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2. 4. 24. 화요일

문화불패 유리에선나무


 


이글은 [선행학습은 반칙이다]라는 테제에 대한 안티테제이다. 교육은 이번 대선의 주요 안건 중 하나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교육문제는 우리 사회에 곪디곪은 종기인 것이다. 그러기에 딴지와 같은 기층에서 교육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고, 토론이 더 활성화 되길 바란다. 고로 나는 제목을 과격하게 잡았다. (사실, 발제한 정우성 님의 문제의식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니 제목만 보고서 답글로 반박하지는 말자)


 


나는 선행학습은 선(善)도 악(惡)도 아닌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굳이 선, 악으로 규정하라 한다면 현재의 교육여건(이것이 중요하다) 하에서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몇몇의 예외를 통해 다수가 참여하는 현상에 대해 반론하려 들지 말아라(나 또한 그 예외에 속하므로 더더욱). 대부분의 학부모가 동참하는 사회현상은 당위성을 뛰어넘은 그 무엇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나는 선행학습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만들어내는 모순이 극대화되면 잠시 움츠러들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반격하며 주된 학습법으로 부상하기를 몇 차례 반복하다, 한 100년 쯤 후에는 자취를 감추지 않을까 한다. 100년이라고? 너무 긴가? 우리의 차고 넘치는 교육열과 선행학습이 만들어내는 모순에 집착한 나머지 그것을 반칙으로 규정하고 그 가지만을 치려하는 우리의 인식수준을 감안하면 200년이 될지도 모른다.


 


이 글은 우선 왜 선행학습이 사회 주된 현상, 최선인 현상으로 자리잡을 수밖에 없는 지에 대해 논증하려 한다. 그것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문제의 핵심이 선행학습에 있지 않음을 밝히고, 그것에 대처하는 우리의 안일함과 [선행학습은 반칙이다]라며 감히 선언하는 무지를 드러내려 한다.


 


I. 최선으로서 선행학습론


1. 선행학습의 탄생 배경


우리는 아이를 낳으면서 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지만 그것은 단지 개념일 뿐이다. 애초 우리는 단지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하지만, 옹알이 하던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호기심에 가르쳤던 한글과 숫자, 알파벳을 아이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 그제야 우리는 아이가 앞으로 겪게 될 교육과정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다.


 



 


초등학교 입학을 압둔 아이를 가진 부모들은 대개 두 가지 행동양식을 취한다. 선행학습에 적극적이거나 그것에 부정적이거나. 하지만 어느 현상이나 그러하듯 두 무리를 이끄는 리더가 있기 마련이고, 이들 대부분은 현명하다. 즉, 선행학습을 시키든 아니든 상황상황에 맞게 선택을 잘하며 아이를 잘 기를 수 있다는 확신을 이들은 가지고 있다.


 


2. 두 개의 신화.


그리고 교육에 성공한 신화는 앞서 기술한 두 그룹의 리더들로부터 탄생한다.


 


우선 선행학습에 적극적인 부모를 살펴보자.


 



 


수학을 예로 들겠다. 교육열이 대단한 이들은 자신의 학창시절을 떠올려 보고서 고등학교 수학이 초중학교에 비해 양과 질이 비약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초중학교 수학은 그럭저럭 할만하다. 그렇다면 저 그릇 안에 담긴 밥을 20년 간 나누어 먹는 것이 더욱 낫지 않을까? 기왕 하는 것 조금 일찍부터 조금씩 나누어 먹기 시작하면 안 될까? 어차피 수학의 양은 건국 이후 변하지도 않았고, 교과과정도 일본과 미국의 것을 그대로 베껴와 검증된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 아닌가? 행여 우리 아이가 특목고나 서울대, 카이스트 혹은 의대를 가고자 한다면 그 상황에 맞추어 여유있게 대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에서도 어느 대학 나왔냐고 묻는 것으로 그 생활을 시작하고, 스카이 대학 나왔다면 일단 먹어주고 시작하잖아. 예습하는 셈 치고 조금씩 앞당기자!


 


이 학부모의 선택이 반칙인가? 20년 동안 공부해야 할 수학의 양은 많고, 그 학문적 특징이 해석학이라는 큰 틀로 수렴하는 고등교육은 반복구조 속에서 중학교에서도 이루어지므로 현명하다고 할 수도 있다. 주어진 여건하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 사춘기, 질 나쁜 친구,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의 이상발작은 늘어나는 털과 함께 음흉한 상상력도 늘어나게 하고 반대로 학습의욕은 떨어뜨린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성취도가 떨어질 수도 있는 고등학교 초기에 그러한 변수들의 영향을 최소화하려는 노력. 더구나 고등학교 진도는 너무나 빠르기까지 하다. 양도 많고 어려운 내용이 빠르기 까지 하니 삐끗하면 낭떨어지 행이다. 그러한 환경변수들을 극복하려는 이러한 노력을 반칙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이러한 노력들로 인해 선행학습을 주도하는 학부모 밑에 있는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학과 내지는 대학을 진학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 선행학습에 반대하는 학부모를 보자.


 


이들은 아이들의 존엄성을 인정하며,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교육의 최종목표는 개인의 행복내지는 인격의 완성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나는 이러한 가치관이 좋다). 이들은 물고기를 잡아 아이 앞에 제시하는 대신 물고기 잡는 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학습의 성취도 보다는 학습하는 방법을, TV와 인터넷보다는 독서를, 주입식 교육보다는 대화를 선호한다. 아이가 진로를 결정할 순간이 오면 그 아이의 선택을 중요시하는 대신 그 선택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아이 곁에 항상 부모 자신이 서있다고 강조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설명이 더 필요없다.


이 아이는 훌륭한 인격을 가질 확률(!)이 높다.


 



 


3. 두 개의 신화를 따르는 무리...


 


앞서 말한 두 부류의 부모들 처럼 부모가 고민하여 결단을 내리고 관심있게 곁에서 지켜본다면 선행학습을 하든 하지 않든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고 그것은 그야말로 개인의 가치관의 문제이자 선택의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이 두 개의 성공신화를 따르는 무리에서 발생한다. 대개의 부모들은 교육에 대한 정보와 철학이 부족한 상태에서 자녀를 학교에 보낸다. 더구나 학교에 대한 불신은 너무나 팽배하다. 그러기에 자연스럽게 이웃의 공부 잘하는 아이의 부모에게 교육 노하우를 획득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그래서 그 공부 잘하는 아이가 선행학습을 하면 선행학습을, 선행학습을 부정하면 또한 그것을 따라한다. 개인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 같지만 이는 심리학에서 숱하게 논의한 것이니깐 건너뛰자. 우리의 이웃들은 단지 자신의 귀에 더욱 그럴듯하게 들리는 선택지에 손을 내밀기 마련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변수가 등장하는데 바로 사교육이다. 공교육에서 학부모들을 초청해 대화하는 것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가능하지만 사교육은 아이가 말을 배우면서 간혹 그보다 전부터 접촉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의 상품을 구매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스키너를 위시하여 그럴듯한 학자들을 들먹이며 선행학습론을 설파하기 시작한다. 졸라 그럴 듯한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이론에 근거하여 공교육도 세팅되어 있다. 다만 불쌍한 우리의 이웃은 그러한 사실을 모를 뿐이다.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놓고 자유시간을 갖고자 하는 엄마의 욕구, 혹은 안심하고자 하는 직장생활하는 엄마의 심정. 친구들이 다들 학원에 가있어 친구 찾아 학원을 향해야만 하는 아이들의 처지는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우리는 오직 선행학습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하므로.


 


선행학습을 하지 않는 것을 흉내내는 엄마들의 심리는 그것을 주도하는 엄마들의 가치관에 동의하면서도 일정정도 운명론적인 경향을 지니고도 있다. 이를 테면 "공부할 놈은 하겠지 뭐...", "공부하나 안 하나 마찬가지더라." 등등.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대개 두 개의 가치관을 주도하는 부모들은 성공한다. 학습과 인격 모두를 건지는 경우가 있다.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경우가.


둘 다 건지지는 못해도 적어도 자신이 교육목표로 삼았던 것은 성취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화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두 개의 신화를 따르는 엄마들은 성공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문제는 좌절하는 경우의 반응이다.


선행학습을 꾸준히 하다가 좌절하는 경우, 부모들은 보통 이런 반응을 한다.


"그거(선행학습)라도 했으니 우리 아이가 대학은 간 거지 뭐..."


선행학습을 하지 않고 좌절하는 경우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이를 놀렸어요. 저는 때가 되면 알아서 할 줄 알았죠."


전자는 자신은 할만큼 했다는 자기만족이 있고, 후자는 책임을 방기해 아이를 망쳤다는 부채의식이 있다. 실패했다는 사실은 같지만 이러한 차이가 꽤나 중요하다.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한 가지 더 말하도록 하겠다. 이것은 유전학에 관한 이야기이다.


 



과학잡지 뉴톤 2009년 11월호 무단발췌.. 이 잡지는 아주 훌륭한 잡지다. 많이 읽자..그러므로 무단발췌를 용서해주길.


 


위의 표는 도쿄의 어느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 중 쌍둥이들만을 연구한 자료이다. 교육학에서 주로 사용하는 방법인데, 쌍생아법이라 불린다.


표의 내용은 사회와 과학은 유전적 요인이 강하고, 국어와 수학은 환경적 요인이 강하다는 것이다. 조금 의외이지 않은가? 우리는 보통 사회와 과학은 노력으로 가능하다 여기고 국어, 수학은 머리와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말이다.


 


위의 데이타는 선행학습법이 효율적일 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왜냐면 대학에서 요구하는 변별력은 국,영,수에 달렸기 때문인데, 그것은 환경적 요인이 강하단다.


국영수는 유전적인 요인보다는 환경적인 영향을 더 받으므로 선행학습을 통해 환경적 변수를 통제하는 것은 어찌보면 합리적이다.


 


자, 이쯤에서 중간 결론을 내려보자.


선행학습은 학습방법 중 하나이고 이것은 선택의 문제이지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환경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 국영수는 그 변수를 적절히 통제하므로 학습효율을 끌어올릴 수 있다.


또 하나, 학부모가 학습방법을 선택하여 자녀를 교육하는 경우 그 결과가 실패했다고 결론이 난다면 선행학습을 선택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낙관적이다. 이것은 선행학습법이 다수의 학부모에 의해 선택되는 주요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선행학습법을 선택한 학부모가 부끄러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학습법과 아이의 인격의 문제는 상호 연관이 있기는 하지만 분리되는 측면도 있고, 선행학습법을 반칙으로 규정하고 사회전체의 반칙으로 확대하는 것은 비약이다. 아이의 윤리적인 문제는 가정교육내지는 학교에서의 윤리교육에 맡겨야 한다는 반론에 부딪히면 무력화되기 쉽다.


 


사실 선행학습은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 않는다. 아이들을 지켜보면 교육에 저항하는 요소, 학습을 방해하는 심리적인 측면, 잘못된 습관 등이 선행학습을 해도 학습성취도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자꾸만 반복학습을 해서 시간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문제가 전혀 다른 측면에 있다는 반증이다.


 


또한, 엄연히 불확실한 미래가 있는데도 부모들에게 '쫄지 마'라고 하는 것은 돈과 충분한 인문학적 기반을 갖추지 않은 부모들에게는 가혹하기까지 하다. 위험에 긴장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걱정하는 것은 동물적 본능이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정지'라고 하는데 뇌의 변연계에서 작동한다. 인간들 중에는 영장류의 뇌인 대뇌피질이 변연계를 누르기도 하지만 대개는 변연계의 본능적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고, 불행하게도 이 나라는 점점 더 야생의 정글이 되어가고 있는데 그 불안을 보고도 쫄지 말라고 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방어를 하지 말라는 말로서 무책임하기 그지없다. 쫄지 말라고 외치기 보다는 문제의 핵심을 제거해서 덜 쫄아도 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II. 논의의 발전


그럼에도 선행학습은 문제가 있다. 현재 상황에서 효율이 높다고 해도 부작용조차 부정할 수는 없다. 내가 구구절절 선행학습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선행학습은 반칙이다'라고 아무리 외쳐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몇 사람에게 영향은 줄 수 있을지언정 다수의 대중은 또 선행학습을 선택할 것이고, 논리는 언제라도 반대논리에 의해 무력화될 수 있다.


선행학습은 스스로 자라 악이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50년 전에도 있었다. 그래서 전두환은 과외를 금지하기도 했다. 그때에는 부유층만 하던 사교육과 선행학습이 이제 살 만해져서 다들 하는 것뿐이다.


 


또한 선행학습이 호출하는 많은 문제들은 선행학습이 사라진다고 해서 같이 없어지는 것또한 아니다.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그 문제들은 선행학습이 기능하게끔 하는 그 구조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니 선행학습의 유무용론으로 문제를 이끌고 나가면 어느 순간 엉뚱하게도 낯선 산 위에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갈등은 더욱 커져 있을 것이고, 해결도 나지 않는다.


 


진보가 왜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는가? 그것은 충분히 공감할만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구조적 인과론 안에서 파악하지 못하고 자꾸 이분법을 강요한다. 왜냐? 그것이 편리하고 효율적일 것 같으니깐. 전략을 세워 상대를 무력화하기보다는 제도를 들이댄다. 이분법으로 선동한 대중들을 통해서는, 아무리 훌륭한 제도일지라도 자리잡아 성숙하지 못한다. 이해찬의 교육실험이 그랬다. 한 번 무력화된 실험은 더욱 퇴보한다. 지금의 교육상황이 그렇다. 그러기에 같은 방식으로 다시 시도한다면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반대세력이 반격을 노리다가 '진보는 무능하다'라는 절대신공으로 진보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를 일으키는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다음을 제시한다.


 


문제 1)


위에서 나는 교육과정을 밥그릇에 비유했다. 그런데 우리의 자녀 앞에 놓인 이 밥그릇은 누가 제공하나?


 



 


여기에는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대략 생각나는 대로 적자면, 변별력을 요구하는 대학행정, 가르치기에 편코자 하는 타성에 젖은 학계, 말 잘듣는 직원을 원하는 기업. 그리고 이제는 너무나 비대해진 사교육.


이들의 이해관계를 따져보아야 한다. 그것도 과목별로 따져보아야 한다.


 


문제 2)


우리는 그 밥그릇에 담긴 내용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그릇의 구조를 파악하고 있으며, 그 양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가?


 


수학에 있어서 저 그릇에 담긴 밥은 문제은행이다. 달리말하면 문제유형은 이미 나올만큼 나왔는데 그 양이 무지 많은 것이다. 그러니 선행학습이 통할 수밖에...나는 수학이라는 학문이 좋다. 하지만 우리는 지식인조차도 수학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 논의가 진전된다면 수학이라는 하나의 과목에 관해서만이라도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는 유치원 때부터 해서 고등학교때까지는 그럭저럭 했는데 왜? 수능에서는 안 먹히지? 문제는 독해력이거든. 책도 읽지 않았는데, 우리말로 쓰인 글도 제대로 이해못하고 쉽게 쓰인 글만을 요구하는데 영어로 쓰인 게 독해가 되겠니? 그러니 자꾸 함정 파놓으면 그 안으로 못들어가 안달이지...


언어영역은 말을 말자. 그것은 둘째 치고라도 논술도 학원에서 배우는 세상... 이눔의 세상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쓰다 보니 긴 글이 되었다. 나로서는 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교육문제이고,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된 교육환경을 주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우성님의 글이 반갑다. 논쟁의 활성화를 위해 공격적으로 쓴 부분이 있으니 그 점은 이해해주길 바란다. 덕분에 나는 못 그리는 그림 그리랴, 장문의 글 쓰랴 밤을 꼴딱 보냈다. 낮에는 쉬어야겠다. 줸장~


 


문화불패 유리에선나무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