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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이후 전국의 피난민이 몰려든 부산 서구의 어느 병원.


극빈자 무료진료와 가난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파격적인 낮은 치료비를 받던 그 병원덕에 겨우 목숨을 건진 어느 환자는 건강이 회복되어 갈수록 얼굴에 수심이 깊어져갔다. 그 이유를 묻는 의사에게 그 환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치료비 낼 돈이 없어서...."


그 말을 들은 의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밤에 병원 뒷문을 열어둘 테니 몰래 도망가시오. 집에서 푹 쉬면서 이 약을 계속 복용하면 완치가 될 거요. 그리고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차비라도 하시고..."


저 바보 의사가 바로 그 병원 원장 장기려박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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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용천출신의 장기려박사는 평양도립볃원장과 평양의과대학 외과교수로 재임 중 6.25전쟁으로 둘 째아들만 겨우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왔고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보며 자신이 의사가 되면서 다짐한 각오를 그의 일생동안 지킨다.



"의사 얼굴 한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내 평생을 바친다"



1959년 장기려박사는 국내최초의 간암수술에 성공했고 그날을 기려 대한간학회는 10월 20일을 '간의 날'로 지정했을만큼 당대 최고의 의사가 엄청난 부와 명예가 보장된 길을 버리고 스스로 거친 가시밭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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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나는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위해 본적지로 갔다. 신검받는 입대장정들 중의 한 사람이 어린 시절 방앗간 기계에 손가락이 끼어 두 손가락의 첫 째 마디가 일그러져 있었다.


"손톱이 있던 자리에 허옇게 굳은 게 뭔가? 손톱인가?" 


라고 누군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을 한다.


"손가락 뼈입니다"


대한민국의 의료보험제도 시행 이전의 병원문턱은 한없이 높았다. 그나마 도시에서라면 저정도 응급상황이면 빚을 내서라도 기본적인 치료는 받을 수 있었겠지만 무의촌 오지에서는 언감생심이었다. 그시절 농촌 국민학생의 방과 후 일과는 소에게 먹일 꼴을 베어 지게에 지고 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서툰 낫질에 손가락을 크게 베어도 병원치료는 커녕 소독조차 할 수 없었고 결국 손가락이 퉁퉁 부어올라 고름이 나고 검게 변해가면 된장을 바르던 시절이었다.



80년대 중반.

나는 부산에 잠시 거주하고 있었고 그때 급성질환에 걸려 사경을 헤맨적이 있다. 119구급차가 없던 그시절 나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주변 지인들에의해 떠메어져 택시에 실려 부산백병원 응급실로 갔다. 의식을 되찾은 뒤 6인 입원실로 갔고 그 후 입원치료 기간 내내 주위의 입원환자와 보호자 간의 억센 부산사투리로 하는 이런 대화를 수없이 들었다.


"미리 청십자에 가입했었다면..."


청십자?


그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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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이후 민주주의와 인권에 눈을 뜬 대한민국은 공적의료보험 도입이 논의되기 시작했고 5.16 당시에는 공약으로 내걸어 1963년 12월 의료보험법이 제정되었지만 강제가입이 아닌 임의가입 형태로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실제 시행된 건 무려 16년 뒤인 1977년이었다. 그것도 500인 이상의 대규모 사업장만을 대상으로 수혜대상은 전인구 대비 8.8%에 불과했다. 그 후 1979년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 그리고 다시 300인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되었지만 정작 의료보장이 절실했던 중소기업과 영세기업 사업장과 자영업 농어민 장애인같은 사회적 약자는 제외 되어 대다수의 국민은 아무 대책없이 방치되어 버렸다. 그것도 기업 50% 노동자 50% 부담으로 운영되어 정부지원은 없었다.


한 마디로 손 안 대고 코풀고 생색내는 수준이었고 의료보험적용 보장성도 의료비의 30~40%에 불과해서 의료보험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당시 겨울이면 새벽마다 밤새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메는 환자들을 들처업고 돈이 없어 여기저기 병원문을 두드리다가 사망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병든 아낙네를 등에 업고 치료비가 없어 이병원 저병원 헤메다 마지막 병원에 도착해보니 이미 그 아낙네는 숨이 끊어져 있어 끌어안고 통곡했다는 김진홍목사의 저서 <새벽에 깨우리로다>가 바로 1970년대의 이야기다. 이분은 훗날 "무상급식은 거지근성을 길러주어 거지문화를 불러 일으킨다" 라는 명언을 남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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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홍 목사는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도 역임했다


공적의료보장 제도의 도입이 늦어지다 보니 77년 의료보험 시행당시 대상이던 대기업들은 대부분 근로자 의료비의 50% 이상을 부담하는 자체 의료보장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결국 뒤늦은 의료보험제도 도입으로 그나마 혜택을 보게 된 대기업 근로자들은 오히려 시행 이전보다 더 많은 보험료를 납부하고 보장성은 더 떨어지게 되었고 정작 의료보장이 절실했던 극빈층과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기이한 제도가 되고 만다.


심하게 말해서 당시 저들 대기업 근로자들은 공적의료보험이 없어도 스스로 의료보장을 받을 최소한의 능력이 있던 계층이었다. 일부계층만을 위한 제도를 만들고 유지하는 건 누구나 할수있다. 모든 계층을 낙오자나 사각지대없이 함께 아우르는 제도가 어려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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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유아 희귀질환 중에 페닐케톤뇨증(PKU)라는 선천성 대사이상증상이 있다. 신생아 5만 명 중에 1명이 걸린다는 이 질환은 모유를 비롯한 어떠한 음식도 먹지 못하고 오로지 맞춤제작된 특수분유를 먹어야한다. 전 세계적으로 몇개 업체만 생산하는 이 특수분유를 그동안 해당부모는 까다로운 수입절차를 통해서 비싼 가격으로 힘들게 구입해야했다.


그러나 1999년 우리나라의 모 기업이 PKU 아기들을 위한 특수분유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제품의 특성상 만들면 만들수록 엄청난 적자가 누적되지만 해당 영유아의 부모는 드디어 손쉽고 값싸게 구입할수 있게 된 국산특수분유를 끌어안고 흐느꼈다.


동네빵집과 순대 떡볶기까지 재벌기업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대한민국에서 저렇게 만들면 만들수록 손해가 커지는 바보짓을 하는 모 기업은 바로 매일유업이다.


뇌성마미로 인해 두팔의 장애를 가진 젊은이가 자동차야말로 장애인의 필수품이라는 인식을 하고 운전면허에 도전했지만 거부당한다. 당국자에게 거부이유를 묻자 법과 제도에 없어서라는 말에 그는 이렇게 반박한다


"정부와 법과 제도가 현실이나 민간에 앞서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어눌하고 부정확한 발음이지만 가장 정확한 저 질문에 장애가 없는 정부당국자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저젊은이는 만약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멋대로 움직이는 양팔때문에 안 된다면 두 팔을 자르겠다고까지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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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다이하츠, 혼다,닛산은 장애인이나 노인을 위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맞춤차량을 제작해서 더 낮은 가격에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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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의 의료보험을 말하면서 박정희전대통령의 위대한 결단을 치하하고 더불어 자신의 건의와 추진덕분이었다고 자화자찬하는 당시 각료나 정치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진보적인 팟캐스트 진행자 중에서도 저런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 사회의 현실에 비춰 앞서 가야할 정부와 법규가 늦어지다 보니 민간이나 기업 또는 개인이 정부를 대신해서 스스로 희생하며 앞장을 섰다. 6.25전쟁과 그 후 가난 때문에 치료 한번 못 받고 죽어가는 참상을 보다못해 장기려박사는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한다. 담배한갑에 100원이던 시절 1인당 보험료를 60원으로 책정하고 의료보험이 뭔지도 모르는 당시 집집마다 방문해서 취지를 설명하고 가입을 독려해서 보험료를 징수하며 힘들게 운영해나갔다.


1989년 7월 1일.

전국민 의료보험 실시로 청십자는 정부에 모든걸 넘기고 조합의 해산을 선언할 당시 부산지역의 조합원 숫자가 무려 23만명이었다.


한 개인의 희생으로 저런 엄청난 결과를 낳았는데 대체 그때 정부는 뭘 했는가? 돈이 없어서 못했다고?


내가 오래전에 써서 딴지에 올렸던 글중에 뉴기니에 관한 글이 있다.


[너희가 게맛을... 아니, 정글을 알어?]

http://www.ddanzi.com/doctuPolitics/984506

 

저 글의 후반부에 뉴기니의 공공의료에 관한 부분이 나온다. 90년대 초의 뉴기니는 우리의 6.25전쟁 당시보다 더 열악하고 빈곤한 원시 부족사회국가였다. 그런 나라에서조차 시행하는 공적의료제도를 대한민국이 돈이 없어 1977년까지 아니, 1989년까지 못했다고? 현실이 문제가 아니라 정권의 실행의지가 문제였다.


의료보험제도는 독일의 비스마르크수상에 의해 1883년 시작되었다. 골수 보수인 비스마르크가 의료보험을 도입한 건 만약 의료보장을 하지 않았다가는 당시 유럽지역에 무섭게 번져가던 공산주의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72년 남북공동성명발표 이후 남북은 서로 대규모 상호방문을 실시했다. 그 와중에 북한은 자신들의 무상의료체제를 자랑하는데 우리는 할 말이 없었고 결국 의료보험 실시를 더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이게 그토록 자화자찬 자랑할 일이었는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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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