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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차별 철폐의 날인 4월 20일, 역시 언론엔 장애당사자와 관련된 수많은 미담과 극복기가 줄을 잇는다. 모든 신체적 제약을 ‘극복’하며 비장애인 못지않은 성공을 이룩한 장애당사자에서부터, 장애당사자가 우리 사회 어디에선가 도움을 받는 등의 ‘훈훈함’을 그려낸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동기와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멋진 모습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우리나라는 장애인들이 살기 쾌적할까? 훈훈한 미담 뒤에 무언가 있지 않을까?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벽을 허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그 벽은 어떤 녀석인가? 장애인이 처한 진짜 문제는 무엇일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사실 장애당사자에게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헬조선’이란 단어는 그리 낯선 게 아니다. 1999년, <주간조선> 1584호에서 “20세기에 못다 푼 20가지 한국인의 숙제”란 글로 그 의미를 제시했다. 안타깝게도 원본은 없고 현재에는 복사된 글(출처)만 남아있다.


(전략)


20. 한국은 장애인들에게 지옥 같은 나라


한국만큼 장애인이 살기 힘든 나라도 없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이 올해 실시한 조사에서 장애인 중 85.1%가 '인권침해나 차별을 받고 있다'고 응답했다. 집단따돌림이나 폭행을 당한 사람이 절반에 이르고, 버스와 택시 승차 거부가 62.5%, 지하철 무료 승차권을 받을 때 직원 불친절이 71.1%였다. 임금차별(77.7%) 구직차별(81.6%) 등도 모두 높았다. 장애인고용촉진법에는 300명 이상의 사업장 중 장애인을 2% 이상 의무적으로 고용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고용률은 0.54%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 땅의 장애인들은 이중으로 서럽기만 하다.


그래서 통계자료를, 장애당사자의 직관을, 실제 사례를 준비해 봤다.


‘헬조선의 장애인!’


몇 가지 통계와 예시를 들며 장애인이 느끼는 헬조선을 다루고, 그 결과물인 ‘극복하는 장애당사자’라는 프레임이 장애당사자로 하여금 무엇을 느끼게 하는지 말하려고 한다. ‘장애등급제(의료적 기준으로 장애의 등급을 나누어 복지서비스에 차등을 둠. 인권침해의 소지와 각 개인의 환경과 경제적 수준을 반영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와 ‘부양의무제(성인 장애당사자의 부양의무를 부모에게 지우는 것)’는 흔히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여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겠다(궁금하다면 <슬로우뉴스> 기사 참고). 나는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제시된 관련통계를 내가 잘못 해석하고 있거나, 자료가 불충분하거나, 다른 느낀 점이 있다면 꼭 알려주시길 바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소통할 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가 잡힌다.



1. 통계와 실상으로 본 장애인 헬조선


몇 가지 통계 자료들을 보자. 현재 장애당사자가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일까? 단연 ‘경제적 어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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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보장은 ‘의료의 질을 보장하라’는 의미와 ‘의료급여의 확대’로 해석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경제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의료보장이 되지 않으면 당장 장애당사자의 보호자가 경제활동을 하기 어렵다.

(출처- 통계청: 사회 및 국가에 대한 요구사항 1순위, 2014년 보건복지부 장애인실태조사)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득’은 곧 ‘생존’을 의미한다. 그러나 장애당사자 계층의 경제통계를 보면 사람답게 살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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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당사자 계층의 생산가능인구(파란 원)와 생산가능 인구 중 경제활동인구(빨간 원)
(출처- 통계청: 연령별 취업 인구 및 취업률, 2014년 보건복지부 장애인실태조사)


현재 장애당사자 계층의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145만 3321명(파란 원)으로 전체 장애당사자 인구의 55.9%를 차지한다. 그러나 생산가능 인구 중 경제활동인구(빨간 원)는 77만 6080명으로, 생산가능인구대비 경제활동 참가율이 53.4%밖에 되지 않는다. 실업률, 특히 20대 장애인의 실업률은 21.99%에 이른다. 경제학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미시적으로는 장애당사자의 자립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거시적으로는 노동포기자가 늘어 국가의 복지정책이 노동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장의 입장에서 봐도 매우 부정적인 환경이다. 이는 장애당사자가 학업을 마치더라도 일반기업들이 (특히 중증의)장애당사자에 대한 채용을 꺼리는 풍토, 출근과 조직문화에 익숙한 업무환경 등이 결합되어 나타난 현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복지제도는 노동집약적이다. 복지의 목표가 노동을 통한 재생산이라, 복지대상자에게 교육, 소득보전 등을 지원하는 정책을 쓴다. 장애당사자에게 노동의 가능 여부는 곧 자립의 가능여부, 앞서 말한 ‘자발적 생존의 여부’가 된다. 그런데 현재 장애당사자에게 노동을 통한 재생산이 가능한가? 그것이 적절한 수준인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장애인의 문화생활은 또 어떠할까? 많은 문화시설들의 비용, 편의시설 부족 등으로 인해 접근성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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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014년 보건복지부 장애인실태조사: 최근 1년 동안의 문화예술행사 관람실태)


실제 자료다. 그나마 영화를 많이 보긴 한다만, 실태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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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L영화관. 

장애당사자는 공짜로 2D 영화를 3D로 볼 수 있다. (하얀 게 스크린)


통계적으로 높다고 해서 실제로 만족스럽다는 건 아니다. 영화관의 경우, 상당수의 장애인 전용 좌석이 앞쪽 구석에 있어 영화를 보기에 매우 불편하며, 따로 떨어져있다는 수치심까지 감수해야 한다. 휠체어를 자주 이용할 가능성이 높은 뇌병변 장애인들이 (영화를 본 적) ‘없음’이라 응답한 비율이 80%를 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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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장애인종합복지관 시간표.
장애인복지관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문화활동은

‘장애당사자의 일상에서는 결코 보편적인 수준의 문화활동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

라는 명제를 반증하는지도 모른다.


문화생활에서의 차별과 배제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문제다. 문화활동 참여에 대한 차별은 바로 우리 사회가 장애당사자 스스로 자기의 정체성을 밝히고, 자기의 가치를 찾아 살기 힘든 사회, 간단한 일상도 누릴 수 없는 사회임을 의미한다. 문화를 통해 자기정체성, 자기효능감을 느낄 수 없는 삶이 유치장에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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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러한 상황은 장애당사자의 정신건강까지 피폐하게 만든다. 비장애당사자에 비해 장애당사자의 최근 1년 동안 자살생각 여부는 무려 14.4%로, 비장애당사자의 그것(4.5%)에 비해 월등히 높다. 장애당사자는 우리 사회의 ‘고위험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쓴 웃음이 나온다.


앞서 본 경제·문화·정신건강 관련 통계들은 우리나라에서 장애당사자가 살기 더럽게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사회에서 ‘극복’이란 단어가 설 수 있는 자리가 있을까? ‘극복’한들 이런 문제가 해결될까? 정말로 극복이란 게 장애당사자들에게 필요나 한 걸까?
 


2. 미담과 극복을 ‘극복’하자


장애인차별 철폐의 날에 장애당사자의 미담과 극복기가 줄을 잇는 언론사가 어디일까? <비마이너>나 <에이블뉴스> 같은 장애당사자 관련 언론일까? 그렇지 않다. 보수언론, 소비를 원하는 언론일수록 더욱 이런 기사를 많이 싣는다.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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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차별 철폐의 날이 가까워 올수록 미담, 극복기사가 언론을 덮으며,

관에서는 ‘모범적인’ 장애인에게 표창까지 한다.


앞선 통계에서 봤듯이 장애인의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경제, 문화, 정신건강으로 영역을 한정시켜도 장애당사자의 삶은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접하기 힘들다. 접하기 힘들기 때문에 쉽게 오해하고, 감정적으로 소비한다. 범죄자에게 장애가 있다고, 그런 장애가 있는 애들은 자연스레 그런 행태를 취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당사자는 늘 의문의 패배를 당한다.


“범죄자가 정신병력이 있대.”


“진짜? 우리 동네에도 정신장애인이 있다던데? 피해 다녀야겠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정신장애당사자들에게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배제다. 그런 소비는 늘 이런 폐해를 낳는다.


아이러니하게 장애당사자에게 ‘극복’을 했다며 띄워주기도 한다. 미담과 극복기는 감동으로 포장되어 있다. 북한이 인민들에게 ‘영웅’이란 칭호를 남발하며 아주 유능한 개인 몇몇에게 훈장을 주고 감동을 조장하는 것과 같은 선상에 있다. 현실은 시궁창인데도 아주 부분적이고 의미 없는 땜질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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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0일, 420공동투쟁단이 버스를 타려고 했지만 경찰이 최루액을 쏘며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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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언론은 이 모습을 비춰주지 않는다.

주류 보수언론 중 <동아일보>만 두 개의 인터넷 기사를 할애했을 뿐이다.

그마저도 제 값 주고 표를 구매해 버스에 탑승하려했던 것을 ‘시위’로 보았다.


여러분들은 이런 얘기에 피곤을 느낄 것이다. “미담은 미담으로 받아들이자고!”하며 불편해할 수 있다. 이해한다. 그러나 앞서 본 장애당사자가 처해버린 불리한 환경 속에서 장애당사자들이 ‘극복’한들, 그 극복이 솜사탕처럼 사라져 버리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앞선 통계로 본 문제점들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어떤 극복기가 아름다울 수 있을까?


왜 이미 수많은 장애당사자, 보호자들이 민폐라며 욕을 듣는 것을 감수하고 도로를 점거해 나가며 투쟁할까? 투쟁은 장애당사자들이 비장애당사자 수준의 보편적이라 불려지는 ‘일상’을 영위하려는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출입문, 몇 백 억이 드는 사업, 극복하는 장애인들에게 시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장애당사자들의 극복기는 사실 전혀 아름답지 않다. 감동적인 드라마가 아니라, 진흙 밭에서 몸부림치며 피눈물이 나오는, 일상에 대한 투쟁이다. 미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지 않을 때 우리는 고작 미담에서 얻은 감동만을 가지고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식을 갖는다면 그 현실을 인식하고 바꾸려 나갈 준비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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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 농성 1339일째.

같은 수준의 일상을 살기 위해서 지금까지 울부짖고 있다.


장애에 대한 ‘극복’이란 말이 반드시 좋은 것인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장애란 것이 극복을 할 정도로 악하거나 부정적인 것인가? 그렇다면 '부정적인' 장애를 가진 당사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부정적인 이미지로 읽힐 수밖에 없지 않나?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난받을 수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난 ‘장애는 극복하는 것이다’란 명제를 대단히 싫어할 뿐 아니라,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장애란 것을 극복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할 수 없고, 모범적인 인간상이란 사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극복’한 장애당사자들의 특징을 보자. 그들은 장애를 일상으로 받아들였고, 주변 사람들과 제도가 장애를 일상화시켰다. 엄밀히 말해 ‘극복’한 것이 아니라 ‘수용’한 것이다. ‘극복’의 이미지가 아닌 ‘수용’의 이미지가 필요할 때다. 장애인과 장애 그 자체에 대한 가치판단과 감정적 갈등을 먼저 차분히 유보한 채, 장애당사자가 여러분들이 속한 지역사회에 존재한다는 그 자체를 ‘수용’해주시길 바란다. 장애당사자 역시 그 장애에 대한 차별과 불편함에 대해 싸우되, 자신들의 장애 그 자체를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주길 바란다.


장애당사자와 그 보호자가 원하는 것은 “장애를 가지셨는데도 대단하시네요.”란 동정어린 칭찬이 아니다. 모두에게 ‘수용’되어져 ‘일상’에서 함께 웃고 우는 것이다.


4월 20일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 그것을 모두 잊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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