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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4. 23. 월요일


정우성


 



 


 


<선행학습은 반칙이다>


 


나는 반칙이 싫다. 반칙을 권하는 것은 더욱 싫고, 반칙을 하고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며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을 볼 때마다 비참한 기분이 든다. 작은 반칙에 너그러우면 큰 반칙에 대해 면역력이 생긴다. 그게 무서운 것이다. 그러면 공정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의 인생을 뒤흔들고 좌절감에 빠지게 만든다. 사람들이 그런 선량한 좌절감을 동정하지 못할 망정 비웃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정말로 끔찍한 일이다. 반칙은 가장 나쁜 꼼수다.


 


선행학습은 반칙이다.


 


선행학습은 학교에서 아직 배우지 않은 것을 정규과정에 앞서 미리미리 공부하는 것이다. 부모가 선행학습을 시킬 수도 있고 사교육 시장을 이용할 수도 있다. 공교육의 교과과정이라는 게 있다.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일단 사회적으로 합의된 교육 순서이며, 이 정규과정에 맞춰서 아이들을 훈육하게 된다. 출발선이 있고, 여러 가지 이정표가 있으며, 단계가 있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참여하여 만든 건축물이다. 그런데 선행학습은 호루라기를 불기 전에 아이를 출발선보다 앞에 놓고 거기서 시작하도록 만든다. 선행학습은 교과과정이라는 건축물에서 주춧돌과 벽돌을 빼내고 함부로 철거하는 행위다. 명백히 반칙이다.


 


 


‘예습’은 예전에도 있었지 않았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터무니없다. 예습은 미리 읽어보고 대충 감을 잡는 것이지 사교육을 통해서 ‘마스터’하는 것을 일컫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선행학습은 나이에 맞는 교과과정을 무시하고 미리미리 마스터하는 교육이다. 유치원생이 초등학교 과정을 공부하고, 초등학생이 중학생 과정을 공부하고, 중학생이 고등학생 과정을 미리 공부하는 것, 모두 입시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선행학습은 아이들을 타락시키고, 선생들을 타락시키며, 국가의 교육정책마저 타락시키는 가장 안 좋은 반칙이다. 그런데 이것을 아이의 부모들이 나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부끄럽지도 않게 너무나 당연히 자행한다. 사회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에서 반칙을 권하므로 사회 전체가 반칙 사회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이상한 반칙을 하고, 정치인과 관료와 기업가가 납득하기 어려운 반칙을 하며, 교수가 남의 논문을 표절을 하더라도 쉽게 잊혀진다. 부모가 아이에게 반칙을 권하는 사회이므로, 홍길동이 성춘향에게, 성춘향이 이몽룡에게, 이몽룡이 임꺽정에게 반칙을 권해도, 서로서로 손을 잡고 반칙을 해도, ‘남들이 하니까 우리도 하는’ 반칙은 오히려 권장사항이 돼 버렸다. 도덕적으로 둔감한 사회다. 나는 이런 사회에서 아이를 키우는 아빠다.


 


선행학습은 쫄아서 그런 거다


 


부모들은 선행학습을 시키면서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다른 사람도 하는 일종의 관습과 관례가 되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동참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하는 것이다. 그래도 남이 도둑질을 한다고 나도 나서서 도둑질을 할 수야 없지 않은가. 물론 이렇게까지 선행학습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필요까지야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선행학습은 도둑질임에 틀림없다. 아이의 오늘을 도둑질하고, 교육의 가치를 쌓아올리는 벽돌을 훔치는 행위이므로 내가 나서서 하기도 그렇고 남한테 권장할 수도 없는 딱 그런 것이다. 선행학습의 효과가 좋으냐 안 좋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도덕적이냐 그렇지 않으냐의 문제다.


 


 


그럼에도 많은 부모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아이들을 선행학습시키는 이유는 쫄아서 그렇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 쫀 것이다. 그 미래를 살아갈 아이가 쪼는 게 아니라, 그 부모가 앞장 서서 쫄아서 그런 거다. 미래는 불확실하다. 불확실한 미래에서 가장 확실한 대책은 순위 경쟁에서 꼭대기를 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돈과 권력을 확보해 놓으면 된다는 생각. 하지만 이건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첫째, 부모의 기획에 맞게 세상이 돌아가야 된다는 전제가 붙는다. 하지만 세상의 상상력은 당신의 생각이나 당신이 가지고 있는 책보다 훨씬 풍부하다. 어떻게 바뀔 지 아무도 모른다. 부모의 상상력으로 이 시대의 미래와 아이의 미래를 엿볼 수 없다. 입시 시스템이 바뀔 수 있고, 바람직한 인재상이 바뀔 수 있다. 둘째, 선행학습이 장기적인 성과를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행학습은 단기적인 성과만 보장할 뿐, 인생 자체를 성공으로 이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학습의욕을 떨어뜨리고, 대인관계를 흐트러트리며, 아이의 인성 또한 망칠 수 있다. 셋째, 선행학습은 부모의 비교문화에서 비롯되는 특징이 있다. 내 아이가 뒤쳐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다 알다시피 행복은 상대적이다. 여기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아이가 행복한 기분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길과, 다른 하나는 부모가 행복한 기분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길이다. 이 두 길 중에서 당신의 자식 사랑은 어떤 길을 선택하고 있는가? 이 길로 가면 아이가 순위경쟁에서 1등을 할 수 있다. 대신 아이의 가랑이를 찢어야 하며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고 가야 한다. 저 길로 가면 아이가 순위경쟁에서 뒤쳐질 수 있다. 대신 아이는 자기 보폭으로 걸으며 환한 미소를 가질 수 있다. 이 길과 저 길 사이를 당신이 선택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어떤 길을 선택하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명쾌하다. 하지만 부모들은 정답을 잘 알면서도 다른 길을 선택한다. 내 아이가 뒤쳐져서는 안 된다는 부모의 자존심이다. “엄마, 아빠 정신차리세요.”


 


 


이런 시대에도 쫄지 않는 부모가 있다. 자기 아이의 인생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는 부모다. 반칙을 반칙으로 생각하는 부모다. 나는 이런 부모야말로 찬사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를 찬사 해야만 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셈이지만, 어쨌든 그들이야말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이런 부모들에게 자기의 치부를 보이면서 너희들도 반칙에 동참하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너, 니 아이에게 관심은 있는 거니? 다른 아이들은 다 이렇게 공부하고 있어. 그렇지 않으면 따라잡을 수가 없어. 미쳤니. 애 인생 망칠 거야?”라고 공격적인 조언을 한다. 반칙을 권한다. 그러나 아이를 망치는 것은 다름아닌 당신이다.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고도 아이들은 훌륭하게 배우며 학습하고 성과를 낼 수 있다. 학교에서 배우고 배운 것을 복습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일이다. 게다가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으면 아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단, 반칙이 만연된 사회에서는 반칙을 하지 않는 아이들이 이상한 것이고, 그래서 정상적인 아이의 자존감을 오히려 걱정해야 한다. 하지만 반칙을 가르치면서 아이의 자존감을 높이면 괴물이 되지만, 규칙을 가르치면서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면 한 인간으로서 무럭무럭 자란다.


 


우리의 몫은 보통아이를 키우는 것이다.


 


우리는 대통령을 키우는 게 아니다.


기업의 총수를 키우는 것도 아니고 천재를 키우는 것도 아니다. 육아와 훈육의 기본은 그저 “보통아이”를 키우는 것이다. 아이들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남의 생명과 존엄성을 함부로 짓밟지 않는 사람으로, 최소한의 양심과 도덕을 지닌 사람으로 키우는 게 인간의 정상적인 양육과 훈육의 모습이다. 그냥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워 하고, 죄스러운 일을 죄스럽게 여기며, 슬퍼할 일에 슬퍼하고, 화가 날 일에 분노하는 그런 지극히 보통의 사람 말이다.


 


대통령감


 


수백만의 아이들 중에서 아인슈타인이 몇 명 나올 것이고, 세익스피어가 또 몇 명 나올 것이며, 모짜르트가 몇 명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런 천재는 아예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기업의 총수가 나올 가능성은 또 얼마며, 대통령이나 권세를 누리는 정치인이 될 가능성은 또 어떻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혁신적인 인물이 나올 가능성은 얼마나 되겠나? 0%일 수 있고, 0%가 아니더라도 로또에 당첨되는 확률만큼 0%에 수렴될 수도 있다. 사랑이 눈을 멀게 할 수는 있어도 조금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자기 아이가 천재가 아닌 것쯤은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부모가 노력해서 천재가 되는 거라면 우리나라는 천재로 가득해야 하는데 눈을 씻고 주위를 살펴보라. 누가 있는가? 괜히 아이들의 가랑이를 찢지 말자.


 


우리 그러지 말자.


우리의 몫은 그저 보통 아이를 키우는 것이다. 옛날 부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를 키웠고, 그것도 다섯 형제나 일곱 남매를 그냥 보통으로 키웠는데, 요즘은 보통 아이를 키우는 게 정말로 어려워졌다. 친구들이 부동산 투기를 해서 한몫 챙겼는데 나만 하지 못하면 바보처럼 생각되기도 하는 그런 세상이다. 부동산 투기를 잘못하면 빚더미에 앉고 파산한다. 하지만 아이를 투기의 대상으로 삼으면 경제적인 파산까지는 이르지 않겠지만(물론 경제적인 부담은 매우 크겠지만), 아이들의 햇빛냄새 나는 시간을 망칠 수 있고 괜히 늙어서 지우기 어려운 죄책감에 시달릴 수도 있다. 우리 그러지 말자. “다 너희를 위한 거야!”라고 거짓말하지 말자. 여기 썩 괜찮은 혼잣말 주문이 있다. 혼잣말을 해보는 것은 때로 큰 위로와 용기를 불러준다. 너그러워진다.


 



“나는 천재를 키우는 게 아냐.”


“우리 아이는 그저 보통 아이야. 건강하게 잘 크고 있어.”


“우리가 뭐 대통령을 키우는 것도 아니고.”


“우리한테는 정말 특별하지만, 다른 사람한테까지 특별한 것은 아니지.”


“괜찮아. 꼴등할 수도 있지.”


“어차피 미래는 몰라. 오늘 이 순간이 중요해.”


“세상이 미쳤어. 나는 미치지 말아야지.”



 


선행학습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망친다


 


선행학습이 어떻게 교육체계를 무너뜨리고 아이를 망가지게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자. 선행학습은 먼저 선생님에 대한 아이의 존경심과 부모의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아주 확실하게 무너뜨린다.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는 결국 “가르침”을 매개로 한다. 물론 선생님의 인품도 큰 매개점으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가르침을 주고 가르침을 받는 관계에서 상호 존중감이 생기는 것이다. 선생이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을 때, 그리고 그 사실을 학생이 눈치챌 때 이 관계는 이미 파산을 앞에 두고 있는 셈이다.


 


 


아이에게 첫 선생님이 생겼을 때, 선생님이란 정말로 중요한 존재로 다가오는 것 같다. 딸아이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배워온다. “선생님이 그랬어”라고 말하면서 여러 가지 배운 것들에 대해서 아빠에게 자랑을 한다. 아빠는 그랬구나라고 답하면서 아이를 칭찬해 준다. 아이는 선생님이 뿌려주는 모이를 열심히 먹는 병아리처럼 그렇게 선생님의 말씀을 먹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아빠가 어린 남동생에게 ‘예쁘다’고 말을 해주자, 딸아이가 하는 말,


 



“아빠, 남자는 예쁜 게 아니라 ‘멋지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여자는 ‘예쁘고’, 남자는 ‘멋진’ 거예요. 그렇죠?”


“누가 그렇게 말했니?”


“유치원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음.. 그렇지는 않아. 남자한테도 ‘예쁘다’라고 말할 수 있고, 여자한테도 ‘멋지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거야.”


“아니라니까. 선생님이 아빠보다 더 똑똑해. 여자는 ‘예쁘고’, 남자는 ‘멋진’ 거예요!”


“아니야. 아빠가 선생님보다 나이도 많고 훨씬 오래 살았어. 그리고 아빠도 똑똑해. 선생님도 틀릴 때가 있어.”


“아니야.”


“그럼. 선생님한테 물어 봐.”



 


그리고 며칠 후였다. 딸아이가 아빠 몸에 바싹 다가와서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빠, 비밀 이야기가 있어.”


“뭐?”


“있잖아. 선생님이 그러는데 아빠 말이 맞대.”


“그렇지? 아빠 말이 맞지?”


“그런데 아빠. 이거 비밀이야 비밀. 선생님도 실수할 때가 있는 거니까. 아무한테도 말하지마. 비밀이야 비밀. 아빠 알았지?”



 


이때 나는, ‘이렇게 작은 아이한테도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정말 소중한 거구나’, ‘아이가 나서서 선생님을 지켜줘야 할 정도로 소중한 존재구나’ 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래,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아이들은 선생님을 통해서 많은 지식과 가르침을 받는 것은 사실이니까. 부모가 모든 것을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선행학습이 아주 잘 이루어지면,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배울 게 없어진다. 선생님은 늘 다 아는 이야기만 한다. 이것도 하루이틀이지, 뻔한 이야기만 하는 선생님의 이미지가 몇 년이고 축적이 되면 선생님은 단지 권력의 상징이지 존경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게 된다. 선행학습은 아이들의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반드시 아이들의 존경심만이 문제가 아니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이미 부모들도 안다. 학교에서 새롭게 배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그저 선행학습의 효과가 더욱 빛을 발휘할 수 있는 성적올리기 방법론을 선생들이 얼마나 잘 수행할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 부모의 입장에서도 선생님은 존경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권력의 상징이요, 보챔의 대상이요, 비난의 대상이 된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렇다.


 


선행학습은 교사를 타락시킨다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는 부모에게 가장 큰 당혹감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선생의 타락이다. 교사가 정해진 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교사가 수업을 방치한다. 이미 아이들이 다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수업이 부실해진다. 선행학습을 한 아이에게 수업의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반칙을 한 아이는 오히려 대접을 받고, 반칙을 하지 않은 아이들은 오히려 밀려난다. 이게 왠 뚱딴지냔 말이다.


 


 


정의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1학년 교사는 1학년 교과과정의 내용으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 10학년 교사는 10학년 교과과정의 내용을 준수해야 한다. 30명 중에서 25명이 반칙을 하여 교사가 가르칠 내용을 이미 마스터했다고 하더라도, 반칙을 하지 않은 5명을 위해서 수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다수의 원칙이 이상하게 작동된다. 25명을 위해서 5명이 희생해야 한다. 물론 교사의 고뇌를 모르는 게 아니다. 당연히 교사도 고뇌하겠지. 하지만 쉽게 타협해서는 안 된다. 학교는 영어와 수학 등의 과목만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인성을 가르쳐야 한다. 단기적으로 그 수업시간에는 유리할 수 있을지언정 잘못된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만일 현장에서 교사의 타락이 지속된다면, 교과과정 전체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 본다. 교사의 타락이 깊숙이 진행된 과목의 학습시간을 대폭 줄이고 그렇지 않은 과목의 시간을 늘려가는 정책이다. 공교육을 위해서라도, 공교육이 반칙에 타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아이들의 인성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방정식과 미적분을 몰라도 인생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영어를 못해도 사람으로 존중받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지식과 지혜는 구별될 수 있다. 수학과 영어와 과학 과목에 배당된 시간을 대폭 줄이고, 철학과 논술과 국어 시간을 늘리는 것도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만연된 선행학습은 교사를 타락시킨다.


 


선행학습은 아이의 마음을 갉아먹는다


 


선행학습이 무서운 것은 아이의 마음을 갉아먹는다는 점이다. 정말이다. 학교는 배우러 가는 곳이지, 자기의 지식을 뽐내러 가는 곳이 아니다. 배움이 즐거우면 지치지 않지만, 지식을 뽐내는 것은 지치게 마련이다. 우선 선행학습에 투자되는 시간과 노력 과정에서 아이들이 지칠 수 있으며, 선행학습의 약발이 떨어져서 나보다 못했던 아이가 자기를 추월할 때 자랑도 쓸모 없게 된다. 격화된 경쟁 속에서 부모가 비교를 멈추지 않으면 아이들도 계속 비교하게 된다. 아이 스스로 비교를 멈출 수가 없다.


 


 


배움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중년을 넘긴 어른도 좋은 책을 읽고 새로운 배움을 얻게 될 때 바로 그 순간은 ‘인생의 겸손’을 실감하게 된다. 배우면 배울수록 사람은 둥글고 순해진다. 아이는 다른 동급생 친구에게 물어 보며 배울 수도 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 속에서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까지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선행학습은 그럴 자연스러운 기회를 빼앗는다. 배움에 관한 아이들의 마음을 뾰족하게 만든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타인이 들어가 쉴 빈 공간이 있다. 선행학습은 그 공간조차 빼앗는다.


 


진실로 선행학습을 할 시간에 더 좋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생각과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아이에게 아이의 시간을 돌려주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예외적으로 아이가 월반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천재라면 모르겠다(대개 그런 천재는 부모가 눈치를 챈다). 그렇지 않다면 아이를 자유롭게 그냥 놓아두자. 학교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부모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만일 공부에 뜻이 있고 또 스스로 즐거워한다면 공부하도록 하는 것.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부모가 결심하면 그렇게 된다. 아이 인생이 깊숙이 개입한 부모의 발을 좀 빼면 된다. 부모 앞에는 부모의 인생이 있다.


 


선행학습은 아이의 상상력을 죽인다


 


오늘날 시대는, 그리고 앞으로의 시대는, 창의력과 상상력과 행복감이 성적이나 출신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쟁은 어디에나 있지만 지식의 양은 대동소이하다. 비즈니스 세계를 예로 들자면(어차피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의 취업을 걱정하니까), 치열한 경쟁 속에서 경쟁기업 간의 격차는 점점 줄어든다. 그래서 많은 기업들이 혁신을 소망한다. 하지만 혁신은 함부로 오지 않는다. 종전의 질서를 전복하는 상상력이야말로 비즈니스의 혁신을 부르고, 그것이 세상을 바꾼다. 하지만 그런 전복적 상상력은 매우 위험하고 불안정해서 관습에 맞지 않은 면이 있고, 게다가 누구에게나 제법 쓸 만한 상상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과 같은 성적 지향의 시스템에서는 상상력이 제대로 발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상상력은 자유롭고 흥미로운 사고와 집중된 생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선행학습은 아이의 상상력을 죽이는 행위다. 첫째, 선행학습은 자유롭고 흥미로운 사고의 적이다. 선행학습을 위해서는 방과 후에도 열심히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의 자유가 박탈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어서 기본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아이들은 관습과 시스템에 익숙해진다. 아이들도 인간이고 눈치가 있어서 이게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체념하듯이 순응한다. 아이들은 인내할 뿐이고 세상은 흥미롭지 못하다. 여기서 무슨 상상력의 발육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둘째, 선행학습은 집중을 잃게 만든다. 학교에서의 수업시간을 모두 합치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다. 이 시간의 집중을 헛되게 보낼 수 있다. 우리 어른들도 친구와 갑론을박을 하다가,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가 무엇인가 정리되는 경험을 우리는 살면서 많이 겪는다. 그것이 언어의 능력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대화와 말에 생각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행학습은 생각의 집중을 잃게 만든다. 이런 관점에서도 상상력은 요원하다. 불행한 일이다.


 


 


아이의 인생은 부모 하기 나름이라거나 자기 아이가 남에게 뒤쳐지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조급함이 아이를 불행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그런 부모의 마음이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을 붕괴시킬 수도 있음을 잊지 말자. 공교육의 최대의 적은 사교육이 아니다. 공교육의 최대의 적은 아이의 인생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부모의 탐욕이다. 아이의 인생을 부모의 힘과 마음으로 지탱하는 거다. 부모가 아이를 지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부모가 아이를 서포트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이의 등에 태엽을 감는 것이고 아이를 지치게 하는 것이다. 아이에게는 아이의 인생이 있고, 부모에게는 부모의 인생이 있다. 마치 홍길동은 홍길동의 인생이 있고, 성춘향은 성춘향의 인생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는 부모의 머릿속에서 사는 게 아니다. 아이의 인생은 부모의 기획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니다. 아이의 꿈은 부모의 기대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다. 이것을 뻔히 알면서도, 또한 “애들이 불쌍하지”라고 문득 생각을 하면서도, 수많은 부모들은 여전히 아이들을 보챈다. 자기 아이의 “실력”과 “수준”이 다른 아이와 비교하여 인정받기 원하는 부모의 욕망. 우리도 어렸을 때에는 비교되는 것을 정말로 싫어하지 않았나. 우리 그러지 말자.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으면 부모와 아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성적이 좋으면 마음껏 칭찬할 수 있어서 좋고, 성적이 나빠도 너그러울 수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성적표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아빠다.


 


 


정우성

twitter:
@hanaeserin


두 아이의 아빠, 변리사, <특허전쟁> 저자, 곧 후속편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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