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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5. 화요일

아홉친구


 


일 때문에 일주일에 며칠은 지하철 3호선 하행선을 이용하게 된다. 일과 시간이 일정치는 않다. 그래서 어떤 날은 낮 12시쯤, 혹은 1시, 또는 오후 4시쯤 타게 된다. 이것도 ‘그때쯤’이라는 거지 정확한 시간은 아니다. 매일도 아니다.


 


다만 압구정역에서 버스로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출구쪽 계단과 가장 가까운 객차를 탄다. 더 정확하게는 7-3 게이트를 택한다. 그러니까 시간은 일정치 않지만 3호선 7호 객차에 고정적으로 탄다는 얘기다. 혹여 필자를 만나고 싶거든 3호선 7호 객차에 죽치고 앉아서 안경 쓰고 뚱뚱한 남자를 찾아보시길. 그런 남자가 만약 예쁜 아가씨 뒤에서 땀을 훔치며 어슬렁거리고 있다면... 결코 그건 필자가 아님을 알아두시라.


 



우리 지금 만나...?


 


이 과정에서 특이한 현상을 발견했다. 종로 3가나 충무로에서 사람들이 많이 갈아타기 때문에 앉아갈 자리가 생긴다는 것도 생활의 발견이라면 발견이다. 그보다 특이한 현상은 옥수역에서 생긴다.


 


옥수역에서 압구정역 사이는 3호선에서 드문 ‘지상노선’이다. 옥수역은 지상에 있기 때문에, 금호역에서 옥수역으로 오면서 서서히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강 동호대교를 지나 다시 지하에 있는 압구정역으로 들어간다. 다리를 지나는 지하철 안에서 한강에 너울너울 비치는 햇빛을 감상하는 일은 즐겁다. 비가 내리면 또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 그 중 최고는 역시 노을이다. 퇴근 차량이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에 꼬리를 물고 빽빽히 늘어선 모습, 여기에 대조되는 한강의 ‘어오렌쥐’색 노을빛 물든 광경은 이 서울 생활의 덧없음을 새삼 일깨워주곤 한다.


 



 


그리고 새삼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온다.


 


옥수역에 정차해서 동호대교를 통과하는, 채 1~2분이 될까하는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하모니카 소리가 들린다. 아니면 찬송가. 그리고 허름한 복장의 노인이 플라스틱 바구니를 내밀고 복도를 통과한다.


 


우연이 아니다. 7호 객차에 앉아있으면 반드시 그 시점에 구걸 노인이 등장한다. 앞서 말했듯 필자는 늘 같은 객차에 있긴 하지만 ‘늘 같은 시간에’ 지하철을 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늘 옥수역 부근에서’ 구걸 노인을 마주친다는 건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생각해보자. 구걸 노인은 아마도 맨 뒤 객차를 탔을 것이다. 보통 지하철은 10량 객차로 운행된다. 그의 느린 걸음걸이를 생각해보면, 7호 객차까지 왔을 때 옥수역 즈음이라는 것은, 그 전 역인 금호역 혹은 약수역에서 탔다는 얘기다. 문제는 필자가 늘 같은 시간에 타지 않았어도 늘 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구걸 노인은 같은 사람이 아니다. 어떨 때는 휠체어 노인, 어느 날은 팔 없는 노인 부부, 또 어느 경우엔 시각장애 노인이다. 하지만 어째서 서로 다른 시간대에 늘 옥수역 즈음에서 이들과 마주친단 말인가.


 



출처 Blog.naver.com/teal1480


 


필자가 생각하는 결론은 이렇다. 이들이 타는 역이 금호역이라고 치면, 여기 맨 뒤 차량에 줄서서 하나씩 타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압구정역에서 내리니까, 맨 앞 차량에서 또 다른 구걸 노인이 탔다고 해도 마주치긴 어렵다. 그저 맨 뒤 칸에 타는 구걸 노인이 ‘한 번에 하나’라는 것이다. 부부인 경우엔 한 팀인 것이고.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어떻게 그들은 ‘한 번에 하나’라는 원칙을 지킬 수 있을까? 그들끼리 서로 협정이라도 맺었단 말인가? 그것도 일리 있는 발상이지만, 이 경우 반칙자를 제재하기 어렵다. 당신이 그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라. 지하철에 손님이 많이 없거나 반대로 너무 빽빽하면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나은 선택이다. 경험이 쌓이다 보면 구걸하기 좋은 ‘적당한 밀집도’가 눈에 보일 것이다. 구걸통에 손 집어 넣었다가 시각장애 걸인이 버럭 눈을 부릅뜨거나 앉은뱅이가 뛰어 쫓아왔다는 ‘기적 아닌 기적’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구걸 노인들은 대개 쇠약해 보인다. 반칙자를 물리적으로 제압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것보단 내가 먼저 반칙을 해버리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다.


 


여기까지 얘기하니까 ‘죄수의 딜레마’ 비슷한 느낌이긴 하다.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공동의 이익으로 연결되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가 발생하지 않는 조건은 반복 학습을 통한 호혜성이 지켜질 때, 즉 ‘보복이 가능할 때’이다. 그런데 구걸 노인의 집단에서는 신체적 제약 때문에 보복이 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차피 추측이긴 한데 밀고 나가보자. 그러면 관리자가 필요하다. 그것도 신체적 제약이 없는, 젊고 건강한 관리자 말이다. 반칙이 생길 때 바로 제지하거나 보복할 수 있는 관리자. 토마스 홉스 식이라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방지하기 위한 공권력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런 이상적 관리자는 세상에 없다. 어쩌면 처음에는 순수한(?) 관리 역할이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여 진짜 ‘공복(公僕)’ 역할이 진행될 리는 만무하다. 공복은 금세 ‘공주(公主)’로 바뀌기 마련이다. 관리자가 있으면 운영비가 들 것이다. 그 운영비는 곧 ‘세금’으로 탈바꿈한다. 나아가 관리자, 아니 ‘공주’는 수첩까지 들고 기록해가며 벌칙을 주거나 집단에서 축출해버릴 권한을 갖게 될 것이다.


 


걸인 조직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예전에 들은 그 이야기의 대상은 청소년 구걸 조직이었다. 그러나 이 지하철 사건을 경험하면서 필자는 구걸 노인의 조직이 있을 수 있다고, 아니 틀림없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관리자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경험상으로도, 그리고 합리적인 추론으로도 그 관리자는 결코 관리자에 머물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익이 발생하는 곳엔 반드시 조직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어떠한 명목으로든 세금이 발생한다. 우리가 잠시 머물다 스쳐 지나가는 지하철에서도 인간 세상의 도리는 엄연하다. 하긴 이 세상도 머물다 스쳐 지나가긴 마찬가지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자. 개인은 윤리적일 수 있지만, 조직은 그럴 수가 없다. 조직의 본질에는 불신이 있다. 신뢰를 강조하며 그로써 운영되는 조직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런 조직이 적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강한 신뢰를 강조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조직의 불신을 경계한다는 증거인 것이다. ‘너 나 믿지?’를 강조하는 친구야말로 배신의 냄새를 감지하고 불안에 떠는 사람이다. 불신은 이익 때문에 생긴다. 이기심이 없는 사람은 성인이고 그는 내 주변에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언제든 몇 푼 때문에 나를 등쳐먹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사라지지 않는다. 조직의 구성 목적이 구원이나 해탈인 경우도 이에 벗어나지 않는데, 하물며 현실적 이권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 이와 무관할 수는 없다.


 



사람에 따라 관리를 인식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러니 구걸 노인 집단의 반칙자처럼 공동의 이익을 배반하는 일은 언제든 생길 수 있고, 그래서 관리자가 생겨난다. 이익이 있으면 조직이 있고, 또 관리자가 있다. 그러면 또 반드시 관리자가 얻는 세금이 발생한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조직이 있다고 할 때 거기엔 반드시 이권이 개입돼 있고, 관리자가 누구인가를 알려면 누가 세금과 같은 이익을 취하고 있는가를 알면 된다는 것이다. 세금 대신 ‘명예’를 택하는 관리자도 있을 수 있다. 그것도 경제학 표현을 빌면 ‘효용’에 속한다. 어쨌든 얻는 게 없는 관리자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만약 경기동부연합이란 조직이 있다면, 이걸 어떻게 해석하는 게 옳은가? 낡은 종북세력의 모임인가? 주사파 떨거지들의 집단인가? 혹은 신념의 관철이 지나쳐 현실 대처가 미숙할 뿐이지 나름의 가치를 인정해야 하는 세력인가? 숱한 실망감을 안고 냉철하게 대처해보려 애썼지만, 돌아오는 것은 허탈감과 분노뿐이었다. 누군가는 분노할 필요가 없다고도 하지만, 그 근거가 어떻든 그런 말은 ‘진짜 분노하지는 않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말한 바 있지만, 의견은 근거에 선행한다. 이런저런 근거를 들어 분노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더라도, 또한 분노의 근거 따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들이 우리와 다른 사람이 아니라면 그들도 보편적인 룰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조직이 있는 곳엔 이익이 따른다. 그 이익은 무엇인가? 국회의원 몇 석? 다음 선거 때 그들이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며 야권의 한 축이 되기 어려우리란 예측쯤은 누구든 할 수 있다. 그러니 4년의 권력이 이익의 전부라고 하기엔 미흡하다. 그것을 밝혀내는 것이 경기동부연합 또는 밀실세력에 대처하는 중요한 기점이 될 것이다.


 



 


누가 이 조직의 관리자인가를 밝혀내려면 세금을 보면 된다. 돈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게 돈이든 효용이든 ‘조직의 존립과 철저히 연계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만약 관리자의 효용이 조직의 존립과 거리가 있다면, 관리자의 역할은 부실해지고 반칙자가 생긴다. 이석기가 관리자인가? 그렇다면 그는 세금을 걷고 있을 것이다. 이 명제가 부정되면 그는 관리자가 아니다. 조직이 비대해진다면 관리자의 수는 늘어날 것이며 어떤 부서로 다시 조직화될 수 있다. 그러면서 특정 개인의 이름이 가려지는 일도 가능하다. 그러나 가려질 순 있어도 본질이 희석될 리는 없다.


 


그 결론은 필자 나름대로 충분히 갖고 있다. 글을 읽는 분들도 결론을 내릴 수 있을 테니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본다. 개인적으로, 이 지점에서 감정은 정리되었다. 잘못된 정보를 갖고 헛된 기대를 한 내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들은 빨갱이가 아니라, 나처럼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불과하다고 했다. 비호하는 입장에서든 아니든 말이다. 그러니 정의감에 불타던 열사들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던 나 자신이 멍청이였다. 분노는 자신이 멍청이임을 더욱 증명한다. 그러니 분노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내려졌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관행을 변명하고 패거리와 현실 결과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경멸의 감정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 거리낄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지하철3호선에서조용하게앉아가는 아홉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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