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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4. 25. 수요일

정우성


 



 


“선행학습은 여전히 반칙이다”


 


나는 며칠 전에 “나는 아빠다 11: 선행학습은 반칙이다”라는 글을 썼습니다. 10회에 걸쳐 글을 써 왔지만 대개 차범근 선수 등번호와 박지성 선수나 안정환 선수 등번호 사이 숫자의 댓글이 달렸을 뿐입니다. 그러던 것이 열한 번째 글이 실린 다음에는 하룻밤 사이에 마이클 조던의 등번호를 넘는 댓글이 달린 데다가 떡하니 반론([반론] 선행학습은 최선이다 - 어설픈 앙가주망은 실패를 부른다)도 제기되었습니다. 관심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매우 흥미로운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기의 밑천을 모두 드러냅니다


 


2012년은 정치의 해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육아니 자녀교육이니 하는 것은 한가로운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육아나 자녀교육에는 참 흥미로운 구석이 있습니다. 이것을 주제로 우리가 말을 섞고 뭔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어느새 우리는 모두 전문가가 되곤 합니다. 육아와 자녀교육은 저마다 체험이 있고 아주 구체적인 목격담이 있으며 게다가 자기 인생의 뿌리와 씨앗에 관한 주제를 자꾸 건드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철학과 가치관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육아와 자녀교육 이야기를 하고, 또 이것을 행동에 옮기다 보면 정말로 자기의 밑천을 다 드러내게 됩니다. ‘정치’나 ‘문화’라는 주제보다 훨씬 더 그 사람의 실체가 보이곤 합니다. 인간에 대한 시선, 성구별에 대한 인식, 행복에 대한 가치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꿈, 삶의 무게와 좌절감, 인간의 자존감에 대한 취급과 태도, 언어의 쓰임새, 사적 대화의 방식, 무관심이 갖는 중력 등등 바로 이곳에서 모두 드러납니다.


 


여긴 또 다른 진영논리의 대결장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육아에 무슨 진보와 보수의 구별이 있느냐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보적인 입장의 육아와 보수적인 입장의 육아 사이에 아주 큰 강이 흐릅니다. 그 강에 놓인 교량은, 과장해서 말하자면,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도덕과 규칙”입니다. 하지만 많은 진보적인 사람들은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공적인 영역의 진보와 자신의 자녀와 아내에 관한 사적인 영역의 진보를 분리합니다. 그리고 후자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침묵합니다(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진영논리에서 보자면 그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보수는 바로 이곳에서 언제나 정력과 최선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육아와 자녀교육을 끊임 없이 시장논리에 편승시켜서 한편으로는 부를 축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적인 가치를 ‘사유’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빠다 11을 쓴 주된 목적


 


“선행학습은 반칙이다”에서 내가 말했던 주장의 구체적인 내용을 다시 꺼내지는 않겠습니다.


그 글을 쓰면서,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고 ‘정상적으로’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부모들 - 경제적인 사정으로 사교육시장에 못 들어가기 때문에 선행학습을 포기한 부모들을 포함하여? 이 내 글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끼고,  뿌듯해 하고, 행복해 하고, 기죽지 말고, 더 용기를 낼 수 있는 아주 작은 ‘위로’와 ‘힘’을 느낄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랬습니다. 나는 그들 혹은 그녀들이야말로 정치현장에서 우리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싸우는 운동가들보다 뒤떨어지지 않으며, 그네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사회 곳곳에서 뙤약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이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실이 아니라 그늘입니다. 선행학습을 이야기할 때, 나는 무엇보다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는 부모들의 자존감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둘째, 특별한 생각없이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부모들이 선행학습을 시킴에 있어 심리적인 머뭇거림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도 글쓰기의 목적이었습니다. 적어도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는 부모를 외계인 취급하거나 아이의 미래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공격하는 것은 정말로 온당치 않습니다. 대부분의 육아와 자녀교육은 ‘선의로’, ‘몰라서’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을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끔 계몽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반칙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세 가지 조건


 


‘유리에선나무’라는 필명을 가진 분의 논지는 선행학습의 긍정적인 학습적 효과를 은연 중에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는 “환경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 국영수는 그 변수를 적절히 통제하므로 학습효과를 끌어올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일시적이고 단기적인 학습효과는 그만큼 시간과 돈과 노력을 투자했으므로 긍정적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흔히들 인생을 100미터 단거리 경기라고 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학습도 모름지기 그러합니다. 게다가 선행학습은 ‘성적’이라는 결과물을 향해 질주하고, 그것이 ‘성공’을 보장할 것이라는 환상을 전제로 합니다. 단순한 학습적 효과만을 운운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 선행학습의 학습적 효과에 대한 여러가지 주장은 매우 부차적입니다. “선행학습의 효과가 좋으냐 안 좋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도덕적이냐 그렇지 않으냐의 문제”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반론의 핵심은, “선행학습은 개인의 가치관의 문제이자 선택의 문제”이므로, 선행학습을 선택한 학부모가 부끄러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언뜻 맞는 이야기 같지만 수긍할 수 없습니다. ‘반칙’의 사전적 의미는 ‘법칙이나 규정, 규칙 따위를 어김’이라는 뜻입니다. 스포츠 경기에서 널리 쓰이는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반칙을 했다고 바로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관용이라는 미덕이 있고, 반칙에도 크고 작음이 있어서 모든 것을 ‘도덕’이라는 잣대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반칙을 판단하는 규칙이나 법률 자체가 비도덕적인 것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반칙’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세 가지 조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반칙을 지속적으로 일으키는 행위입니다. 즉 우연한 반칙이 아니라(예컨대 농구경기의 ‘공격자 반칙’ 등) 장기간 지속적이거나 의도적으로 반칙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반칙을 권하는 것입니다. 반칙을 권하는 풍토에서는 반칙을 하지 않고 규칙을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 발생하고 그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셋째, 반칙이 만연하여 반칙이 규칙화되고, 규칙이 예외적인 현상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면서 반칙하는 행위에 대해서 무뎌지고 너그럽게 여기게 됩니다.


그런데 선행학습은 이 세 가지 모두를 동반합니다.


 



 


 


선행학습은 교육시스템을 붕괴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행학습을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치부하는 생각을 접하면서, 나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얼마나 도덕불감증(‘도덕’이라고 말하면 괜히 편견이 생길 수 있겠습니다만, 이 표현 대신에 ‘정의’라고 읽어도 동일합니다)에 빠져 있는가를 느낍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선행학습은 교육시스템을 붕괴시킵니다. 교육은 (1) 가르치는 사람, (2) 커리큘럼, (3) 배우는 사람, 이 세 가지의 기둥이 있습니다. 선행학습은 이 세 가지 기둥 모두 뒤흔들어 뽑아버립니다. 교사를 타락시키고, 교과과정의 질서를 붕괴시키며,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 학생과 학생 간의 관계, 아이와 부모와의 관계를 어긋나게 합니다.


 


이렇게 교육시스템을 붕괴시키면서까지 구원할 새로운 가치와 미덕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무한경쟁의 프레임과 개인의 성공만이 있을 뿐입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서 교육시스템이 붕괴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선행학습은 ‘성적’과 관계되는데, 그 성적이 미치는 대학입시의 영향은 여기서는 무시하겠습니다. 그것은 논점이 아닐 뿐더러 나 스스로 선행학습의 학습적 효과에 대해 부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부모가 아이들을 비교하고 평가함에 있어서, 아이를 비교함으로써 결정되곤 하는 부모 간의 자존감에 있어서, 그리고 아이들이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고개를 숙이거나 으스대는 기준은 ‘성적’이 되고 있습니다. 성적이 아이를 평가하는 잣대가 되고, 아이 마음은 흔드는 거대한 무게가 되는데, 그럴수록 성적 기준은 공평해야 합니다. 하지만 선행학습은 이런 공평성을 무너뜨립니다.


 


또한, 여기서 한 번도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게 “아이의 자발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아이가 자기 스스로 탐구 정신에 의해서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나름 연구하고 조사하는 것은 자발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바람직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행학습’을 문제로 삼을 때에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정식교과과정을 사교육을 통해서 미리 마스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식 교과과정에 편입되지 않는 분야에 대한 다양하고 자발적인 학습을 우리는 선행학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권장될 수는 있어도 제도화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야말로 개인의 선택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따라서 유리에선나무님이 ‘선택의 문제’는 단지 이 영역에 있을 뿐입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아이들의 자발성, 주체성, 창의성은 우리가 논하고 있는 ‘선행학습’과 상당히 적대적이라는 점입니다. 미래 사회 혹은 당면한 사회가 개인의 창의적인 상상력을 중요하게 요청하고 있다면, ‘선행학습’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선행학습이라는 반칙은, 어쩌면 도박보다 더 무서울 수 있습니다. 도박은 개인의 인생과 그 개인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인생을 황폐화하지만 개인의 도박이 직접적으로 사회를 위협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도박이 만연하면 사람들이 노동을 멀리하게 되어 건전한 사회를 만들 수 없고, 또 개인의 심대한 상처라는 것도 있어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 도덕적인 비난을 수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박에 빠져 있습니다


 


기왕에 도박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좀더 깊숙히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회적 상식은 도박을 경계하라고 가르칩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도박을 멀리 하고 땀을 흘리며 일하는 보람을 소중히 여깁니다. 어떤 부모도 자기 아이들에게 도박을 권하면서 인생을 바꿔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판돈을 준비하라고, 지금은 좀 잃어도 좋다고 나중에 단번에 만회할 기회가 올 거라며 자식을 다독이며 격려하는 부모도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를 휩쓴 부동산 투기도 일종의 도박으로 볼 수도 있지요. 사람들은 재산증식의 일환으로서, 부자가 되기 위한 지름길로서 부동산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 도박판에서 크게 성공했다는 사람의 증언과 경험이 알려지자 여기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둔하게 여겨졌습니다. 남자들은 술마시면서 도박에 관한 정보를 주고 받습니다. 카페에서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도박정보를 청취합니다. 인터넷을 뒤집니다. 이 판에서는 관료들이야말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합니다. 권력은 정보를 쥡니다. 교회는 인맥을 활용하여 정보를 은밀히 혹은 공공연히 소통합니다. 욕망이 자기 증식을 하고, 사람들은 판돈을 겁니다. 은행은 신나서 판돈을 공급하고 그러나 사람들은 빚더미에 앉게 됐습니다. 부동산 투기 결과, 집값은 사람들의 봉급수준과 보유현금이 감내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돈이 말라버렸습니다. 사실 이 또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 ‘선택’이 초래한 악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동산 투기에 관한 사람의 탐욕을 말할 때, 이것 또한 ‘모럴 헤저드’를 논하곤 합니다.


 


여기 도박에 관해서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치부할 귀여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로또입니다. 물론 이것도 도박입니다. 우리는 로또가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로또를 삽니다. 확률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복권을 구입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퍽이나 귀여운 행동이죠. 간밤에 꾼 꿈이 예사롭지 않았다고 하여 복권을 구입하는 것 자체는 매우 인간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팍팍하고 비좁은 인생을 살면서 마음으로나마 해방되고 싶은 욕망은 자연스럽습니다. 몇천 원의 해방감 정도는 정신건강을 위해 지불할 수도 있는 겁니다. 자기 월급의 삼분지일, 오분지일을 쓰면서 로또를 사는 사람은, 자기 정신의 삼분지일, 오분지일을 로또에 쓰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로또를 했다고 해서 가계가 붕괴되는 것도 아니고, 사회에 전혀 위협이 되지도 않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 같은 도박이라고 해도 어떤 도덕적 비난을 수반하지 않습니다.


 


여기 아주 색다른 도박장이 있습니다.


판돈을 거는 도박보다 로또를 왕창 사는 행위보다 훨씬 해롭고 치명적인 도박을, 아주 집념을 갖고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아이의 인생을 탐하는 부모의 도박입니다. “다 너희를 위한 거야”라고 최면을 걸지만, 도박에 빠진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환상이 빚어낸 거짓말입니다. 부모와 아이의 영혼을 팔고 교육시장의 사채업자들은 계산기 두드리기에 바쁩니다. 사회 전체가 거대한 도박장입니다. 그러나 도박은 무엇이든 대가를 요구합니다.


 



 


성공에 대한 지나친 환상도 그런 것입니다. 반론에서는 은연 중에 성공을 전제로 논지를 풀어갑니다. 성공은 미래에 있습니다. 어떤 얼굴을 할 지 모르는 그 미래의 성공을 위해서 오늘을 저당잡혀야 합니다. 아이의 오늘을 저당잡혀서 미래의 성공을 꿈꾸는 것입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학력이 좋아야지, 성적이 좋아야지, 영어를 잘해야지, 스펙을 쌓아야지, 좋은 인맥을 만들어야지. 이를 위해서 애들을 닦달하고, 오늘의 즐거움과 행복을 참아야 합니다. 이 정도는 그래도 봐줄 만합니다. 성공의 신화를 위해서 정의를 버릴 때 인간으로서 아주 비참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거짓과 사기도 우리는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너그러워집니다. 장발장은 구속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죄악은 쉽게 용서됩니다. 죄를 지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뻔뻔함이 판치는 세상. 거짓말을 해도 국회의원이 되며 대통령이 되는 세상, 거짓말을 해도 권력자가 될 수 있는 세상. 비참하지만 오늘날의 우리 어른들의 세상입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이 성공하길 원하며 보챕니다. 비참하지만 누구를 탓할 게 아닙니다. 이 사회 전체가 ‘성공’이라는 도박판에 몰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문제입니다.


 


 


문제를 풀기 위한 두 개의 길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이것은 늘 골치아픈 과제입니다. 두 가지 길이 여기 있습니다. 이쪽은 시스템의 개혁과 변화를 추구하는 길입니다. 저쪽은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길입니다. 이쪽 길을 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쪽 길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과 정치인은 전자를 강조합니다.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후자의 길을 택하여 <나는아빠다 11>을 썼던 것입니다. 내 입장은 일관되게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뭉뚱그려 그냥 사람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을 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쁘고, 고되고, 힘겨운 세상 살이를 하는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훈육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입니다. 한 가족의 인생은 그 가족이 열심을 다해 좋은 길을 선택하고 개척하고 볼 일입니다. 하지만 그 개인의 힘으로는 너무 벅차기 때문에, 사회복지라든가 시스템(단순히 교육시스템이 아니라)적인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정치인들과 자칭 전문가들의 몫입니다. 내 입장이 이렇다고 해서, 시스템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몫이 있습니다. 다만 모든 것을 시스템을 해결하려고 하는 근원론자들에게 한 가지 당부의 말씀은, “힘들어 하는 개인”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관점을 놓치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도 결국 사람이 만들고 운용하는 것이어서 그 사람이 꽝이면 시스템은 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보통 사람들의 육아왕 자녀교육에 대해서 여러 가지 화두를 던지지만, 그렇다고 소위 전문가로 자칭하거나 혹은 전문가인 양 행세하는 사람들의 교사가 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한편 오늘 사교육을 법적으로 금지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선행학습’이 반칙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반칙을 법적인 규제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지나치게 시스템 지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마 반론의 견해와 같은 편일 수는 있겠습니다.


 



 


부족하지만 나의 작업은, 선행학습이 반칙이고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것을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거나 혹은 심리적인 머뭇거림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선행학습을 금지시키겠다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긍정적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세류에 휩싸이지 않고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으면서 자기 아이의 자발성과 자유의지를 존중하려는 부모들을 응원하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아무리 반론의 표현대로 ‘야생의 정글’ 안으로 되었다고 하더라도, ‘선행학습’은 부모가 쫄지 않으면 그 정글에서 간단하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자기 아이를 믿고, 자기 아이의 자발성과 자존감과 미래에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고 발을 빼면 됩니다. 이것은 부모의 용기와 결단만으로도 바로 다음 달부터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선행학습 시키지 않으면 됩니다. 적어도 개인의 관점에서는 가능합니다. 우선 나는 ‘어떤 개인’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개인에게만 촉구할 수는 없으므로 사회 시스템의 개선과 혁신 문제는 여전히 과제로 남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개인의 마음에 촉구함’을 매우 소중히 여기고 그게 제 역할입니다.


 


부모님들, 그리고 우리 아이들,


우리는 서로 보여줄 게 너무 많습니다. 아직 보여주지 못한 것이 가득합니다.


선행학습은 여전히 반칙입니다. 감사합니다.


 



 


 


정우성

twitter:
@hanaeserin


두 아이의 아빠, 변리사, <특허전쟁> 저자, 곧 후속편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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