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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회에서는 7세기의 백제(AD 600~660)에 대해서 한번 자세히(?) 추정해보기로 하자. 그러기 위해선 아이러니하지만 백제가 부여까지 밀려나서 부여백제를 이루게 된 과정을 되돌아봐야 한다.



1. 백제의 전성기, 위례백제


3~5세기 무렵, 지금의 서울 송파구에 위치했던, 위례성에 도읍을 둔 위례백제는 한반도에서 고구려와 대등한 실력을 지녔던 강대국이었다. 위례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풍납토성이 먼저 만들어져서 초기 백제의 왕도 역할을 했고, 이후에 남쪽의 몽촌토성이 만들어졌다는 견해가 많다. 사실상 두 개의 거대한 성으로 이루어진 복합 도시가 위례성이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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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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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 터


규모에 있어서는 풍납토성이 훨씬 커서 성과 주위에 약 4~5만 명의 인구가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에 뒤늦게 세워진 몽촌토성은 조금 작아서 약 1만 명이 거주할 수 있었지만, 군사적 방어에는 매우 유리했다. 두 개의 성과 인근 지역의 인구까지 합치면 위례성은 인구가 약 10만 명이 넘는, 한반도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 시절에는 한강 유역을 거점으로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남쪽의 마한을 완전히 복속시켰고, 비교적 약소했던 가야와 신라 세력을 굴복시켰다. 북쪽의 고구려와 여러 차례 세력 갈등(쉽게 말해서 전쟁)을 겪었으며, 371년에는 근초고왕이 직접 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의 남쪽 거점이던 평양성 인근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고국원왕을 살해하기도 했다.


한 가지 추정을 하면, 4세기 무렵 이미 백제는 인구와 경제력, 군사력에서 1만 명이 넘는 정예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한반도 상고사에 대한 자료의 신빙성이 크게 약해서 정확한 병력의 추산은 어렵지만, 5세기의 고구려가 동북아에서 강대국으로 떠오른 걸 미루어 볼 때 고구려와 백제의 왕들이 직접 참전한 전투가 수만 명이 싸우던 대규모 전투였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고대 전투에서는 단순히 3만 명의 병력이 참전했다고 해도 3만 명이 모두 싸웠다고 보긴 어렵다. 역사적 사료가 명확히 남아있는 중국의 군편제를 보더라도 전체 병력의 절반 이상이 예비대와 보급부대다. 특히 본진을 떠나서 침공군의 입장에서는 식량이나 물자 등을 운반해줄 보급부대가 더욱 중요하다. 3만 명의 백제 침공군이 평양성에 이르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1만 명 정도의 정예군이 직접 전투에 참가하고, 1만 명 정도의 보급부대, 그리고 후방을 지키거나 주변을 견제하는 예비대가 1만 명 정도 되었을 것이다(역사상 중국을 유린했던 훈족, 몽골족 등의 기마병단을 제외하고는 군대에서 전체 병력이 모두 뛰어난 전사로 전투에 참가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유목민의 군대는 그 자체가 보급부대이며 전투부대라는 특징 때문에 가공할 전투력을 보여준 것이다).


동아시아에선 중국의 영향 때문에 삼군 체제가 보편적이었다고 봐야 한다. 중국 드라마에서 “삼군을 호령하는”, “삼군이 어쩌고저쩌고”라는 대목을 자주 들을 수 있다. 여기서 ‘삼군’이란 왕이 직접 지휘하는 최정예인 중군, 역시 정예병에 해당하는 우군, 그리고 예비·보급부대 성격의 좌군을 뜻한다(통일 중국 제국의 황제들은 삼군에 더해서 직접 통솔하는 엘리트 친위군까지 갖췄었다).


아무튼 4세기 무렵의 백제는 한반도에선 고구려에 필적하는 강력한 국가였다. 한강 유역을 점유하고 얻어낸 풍부한 물자와 곡식, 중국 대륙과 해상무역을 통해 얻은 기술과 문화 덕분이 아니었을까?



2. 백제의 쇠락, 위례성의 함락과 웅진 천도


왕이 전사한 371년 이후, 고구려는 절치부심하여 세력을 키운다. 391년에는 광개토대왕이 즉위한다. 20년 간의 즉위 기간에 광개토대왕은 엄청난 활약을 해서 영토를 키웠다. 서쪽으로는 중국의 연나라를 물리쳐서 요동을 완전히 정복하고, 남쪽의 백제를 크게 억누른다. 뒤이어 즉위한 장수왕(재위 412~491)은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고 남하하여 이윽고 475년에 백제의 도읍이었던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개로왕의 목을 베어 선대의 복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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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세력 확장


위례백제의 몰락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라는 거대한 군사방어시설이 무력화되었음과 지금의 서울 인근에 거주하던 수많은 백제인들이 흩어지게 되었음을 뜻한다. 고대의 국가에서 주요 정치세력은 도읍을 중심으로 거주하며, 지방의 주요 거점들에는 부족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 이들은 느슨한 연대를 하며 부족연합국가 형태를 갖췄다.


위례백제의 정치세력은 왕의 죽음과 함께 몰락하여 일부는 고구려의 포로가 되고, 일부는 왜국 등으로 망명했을 것이다. 그나마 주요 정치세력의 일부는 남쪽으로 피신하여 과거에 복속시켰던 마한 지역의 중심부에 간신히 정착한다. 바로 웅진(지금의 공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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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전경


마한 지역에 오래도록 터잡고 세력을 잡았던 지방 호족(귀족) 세력의 틈새에서, 경제와 인구의 중심지였던 한강 유역을 상실한 백제 잔존 정치세력들이 새로운 백제를 재건하는 데는 애로가 많았을 것이다. 한강 유역에서 힘만 믿고 설치다가 고구려에게 개털려서 온 피난민을 토박이들이 곱게 봤을 리 만무하니까.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말이 천도지 사실상 피난)한 이유에 대한 학설은 여러 가지인데, 필자가 보기에는 당시 웅진 지역이 지방 호족세력들의 주요 근거지가 아니어서 세력 공백이 있었고, 군사적으로 방어에 매우 유리한 곳이라 임시 도읍으로 삼았다는 학설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아마도 공산성(웅진의 산성)은 마한을 복속시키기 위한 위례백제 정치세력들의 주요 군사거점은 아니었을까?


어찌 되었든 멸망 직전의 백제(정확히 말해서 백제의 중앙 정치세력)는 간신히 웅진의 공산성으로 피신하고 고구려의 추격을 피하며 버텼다. 그러나 위례백제의 모든 경제, 인구, 군사적 배경이 되던 한강 유역을 상실한 상태다. 지방 부족 세력들이 아직 힘을 지니고 있는 남쪽의 복속 지역이던 마한(충청도, 전라도 일대) 일부 지역에 새롭게 터를 잡고 다시금 시작해야 하는 처지였다.



3. 백제의 중흥, 부여 천도의 의미


웅진백제는 초기부터 잡음이 많았다. 귀족들의 반란(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지역 토호세력과의 갈등)이 여러 차례 있었고, 한강 유역을 점거한 고구려가 수시로 남침하는 것을 방어하는 데 급급했다.


현대인들은 고구려가 위례성 일대를 점거했으므로 당연히 위례백제의 경제적 생산능력과 군사력을 복속시키고, 인구 역시 그대로 물려받았을 것으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고대는 전혀 양상이 다르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면 비슷하다. 오로지 ‘지역’만 차지한 셈이다. 실제로 위례백제 이후로 한강 유역은 꾸준히 삼국의 주요 전투지역이 되면서 인구 집중이나 물자 생산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각지에 수많은 산성들이 있었고 수시로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누가 그런 곳에서 맘 놓고 농작물을 재배하며 행정기구를 꾸렸겠는가? 한때 백제의 본진이었던 한강 유역은 뺏고 빼앗김을 반복하면서 살벌한 전쟁터로 200년이란 시간을 보낸다.


반면에 위례성에서 무려 남쪽으로 140km나 떨어진 공산성까지 도망을 쳤던 백제 정치세력들은 지금의 천안 지역까지 진출한 고구려군의 전진기지들로부터 수시로 위협을 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웅진성은 전선 인근에 인접하여 위협을 받았다. 백제는 웅진을 지키기 위해 북쪽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백제는 26대 성왕(재위 523~554)에 이르러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세력을 재정비하는데 성공한다. 성왕은 일단 몇 가지 큰 개혁을 단행하는데, 그중 으뜸은 ‘부여 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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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의 신행정수도 계획

부여-김제평야를 잇는 새로운 백제의 건설


위 지도를 보면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고대 국가의 주요 정치세력은 일부 거점을 중심으로 밀집되며, 지방 거점들에 대해서는 통제를 통해서 느슨한 중앙 집중을 이뤘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읍 주변에 경제력과 인구를 집중시켜야만 한다. 과거 위례백제 시절에는 한강 유역이라는 넓은 평야지역과 큰 강, 풍부한 물자를 바탕으로 세력을 키웠지만 웅진은 지리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반면에 협소하기 때문에 배후지역이 한정적이었다.


부여의 위쪽에는 웅진이라는 강력한 방어 거점이 있다. 또한 금강을 통해서 웅진과 연결이 되며, 서해로 빠지면 중국과 왜국 등에 연결되는 해상 교통망도 있다. 그리고,


한반도 최대의 곡창지대인, 드넓은 김제평야가 있었다. 김제평야가 부여의 배후지역이 되었다.


성왕의 부여 천도로 부여백제가 '건국'된 것이나 다름 없다. 백제는 과거 위례백제의 영광을 뒷받침했던 한강 유역 대신에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의 김제평야에 부여백제의 운명을 걸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지역 토착세력과 많은 갈등이 있었겠지만 성왕이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면서 부여를 비롯한 김제평야 지역을 왕의 직할지로 만든다.


고대 국가들에게 있어서 도읍의 위치란 정치군사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구려 장수왕이 평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남하정책을 가속화할 수 있었던 까닭을 한번 생각해 보자. 고대 국가의 전쟁 양상에는 항상 보급과 교통이라는 문제가 있다. 또한 도읍이 핵심 인구 밀집 지역이자 병력 차출원, 식량 저장소라는 것도 함께 고려하자. 여기에 또 한 가지가 있다.


‘고대 국가들의 정예군, 그들은 누구일까? 지금처럼 징집된 각지의 평범한 청년들인가?’


고대 국가들의 정예군, 무사, 장수들은 대부분 정치세력들의 자제들과 그 부하들이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 교육을 받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지방 호족들도 각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예를 닦고 사병들을 훈련시켰으나, 중앙 정치세력은 ‘왕권’이라는 거대한 계급적 울타리를 통해서 정예군을 고도로 훈련시키고 군사력을 양성하였기에 지방 호족들에 비해서 훨씬 전문화된 병사와 장수들을 보유했다.


모든 고대 국가들의 도읍에는 가장 뛰어난 병사들과 장수들, 식량과 무기가 쌓이고, 각지의 물자와 인재가 몰려 필연적으로 수도권은 과밀화 된다(2,000년 전 한반도 최대 인구 밀집 지역이 지금의 서울 지역이란 게 아이러니).


그렇기 때문에 부대가 도읍에서 진격할 때 가장 파괴력이 있는 것이고, 도읍에서 멀리 떨어져서 작전할수록 보급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애로사항이 커진다. 고구려는 북쪽의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남쪽으로 주력군을 파병하기 쉽게 만들었다.


지정학적으로는 웅진이 부여보다 조금 북쪽에 위치하며 잃어버린 한강 유역에 더 접근하기 좋다. 그러나 본격적인 세력을 키우기에는 배후지역이 협소하며, 성왕이 눈여겨 본 새로운 백제의 중심 경제 지역인 김제평야로부터 더 멀다. 도읍에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왕권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힘이 약해지는 것을 감안하면 부여는 지리적으로도 김제평야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기에 유리했다.


성왕은 백제 중흥을 위한 원대한 계획의 포석을 놓고, 드디어 힘을 축척하여 북쪽으로 진격한다.



4. 복수의 칼날, 북쪽이 아닌 동쪽을 향하다


551년,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점령한다. 이 과정에서 백제는 위례성이 있었던 서울 지역을 비롯하여 천안에서 경기도에 이르는 알짜배기 지역을 차지한다. 신라는 강원도에서 시작해서 일부 경기도 지역, 심지어 함경도 연안지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차지했다. 면적으로는 신라가 더 넓은 지역을 차지했지만, 실속으로 보면 백제의 압승이다.


당시 신라는 백제의 근초고왕과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 맞먹는 '진흥왕'이라는 걸출한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진흥왕은 신라 최초로 본격적인 중앙집권적 왕권을 강화하였고, 군사대국화를 위해 강력한 정예군을 양성했다. 진흥왕 직전에 이미 신라는 가야 세력의 양대 축이었던 금관가야를 병합했다.


(금관가야의 병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이 있다. 원래 가야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금관가야가 뒤늦게 강자로 떠오르면서 대가야와 마찰이 있었다. 그러다가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금관가야가 먼저 신라에 병합되고, 금관가야의 정치세력은 그대로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 편입된다. 통상 병합 과정에는 패망 국가의 정치세력이 살육되는데 반해 금관가야의 경우는 특이하게 귀족으로 인정받는다. 반면 수십 년 뒤 병합된 대가야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삼국통일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세력들이 금관가야계 진골 귀족들이었음을 상기하면, 과연 금관가야는 신라에 병합된 것인가? 아니면?)


553년, 신라는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 한강의 백제군을 기습한다. 당시 고구려는 오랜 숙적이었던 백제가 한강 일대의 알짜배기 강남땅(강남, 서초, 송파 등)을 먹고 땅부자가 되는 게 배가 아팠다. 차라리 그럴 바엔 저 먼 경상도 남쪽의 만만해 보이던 신라가 차지하는 게 더 속 편하다고 여겼던 듯 하다. 나중에 재탈환하려면 백제보단 신라가 더 만만해 보였을지도.


백제는 한강을 비롯한 경기도 전역을 통째로 털렸고 성왕은 극도로 분노했다.


"감히 신라가 우릴 배신해? 복수다! 출전의 북을 울려라~"


결과부터 말하자면, 복수전 1라운드에선 백제를 비롯한 가야(아마도 대가야), 왜의 연합군 3만 명이 지금의 대전 식장산을 넘어서 옥천으로 진입하였고, 신라의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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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4년, 백제군이 신라군을 공격한 루트


위 지도를 주목하자. 백제와 신라는 이 루트를 놓고 100년간 치열한 전쟁을 벌인다. 유럽에만 백년전쟁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6~7세기 한반도에선 두 국가가 거의 매년 빠짐없이 이 지역을 놓고 전쟁을 벌였다.


지정학적으로 백제와 신라의 도읍을 서로 직통하는 루트는 부여-논산-대전-옥천을 지나서 경주로 향하는 길이다. 이보다 남쪽으로는 산맥들이 가로막고 있어서 대규모 병력의 이동과 물자의 보급이 매우 어렵다(고대의 교통수단과 도로망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남해안을 타고 돌아가는 루트는 너무 비효율적이다. 고대 국가들은 도읍 중심의 거점국가다.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도 있지만 군사적으로 매우 곤란하다. 백제 북부지역(웅진성 이북)은 고구려와의 오랜 전쟁으로 이미 철통같이 요새화된 지역들이다. 충청북도 쪽으로 돌아가면 보은지역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하나 있고, 문경새재라고 알려진 협로가 옆쪽에 있다. 요새지대와 좁은 길로 이뤄진 북쪽 우회 코스는 최단거리 직통 코스인 대전-옥천 지역에 비해 비효율적이다. 북쪽의 나머지 코스는 다들 아시듯 험준한 산맥들이 가로막고 있다.


(이 무렵부터 신라는 북쪽으로 진출해서 한강 유역을 통제하기 위해 문경새재를 사용했다. 보은 방면의 통로는 백제와 인접해서 수시로 군사적 위협을 받기 쉬웠으나 문경새재 방면은 상대적으로 군사적 압박이 덜한 후방이었다. 훗날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도 영남지역에서 서울 쪽으로 가는 최단 코스도 문경새재가 됐다. 문경새재의 영남 측 입구인 상주지역은 신라의 오랜 군사거점이기도 하다. 왜 상주가 신라에게 매우 중요했는지는 다음 편에 계속)


아무튼 복수심에 불타는 성왕의 백제군은 북쪽으로 진격해서 한강 유역을 회복하려는 게 아니라 동쪽으로 진군하여 서라벌로 향했다.


"진흥왕 이 자슥의 모가지를 댕강~해서 축구공으로 쓰겠어~"


백제군은 태자(성왕의 아들)의 지휘 아래 옥천 방면의 신라 산성들을 하나둘 점령해갔다. 이곳이 뚫리면 백제군은 곧바로 영남지역 한가운데로 진군할 수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서라벌이었지만 신라군이 계속 수세에 몰리진 않았다. 각지의 병력(아마도 한강 파견군까지 소환)을 모으고 전술적으로 반격을 준비했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각종 사서에서 백제 성왕이 관산성을 점령한 태자를 응원하기 위해 수십 기의 호위만 대동하고 옥천으로 들어갔다가 이를 눈치 챈 신라군에 잡혀 참수당한다


성왕의 목이 베였고, 성왕의 죽음이 도화선이 되어 백제군은 참패하고 퇴각한다. 어떤 사료에는 성왕의 목이 서라벌 왕궁 길에 묻혀서 밟힘을 당하고, 몸만 백제로 돌려보내졌다고 한다. 백제가 받은 패전과 왕의 참살에 대한 충격은 대단해서, 성왕 이후 여러 명의 왕들은 기울어가는 국력을 되살리기 위해 몸부림을 썼지만 어려웠다.


여기서 백제군을 참패시켰던 신라의 군대를 이끈 인물이 바로 김유신의 할아버지다. 즉, 금관가야의 왕족이란 셈이다.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지 얼마 안 돼서 금관가야 출신의 진골 귀족이 신라군을 이끌고 백제왕의 목을 친 거다.


백제를 도와 신라를 공격했던 가야(아마도 대가야 주축의 세력)는 미운 털이 박혔는지 10년 뒤에 신라에게 병합된다. 이 과정에서 대가야 지역에서 대규모 학살극이 벌어졌다고 하는 사료도 있다. 훗날 신라는 대가야 지역에 대야성을 짓고 그 지역의 거점으로 삼는데, 백제 의자왕 초기에 대야성을 점령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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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성 성주의 만행에 분개한 장수가 배신하여 대야성 성문을 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은 지역민들이 신라에 대한 적개심이 만연하여 백제군을 도운 것은 아닐까?


백제는 개로왕이 고구려군에 참살당한 이후 봉착한 멸망의 위기에서 도읍을 옮겨 기사회생한다. 그러나 중흥의 찰나에 다시금 신라군에 성왕이 참살당해 국운이 기운다. 이후 백제는 신라에 의해 수세에 몰리고, 6세기 말에는 기력을 회복한 고구려가 남하함에 따라 진퇴양난에 처한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백제와 신라 양국이 경쟁적으로 사대의 예를 취하면서 고구려를 징벌해 줄 것을 청했다고 한다. 당시 영토상으로 백제와 고구려는 직접 대면하지도 않았는데 그 점이 다소 의아하다. 아마도 한강 유역과 경기도 일대를 놓고 수시로 고구려군이 남하하였고, 백제 역시 경기도, 옥천 방면의 신라군과 양면에서 교전을 벌이던 와중에 고구려까지 가세하여 혼전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590년,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아차산성(서울)을 공격하다가 전사한다. 그러나 고구려의 남진은 이어진 수나라와의 전면전으로 인해 중단된다. 백제 무왕이 즉위할 600년 무렵 고구려는 더 이상 남쪽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한강 이남 지역에서 백제와 신라가 진검승부를 펼칠 순간이었다.



5. 60년간의 파상공세, 그리고 백제의 멸망


30대 무왕(재위 600~641), 31대 의자왕(재위 641~660) 시기의 백제는 세 번째 중흥기였다. 앞에서 성왕이 부여를 중심으로 김제평야를 아우르는 새로운 백제의 기반을 만들어 놓은 과정을 보았다. 무왕은 김제평야의 한복판인 익산지역에 미륵사라는 거대한 절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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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의 창건에 대해서 서동요에 나오는 선화공주 설화가 인용되곤 한다. 하지만 엄연한 거짓이다. 미륵사는 당대의 정치사회구조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명확한 설명이 불가하다. 당시 백제와 신라는 모두 불교를 국교로 삼고 사회통합을 이루어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려고 했다. 특히 백제의 사찰은 단순한 종교시설이 아닌 행정관청의 역할도 가지고 있었다. 미륵사는 드넓은 김제평야에서 나오는 많은 식량과 물자의 저장 및 관리, 그리고 농민들을 통제하는 왕 직속의 정부기관이었다. 수천 명의 승려들은 사실상 공무원이었으며, 미륵사는 정부청사에 가까웠다. 미륵사 창건은 전설 속의 선화공주가 아닌, 무왕의 실제 왕비였던 백제 귀족 사택씨 집안의 사택왕후가 간여했다는 고고학 증거가 미륵사지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미륵사는 수천 명의 승려가 기거하던 거대한 사찰이다. 그리고 김제평야 한복판 구릉지에 위치하여 홍수 등에서도 버틸 수 있는, 김제평야 전체를 통제하기 좋은 위치다. 이러한 곳에 대형 사찰을 짓고 십 수만 명의 농민들을 통제하여 엄청난 식량과 물자를 조달했다. 물론 미륵사는 왕 직속기관이므로 지방 호족들이 내는 세금과 다르게 왕이 전용할 수 있었다. 고대 국가에서 승려들이 순수한 종교인이었을까?


신라와의 접경 지역이자 대전-옥천 라인의 길목에 이어지는 논산 지역은 당시에 대규모 군사기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고고학 발굴에서도 논산 지역에서는 백제의 유물들이 거의 발굴되지 않는데, 이러한 현상은 대규모 군사 밀집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부여는 백제의 행정 정치 중심지, 미륵사를 비롯한 넓은 김제평야는 생산기지 겸 창고, 논산 지역은 정예병 군영이었다. 이것이 부여백제의 중심축이다. 무왕과 의자왕은 이러한 체제를 통해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지방의 호족들을 힘으로 누르고 물자와 인원을 조달해서 대규모의 병력을 양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신라를 향해 진군했다.


(계백 장군이 왜 좁은 탄현을 놓고 넓은 황산벌에서 신라의 5만 대군에 맞서서 고작 5천의 결사대로 버티다가 죽었느냐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백제는 김제평야에서 생산되는 막대한 식량과 물자를 미륵사 중심으로 수집, 보관했다. 그리고 각지에서 징집한 수만 명의 병사들을 논산 일대의 대규모 병영에서 정예병으로 훈련시켰고, 전쟁이 벌어지면 대전-옥천의 통로를 통해서 신라로 진격했다. 황산벌은 백제군의 핵심 군사시설이 있던 지역이다. 계벽의 병사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곳에서 방어전에 돌입했던 것이다)


후대인들은 백제를 두고 ‘무왕, 의자왕 시기를 국력을 키웠고, 신라에 대해 복수하기 위해 수시로 전쟁을 벌였지만, 후대로 가면서 향락에 빠져서 국운이 기울다가, 나당 연합군의 공세에 갈팡질팡하다가 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승자에 의해 쓰인 왜곡된 역사다. 역사는 망한 나라에 대해서는 망할만 하니까 망하고, 승리한 나라에 대해서는 근면성실하니까 이겼다고 서술한다.


무왕과 의자왕 모두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고,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꽤 안정적인 정치체계를 유지했던 듯하다. 또한 한 번에 1~3만에 이르는 대군을 동원하여 수시로 신라를 공격했다. 의자왕 초기에는 충북 괴산지역을 함락시켜서 신라가 한강 유역에 이르는 목줄을 누르기도 했다. 대야성까지 함락시켜서 한때 신라가 큰 위기에 빠지도록 했으나, 신라가 군사강국이 되어감에 따라 군사적 징벌은 차츰 좌절되었다.


600년부터 백제가 멸망한 660년까지 60년간 백제는 국가총력전 체제로 신라를 맹공격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물론 신라 역시 괴로웠고 한강을 차지한 업보로 고구려로부터 수시로 공격도 당했으니, 양쪽의 적으로부터 애로점이 있었다.


신라는 서라벌, 가야, 한강유역을 모두 석권하고도 오로지 김제평야 한 곳의 경제력을 누르지 못했다. 안정적으로 경작을 할 수 있는 곡창지대는 곧 인구와 직결되며, 인구는 군사력에도 영향을 준다. 삼국사기에서 백제 인구를 약 350~400만이라 추정하지만, 실제로 백제의 인구는 200만이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왕권에 직접 영향을 받는 부여-김제의 인구는 수십만에 불과했을 것이다. 신라는 백제와 비슷한 수준의 인구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되며, 화랑제도 등 군국주의 성격이 강해서 군사력의 질적 측면에서는 백제에 대해 우위를 점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해도 백제는 신라 혼자의 힘으로 호락호락 무너질 나라가 아니다. 당나라에 의해 무너졌다고 보는 것이 맞다. 넓은 중원을 통일한 당나라군의 질적 수준은 좁은 한반도에서만 싸워온 백제군이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고구려의 방관 속에 신라, 당의 협공은 치명적이었다. 그럼에도 백제의 허망한 멸망 이유엔 조금 다른 사연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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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서 백제의 멸망에 대해 여태껏 통설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시각에 편협하게 기대어 서술해 볼까 한다. 왕이 혼자서 동원할 수 있는 정예군이 2~3만 명이나 되는데 조금 더 버틸 수 없었을까? 계백은 왜 홀로 5천 결사대만 이끌고 죽었나? 신라의 5만 대군은 과연 사실일까? 의자왕은 왜 공산성에서 항복했나? 백제부흥운동은 어떻게 실패했나? 등.
 


P.S


"의자왕이 삼천 궁녀에 빠져서 정치를 소홀히 했다는 썰(?)은 상고사 사료들에 대한 신빙성 자체를 의심케 하는 대목입니다. 어디까지나 제대로 된 역사서라면 명확한 사실만 기재해야 하지만 주관적인 해석이 계속 덧붙여진다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분간하기 어렵지요."


"삼천 궁녀에 대해서는 당시 고대 전쟁에서 일반적이던 약탈의 풍습이 더 정확한 설명이 아닐까 합니다. 중국을 비롯한 고대 국가들은 적의 도시를 점령하면 재화와 여자를 약탈하도록 방조하거나 암묵적인 허용을 해왔기에 당시 부여에 입성한 당나라군이 약탈과 살인을 일삼자 이를 피하던 아녀자 등이 강물에 투신했던 사실을 승자의 입장에서 미화한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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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당신 생각보다 더, 강했다





엘랑


편집: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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