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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의 장기전 태세를 목도한 일본은 ‘거국일치(擧國一致. 온 국민이 뭉쳐서 하나가 됨)’를 말하며, 전시체제로 개편했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탈퇴, 국제연맹의 탈퇴로 국제사회에서 한 발 빗겨난 일본은 이제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야 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정치행위의 근간에는 ‘명분’이 필요했다. 물론 명분은 포장지에 불과했지만 최소한의 ‘정당성’을 주장할 만한 근거는 있어야 한다. 그건 자신을 위해서도(자국민을 설득하기 위해서도), 상대국에게 자신의 주장을 설파하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중일전쟁 개전 후 1년이 지난 1938년 11월, 일본의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총리가 ‘동아협동체론’을 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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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대동아공영권이란 이름이 된다.


“동아(東亞) 영원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신질서의 건설이 이번 전쟁의 목적이다. 이것은 일본의 조국(肇國) 정신에 연원하며, 이를 완성하는 것은 일본 국민에게 지워진 영광스런 책무다.”


간단히 말해서 동아시아는 지역적 운명 공동체이고, 이 운명 공동체는 천황을 맹주로 하여 공동의 국방, 일체화된 경제, 한자 문화권의 동질화 된 문화공동체를 형성해, 미국과의 ‘세계 최종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배 선언이었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일본의 ‘총리’였고, 그가 공식석상에서 천명한 대외관계에 관한 주장은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 즉, ‘독트린(doctrine)’이 되는 것이다.


미국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같은 해 12월 미국은 고노에 총리의 주장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천명했다.


“어떠한 나라도 자기의 주권에 속하지 않는 지역에 대해 신질서를 건설할 자격이 없으며, 문호개방 원칙을 무시한 신질서는 인정할 수 없다.”


러-일 전쟁 직후부터 일본의 만주점령과 중국진출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던 미국이 드디어 입을 뗀 것이다. 그리고 실질적인 ‘행동’에 나선다. 미국은 중국에 대한 차관 제공 등 실질적인 중국 원조 방침을 밝혔다(그동안 보여줬던 ‘경고수위’를 넘어서는 반응이었다).


미국의 압박은 점점 거세져 갔다. 1939년 7월엔 미일통상항해조약의 파기를 선언한다. 미국은 일본에 대한 무역과 상거래를 정부 통제 하에 둔 것이다. 미국 정부는 마음만 먹으면 일본에 대한 경제제재를 할 수 있는 법적근거를 확보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1940년 기준으로 일본의 총 수입액은 21억 엔으로, 이 중 19억 엔을 미국에서 수입했다. 만약 미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전쟁 수행에 없어서는 안 되는 석유와 철광의 수입이 모두 막힌다는 의미다.


이제 일본은 국제미아가 될 상황이었다. 일본 근대화와 군사강국 일본을 만들어준 영일동맹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떠나갔고, 국제연맹의 탈퇴로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입지는 좁아든 상황. 이때 일본의 눈에 들어 온 것이 ‘독일’이었다.


일본과 독일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을 탈퇴하고, 국제사회로부터 ‘문제아’ 취급을 받던 독일도 자신만의 파트너가 필요했다. 이들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1937년 11월 일본, 독일, 이탈리아는 삼국방공(防共. 공산주의 세력을 막아내자) 협정을 맺는다. 삼국동맹(三国同盟)의 전초단계였다. 일본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 일본 해군의 삼국동맹 조약 반대파 3명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이노우에 시게요시, 요나이 미츠마사. 일본 국민들과 조약 찬성파들은 ‘조약반대의 삼족오’라고 이들을 비아냥거리며 멸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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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이소로쿠


미국과의 일전은 필패라고 말하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일본군부 인사들 중 거의 ‘유일하게’ 국제적 식견과 미국에 대한 안목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는데, 연재 초반에 말한 ‘총력전연구소’ 이야기처럼 당시 많은 인물들이 미국과의 전쟁은 필패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당시 야마모토가 미국과의 개전을 반대했던 건 그가 ‘평화주의자’이며, 놀라운 식견을 가지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전통적인 일본 육군과 해군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당시 육군의 가상 적국은 ‘소련’이었는데, 이들은 소련과의 전투를 상정한 전투준비에 들어간 상황이었고, 그러기 위한 ‘삼국동맹’ 체결을 주장하고 있었다. 즉, 삼국동맹은 육군 위주의 주장이었다. 만약 소련과의 전쟁이 결정된다면 해군은 자신이 활약할 기회를 상실하게 될 테고, 모든 예산과 자원이 육군에게 몰릴 게 뻔했다. 야마모토가 내세운 삼국동맹 반대 입장의 이유는,


첫째, 미국과 영국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어 중일전쟁 해결이 어려워진다.
둘째, 소련과 전쟁을 벌일 경우, 독일은 거리가 너무 멀어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
셋째, 독일과 이탈리아가 중국에서의 이권을 요구할 수 있다.


였다. 결국 야마모토도 전쟁을 피하자는 입장이기 보다는 보다 ‘효과적으로’ 싸우자는 입장이었다.


1938년 3월,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다. 히틀러가 고향으로 금의환향한 것이다. 그리고 5월, 만주국을 승인한다.


문제는 해군이 끝끝내 삼국동맹 가입불가입장을 고수하던 1939년 8월, 소련과 독일이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충격과 공포였다. 가상적국으로 바라보고 있던 소련이 일본의 최대 파트너가 되어 줄 독일과 손을 잡은 것이다. 덕분에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 騏一郎) 내각이 총사퇴를 한다. 일본은 천둥벌거숭이와 같은 입장이 되었다.


그리고 1940년, 일본 내에서 삼국동맹에 대한 또 다른 움직임이 감지된다. 1939년 여름까지의 삼국동맹의 입장은,


“독일과 이탈리아와 손잡고 소련에 맞서자.”


였다면, 1940년엔,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덤으로 소련까지 대미동맹을 결성하자.”


라는 쪽으로 본말이 전도된다. 일본의 정체성(!)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어쨌든 전쟁만 할 수 있다면 된다는 걸까?


까놓고 말해 삼국동맹은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의 결속력에 비해 상당히 느슨했다. 독일만 하더라도 중일전쟁 때 자신들의 무기를 중국군에게 제공했었고, 이탈리아는 2차 대전 직전까지 영국과 협상을 했다.


윈스턴 처칠은 이탈리아가 보유한 200여 척에 달하는 이탈리아 잠수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독일 U-보트와 연합해 영국의 보급선을 차단하면 영국으로서는 치명타였다. 1939년 9월 1일 기준으로 독일군이 보유한 U-보트가 56척에 불과했던 걸 생각한다면, 이탈리아가 독일과 손잡는 건 영국으로서는 ‘악몽’이었다. 하지만 이는 처칠의 기우로, 이탈리아 잠수함 부대는 영국이 생각한 것 ‘이하’로 한심했다. 독일 U-보트 부대들이 아무리 가르치고 얼렀지만 이탈리아 잠수함 부대는 이탈리아 군의 ‘전통’을 고스란히 따랐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삼국동맹 체결 당시 일본의 세계관(?)이다. 당시 일본의 세계관을 보면 어째서 삼국동맹에 참여하게 됐는지를 확인 할 수 있다. 독일이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을 때만 하더라도 나라 잃은 심정이었던 일본이었지만, 폴란드를 소련과 반분(半分)하고, 프랑스를 불과 6주 만에 점령하는 걸 확인하면서 몸이 바짝 달아올랐다. 일본은 독일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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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계관을 잘 드러낸 것이 삼국동맹 체결 후 5개월 뒤인 1941년 2월에 있었던 정부연락회의 결정사항의 ‘대 독일, 이탈리아, 소련 교섭안 요강’이다.


“세계를 대동아권, 유럽권(아프리카 포함), 미주권, 소련권(인도, 이란 포함)의 4대권으로 하여 전후 강화회의에서 이의 실현을 주장한다.


(중략)


제국은 대동아공영권 지대에 대해 정치적 지도자의 지위를 점하여 질서유지의 책임을 진다.”


일본인 특유의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민족성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솔직히 말하지만, 이 요강은 거의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당장 삼국동맹+1(소련)이 세계를 제패한다는 자체가 실현 불가능이다(2차 세계대전 당시 전 세계 군수물자의 절반 이상을 생산한 미국을 이긴다?). 당장 ‘대동아권’이란 것도 중국과 아시아 각국의 동의와 함께 ‘미국의 개입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그 때까지도 일본은 중국 전선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어찌됐든 일본은 ‘동아협동체’의 동아(東亞) 앞에 ‘대(大)’자를 붙이며 자신들의 구상을 점점 확대해 나가는 중이었다.



첨언
사정상 이번 회는 좀 짧다. 다음 회에 삼국동맹 직전에 있었던 소련과의 충돌과 삼국동맹에 의해 일본이 식민지를 확보한 이야기를 길게 쓰겠다.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모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년 의 회, 던 축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도조 히데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일본을 늪에 빠트린 4명의 '미친놈'

대륙의 각성완료, 다급해진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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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 작가로서 바라본 먹고사니즘에 대한 적나라한 통찰


'글이 돈이 되는 기적'





펜더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