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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9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지는 생소한 이름의 물가지수를 선보입니다. ‘빅맥지수’였지요.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맥도날드의 빅맥 햄버거 가격을 달러로 환산해 분기별로 발표한 겁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빅맥지수를 산출할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한국에 맥도날드가 처음 상륙한 것은 올림픽이 열리던 해 1988년 춘삼월 29일에나 가능했기 때문이죠.


한국도 꽤 늦긴 했지만 맥도날드는 서슬 푸르던 냉전 시기에도 동유럽의 문을 줄기차게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맥도날드 매장이 들어설 즈음 무려 10년간의 협상 끝에 당시 소련 모스크바 시로부터 매장 허가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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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맥도날드


전 세계 120여 개 나라에서 분주히 구워지고 먹어치워 지는, 그래서 ‘빅맥지수’라는 물가지수를 가릴 만큼의 위력을 지닌 맥도날드 햄버거의 로고는 사뭇 위풍당당합니다. 밀턴 프리드먼이 그의 저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주장한바, M자형의 이른바 '골든아치'(맥도날드 햄버거 로고)가 들어선 나라들 사이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른바 '갈등 예방의 황금 아치 이론’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맥도날드는 쇠고기 안 먹는 인도부터 까다로운 미식가들의 나라 프랑스의 중심가까지 광범위하게 정복했으니까요.


이 ‘맥도날드’ 브랜드의 창시자는 영화 스튜디오 잡역부로 일하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요식업에 뛰어든 맥도날드(Mc.Donald) 형제입니다. 그들이 햄버거를 발명한 건 아니죠. 중세 유럽을 침략했던 몽골인들이 말 안장 밑에 두고 다진 고기 요리가 독일의 함부르크 상인들에게 전파됐고 그들의 다진 고기 스테이크가 함부르크 (Hamburg) 스테이크, 바로 햄버그 스테이크가 됩니다.


1904년의 세인트루이스 박람회 때 이 햄버그 스테이크를 빵에 싸 먹는 방식이 선보였고 그 이후 ‘햄버거’로 불리는 음식을 파는 식당도 생겨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 햄버거를 사람들의 눈에 띄는 될 만한 물건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맥도날드 형제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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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널드 형제


그들에게 사업의 영감을 주고 힌트를 제공한 사람은 미국 자동차 업계의 대부 헨리 포드였습니다. 포드 덕분에 대량생산된 자동차는 미국의 필수품이 됐고 마이카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도시락 문화가 없는 미국 사회에서 차를 타고 이동하는 여행객들이나 직장인들에게 간편한 간이식으로서 햄버거만 한 것이 있었을까요.


1937년 맥도날드 형제는 ‘미국의 실크로드’라 불리며 시카고에서 시작해 8개 주를 거쳐 캘리포니아 샌타모니카 바닷가에 이르는 2,444마일 대륙횡단도로인 66번 도로변 샌버나디노에 맥도날드 매장을 세웁니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갈 길이 바쁜 손님들이 주를 이루는 상황에서, 맥도날드 형제는 어떻게 하면 더 빠르고 더 쉽게 햄버거를 팔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죠.


여기서 또 한 번 힌트를 준 것이 바로 포드의 철저한 분업화 시스템이었습니다. 요리대를 움직이는 컨베이어식 조립기로 개조하여 직원들이 각각 맡은 빵이며 치즈며 패티, 야채 등을 차례로 얹고 조합하여 햄버거를 기다리는 손님들 손에 신속하게, 그리고 대량으로 전달할 수 있게 만든 겁니다. 차에서 내리기 싫은 사람들을 위해 드라이브 인 시스템을 개발한 것도 맥도날드 형제였고 이것저것 다 빼 버리고 햄버거와 음료수만 포장 판매하여 화끈한 대박을 친 것도 맥도날드 형제였습니다.


이렇게 두고 보면 맥도날드 형제는 오늘날 맥도날드 햄버거의 틀을 거의 완벽하게 만든 셈입니다. 그들은 마이카 시대의 트렌드에 민감했고 트렌드 속의 욕구를 이용할 줄 알았고 트렌드 위에서 새로운 트렌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마이카 시대를 맞아 곳곳을 활개치고 다니던 미국인들에게 어둑어둑할 무렵 저 멀리서 빛나는 황금색 맥도날드 로고는 일종의 복음과도 같았습니다. 맥도날드 형제의 가게는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며 대박을 쳤습니다.


이 대박 앞에 눈이 휘둥그래진 사람이 하나 등장했습니다. 바로 레이 크록이라는 믹서기 영업사원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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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여름 맥도날드 매장을 방문한 레이 크록은 손님들의 규모 외에도 맥도날드 형제가 보여 준 또 다른 장점에 놀라고 있었습니다. “무더운 날이었다. 그런데도 그곳에는 파리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흰색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은 레스토랑 안팎의 모든 것을 깔끔하고 청결하게 유지했다. 평소 위생 관리가 허술한 레스토랑에 질색인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당시 나이 쉰둘의 퇴물에 가까운 영업사원이었으며 관절염에 당뇨병, 갑상선 질환까지 앓고 있던 허약한 레이 크록의 심장은 무섭게 불타올랐습니다. 이건 될 수 있다! 당시의 크록은 항상 이렇게 되뇌고 있었다지요. “나는 아직 푸르다. 내 절정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나라 학원가에 많이 붙어 있는 표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라는 표어의 레이 크록판일 수도 있겠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은퇴를 생각할 나이에 “아직 푸르다”고 벼르던 크록은 모험을 걸었고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만고의 진리이겠지만 위험이 따르지 않는 성공은 드물지요.


맥도날드 형제에게 크록이 제안한 것이 프랜차이즈 사업이었다. “당신들의 브랜드를 퍼뜨립시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들의 이름을 딴 가게를 열게 하는 겁니다. 그 댓가로 매출의 1퍼센트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맥도날드 형제는 거절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욕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크록은 물고 늘어졌죠. 결국 크록은 그들 형제에게 매출의 0.5%의 로열티를 주기로 하고 맥도날드 총판권을 받아내게 되죠.


1955년 시카고 근교에 첫 체인점을 열었을 때 크록의 나이는 53세였습니다. “크록은 1955년 말까지 캘리포니아에서 두 개의 총판권을 판 것을 시작으로 1960년까지는 200여 개의 맥도날드 총판권을 팔아 한해 전체 가맹점으로부터 그에게 들어오는 수입이 70만 달러에 이르렀다.”(김흥길 교수의 경제 이야기 중)고 하니 대박을 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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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맥도날드의 전단지


그리고 그에게 더 큰 기회가 왔습니다. 맥도날드 형제가 자신들의 사업체와 브랜드의 권리를 넘기는 댓가로 향후 15년 동안의 로열티에 해당하는 270만 달러를 일시불로 요구한 거죠.. 낼 모레가 환갑이었던 크록에게는 또 하나의 갈등의 순간. 그럴 돈도 없고 일흔을 훌쩍 넘긴 15년 뒤의 미래에도 확신이 없던 그였지만 그는 고민 끝에 자신의 변호사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사인합시다! 뒷일은 하늘에 맡기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요. 레이 크록의 진가는 그때부터 발휘되기 시작합니다. 그는 단순히 프렌차이즈를 내 주고 로열티를 챙기는 쩨쩨한 사업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각 매장을 돌아다니며 철저히 단일화된 ‘맥도날드’를 만들어 냅니다. 맥도날드 형제가 햄버거의 제조와 상품화 틀을 만들고 대중들의 요구를 읽어 냈다면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 브랜드의 통일된 가치를 창조해 냈습니다. 어디에서나 똑같은 맛으로 고객을 이끌 수 있는 레스토랑 시스템의 구축이었죠.


맥도날드에서 배웠던 철저한 위생 관념을 그는 휘하의 프랜차이즈업계 전체에 강요했습니다. 매장 주변에 쓰레기가 발견된 날이면 담당 직원은 레이 크록의 폭발을 견뎌야 했죠. 맥도날드가 한국에 진출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한 서울 영업점에서 파리가 날아다닌다는 이유로 영업 정지령을 내렸던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엄격한 가맹점 관리와 경쟁 업체의 비밀을 캐내는 스파이 행각까지 일삼는 집요함으로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의 제2의 창시자가 됩니다.


1983년 12월 미국의 남성잡지 ‘에스콰이어’가 20세기 미국인의 생활 방식에 위대한 기여를 한 5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레이 크록을 선정하고 작가인 톰 로빈스는 ‘에스콰이어’에 기고한 글에서 “콜럼버스는 미국을 발견했고, 제퍼슨은 미국을 세웠으며, 레이 크록은 미국의 입맛을 ‘맥도날드 화’ 했다는 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를 넘어서 크록은 세계 도처에 맥도날드의 황금빛 M자의 성채를 세웠고 그 속에 세계인의 입맛을 가뒀지요.


그의 말을 들어 봅시다. "능력만큼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의 속담이 될 정도로 흔한 일이다. 교육을 받아도 소용없다. 이미 세상은 교육받은 낙오자들로 가득하다. 오직 ‘끈기’와 ‘의지’가 있어야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는 법이다."


맥도날드 형제가 개척한 오솔길은 크록에 이르러 대로가 됐고 그 이름은 맥도날드로 남았으나 길의 주인은 명백히 크록이었습니다. 그 길을 닦은 것은 ‘끈기와 의지’였습니다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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