항씨 가문은 검술의 복잡한 초식과 품새를 갖고 있었다. 항씨 남자들은 가문에서 내려오는 검술의 초식을 결합해 검무(칼춤)을 출 수 있을 정도였다. 검술도 결국엔 몸을 쓰는 일이다. 깊이 연구하면 공연예술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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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굴된 초나라의 검


항우는 예술의 경지가 쓸데없다고 여겼다. 만약 완벽하게 통제된 평지의 시합장(연무대)에서 동일한 조건의 무사 둘이 대결한다면, 검에 대한 훈련과 연구가 깊은 쪽이 유리할 것이다. 실전은 다르다. 모래바람이 불거나 발이 푹푹 빠지는 늪지에서, 혹은 산비탈과 같은 경사에서 적과 아군이 뒤섞여 아수라장을 이루는 곳이 전장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우연과 변칙이 난무한다. 체급이 높고 빠르고 강하며 대담한데다가, 운동신경에 포함되는 ‘싸움 센스’까지 타고난 항우에게는 검술의 깊은 교리가 무의미해 보일 수 있다.


항우는 항량이 구축한 준군사조직 시스템에서 성장했다. 항씨가문의 숙원, 즉 제국에 대한 복수와 초나라 재건이 당연한 목표인 환경이다. 항우에게 검술은 처음부터 수련이나 철학이 아닌 실용의 영역이었다. 항우가 상대를 이기는 선에서 만족한 것은 이해할 여지가 있다.


항량은 마지막으로 항우에게 병법을 가르치기로 했다. 항우는 병법의 기본 개념 역시 빠른 속도로 흡수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항우는 자신의 머릿속에 입력된 병법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판단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공부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항량은 항우를 많이 혼낸 모양이지만, 혼난다고 숙연해질 성격이 아니었다.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이런 항우에 대해 퉁명스럽게 ‘학습장애가 있었다’거나 ‘집중력장애자다’라고 말하곤 한다. 항우의 재능이 평범했다면 학습장애가 맞다. 그러나 기본과 실전을 너무 빨리 성취한 성장기 청소년이 깊은 원리에 무관심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항우의 비범함은 기괴할 정도였다.


흔히 ‘역발산 기개세(힘은 산을 들어 올리고 혈기는 세상을 덮는다)’라는 항우 본인의 말 때문에 그의 힘이 과장되곤 한다. 집채만 한 돌을 들어 올렸다거나, 무너지는 가옥을 힘으로 받쳐 다시 세웠다거나.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소설이나 구전의 과장이다.


역사에 분명히 기록된 항우의 힘은 이렇다. 그는 10대 청소년 시절에 정(鼎)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정이란 청동으로 주조된 세 발 달린 솥을 말한다. 솥이니 당연히 음식을 삶는데 쓰인다. 그런데 그냥 음식이 아니다. 제사용 음식이다. 따라서 정은 제사의 중심에 놓이는 신성한 물건이다. 이런 물건은 왕이나 제후, 즉 공적인 제사를 받들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만 소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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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의 정. 표면의 문양은 포악한 성질을 지닌 상상의 동물 도철(饕餮)의 얼굴이다. 

귀신을 쫓기 위한 목적으로, 정 장식에 특히 많이 나타난다.


항우의 성장기 주변에 정이 있었다. 이는 당연히 항씨 가문 소유이자 항량이 사용하는 정이다. 비록 비공식적이지만, 회계군의 민간에서 항량이 영도자의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물건은, 당연한 말이지만 무겁다. 춘추시대 주나라 천자가 썼던 정이 800kg이 넘었다고 하는데, 당연히 공식적으로는 중원에서 가장 무거운 정이었다. 제후들이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 썼던 정은 그보다 무게가 적다. 항우가 들어 올렸던 정은 어땠을까? 기본적인 역할을 하려면 100kg은 훌쩍 넘었을 것이다. 항우는 이 물건을 바닥에서부터 끌어올려 머리 위로 팔을 펴고 들어 올리는 것이 가능했다. 솥의 생김새를 보면 알겠지만 아무리 천하장사라도 허리힘만으로 들어 올릴 수는 없다. 타고난 힘 뿐 아니라 신체 비율, 발란스, 순발력이 모두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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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드는 항우

 

 

항우는 8척까지 성장했다. 진나라의 척은 23cm에서 24cm 사이다. 그러므로 항우의 키는 180cm대 후반이다. 항우의 재능은 신체능력뿐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사마천은 항우의 성장기를 이렇게 기록한다.


“재기과인(才氣過人)”




3


‘재기과인’을 보통은 “재기가 넘쳤다”고 번역한다. 원래의 뜻에 한참 부족하다. 요새 재기는 뭔가 발랄한 느낌인데다가, 모든 언어가 그렇듯이 한자어도 지난 2200년 동안 표현의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재기가 넘친다는 식의 표현은 약간의 재능만 있어도 갖다 붙인다. 다른 버전에서는 ‘재기(才氣)’를 '재주와 기량'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나는 이런 식의 역(譯)이 안일하다고 생각한다. 才는 재주라기보다는 현대 한자어의 재능에 가깝다. 더 정확한 뉘앙스로는 ‘타고난 가능성’ 정도일 것이다. 그냥 재능이 아니다. 기(氣)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가만히 있어도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다. 저 문장은 항우의 재능이 다른 이들의 감각을 엄습하고 압도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다음 두 글자 때문에 그렇다.


“과인(過人)”


인간의 수준을 넘어섰다는 뜻이다. 담담하지만 섬뜩한 두 글자다. 사마천은 이 문장에 “오중(吳中 오 일대)의 자제(子第)들 중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는 설명을 곁들여 놓는다. 비범(非凡 평범을 벗어나 있음)도 아니고 천재(天才 하늘이 주어진 재능을 소유. 즉 요즘 뜻으로는 유전적 훌륭함)도 아니다. 이런 표현은 모두 뛰어남을 가리키지만 그래도 인간의 영역 안에 있다. 사마천은 그의 신체적, 정신적 강력함을 나타내는 방법을 찾다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다’는 무서운 표현을 택했다.


실증과 객관을 추구하는 사마천이 저리 표현했을 정도면 오 일대의 젊은이들-항우와 함께 성장한 사내들-이 그를 어찌 보았을 지 짐작이 된다. 해석할 수 없을 정도의 능력 앞에서 인간은 두려워진다. 초나라 젊은이들이 무슨 영장류나 원시인도 아니고, 단순히 힘이 세다고 경외심을 느끼는 게 말이 되는가. 항우는 신체능력 외에도 정신력, 상황에 대한 본능적 판단력과 이해력이 귀물(鬼物)같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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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초나라의 검


만약 여러분의 성장기가 항우와 같았다고 하자. 그렇다면 여러분이 겸손하거나 조심스러운 청소년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항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장량이 고용한 창해역사의 철퇴를 피한 진시황이 동남쪽으로 내려와 회계군을 순행할 때였다. 진시황의 행차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 중에 항량도 있었다. 그는 어린 항우를 데리고 있었다.


제국 황제의 위엄을 가까이서 본 항우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내가 언젠가 저 자리를 차지하고 말겠다!”


다행히 이 말을 들은 진나라 병사들은 없었다. 항량은 깜짝 놀라 항우의 입을 틀어막으며 혼을 냈다.


“방금 네가 가문을 몰살시킬 뻔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대견해했다. 역시 항우는 보통 녀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반란을 준비하는 남자의 관점에서 야심은 성격이 아니라 능력이다. 아마도 이 시점부터 항량은 친아들이 아닌 항우를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항우는 초나라 최후의 불꽃 항연의 장손이었다. 항우는 할아버지의 혈통적 배경, 항량의 군사적 배경,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모두 갖고 있었다.




4


한편 첫 회의 주인공인 장량은 신분세탁에 완전히 성공했다. 그는 이미 자방(子房)이라는 이름자를 만들어 자신의 본명까지도 지워버렸다. 이때만 해도 ‘장자방’이 책사의 대명사가 될 줄은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장량은 원래 책사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의 목표는 일차적으로는 제국에 대한 복수였다. 그 다음은 조국인 한나라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의 문제는 죄책감이었다.


장량이 계획한 진시황 암살 작전 실패의 희생자는 창해역사가 전부가 아니었다. 진시황은 위기를 넘긴 후 중원 전역의 협객들의 씨를 말렸다. 협객들이 아무리 혈기가 넘치고 검을 좀 다룬다 한들 제국의 시스템에 대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체제 반항적이고 혈기 넘치는 협객은 눈에 잘 띈다.


반면 지적이면서 무예에 아무 소양이 없는 장량은 변장과 신분세탁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장량은 무예실력도 없고 몸도 허약하다. 반면 막대한 가산을 처분해 돈은 많다. 산적이나 수적(水賊 민물 해적)을 한다는 건 체력도 안 따라줄 뿐 아니라 자살행위다. 농토와 자연에서 발생한 생산물을 소비하는 도시에 있어야 한다. 그가 택한 도시는 하비(下)였다. 거기서 그는 자신 때문에 박멸되다시피 한 협객들 중 살아남은 이들의 신분을 세탁해 숨겨주고 먹여 살렸다.


항씨 가문 결집에서 낙오한 항우의 친삼촌인 항백이 하비로 간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도 무협의 세계에 있었고 장량의 존재는 강호에 전해졌으리라 본다. 장량을 만나는 데 성공한 항백은 그때부터 갑자기 안전해진다. 장량의 거처는 자연스레 협객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협객들이 모여 있으니 군사력은 됐다. 다들 ‘한 가닥 하는’ 남자들이다. 이들을 제대로 이끌 수만 있다면 상당한 군사력이 되리라. 장량은 병법을 연구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시기 장량에게는 독자 여러분과 내가 인정하기는커녕 코웃음을 칠 사건이 발생한다. 이른바 '황석공(黃石公 누런 돌 어르신)고사'다.




5


장량은 이미 많은 돈을 썼지만 아직 '현금부자'다. 시간도 많다. 그는 교외에 산책을 나갔다. 몸이 약했던 그에게는 산책 정도가 야외활동의 최대치였을 것이다.


지난 글에서도 강조했지만 당시 중국 대륙은 축축했다. 물을 다루는 기술도 훗날처럼 정교하지 못했다. 그래서 교외에는 주민들이 진흙을 이겨 만든 다리로 질척한 물가를 피했다. 장량도 그날 진흙 다리 위를 건너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현실적이다.


장량은 다리 위에서 삼베옷을 입은 노인과 마주쳤다. 노인은 장량을 지나치다가 일부러 신발을 벗어 다리 아래로 떨어뜨리고는 장량에게 말했다.


"이봐 젊은이, 내 신발 좀 주워 줘"


어처구니가 없었던 장량은 노인을 패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노인의 백발이 성성한 것을 보고 예의상 골탕을 먹어줄 생각 반, 어쩌면 노인에게 비범한 뭔가가 있을 지도 모르니 시간이나 때우려는 생각 반으로 다리 아래로 내려가 신발을 주워주었다. 그런데 노인은,


"신겨라!"


라며 발을 내미는 게 아닌가? 장량은 이왕 품을 판 거, 끝까지 예의를 지켜 주고 칭찬이나 듣자는 생각을 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춘 굴욕적인 자세로 신발을 신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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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공 고사를 표현한 그림. 진흙 다리가 석재 다리로 잘못 표현되어 있다.


노인은 기분이 좋은지 웃더니 가던 길을 갔다. 뭐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이게 뭔가. 황당한 장량이 멍하니 사라져가는 노인을 바라보는데, 노인은 몸을 돌려 장량에게 돌아왔다. 이때 장량은 무슨 짓을 또 당하나 싶어 깜짝 놀랐다. 노인의 말은 예상 외였다.


"5일 뒤 새벽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장량은 이미 한 번 예를 갖추기도 했고 역시 노인에게 뭔가 있나 싶어서 무릎을 꿇고 알겠다고 했다. 장량은 시간이 많다. 여기까지 당했으면 못 만날 이유도 없다. 그는 시간약속을 지켰지만 노인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연배가 높은 사람과 약속을 하고서 지키지 않다니, 뭐 하는 녀석이냐?"


이렇게 말하고 뒤돌아 몇 걸음을 가다가 특별히 기회를 주겠다는 식으로,


"5일 뒤 새벽에 다시 만나지."


하고 사라졌다. 장량은 새벽 첫 닭이 울기도 전에 다리로 뛰어갔다. 이번에도 노인은 먼저 와 있었다. 또 쫓겨났다. 약속은 역시 5일 뒤 새벽으로 잡혔다.


장량은 이번엔 안 진다는 심산으로 아예 전날 밤에 도착해 노인을 기다렸다. 장량보다 늦게 나타난 노인은 만족스러워 했다.


"당연히 이렇게 행동해야지."


그는 정체불명의 책 한 권을 장량에게 건네주며 호언장담했다.


"이 책을 읽고 또 읽어 통달하면 왕이 될 자의 스승이 될 수 있네. 10년이 지나면 큰 공을 세운 인물이 되어 있을 것이네. 13년 뒤 제수 북쪽 곡성산 아래 누런 돌(黃石) 하나를 발견하면 그게 바로 나인 줄 알게."


노인은 홀연히 사라졌다. 당시의 책은 죽간이다. 펴기 전에는 둥글게 말려 있다. 요즘처럼 사각형 표지에 제목이 쓰여 있는 게 아니다. 내용을 읽어 봐야 무슨 책인 줄 알 수 있다. 장량은 아침까지 기다려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무려 <육도삼략>의 저자로 알려진 전설상의 인물 '강태공'이 쓴 <태공병법(太公兵法)>이 아닌가? 장량은 신비한 노인을 '누런 돌 어르신'이란 뜻으로 '황석공'이라 부르기로 했다.


장량이 외운 이후, 태공병법은 사라졌다.




6


사마천은 별 신기한 일도 다 있다는 듯이 이 이야기를 기록했다. 정설로 굳어진 이야기니만큼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아무래도 불편한 뉘앙스다. 고대인인 사마천도 그랬을진대, 지금에 와서 이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떻게 된 걸까.


장량이 지략가로 변모한 일을 설명하기 위해 꾸며진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지금이야 장자방이라고 하면 지략가의 대명사다. 그러나 장량은 애초에 군사작전과는 상관없는 인물이었다. 대대로 재상 집단의 장손으로 태어난 장량이 성장기에 받은 교육은 왕을 보필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술이었다. 병법은 무장 가문에서나 배우는 과목이다. 나라가 망한 다음엔 진시황 암살에 몰두하다가 실패했다. 협객들을 도우며 '아지트 본부장'이 되고 나서야 반란의 지휘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가 병법을 연구할 시간은 불과 몇 년밖에 없었다. 스승도 없었다.


훗날 그의 맞수가 되는 항우의 모사 '범증'은 70대 노인이었다. 공부할 시간이 많았다. 당시 사람들에게 장량이 젊은 나이에 배경도 스승도 없이 군사와 모략에 정통한 인물이 된 사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가 워낙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라는 것을 아는 우리야, 독학으로 병법에 달통했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당대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


당시에 통용되던 병법서인 <손자병법>, <손빈병법>(손빈병법은 전설상의 책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1970년대에 발굴되었다.), <육도>등은 장량만 얻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물론 같은 책을 읽어도 장량이 읽는다면 결과가 다르지만 사람들이 그걸 곧이곧대로 이해해줄까. 황석공 고사는 이 미스테리를 기연(奇緣)으로 간단히 설명한다. 그럼 이해가 된 셈 치고 넘어갈 수 있다.


나는 심지어 황석공 이야기를 꾸며낸 장본인이 장량이라고 믿는다. 장량은 '대체 어디서 그 수준의 병법과 지략을 배웠냐'는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다.


"글쎄요? 그냥 독학을 하다 보니..."


혹은,


"제가 워낙 천재적이어서요."


겸손한 장량의 성격과 맞지 않다. 설사 솔직히 이야기한다 해도 사람들이 믿어줄지? 장량은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놓고 인적이 없는 시간인 새벽에 만났다고 하지 않았을까? 황석공은 물론이고 <태공병법>도 장량 외에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태공병법>의 태공은 강태공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냥 어르신이라는 뜻도 있다. 이 경우 그냥 '노인이 준 병법'이다. 무엇보다 장량은 왜 이다지도 뛰어난 책을 후대에 전하지 않았단 말인가.


곡성산 기슭이라는 것도 애매하다. 산기슭이라는 게 어디 특정할 수 있는 위치던가? 누런빛이 도는 자연석이야 어디서든 구하면 그만이고, 못 구해도 있다고 우기면 된다. 모든 사건의 증인은 단 한 명, 장량밖에 없다. 당사자가 그렇다는데 누가 뭐랄 것인가. 장량은 병법을 강론할 때 강태공과 황석공을 들이대면서 자신에게 없는 권위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황석공은 장량에게 왕이 될 자의 스승이 될 거라 했다. 정작 황석공을 만날 때 장량은 책사가 될 생각이 없었다. 나중에 유방의 모사가 되고 나서 자신의 경력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다. 장량 본인이 창작자로 가장 유력하다.


장량이 병법의 실력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장량의 협객 생활을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는 협객들에게 '돈 많은 좋은 친구'에 불과했다. 누구도 그를 수장으로 모시려고 하지 않았다. 장량은 병치레도 많았고 무예도 없었다. 당시의 호걸들이 카리스마를 느낄 타입의 인물이 못 됐다. 더욱이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외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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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장량을 표현한 그림


사마천은 <사기>를 쓰기 위해 취재를 다니며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장량의 생전 초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부(婦 귀부인)나 소녀처럼 아름다운' 그의 외모 때문이다. 호걸의 모습을 기대했던 사마천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말을 되새기며 자신의 선입견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당시는 고대다. 중성적이거나 여성적인 남성미란 존재하지 않았다. 야성이 풀풀 넘치는 협객들은 예쁜 청년에게 충성을 바칠 마음이 없었다.


수 년 간의 시도 끝에 장량은 자신이 지휘관이 될 재목이 못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7


협객들이 칼을 숨기고 몸을 웅크리고 있던 시기. 우리의 주인공은 별일 없이 살고 있었다. 한 번인가, 패현의 큰형님 왕릉의 알선으로 ‘옹치(雍齒)’라는 패현의 지역 유지 밑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지역 유지란 단순히 동네 부자가 아니다. 지역 커뮤니티가 와해된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부자는 의외로 사랑받았다.


전통적인 지역 커뮤니티에서 부자는 고용을 창출하고 명절이나 장례 등 행사의 제반 비용을 부담하는 역할을 한다. 가뭄이 났을 때 재산을 푸는 건 물론이다. 혼자 일해서 부자가 되는 사람은 없다. 지역민들의 노동이 자신의 재산에 투입된다. 부자의 선행은 성품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 근대 이전에 '자기가 번 돈 자기가 쓰는데 누가 뭐라고 하나'하는 자본주의의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인색한 부자는 경멸의 대상이었다.


서양의 전통에서 나온 타로카드에는 <10 of wands(혹은 rods)>라는 카드가 있다. 다양한 상황에서의 부담을 나타낸 카드인데, 요즘 우리에게는 생경하게도 '뜻하지 않게 생긴 너무 많은 재산'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전통사회에서 많은 재산은 곧 많은 의무다. 그만큼 지역 주민에게 부자는 괜찮은 존재다.


옹치는 특별히 선량한 부자도 구두쇠도 아닌 무난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유방은 옹치가 맡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모양이다. 옹치는 유방을 싫어했다. 물론 무책임한 만큼 피해를 줬으면 줬지 받았을 리 없는 유방은 옹치를 미워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사정이 달라지지만)


아무튼 조용한 패현에 경사가 생겼다.


다른 지역의 부자 일족이 패현에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현재의 산동성에 살던 여(呂)씨 가문의 수장 여문(文)은 원래 패현의 현령과 친분이 있었다. 제국의 엘리트 관료와 부자의 친분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무튼 여문의 집안은 무슨 실수를 했는지 고향에서 원수를 졌다. 그래서 보복을 피해 그와 가족들은 패현의 현령 관사에 머물렀다.(권력 없는 부자라는 이유로 사학자들은 여문을 상인이라고 추정한다. 실제로 여(呂)씨는 상인 가문의 흔한 성씨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진시황의 생물학적 아버지라고 알려진 여불위가 있다.)


여문은 패현을 관찰해보고는 이사 오기에 적합한 곳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아예 가문째 이주하기로 작정했다. 돈으로도 해결이 안 될 정도라면 아무래도 권력자와 척을 졌을 가능성이 높다. 패현 주민 입장에서는 흐뭇하게도 권력자 대신 부자를 이웃으로 맞게 됐다. 당연히 잔치가 열렸다.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닌다는 사내들은 모두 몰려들었다.


회계출납업무를 맡은 이는 소하였다. 그는 잔치가 난장판이 되기 전에 하례금으로 교통정리를 했다. 현금과 선물을 집계해 천 전(錢)이 넘는 사람은 현령과 여문 등 VIP와 가까운 상석에, 그 이하인 사람들은 바닥에 앉게 했다.


이제 잔치가 시작되려는데 문 앞에 그가 나타났다. 허세로는 지지 않는 남자, 바로 유방이었다. 유방은 문 앞에서 약간의 제지를 당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하례금 일만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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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제국 시대 화폐의 기본 단위인 반량전(半兩錢). 이게 10000개 있어야 일만 전이다.


거액이다. 깜짝 놀란 여문은 어떤 대단한 인물이 왕림했나 싶어 뛰어나가 직접 대문을 열었다. 죽피관을 쓴 유방이 당당하게 들어와 자신의 이름과 '1만전'이 기입된 이름첩(휴대용 방명록)을 내밀었다. 고대 중국은 사적 계약에 의한 신용을 목숨처럼 여기는 사회다. 말하거나 쓴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래서 은혜도 원수도 돈과 마찬가지로 '갚는다'고 한다. 여문은 이름첩을 보자 한 번 더 놀랐다.


동네잔치일 뿐인데 현금 1만전이라니! 하지만 독자제위께서 예상하듯 유방은, 문자 그대로 단 한 푼도 없었다. ("不持一錢") 유방은 상석 중의 상석에 걸터앉아 잔치의 주인인 양 거드름을 피우며 술과 음식을 마음껏 즐기기 시작했다.


소하처럼 꼼꼼한 성격의 인간은 작업의 완성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숫자를 다룰 때는 에누리 없이 깔끔하게 일을 마치는 데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유방은 소하의 돈 계산을 망가뜨린 데다가 그가 신경 써서 만든 규칙을 엎어버렸다. 그러잖아도 유방 때문에 여러 번 속을 썩였던 소하는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여문에게 말했다.


"저 유계란 작자는 원래 큰소리만 자주 칠 줄 알지(固多大言) 제대로 해 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少成事)!"


다시 말하지만 중국은 '자가(自家)신용사회'다. 소하의 말은 대단히 심각한 모욕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대목에서 유방의 매력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소하가 그러거나 말거나 껄껄 웃어넘겼다.


친구야, 화를 내려면 내라.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즐길 테니.


이런 태도다. 유방은 욕설을 즐겨 뱉었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욕을 먹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방향이 엉뚱하지만 공정하긴 하다. 그는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관대했다. 그래서 그는 깡패기질만 감수하면 대하기 편한 사람이었다. 소하가 마음껏 분통을 터뜨린 데엔 유방의 편리한 성격도 한 몫 했으리라.




8


묘한 기류를 느낀 여문은 화를 내기는커녕 유방을 유심히 관찰한다. 죽피관. 저딴 물건은 세상에 없다. 엉뚱한 놈이다. 정성껏 다듬은 수염. 노는 놈이다. 유방이 잔치를 망치고 있는데도 장정들이 그를 끌어내리지 않는다. 아니 끌려가기는커녕 왕 노릇을 한다. 그렇다면 이놈의 정체가 뭔지 답이 나온다.


이 동네 주먹이다.


여문은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유방이 잔치를 즐기도록 놔둔다. 그리고 잔치가 끝날 때쯤 유방을 따로 불러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자기 집안에 장가를 들라는 것이었다. 여문에게는 혼기를 넘긴 딸자식이 둘이나 있었다. 그의 자식은 다음과 같다. 장남 여택, 차남 여석지, 삼녀 여장후. 장후 밑의 두 딸이 미혼이었다. 나이순대로 ‘여치’와 ‘여수’였다.


여문이 유방에게 혼사를 제안하는 광경은 설화나 마찬가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여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려서부터 남의 관상을 보는 걸 좋아했는데, 당신처럼 좋은 관상을 본 적이 없소. 그러니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셔도 될 것 같소. 마침 나에게 딸자식이 있는데 데려가지 그러시오? 뭣하면 집안 청소나 하는 첩으로 부리시오."


유방의 뜬금없는 결혼과 입지전적인 성공담을 설명하기엔 좋은 말이다. 하지만 관상이라니, 그런 걸로 결혼이 성사될 리가. 여문이 혼담을 추진하기 위해 저런 말을 했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진심일 수는 없다. 첩으로 들이라는 말도 진심이 아니라 수사에 불과하다. 유방이 미혼이라는 사실은 술자리 참석자에게 한 번 묻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여문은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재산과 가문의 미래를 통째로 패현에 옮겼다.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고 굴리려면 현지 주민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토박이로 잔뼈가 굵은 논두렁 조폭과 혼사를 맺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다. 주먹 좀 쓰는 불한당의 장인이 된다면 비록 외부인일지언정 감히 누가 그를 해코지하러 기웃거릴 수 있겠는가?


이때 유방의 나이, 45세.


무일푼의 백수.


반면 여문의 딸 여치(呂雉)는 예쁘고 영리했다. 치(雉)는 암꿩-까투리라는 뜻이다. 예쁜 이름이다. 여문은 자신이 지어준 이름마냥 딸을 아꼈다. 그 스스로로 여치가 보통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대 중국이다. 그에게도 딸은 가문을 위해 쓰고 버릴 수 있는 카드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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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 표현된 여치


역사는 여치를 절세미녀로 기록하지 않는다. 별다른 과장 없이, 그러나 분명히 '예뻤다'고 한다. 그래도 부잣집 따님 여치는 패현의 시골에서는 주목받는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이쯤 되면 한 번쯤 사양할 법도 한데, 유방은 흔쾌히 결혼을 수락했다.


하긴, 거절할 인간이 아니다.


여치는 방년 28세. 유방과는 15살 차이였다. 당시 기준으로는 거의 딸 뻘이다. 여치도 혼기를 놓치기는 했다. 사실 그녀에게도 결혼의 기회는 있었다. 패현의 현령이 젊은 시절에 여치에게 반해 청혼한 적이 있었다. 그때 여문은 함부로 시집보내기에는 아까운 아이라며 거절했다.


유방이 돌아간 후, 여문의 부인은 '뚜껑이 열렸다.'


"당신은 매일 우리 딸이 보통 아이가 아니라고 하면서 귀인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했습니다. 패현 현령이 청혼했을 때도 거절했으면서, 이제 와 '유계 같은 자'에게 딸애를 주겠다는 이게 말이나 됩니까?"


한국어 번역에 들어갈 틈이 없어서 빠졌지만, 부인은 '망(妄)'자를 썼다. 어그러지다, 헛되다는 뜻이다. 기껏 키운 딸 신세 망치게 됐다는 한탄이 느껴진다. 여치의 어머니야 딸을 생각하는 마음이 당연하다. 여문은 여자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며 아내의 말을 무시했다.


여치는 왜 혼기를 놓쳤을까? 집안 사정 때문이었으리라. 아버지 여문이 원수를 지고 집안이 피신을 가고 이사를 결정했다. 이후 가문의 모든 재산과 기반을 고향과 동떨어진 곳에 옮겼다. 최소한 몇 년이 걸리는 일이다. 여치는 패현 현령을 포함한 괜찮은 남자들의 청혼을 거절했다. 이후 집안에 우환이 생겨 혼사를 추진할 상황이 안 됐다. 미혼으로 28세가 된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미 패현에 자리를 잡기로 한 마당에 중앙정부 임명직인 현령보다는 토박이 주먹꾼이 가문의 미래엔 더 낫다. 현령은 언제 어디로 승진하거나 좌천할지 모른다.


이 결혼이 말이 되는 이유가 또 있다. 유방은 부역과 병역에 동원되는 진나라의 징집 연령을 넘겼다. 여치가 과부가 될 가능성이 확 준다. 유방에게는 애인 '조씨'와 아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미혼이다. 유방의 나이에 미혼인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 어설픈 남자에게 첩으로 보내느니 유방처럼 특이한 인간에게 베팅을 하는 편이 낫다.


이렇게 유방은 15세 연하의 어여쁜 처녀를 덜컥 차지하게 된다. 행운의 주인공은 또 있었다.




9


패현에는 사내라기보다는 수컷이라는 말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번쾌(樊噲).' 독신이었고 가난했으며 직업도 비천했다. 그는 일자무식의 개백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비범했다. 번쾌는 무시무시한 외모와 장대한 풍채,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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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에 그려진 번쾌의 초상


역사는 그를 왜 도축업자가 아니라 개백정으로 기록할까? 어차피 도축업을 하면 한 종류의 고기만 다루지 않는다. 백정이면 백정이지, 개백정으로 못을 박은 이유는 뭘까? 번쾌의 직업명은 그의 가난을 알려준다.


중원은 소의 힘으로 농사를 짓는 우경법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우경 하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황소를 떠올린다. 하지만 황소의 힘으로는 고대 중국의 습하고 끈끈한 토질을 갈아엎을 수 없다. 우경의 최초 희생자는 덩치와 힘이 월등한 물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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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의 모양과 몸매로 물소임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중국의 논밭에는 물소가 남아있다. 라오스의 농민들은 정글을 개간한 습한 계단식 논에서 농사를 짓는데 역시나 물소를 사용한다. 라오스에서 황소는 식용이다. 아무튼 소는 귀하고 크다. 사고 도축하고 파는데 자본이 필요하다. 시설도 문제다. 소를 취급하려면 일정한 크기 이상의 푸줏간이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소 도축용 도(刀)도 크기와 종류별로 갖춰야 하는데 모두 값비싼 청동 제품이다. 고기를 부위별로 나눠 저장하는 공간과 유통망도 갖춰야 한다. 이러려면 아랫사람도 필요하다.


돼지는 소보다 작고 흔하지만 역시 돈이 든다. 돼지고기는 금방 상한다. 명절이나 잔치에서는 모두가 돼지 한 마리를 잡아 나눠먹으면 되지만 평상시엔 저장과 유통의 단계를 거친다. 많은 양의 소금이 필요하다. 돼지고기를 특별히 짜게 먹지 않는 것은 한국 식문화의 특징이다. 베이컨, 살라미, 소지지 등 세계의 전통적인 돼지고기 유통식품은 몹시 짜다. 중국에도 전통 소세지가 있는데 마찬가지다. 내륙인 패현에서 소금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으려면 자본이 있어야 한다.


2200년 전 중국에서 도축업자는 노동자라기보다는 사업가에 해당한다. 결혼할 돈도 없었던 번쾌는 개백정일 수밖에 없었다. 고대 중국 신화에서 인간의 멋진 친구로 등장하는 개는 농경문명이 자리 잡으면서 기원전에 이미 싸고 질 좋은 육류의 위치로 떨어졌다. 개는 한 마리를 잡으면 그날 소비가 된다. 특별한 시설과 자본이 필요 없다. 번쾌는 소와 돼지도 도축했지만 이 경우는 '자기 사업'이 아니다. 요즘으로 치면 출장 노동과 구멍가게 수준의 자영업이 합쳐진 직업이다.


그래도 고기는 고기다.


농경사회에서 곡식이 현금이라면 고기는 복권이다. 문화권마다 도축법이 다르다. 그래서 같은 동물도 도축을 끝내고 나면 판이하게 달라진다. 독일에는 존재하지 않는 돼지고기 부위가 한국에는 있다. 이 경우 아예 번역이 안 된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부위, 즉 ‘부속고기’ 혹은 ‘뒷고기’가 발생한다(육고기는 물론이고 참치에도 부속고기가 있다. 남태평양의 섬나라 주민들은 일본식 해체법으로 팔고 남은 참지의 부속고기를 즐긴다.). 부속고기는 현지인들의 귀중한 단백질원이다. 부속고기 유통은 인류의 가장 오래 된 지하경제이며, 그렇다고 딱히 불법도 아닌 공공연한 행위였다.


번쾌는 도축을 통해 손에 떨어진 고기와 현금을 패현의 사내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우직하고 직선적인 번쾌는 계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작 자신은 가난하면서도 친구와 후배들을 챙기는 괴력의 거인. 그러면서 나이 든 사람에게는 예의가 바르기까지 했다. 번쾌는 그야말로 남자 중의 남자였다. 패현의 사내들은 그에게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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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 표현된 번쾌

 

 

여문은 자신의 잔치에 번쾌가 도축 일을 하러 와 분주히 땀을 흘리는 모습을 관찰했다. 사람들이 대하는 걸 보면 그가 어느 정도의 위치인지 알 수 있다. 여문도 사람을 부려 본 부자라면 눈치가 나쁠 리가 없다. 어차피 예쁘고 영리한 큰딸을 유방에게 주기로 한 마당이다. 여문은 내친 김에 여치의 여동생 '여수(呂須)'를 번쾌에게 시집보내 패현에 완전히 스며들기로 했다. 순박한 번쾌는 수락이고 사양이고 할 것 없이 얼떨결에 장가를 들었다.


시골에 등장한 예쁜 부잣집 처녀 둘을 건달과 개백정이 차지했다. 원래도 막역한 사이였던 두 사람은 동서지간이 되었다.




10


<사기>에는 여문의 아내만 결혼에 반대한 것처럼 나온다. 다른 기록에는 집안 여자'들'이라고 한다. 여치와 여수 본인도 반항했다는 얘기다. 이딴 결혼이 좋았을 리가 없다. 그럼 정작 결혼생활은 어땠을까?


먼저 미녀와 야수인 번쾌 부부. 두 사람은 평생 금슬이 좋았다. 번쾌는 처음부터 새신부에게 반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아내 여수에게 순하고 진실된 남편이었다. 번쾌라는 사람의 결을 알게 되자 짐승 같은 외모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방은 아내뿐 아니라 집과 논밭까지 혼수로 얻었다. 그는 인생에 주어진 선물을 만끽했다. 여치는 3년 동안 딸과 아들을 연달아 낳는다. 모유를 수유하는 기간까지 고려하면 유방이 밤일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0대의 미녀를 집에 두고 난 후부터 유방은 매일 시간을 죽이던 사수정(亭)을 방치해버렸다.


여치는 천성이 겁 없는 여걸이었다. 그녀의 부모도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할 정도였지만 건달 유방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유방은 여치를 가차 없이 휘어잡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치는 유방을 깊이 사랑했다. 양성평등의 관점에서 올바른 해석은 아니겠지만, 여치는 자신의 드센 성격을 아랑곳하지 않는 유방에게 매력을 느낀 것 같다.


제국의 엘리트 관료에게 청혼을 받았을 정도면 기웃거리는 남자가 많았을 것이다. 여치는 구혼자들이 어떤 남자인지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모두 예의바르고 절제된 남자들이었으리라. 노처녀였던 자신을 소녀처럼 다루는 유방은 그들과 백만 광년 떨어진 인물이었다. 여치는 배운 여자다. 대화를 해 보면 남자의 지적 수준을 알아채게 마련이다. 유방은 무식했지만 머리는 좋았다. 어차피 결혼은 했고 물릴 수도 없다. 유방의 대책 없는 낙천주의에 감염당해주지 못할 이유는 없다.


유방은 자기 논밭이 생겼지만 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싱싱한 노동력, 바로 아내 여치가 있지 않은가? 그는 일관된 사람이다. 유방은 곱게 자란 아내가 갓난아이를 업고 혼자 농사를 지을 때만큼은 칼같이 집을 비웠다.




11


항우와 유방, 미래의 두 영웅이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동안 ‘최초의 중국’은 뿌리부터 썩어 들어갔다. 진시황은 영정이 스스로 진 제국의 첫 번째 황제라는 뜻으로 지은 명칭이다. 그 다음엔 이세황제, 다음엔 삼세황제, 사세황제... 이렇게 천세 만세까지 이어지리라 그는 믿었고, 바랐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 제국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제국은 없다. 제국은 시간을 두고 팽창해야 한다. 완벽한 제국은 없다. 오류를 수정해나가야 한다. 이것도 몇 세대 이상의 시간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진시황의 야심은 끝이 없었다. 동아시아 유목문명의 적장자인 흉노를 서북쪽으로 몰아내고 만리장성을 짓고 있었지만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진시황은 중원에서 현재의 내몽고를 향해 고속으로 통하는 도로공사를 결행했다. 내몽고 일대를 병참기지로 만들어 흉노를 정복하고 그 다음엔 동서양을 잇는 광대한 초원과 사막에 진출하려는 것이었다. 진나라의 전설적인 명장 몽염(蒙恬)을 파견해 산맥을 끊고 계곡을 매웠으나 수년이 지나도 공사는 끝없는 물자와 인력만 소모할 뿐이었다.


남쪽으로는 남월(베트남) 정복에 무려 50만 명의 죄수와 포로를 병력으로 동원하는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진시황은 생전에 만리장성 완공을 보려고 했다. 사람과 가축의 힘으로 장대한 산맥을 끊고 이었다. 그 과정에서 노출되는 지층의 암석을 가공해 성벽을 쌓고 또 쌓았다. 만리장성 인부의 사망률은 초창기의 25%에서 75%로 폭등했다. 그렇다고 남방의 운하 사업이 보류된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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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


진시황 자신이 죽으면 묻힐 여산(驪山)의 황릉 축조사업은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규모였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만이 비교 대상이다. 그 유명한 병마용 전체가 진시황의 부장품 일부에 불과하다(아직도 완전히 출토하려면 한참 멀었다.). 그러나 진시황은 무덤을 짓는 한편 딴 마음을 품게 된다.


“불로불사(不老不死)”


불노초를 찾는다고 막대한 재화를 낭비했지만 이는 제국 전체에 별다른 피해를 끼치지 않았다. 진시황은 불사의 몸으로 천하를 통치할 영원한 궁전을 원했다.


아방궁(阿房宮)이었다.


아방궁의 정식 명칭은 없다. 준공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사가 ‘아방촌’이라는 마을의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얻은 터에서 시작되었기에 아방궁이라는 미완의 별칭으로 남았다. 원래 아방궁 축조는 진시황이 황제에 오르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황제가 말년으로 갈수록 규모가 확장되었다. 그 전각의 수는 970채! 거기에 기존의 수도 함양과 직통으로 연결된 복도가 있었다. 이 복도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 강 위에 세운 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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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아방궁 상상도. 아방궁은 단순한 궁궐이 아니라 ‘궁궐 및 조정 복합단지’였다. 

자금성이나 우리의 경복궁 등 동아시아의 복합단지형 궁궐은 아방궁의 영향을 받았다.


이미 완성된 전각에서는 사치의 한계를 시험했다. 진나라가 멸망시킨 육국의 궁궐을 실생활이 가능한 크기의 미니어처로 재현해 놓았다. 그 안은 육국의 보물로 채웠다. 거기에 미녀들을 각 지역 여성의 특징에 맞게 수집해 배치했다. 본국인 진나라의 전통적인 미녀, 조나라의 비(肥 살결이 희고 몸매가 풍만한 여성), 북방계인 연나라의 수(瘦 키 크고 날씬한 여인), 베트남 정글에서 사냥해 온 여(女 가임기의 건강한 처녀), 초나라 묘족 혈통의 발랄한 희(姬 사춘기 소녀) 등이었다. 닭 울음 대신 미녀들이 부르는 고향의 민요가 아방궁의 아침을 열었다. 그녀들은 밤에는 각자의 전통 악기를 연주해 밤하늘에 운치를 더해야 했다. 궁 외곽에서는 끝없는 강제노동에 일꾼들이 죽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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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족 소녀. 물론 위의 장례 사진을 포함해, 지금의 묘족과 당시의 초나라 토박이의 모습을 동일시해선 안 된다. 

조선사람과 고조선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12


아방궁에 동원된 인원은 70만 명이었다. 백성들은 몰래 노래했다.


“진나라는 아방궁으로 망하리라.”


아방궁에 대한 원한이 전부가 아니다. 중국인들은 지금의 체제가 오래 가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제국이 아방궁 공사만으로 흔들린 것은 아니다. 진나라가 국경 수비와 정복사업, 공권력 행사를 위해 유지한 병력은 250만 명이다. 여기에 만리장성, 운하, 황릉, 북벌(北伐)가도 공사인력을 더해야 한다.


진시황은 동시대 이집트 파라오의 10배가 넘는 백성을 다스렸다. 아무리 막대한 인구와 물자도 한계란 것이 있다. 아방궁은 백성들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임계점이었다.


아무도 진시황을 말리지 못했다. 한때 불세출의 정복자였던 남자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환청에 시달렸고 자신 외의 모든 사람을 의심했다. 의심을 굳히면 광폭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가혹하게 처형당했다. 자신이 죽인 원혼에 쫓기는 환각에 시달리기도 했다. 과대망상은 갈수록 심해졌다. 자신이 신(神)이라고 착각하면서도 어린아이처럼 겁에 질린 생활이 이어졌다.


진시황은 불로불사약을 먹었다. 먹으면 일시적으로 피부가 깨끗해져 동안으로 보이는 약. 그래서 당시에 존재하던 가장 신비로운 약이었다. 그는 주치의가 처방한 복용량의 몇 배를 삼켰다. 이 물질은 인체에 용해 가능한 상태로 제조하면 원래 상태와 달리 붉은 빛을 띤다.


수은(水銀)이다.


최초의 황제와 최초의 중국은 수은에 중독되었다. 의학자들은 진시황의 광기가 중증 수은중독의 전형적인 부작용이라고 단언한다. 중독은 온 백성의 피땀을 짜내다 못해 소멸시킬 기세였다. 패현에도 수은의 마수가 드리웠다. 패현 감옥의 죄수들이 모조리 여산 황릉 공사현장에 징집되었다.


사수정의 정장에게 패현의 죄수를 호송하는 임무가 떨어졌다. 유방이었다. 여산으로 가는 길이 천하제패의 출발점이 될 줄은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다음 회에 계속...



PS. 총선 때문에 마빡 스케줄이 빡빡하다고 해서 한 주를 거르게 됐다. 대신 2회분을 채워 썼으니 독자제위께서는 알아서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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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서 가서 청취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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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물어봐도 알려주는 남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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