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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은 6행으로 단 두 개의 문장으로 쓰여졌다. 그 두 개의 문장은 유사한 구조로 되어있는데, 이런 특유의 운율감 때문에 우리말을 쓰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외울 수 있는 시 중 하나가 꽃이 되지 않았나 한다.


50년대 초에 발표된 이 시에서 김춘수는 가장 서정적인 소재인 ‘꽃’을 제목으로 하고 첫 연의 ‘몸짓’과 대응하는 유의미한 존재론적 전환을 그리고 있다. 스스로 무의미 시론을 주창하였으며 한국 문학사에서 모더니즘의 한 봉우리로 일컬어진다.


그랬던 그가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의 집권여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된다. 그리고 1988년 2월에 열린 전두환의 대통령 퇴임 연회에서 다음의 축시를 읊는다.



“님이시여 겨레의 빛이 되고 역사의 소금이 되소서 (중략)

님이 헌헌장부로 자라 마침내 군인이 된 것은 그것은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천구백칠십구년 가을에서 팔십년 사이 이 땅 이 겨레는 더할 나위 없는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은 우선 그것부터 끄고 봐야하듯이 우선 치안을 바로잡고

우선 인심을 안정시키고 우선 경제의 헝클어진 운행을 궤도위에 올려놓아야만 했습니다 (중략)

님은 선구자요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후략)



누가 읽어도 낯 뜨겁고 오글거리는 이 시와 그의 5공을 통과하는 행적은 시인 김춘수의 가장 치욕스러운 낙인으로 찍혀있다. 후일 그는 이 시기를 “한 마디로 백프로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처량한 몰골로 외톨이가 되어,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어쩔 줄 모르고 보낸 세월”이라고 회고했다.

 

양성우의 시집 『겨울 공화국』은 1980년대 금서였다. 광주 중앙여고 국어 교사였던 양성우는 1975년 2월 열린 YMCA 구국 기도회에서 『겨울 공화국』의 표제시가 되었던 시 <겨울 공화국>을 낭송하고 같은 해 4월 파면된다.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 쉬는 것을 보았는가 (중략)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홧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 대는

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을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중략) 

이럴 때는 모두들 눈물을 닦고

한강도 무등산도 말하게 하고

산새들도 한 번쯤 말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이 만약 게으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과녁으로 나란히 서서

사나운 자의 총 끝에 쓰러지거나

쓰러지며 쓰러지며 부르짖어야 할 걸세

(후략)



김춘수와는 다르게 그는 현실 속으로 들어갔다. 전체 9연 81행의 짧지 않은 이 시에서 양성우는 “차라리 과녁으로 나란히 서서/사나운 자의 총 끝에 쓰러지거나”라며 스스로를 시대의 과녁이 되고자 한 단호한 결의 끝에 서 있음을 선포한다.


파면되었으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에필로그와 프롤로그 그리고 전체 35편으로 쓰여진 <노예수첩>을 타이핑해 지인들에게 돌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이 시가 일본 『세까이(世界)』지에 실리게 되어 중정에 의해 체포되어 1977년부터 1979년까지 박정희 정권 아래서 옥고를 치뤘다. <노예수첩>에서 양성우는



(전략)

나는 보았다

누더기 속에서, 가마니 속에서

나는 보았다

사랑하는 이웃들이 죽어가는 것을,

칼끝에 짐승처럼 죽어가는 것을,

죽어가며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죽어서 열번이나 다시 죽어서

칼든 자의 그늘 밑에 쓰러지는 것을,

저주하라 저주하라

산천초목아

목놓아 가슴치며 울부짖어라

(후략)


 

라고 당시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복권되어 1988년 평화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양천 갑의 지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출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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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기념 사업회 양성우 노예수첩 인쇄본

 

동인지 『분단시대』로 등단한 시인 도종환도 양성우와 마찬가지로 교사였다. 창비시선에서 『고두미 마을에서』를 첫 개인시집으로 출간했으나 대중에게 각인된 것은 아내 사후에 발표한 시집 『접시꽃 당신』 이후다. 시인이, 시인의 시가 대중에게 각인되기란 어렵다. 『접시꽃 당신』은 그런 면에서 도종환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했으나 이 시집이 시인 도종환을 규정하는 전부는 아니다. 첫 시집에 수록된 <죠센 데이신따이(朝鮮挺身隊)>, 4에서는



번개가 지나가는 하늘 아래

우리는 누워 있었습니다.

낮은 데서 바라보는 산들도 이제는 낮고

궐련도막에 빨갛게 불을 붙이며

일본군 고쪼는 등 굽혀 어둠 열어 나가는데

어금니에 물려 떨리는 천둥소리

발톱 끝을 때리는 빗물에도 아파요

늦도록 군표 쪽지나 지전을 세고 있을

늙은 포주의 방엔 불이 흐리게 새고

문 앞마다 걸린 우리들 사진이/빗소리에 흔들리며 가슴 복판 두드려요.

어미니, 젖고 있어요

저희는 누구의 딸이어요”


 

라며 함께 흐느끼고 있다. 정대협이 발족한 것이 1990년 무렵이니 도종환의 문제 제기는 그보다 훨씬 빠르다. 이 시집에서는 표제작 <고두미 마을에서>에는 ‘단재 신채호 선생 사당을 다녀오며’라는 부제가 붙어있고 <흑인 혼혈아 가수에게>,<첫돌> 같은 작품은 민족 모순과 분단 모순에 닿고 있다.

 

『접시꽃 당신』에 수록된 시 <암병동>은 다음과 같다.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믿음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온 세상이 암울한 어둠뿐일 때도

우리들은 온몸 던져 싸우거늘

희망이 있는 싸움은 진실로 행복하여라

참답게 산다는 것은 참답게 싸운다는 것

빼앗기지 않고 되찾겠다는 것

생명과 양심과 믿음을 이야기할 때도 그러하고

정의와 자유와 진실을 이야기할 때도 그러하니

밀물처럼 달려오는 죽음의 말발굽 소리와

위압의 츱츱한 칼바람에 맞서

끝끝내 물러서지 않는 것도

(후략)


 

말할 것도 없이 이 시의 모티브는 아내의 암투병이다. 암이라는 희망 없는 싸움과 점점 믿음이 스러져가는 싸움은 암울할 수밖에 없지만 도종환은 이 속에서 ‘참답게 산다는 것은 참답게 싸운다는 것’이고 ‘빼앗기지 않고 되찾겠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밀물처럼 달려오는 죽음의 말발굽 소리’에도 맞서 ‘끝끝내 물러서지 않는 것’이라며 개인의 싸움을 참되게 살지 않는 것과의 모든 싸움으로 확장해 나간다. 비극에 맞닥뜨린 개인사가 어떻게 외연을 확장하는지 드러난 두 번째 시집에 이어서 발간된 네 번째 시집 『지금은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에서는 교사 도종환과 그가 맞닥뜨린 현실의 싸움으로 다시 한 번의 전환을 맞이한다. 표제시 <지금은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의 전문이다.



나는 또 너희들 곁을 떠나는구나

기약할 수 없는 약속만을 남기고

강물이 가다가 만나고 헤어지는 산처럼

무더기 무더기 멈추어 선 너희들을 두고

나는 또 너희들 곁을 떠나는구나

비바람 속에서도 다시 피던 봉승아 잎이 안개비에 젖고

뒤뜰에 열 지어 선 해바라기들도 모두 고개를 꺾었구나

세월의 한 굽이가 이렇게 파도 질 때마다

다 못 나눈 정만 흥건히 담아둔 채 어린 너희들의 가슴에 잔물지는 아픔을 심는구나

나는 다만 너희들과 같은 아이들 곁으로

해야 할 또 다른 일을 찾아 떠나는 것이라고 달래도

마른 버즘이 핀 얼굴을 들지 못하고 어깨를 들먹이며/아직도 다하지 못한 나의 말을 자꾸 멈추게 하는구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이 짧은 세상에 영원히 같이 사는 사람은 없지만

너희들이 자라고 내가 늙어서라도 고맙게 자란 너희들의 손을 기쁨으로 잡으며

이 땅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

하나 되어 꼭 다시 만나자.

 


교사 도종환은 1989년 전교조 설립에 앞장섰고 해직됐다. 참되게 살지 않는 것과의 싸움이 예정돼있었던 도종환에게 이 싸움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것이었고 이 싸움은 도종환에게 ‘너희들과 같은 아이들 곁으로’ 가는 것이었으며 ‘해야 할 또 다른 일을 찾아 떠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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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도종환은 19대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섰다. 몇 번의 우연이 있어서 등단 전의 도종환과 『접시꽃 당신』 후의 도종환을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국회의원 도종환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러다 어느 기사에선가 국회의원이 된 도종환의 사무실로 배달된 근조 화분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시인으로서 혼탁한 정치판에 들어섰으니 시인 도종환은 죽었다라는 의미의 근조화분이었을 것이다. 도종환은 그 화분을 책상 옆에 두고 물을 주며 자신이 국회에 들어선 의미를 되새기고는 했다는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대사에서 김춘수, 양성우와 도종환 말고도 시인이 정치를 한 적이 있는지는 과문한 탓에 잘 알지는 못하지만 유학을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시가 정치가의 덕목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도종환 시인이 출마한 곳은 노영민 의원의 지역구였다. 노영민 의원의 시집 강가 문제가 되어 출마하지 못한 지역을, 다시 도종환 시인이 물려받은 것이다. 노영민 의원 이전에도 심심치 않게 국회의원이 시집을 낸다는 소문은 들었으니 정치가의 호사 중에 하나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다. 시와 정치는 어떤 관계일까?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와 송몽규의 취조가 끝나자 일경은 진술서를 내밀어 서명을 강요한다. 송몽규는 일제에 맞서 재일 유학생들을 규합했다는 진술서에 제대로 싸우지 못한 스스로에 분노하며 서명한다. 반면 윤동주는 그림자처럼 살아온 스스로를 참회하며 진술서를 찢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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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부터 송몽규는 불의와 맞서지만 윤동주의 시선은 내면으로 향해 있다. 고등학생 때부터 고향을 떠나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총을 든 송몽규와는 달리 윤동주는 시를 쓴다. 그렇게 내면으로 스며든 윤동주에게도, 그러나 일제는 시인을 시인으로 죽게 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시인도 시인의 내면에 외부의 불의함이 충돌하여 올 때, 그 불의함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저항한다. 선택은 의지를 지닌 개인의 몫이다. 죽을 때까지 개인의 삶을 살거나 아니면 세계와 맞서 싸우다 죽을 수도 있다. 도종환도 송몽규,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싸움을 선택했다.

 

손혜원이 좋아하는 의원이 도종환이라고 말한다. 부드럽지만 강한 사람이라고, 달변은 아니지만 함축하여 자신의 생각을 잘 얘기하는 의원이다라고 평한다. 나는 그가 정치인으로 싸움을 계속하기를 원한다. 지난 4년 국회의원으로 교과서를 손에서 떼지 않고 싸워온 이유가 있다고, 불의한 정권에 맞선 그의 싸움에 분명히 큰 명분이 있다고 믿는다. 도종환의 건투를 빈다.






편집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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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 독투 풍금


편집: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