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 도조 히데키(東条英機), 츠지 마사노부(辻政信), 무타구치 렌야(牟田口廉也)... 이 4명의 미친놈들이 노구교사건을 일으키고, 확전을 결의한 그때, 장제스는 그때까지의 중국이 아닌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노산(盧山)담화’ 직후 중국군은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웠고, 그런 중국을 보면서 일본은 관동군이 일으킨 노구교사건을 사후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곤, 스기야마 하지메가 주창했던 3개 사단의 증파를 결정하게 된다.
이때 일본은, 이 지나사변을 신질서 구축을 이해하지 못하는 장제스를 응징하는 성전(聖戰)으로 규정하고, 중국의 반성을 위한 출병으로 스스로를 포장한다.
1. 늪에 빠지다 ②
스기야마 하지메의 주장으로는 1개월, 일본 군부의 생각으로는 3개월로 봤던 중일전쟁은 점점 진창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2차 상하이 사변(상하이 전투)에서 ‘독일식 사단’과 처음으로 조우하게 된 것이다. 88사단의 용전분투 앞에서 일본군은 충격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이제까지 만만하게 봤던 당나라 군대가 아닌 ‘진짜 중국군’을 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7년 말이 되면 일본은 산서성, 산동성, 하북성 등등을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대망의 1937년 12월 13일 중국의 수도 남경(南京)을 점령하게 된다. 난징 징크스는 다시 한 번 증명된 것이다.
예로부터 난징을 수도로 한 정권은 100년을 넘기지 못하고 망했던 것이 역사의 증언이다. 오나라, 동진, 송나라, 제나라, 양나라, 진나라, 명나라, 남명 등등 수많은 왕조가 난징에 수도를 두거나 혹은 난징을 발판으로 국가를 열었으나(태평천국의 난 때도 난징은 수도로 사용됐다) 그 역사는 대부분 오욕으로 얼룩져 있었다. 중화민국도 마찬가지였는데, 난징에 수도를 뒀으나 일본군에게 밀리고, 이후 국공내전에 패배해 타이완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더듬어 볼 여유가 없었다.
일본군은 상하이 전투와 오송 전투의 피해 때문에 눈이 뒤집혀진 상황이었다. 특히나 오송전투가 문제였다. 일반인들에게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상하이에 2개 사단을 증파하기로 결정한 일본군은 이 부대를 오송만에 상륙시키기로 했다. 일본판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라고 해야 할까?
오송만에 일본군 제3사단, 11사단에 상륙했는데, 제3사단은 사단 구성원의 96%가 전투불능에 빠졌고, 11사단도 6일 동안 겨우 5킬로미터 전진한 게 고작이었다. 3사단 보다 뒤에 도착한 11사단이지만, 1주 일 만에 4천 명의 사상자를 냈고, 한 달 뒤엔 1만 명의 병사를 잃게 된다.
당시 장제스가 초빙한 독일 고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Alexander Ernst Alfred Hermann von Falkenhausen)은 독일군의 명성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독일군 장비, 독일군 편제, 독일군 훈련을 받고, 독일 고문관의 전략이 맞물리자 중국군은 ‘괴물’이 됐다(어디까지나 이전의 중국군과 비교해서이다).
일본군은 점점 늪에 빠져나갔다. 3만 명이면 충분히 중국군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당시 상하이에 있었던 중국군 병력은 20만이 넘었다) 생각했는데, 이야기가 점점 꼬여갔다. 독일식 사단은 벙커와 철조망 뒤에서 차근차근 일본군을 학살했고, 일본군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충격과 공포. 그리고 공황.
일본군은 황급히 병력을 차출해 상하이 전선에 보내게 된다. 1937년 9월 7일에는 3개 사단 증파가 결정됐고, 대만에 있던 1개 연대 역시 차출됐다. 최초 3만 명이면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상하이 전투에 일본군은 10만 병력을 밀어 넣어야 했고,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의 병력을 보냈다가는 화북 전선이 헐거워질 수밖에 없었기에 섣불리 병력을 더 뺄 수도 없었다. 애초에 화북지역을 평정하는 게 전쟁의 목적이었는데, 주객이 전도됐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장제스도 결단을 내리게 된다.
“상하이 전투에 모든 걸 걸고, 일본군을 몰아내자!”
일본군이 상하이에서 허우적거리는 걸 확인한 장제스로서는 전략적으로 괜찮은 판단...아니, ‘올바른 판단’이었다. 당시 장제스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병력을 쏟아부었는데, 1937년 10월 말이 되면 7개 집단군 85개 사단, 80만 대군이 상하이에 집결하게 된다. 당시 화남과 화중에 있는 거의 모든 군대가 집결한 것이다. 여기에는 장제스가 애지중지 키워냈던 독일식 사단 4개도 포함돼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장제스의 판단은 옳았다. 역사에 만약이란 단어를 넣는다는 건 무의미하지만, 당시 장제스는 올바른 판단을 한 게 맞았고, 상하이 전투에서 일본군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도 맞았다. 여기서 중국군이 조금 더 일본군을 압박하거나 전선을 고착화시켰다면, 일본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문제는 판단이 아니라 ‘실행’이었다.
상하이 전투가 전쟁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판단도 옳았고, 그 판단에 따른 과감한 결정도 옳았다. 그러나 80만이나 되는 대단위 병력을 투입하고, 운용하는 과정이 문제였다. 상하이라는 ‘좁은 구역’에 너무 많은 병력이 빽빽이 밀집돼 있었고, 그 병력도 무계획적으로 투입됐던 것이다.
너무 좁은 구역에 밀집돼 있다 보니 상하이 만에서 지원 포격을 하는 일본 해군의 함포 사격 한 방에 1개 대대가 전멸하는 ‘괴이한’ 상황이 벌어졌고, 축자적으로 무분별하게 투입된 중국군 스스로 보급과 연락통신에 문제점이 발생해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지휘’가 문제였다. 그때까지 중국군 지휘관 중 80만 단위의 병력을 지휘해 본 지휘관이 없었던 것이다.
중구난방으로 흩어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중국군. 너무 많은 병력이 족쇄가 된 것이다. 문제는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상하이 전선에 너무 많은 병력이 몰리자, 반대로 주전선이라 할 수 있는 화북 전선이 헐거워졌고, 일본군은 반대로 화북 전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이 속속 집결하면서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일본 해군은 세계열강의 그 어떤 기동함대보다 먼저 항공모함의 잠재력을 확인했고, 실전에서 경험을 체득하게 된다).
결국 일본군은 독가스를 뿌리며 다창전을 함락했고, 상하이를 외곽으로부터 포위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장제스는 1937년 10월 26일 상하이에서 전면퇴각을 결정하게 된다.
이때 다시 한 번 맹위를 떨친 게 독일식 사단인 제88사단이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군사행동 중 가장 위험한 것이 퇴각이었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 밑에서 수많은 공을 세웠지만, 그가 오다 家의 가신들에게 인정을 받은 건 그가 신가리 (しんがり: 후퇴 시 부대의 후미에서 마지막까지 적군을 저지하는 후위대)를 자청했기 때문이다. 만약 뒤에 남겨졌다가 적에게 꼬리를 잡히면 그대로 죽음으로 이어지는 후위대의 역할은 그 누구도 맡고 싶어 하지 않는 최악의 임무이다.
상하이 퇴각에서 이 후위대의 임무를 맡은 건 88사단의 결사대 400명이었다. 이들은 나흘 동안 차근차근 일본군을 학살(!)하며 중국군의 퇴로를 지켜냈다. 그리곤 1937년 11월 1일 영국 조계지로 질서정연하게 퇴각했다.
이 후위대 전투에서 400 결사대의 피해는 50명의 사상자를 내는 것에서 그쳤지만, 이를 상대해야 했던 일본군은 2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야했다.
...이 때의 악몽이 12월 13일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의 머릿속에는 고스란히 각인 돼 있었다.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자마자 무려 30만 명의 중국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난징 대학살은 그렇게 시작됐다.
2. 늪에 빠지다 ③
지도로만 보면, 일본군은 쾌속진격을 했고 엄청난 전과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937년 말의 ‘점령지’는 어디까지는 ‘점’과 ‘선’으로만 이어진 허깨비였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서울을 목표로 쾌속 진격을 했지만, 후방에서 일어난 의병들과 한산도에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옥죄고 있는 이순신 장군에 의해 후퇴할 수밖에 없다. 당시 일본군은 조선의 주요 거점을 확보했을 뿐 점령지 전체를 다 확보했던 것이 아니다. 결국 점과 선으로 이어진 ‘도로’를 확보했을 뿐이고, 그나마도 유지할 수가 없어서 패퇴하게 된다.
1937년의 일본군도 마찬가지였는데, 일본군이 점령한 ‘광대한’ 중국 영토는 거의 대부분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철도를 중심으로 한 ‘허깨비’였지, 완전한 점령이 아니었다. 중국은 너무 광대했고, 일본군은 그 숫자가 너무 적었다.
대외적으로 중화민국의 수도인 남경을 점령했다지만, 이미 장제스는 남경을 떠나 중경(重慶)에 새 터를 잡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장제스는 공간을 주고, 시간을 얻는 방법을 선택했다. 일본군이 아무리 용맹하다 하지만, 2,400킬로미터나 되는 중국의 해안선을 다 지켜낼 수는 없을뿐더러, 광대한 중국 영토 전체를 점령하기는 더더욱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장제스가 주목한 것은 ‘게릴라 전’이었다. 그는 자신 휘하의 병력 중 1/3을 쪼개 일본군 점령지를 보내 유격전을 벌이게 됐다. 아울러 홍콩, 마카오, 광저우, 상하이의 조계지를 통해서 무기를 수입하기에 이른다(당시 장제스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미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선전포고를 해 본격적인 ‘전쟁’에 들어가기보다는 하나의 ‘사변’으로 고착화 시켜 외국 열강들의 조계지를 활용하는 방법으로 일본을 괴롭혔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다급해 진건...아니, ‘불안해 진 건’ 일본이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래로(내전을 제외하고) 항상 일본 본토 바깥에서 전쟁을 수행했다. 이 대목을 유의해서 봐야 한다.
본토 밖에서 전투를 한다는 건 본토에는 피해가 없다는 걸 의미하지만, 반대로 본토 밖에 있는 부대에 지속적으로 ‘보급’을 해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본이 아무리 메이지 유신에 성공해 공업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대단위 부대를 본토 밖에서 운영하며 보급선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미 러-일전쟁 당시 근대전의 ‘물량’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몸으로 체득한 일본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장제스가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버는 식으로 장기전 태세에 들어가자 일본으로서는 불안해 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모든 걸 쥐어짜내 간신히 이겼던 러-일 전쟁도 그 기간은 겨우(!?) 19개월에 불과했다. 일본은 2년 이상 전쟁을 치러 본 경험이 없었다.
그런데 중국은 달랐다.
‘대륙의 기상’이라고 해야 할까? 장제스는 느긋하게(?) 중경에 터를 잡고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라는 정신으로 게릴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리고 8년을 버텨냈다). 어느 순간 부패한 일본 관리들과 장교들을 포섭해 무기를 빼돌렸고, 중국의 군벌들을 비롯한 부패한 고위 장성들을 체포해 총살을 시키며(화북 전선이 무너진 1938년 1월 24일 여단장급 이상의 부패한 고위 장성 41명을 총살시켰다), 장기전 태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다급해진 건 일본이었다. 중국이 장기전 태세로 전환한 상황에서 일본 역시 손 놓고 앉아 있을 수 없었기에 일본도 바쁘게 움직이게 됐다.
19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법>이 공표되게 된다.
이 법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제1조 국가총동원이란 전시(전시에 준할 경우도 포함)에 국방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의 전력을 가장 유효하게 발휘하도록 인적 및 물적 자원을 운용하는 것을 말한다.
제4조 정부는 전시에 국가총동원상 필요할 때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제국신민을 징용하여 총동원 업무에 종사하게 할 수 있다. 단 병역법의 적용을 방해하지 않는다.
제7조 정부는 전시에 국가총동원 상 필요할 때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노동쟁의의 예방 혹은 해결에 관하여 필요한 명령을 내리거나 작업소의 폐쇄, 작업 혹은 노무의 중지, 기타의 노동 쟁의에 관한 행위의 제한 혹은 금지를 행할 수 있다.
제8조: 정부는 전시에 국가총동원 상 필요할 때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물자의 생산, 수리, 배급, 양도, 기타의 처분, 사용, 소비, 소지 및 이동에 관하여 필요한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제20조: 정부는 전시에 국가총동원 상 필요할 때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신문지, 기타 출판물의 게재에 대하여 제한 또는 금지를 행할 수 있다.
일본(식민지 조선을 포함) 내의 모든 물적, 인적 자원을 국가가 통제하며, 노동쟁의를 전면으로 부정하고, 국가의 필요에 의해 마음대로 병력을 징병하고, 국민의 모든 재산 처분권을 일본 정부가 가지는 ‘계획경제’로 들어가겠다는 선언이다. 아울러 언론 통제도 하겠다는 선포였다.
그 결과 작게는 식민지 조선의 조선, 동아일보가 폐간됐고(조선, 동아일보는 자신들의 애민애족하는 마음으로 고뇌에 찬 결단이었다지만, ‘조광’과 같은 다른 루트를 파서 친일행보를 계속했다), 크게는 수많은 조선인들의 징용, 징병, 위안부 문제의 시작이 된다.
이제 일본은 완벽한 전시경제로 변신했고, 이때부터 일본 정부는
“거국일치(擧國一致), 진충보국(盡忠報國)”
이라는 구호를 내뱉으며, 조금이라도 일본 정부의 ‘뜻’과 어긋나는 이들을 비애국자, 불순분자로 낙인찍고 헌병대로 보내버렸다.
서서히 일본은 미쳐가게 된다.
이 국가총동원법의 위력은 일본 사회를 점점 옥죄었는데, 1939년 3월이 되면 학생들의 장발과 여성들의 파마를 금지시켰고(꼭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1939년 7월이 되면 국가총동원법을 근거로 한 칙령 제451호 ‘국민징용령’이 나오게 된다. 이제 일본 국민(식민지 조선을 포함)을 전쟁에 강제로 동원할 수 있는 합법적(?)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한 병사의 장 트러블이 일으킨 놀라운 결과였다.
*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http://hohodang.com/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모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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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 작가로서 바라본 먹고사니즘에 대한 적나라한 통찰
'글이 돈이 되는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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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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