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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4. 월요일


Matti


 



 


'무협 학생운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작가 김영하가 썼던 책인데, 학생운동을 무협지처럼 묘사한 책입니다. 선배들 말로는 무척 재미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읽지 않았습니다. 제가 당시 신뢰하던 선배가 진지하게 접근해야 할 운동을 이 책처럼 바라보는 것은 희화화에 불과한 것이라며 읽지 않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 이야기에 공감해 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고학번이 되어서도 딱히 구해서 읽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이 글 역시도 수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로 이루어진 학생운동을 희화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마음 한 구석에 죄의식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엄중한 시기 현재진행형으로 이뤄지고 있는 일들도 아니고, 거짓말로 창작을 하는 것도 아니기에 회고록을 쓴다는 생각으로 글을 이어가겠습니다. 통진당의 많은 분들이 이제는 주사파가 없다고 주장하시니 이런 글 하나쯤은 상관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언젠가 한 번쯤은 기억에서 많은 것들이 지워지기 전에 평범하게 운동을 했던 제 나름의 수준으로 90년대 학생운동을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 낮은 단계의 목표 -


 


신입생들은 이제 겨울방학에 돌입하게 됩니다. 이미 여러 스케쥴들이 잡혀 있고, 그 과정을 통해 선배가 될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겨울방학 동안의 성장과정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짚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NL과 주사파의 관계.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딱히 나눠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NL이 성장하면 반드시 주사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견실한 NL 운동가라면 윗선이 주사파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 주사파 운동가라면 한총련 의장단이나 중집(중앙집행부) 이상의 윗선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이건 음모 수준도 아닙니다. 당장 그 시절 한총련 총노선 자료집 등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만약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절이라면 자료집의 온갖 부분들이 발췌되어 떠돌아다닐 겁니다. 사실 당장 검색만 해봐도 되기는 합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차근차근 보여드리겠습니다.


 


입학하자마자 책 몇 권 읽고, 집회 몇 번 나갔다 오고, 선배들과 술 몇 번 마신 다음에 자기는 주사파라고 거만하게 이야기하는 신입생들이 있기는 합니다. 어디서 수위가 높은 노래들도 배워가지고 와서는 술자리에서 자랑스레 불러 제끼기도 합니다. 골방에서 장군님 만세를 외치기도 하죠. 이처럼 주사파가 되는 과정이 꼭 제 글처럼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특정한 책들을 읽고 나서야 주사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종교에서의 신앙고백 과정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앞 글에서도 적었듯 NL은 이런 스타일을 경계합니다. 이런 친구들은 열에 아홉이 운동을 금세 그만 둡니다. 그리고 돌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쨌든 주사파의 속살을 보기는 본 것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다니지는 않지만, 술자리에서 후배들에게 거들먹거릴 수 있는 무용담 중의 하나로 소비됩니다. 급격하게 광신적 태도를 보였던 친구들일수록 변신도 과감합니다. 주사파가 뉴라이트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주장 때문이라기보다 습성 때문입니다. 뉴라이트들 중에는 제대로 된 성찰과 공부를 통해 전향한 사람들도 소수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뉴라이트로 전향한 대표적인 운동권인사 홍진표


 


그래서 제대로 남게 되는 운동가들은 대개 차근차근 과정을 밟아 키워지는 이들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학년이 높아질수록 운동을 정리할 수 있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있는데, 그 과정을 견뎌낼수록 대나무가 마디를 남기듯 단단해져 갑니다. 그렇지만 굳은 결의를 하지 못하면서도 어찌어찌 고학번까지 남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 내면에 숨기고 있는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원래 강철은 쉽게 단련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강철이 만들어지는 공정이 달라졌고, 소비패턴도 달라졌습니다. 그렇기에 오직 신념 하나만 움켜쥐고 많은 것들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현시대의 시스템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광신도나 정치자영업자라는 규정만으로 이들의 행태가 설명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아무튼 강철을 만들기 위한 과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조금씩 수위가 높아지고 반복되면서 서서히 이뤄집니다. 이건 훌륭한 대중운동가를 만들기 위한 시스템적 요구이기도 하지만, 성급한 시도로 신입생들이나 초보 수준의 운동가들이 나가 떨어지도록 하지 않는 현실적 요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지 못하는 이들이 이탈하지 않고 적정 수준에 안착하도록 만드는 부수적 효과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언급하는 이들은 NL운동에 어느 정도 참여는 하지만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할 때까지 주체사상과 관련한 것들은 거의 인지하지 못하며 그다지 관심도 없습니다. 주사파 문제가 나오면 대개 인터넷에서 이런 분들이 적극적으로 방어를 합니다. 자신들이 부대끼고 경험했던 이들은 그저 성실한 통일운동가이자 친근했던 동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사파 문제가 나오면 열심히 살았던 자신들의 대학시절이 부정당하는 모욕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분들의 주장은 사실과 어긋나지만, 감정적인 측면은 이해가 가는 이유입니다.


 




 


NL들이 그동안 헌신해왔던 사회적 투쟁과 대중사업들은 그 모두가 촘촘한 음모하에 이루어진 것들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랬다면 애초에 끝났을 운동입니다. 병렬적으로 따지면 부정적인 것들보다 가치 있는 것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행위들의 유기적 관계가 문제였던 거죠. NL과 함께 하면서 좋은 일들을 하셨다면 자괴감을 갖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누구와 함께 하고 누구의 의도였건, 당시 도움을 받았던 이들이 분명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시리즈에서는 NL과 PD는 모든 게 다른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신입생 사업의 경우에는 NL이나 PD나 대동소이하게 접근합니다. 다만 경향성에서 차이가 날 뿐입니다. NL과 PD에 대해서는 후에 '정파'라는 주제에서 다시금 말씀 드리겠습니다.


 


서총련(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과 지방 간에는 차이가 많습니다. 하물며 같은 서울이라도 캠퍼스 간에 차이가 있고, 정파들의 존재나 세력균형에 따른 차이도 있습니다. 그걸 염두에 두시고 글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이 글은 제 시선으로 바라본 회고록이지, 그 시절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운동권 백서는 아닙니다.


 


오늘부터 드디어 민감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주체사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정통 주사파 분들이 보시면 코웃음 칠 설명들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제 와서 주체사상 공부를 다시 할 수도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려 주체사상 관련 책들을 모두 읽은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이 글이 주체사상이란 무엇인가를 논하는 글도 아니기에 그냥 제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대로 씁니다. 제대로 알고 싶으신 분은 검색을 하시면 됩니다.


 


 


* 이상적 인간형


 


NL과 PD가 다른 것 중 하나가 '품성론'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이상적 인간상의 강조 차이입니다. 물론 PD에서도 공산주의적 인간형을 이상으로 이야기하며 희생, 헌신, 협동 등을 이야기합니다. 어렵죠. 잘 와 닿지 않습니다. 사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가 대체 어떤 것인가도 감이 잘 안 오는 판에 거기에 걸맞는 인간형이 쉽게 떠오르겠습니까. (물론 이 부분은 순전히 제 개인적 견해입니다.)


 


그렇지만 NL은 다릅니다. 이상적 인간의 모델이 존재하며 그를 기준으로 배우고 익혀야 할 품성이 있습니다. 이상적 인간이란 누구인가. 바로 김일성입니다. 김일성이 이상적 인간인 이유는 이렇습니다. 김 주석께서는 사람 중심의 세계관을 개척해 민족영생의 철학을 창시하셨으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항일유격대 시절까지 대중을 중심으로 한 사업을 모범적으로 벌이는 와중에 깨달으신 게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고행 끝에 스스로 열반의 경지에 올라 민족을 영도하시는 지도자인 셈입니다.


 



 


항일유격대 시절 김일성의 대중사업을 진솔하게 그린 책 중으로는 '회상기'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항일무장투쟁사 등 다른 책에서도 끊임 없이 강조하는 게 김일성의 사람중심적 면모입니다. 최근 유행어처럼 김일성의 교시들에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이 성경 말씀에 세상만사가 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어떤 이들은 혁명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답은 김일성의 경험과 교시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모든 사업은 사람을 중심으로 놓고 하라는 건데, 그 모범들이 바로 김일성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진리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이 김일성 버젼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상식적으로 마냥 이상한 이야기들만 있을 리도 없고, 분명 사람을 강하게 설득하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80년대 사람은 사라지고 이론논쟁만으로 황량하던 시절 주사파가 대학가를 순식간에 석권한 게 괜한 일이 아닙니다. 주사파들이 데일 카네기의 책을 보면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김 주석께서 이미 우리 민족의 실정에 맞는 교시들을 내리셨건만...' 농담 반, 진담 반입니다.


 


그렇지만 이걸 초입자나 평범한 NL들에게 들이밀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1, 2학년 때 많이 읽게 되는 시집이 바로 '바보과대표'입니다. 2학년 운동가들의 경우 '우리는 일꾼'이라던가 '활가론(대중활동가론)' 같은 딱딱한 책들도 있지만 돌아보면 다 필요 없습니다. 정수만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바보과대표. 90년대 NL 운동가라면 많은 이들이 갖고 있던 시집입니다. 시집은 안 읽었어도 '바보과대표'라는 시는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방금 책장을 이리저리 뒤지다보니 홍치산의 '바보과대표', 김남주의 '조국은 하나다', 문부식의 '꽃들'이 세트로 꽂혀 있습니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은 브레히트 시집과 함께 이단 책꽂이 너머에 숨어 있는 듯 합니다. 앞의 세 시집은 NL들이 읽는 시집이고, 브레히트는 주로 PD들이 읽습니다. '노동의 새벽'은 둘 다 읽는데 제가 무의식 중에 PD쪽으로 분류해 정리를 한 모양입니다.


 


일단 시 '바보 과대표'를 소개합니다.


 


 


< 바보 과대표 > - 홍치산


 



우리학교 1학년에 바보 과대표가 한 명 있다.


술만 먹으면 개가 되고


밍맹몽, 007빵 무얼 하더라도 진짠지 가짠지


야튼 맨날 걸려 얻어맞으며 헤헤 웃고


벌주 발칵발칵 마시며 배꼽 뚜딜겨


뽕짝 걸판지게 뽑아대는 천하에 바보가 있다.



 



항상 그 바보 곁에 사람들이 드글거리고


그 수첩에는 120명 동기 이름 모두 적혀있다.


누구누구와 언제 만났고


누구의 고민은 무엇이고


누구와는 아직 얘기 못해 보았느니


멋있는 싯구 하나 없지만 그런 것들이 잔뜩 쓰여있다.



 



수업 안 들어오는 애들 리포트 알려주고


시험 때는 쏘스(자료) 제비 벌레 물듯 물어와 노놔주고



 



역사연구반이니, 사회과학 연구반이니


소수의 의식을 위한 것보다


바둑반이니 농구반이니


그런 모임을 만들어 120명 모두를


함께하는 고민으로 자기 과 소모임에 참여시켰다.



 



일기장에는 자신의 참된 삶의 문제


누구보다 겸허하게 치열하게 고민하였으며


개인의 안락에는 추호의 타협이 없었으며


항상 5시간 수면을 철저히 지킬것을 강제했고


서재에는 항일무투사(항일무장투쟁사)가 손 때묻어 간직되어 있었다.



 



그날


자기 과 친구들에게는 아직 이르다며 본대에 있으라 하고


아스팔트 하이바에 우리 선배 전투조들 떨고 있을때


익살스런 춤 "간다 간다 뽕간다"


신명나게 두려움 누그려주고


전투대장의 진격의 나팔 우렁차게 울리니


그는 누구보다 최전선에서 정확하게 꽃병(화염병)을 꽃았다.



 



드디어 놈들이 사나운 이빨 으르렁 거리며 덤벼들 때


한 친구 전사는 미끄러지고


모두 안타까이 돌아섰을 때


그 바보 전사는 바보처럼 의연히 달려 나갔다.



 



다음날 한계레신문에 조그맣게 바보 이야기가 실렸다


고대에서 2명이 화염병으로 잡혀오고 100명이나 친구들이


성북서 항의 방문을 했다고 바보를 풀어 달라고 울부짓었다고


총학생회장님이 잡혀가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그리고 다음날 교문과 식당에서는


바보의 바보같은 친구들을 누구나 만났다.


그들 손에는 당구 큐대가 아니라,


볼펜이 아니라 오락실 운전대도 아닌


규탄 성명서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며칠 지난 뒤 학생의 날 가투 전투조 사전모임에서


한 1학년 학우의 결의 발표가 나의 심장을 쳤다



 



"나는 바보의 다른 과 친구입니다.


투쟁하란 말은 없었지만


그 친구는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저는 아직 짱돌 한 번 던진 적이 없지만 바보를 잡아 간 놈들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비록 제가 잡혀 간다 하여도....."



 


 


이 시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똑똑한 척 하지 말고, 학우들 중심으로 바보처럼 살다 보면, 언젠가는 학우들이 우리를 반드시 알아준다는 내용입니다. 이게 NL이 요구하는 인간형이자 바로 말 많은 '품성론'의 핵심입니다. 시의 마지막 부분은 지금 보면 유치한 신파지만 시대성을 놓고 보면 끄덕일만도 합니다. 저도 이 바보과대표처럼 살아야 하는데라고 고민하며 밤잠을 설쳤습니다.


 



 


품성론의 강점은 역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에 타협해야 합니다. 매년 돌아오는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서는 대중들 사이에 보이는 분명한 문제점에 침묵해야 합니다. 곁다리지만 민주노조 운동이 쇠퇴기에 접어든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각 정파들은 노동조합을 장악해야 하고 선거 때 표를 얻어야 하니, 조합원들 사이의 불합리한 문화에 눈을 감습니다. 입 바른 소리하는 놈이 지는 싸움입니다. 학생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품성은 조직 내에서도 요구됩니다. 오늘의 폭투(폭력투쟁)가 과연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보다 무리한 지시라도 기꺼이 받아 안으며 간다 간다 뿅간다를 외치면서 정확히 꽃병을 꽂고 돌아오는 게 올바른 품성입니다. 권위주의 문화에 길들여지게 됩니다. 왕년에 운동을 했다는 분들 중에 생각은 진보적인데 행태는 권위주의적인 경우가 많은 이유입니다. 그래서 품성론은 대중운동 측면에서 명과 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품성론을 강조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중 진정으로 품성을 갖추고 있는 이들이 드물다는 겁니다. 어차피 대학 들어와서 운동을 한다면 NL이든 PD든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품성론을 뒤집으면 그건 선민의식입니다. 너희들은 바보가 아니니까 바보처럼 보이라는 겁니다. 민중을 무한히 믿으라고 하면서도 실제 믿고 따라야 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장 민중들이 통진당 비례대표 당선자들에게 사퇴를 하라고 하는데 그건 당원들의 수준과 맞지 않다며 거부합니다. NL 지도부들의 민중중심이라는 말은 곧 자신들의 견해와 일치할 때만 성립합니다. 정치권에서 필요할 때만 국민의 뜻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품성론이 통하는 것도 잘 나가는 캠퍼스의 조직원 많은 단위에서나 가능합니다. 사람 하나가 아쉬운 곳에서는 인간이 개차반이어서 뒤에서 욕을 하더라도 어쨌든 함께 합니다. 외롭고 쓸쓸한 노년보다는 차라리 악처와 함께 싸워가며 늙어가는 게 낫듯 말이죠.


 


오늘 혹시나 하고 이 시집을 찾았는데 서재를 무질서하게 채우고 있는 책꽂이들 중에서 다행히 찾기 좋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서재라고 이야기하니 괜히 있어 보입니다. 창고 같은 방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문화가 있습니다. 후배에게 책을 사주면 꼭 맨 앞 표지에 몇 마디의 좋은 말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써 줍니다. 신입생들에게 자신을 각인시켜주는 효과도 있지만, 아끼는 후배와 다짐을 공유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뽀얗게 바래버린 아름다운 기억들입니다. '바보과대표'도 대개 선배가 후배에게 선물해주는 시집입니다. 누가 나에게 이 시집을 주었을까. 몇몇 얼굴들을 떠올리며 첫 장을 열었습니다. 역시 글씨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 글씨입니다. 분노한 듯 십여 줄로 빽빽히 휘갈겨진 제 글씨입니다.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당시 무슨 회의가 있었는데, 공개적인 자리에서 여러 명의 선배들이 돌아가며 저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이십대 초반이었을 제가 그에 대해 얼마나 서운했던지 비판 내용도 적혀 있습니다. "너의 언행은 왜 그 모양이냐. 대중관은 도대체 어떻냐. 동기들이 너에게 데였다." 그 외의 내용은 중2병 수준이라 부끄러워 옮길 수가 없습니다. 저는 죽고 나면 모교 도서관 등에 제 책들을 기증할 생각인데, 만에 하나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그러니까 이 시집은 선배들로부터 대중성에 대한 치명적인 비판들을 받고 나서 홧김에 제가 직접 산 겁니다. 아마 나도 바보과대표처럼 살겠노라며 다짐에 다짐을 했겠죠.


 


학생운동과 관련해 괴로운 기억들 중의 하나가 비판을 가장했던 모욕들입니다. NL이나 PD나 마찬가지인 부분인데, 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에게 모욕을 주는 게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가 봐도 모욕인데 자신들은 그걸 올바른 비판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곧 죽어도 동지애적 비판이라고 하니 발끈하면 저만 바보가 됩니다. 상대방이 분노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자신이 그만큼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운 비판을 했기 때문에 상대가 불쾌해 한다고 판단하며 뿌듯해 합니다. 오히려 내가 그만큼 너를 아끼는 마음이 있기에 모질게 대하는 거라며 비뚤어진 애정표현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그냥 인간에 대한 예의의 부재, 그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저 역시도 모욕을 당했던 기억들이 많습니다. 선배로부터 얻어 맞은 적도 있습니다. 그때는 진짜 바보여서 모두 내 잘못이라며 스스로를 자책하며 넘어갔습니다. 그렇지만 그 상처의 기억들은 결코 잊혀지지 않습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잠자리에 누우면 가끔씩 그 때의 기억들이 엄습합니다. 물론 저 역시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을 겁니다. 가해했던 기억들은 언제나 쉽게 잊혀지니까요. 그래서 그런 기억들이 떠오를 때면 울컥하는 마음에 자다가도 하이킥을 날리고 싶지만, 이것도 다 스스로 만든 업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다시 잠을 청합니다.


 


 


* 바보과대표


 


바보과대표 같은 삶이 곧 주체사상은 아닙니다. 바보과대표라는 시집을 가지고 다니고 그렇게 산다고 곧 주사파는 아니라는 거죠. 낮은 자세로 봉사하며 살아가라는 게 뭐 그렇게 심오한 이야기겠습니까. 바 과대표는 품성론의 대중적인 버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품성론은 주체사상과 다른 건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딱 필요한 만큼만 몇 단락으로 터치를 하겠습니다. 제 시리즈에서 나오는 부분을 갖고 어디 가서 아는 척을 하시면 안 되지만, 적어도 그동안 진보진영에서 이해되지 않던 모습들 중의 일부는 이해가 가실 겁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제 수준은 바닥입니다.


 



 


주체사상이란 무엇인가 했을 때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세상의 중심이 사람이라는 것이고,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라는 명제가 핵심입니다. 맑스 이전의 세계관은 정신을 강조하는 세계관이었고, 맑스가 비로소 그것을 물질과 정신의 대립으로 끌어올렸다고 합니다. 보통 운동권에서는 맑스가 최고입니다. NL도 처음 시작은 얇은 책에 있는 유물론적 변증법으로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NL의 맑스는 거기까지입니다. 왜냐하면 맑스를 극복한 선진사상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PD들이 아무리 귀에 못이 박히도록 비판해봤자 별 무소용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저 어리석은 PD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세계관 자체가 사람 중심이기 때문에 '주체'사상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뭐냐, 사람의 본질은 뭐냐라는 거죠.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며,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존재'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 그 나름의 깊은 논의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나온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때, 물질로 이루어진 구조적 여건도 물론 중요하지만,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겁니다. 네. '하면 된다'이고 '정신일도 하사불성'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주사파입니다. 농담입니다.


 


결국 사회변혁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주체의 신념과 의지'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셨을 단어들입니다. 나치 참여로 비난을 받았던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이 나치 전당대회 등을 그린 다큐멘터리들의 제목이 '신념의 승리', '의지의 승리'였는데 이게 우연한 일치일까요. 전체주의 사회에서 유독 개인의 신념, 의지 등을 강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시스템에 대한 고민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위에서 내려준 시스템 하에서 지도부를 믿고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겁니다.


 


사람이라는 '주체'에 모든 것의 성패가 달려 있고,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의 품성은 사회적 관계에 걸맞도록 길러져야 합니다. 혼자 독야청청 잘나봤자 소용 없습니다. 그래서 품성론이 도출되고 중요시됩니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거죠. 그래서 혹자들은 주체사상에는 품성론이라는 게 없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와 그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는 다른 문제라는 겁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니 어떻습니까. 주체사상이 뭔가 무시무시한 것 같은데, 사실 알고 보면 별 게 아닙니다. 고3 교실에 걸려 있는 급훈들은 알고 보면 모두 주체사상의 핵심 정수들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가진 개인들이 정교한 시스템 속의 개인으로 파편화되면 전체주의 사회가 됩니다. 우리의 현대사도 마찬가지구요. 그렇기에 87년 민주화운동은 사회체제를 변화시키는 데 있어 결정적 사건입니다.


 



 


아무튼 대중사업을 하는 운동가들에게는 구원과 같은 사상입니다. 어차피 우리에게는 자본도, 권력도 없이 동지애적 의리만 가지고 싸우는데, 주체사상은 "자본, 권력 그런 거 없어도 돼. 너희들의 주체적 역량만 있으면 사회는 바꿀 수 있어"라고 이야기를 해주니 얼마나 고맙고 마음에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주체의 본질은 완벽한데 그게 현상으로 드러난 것은 부족한 부분이 있으니 끝없이 학습을 하고 실천을 하며 좀 더 완벽한 인간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유학에서의 수양론도 보입니다. 주체사상을 보면 기독교적 세계관이 많이 보이고, 유학의 가르침 등 여러가지 좋은 이야기들이 모두 짬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적 모범들은 김일성의 교시들이나 관련 서적들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가르침대로 품성을 닦고 대중사업을 하니 효과가 만빵입니다. 설득하기 위해서는 논쟁을 하기보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고, 절대 대가를 바라지 말고 헌신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니까 정말로 나중에는 사람들이 붙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칩시다. 문제는 수령론입니다.


 


주체사상의 좋은 이야기들은 수령론을 목적으로 한 경전들일 뿐입니다. 수령론을 통해 지금까지의 좋아 보이는 이야기들이 모두 일인 독재의 전체주의 사회를 지탱해 나가는 받침대와 지주가 됩니다. 실제로 주체사상대로 하다보니 현실에서 성과가 나고, 그래서 신뢰가 생기니 마지막 순간 수령론으로의 점프가 가능합니다. 물론 운동권 내부의 권위주의적 문화, 미제와 싸우고 있는 북한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 혁명을 위한 지도부의 필요성 등 다른 요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수령론으로의 점프에서 멈춥니다. 설사 조직의 분위기 때문에 그런 척 하고 넘어가더라도 속으로는 거부를 합니다. 스스로를 비주사 NL이라고 하는 경우 보통 이 단계를 의미한다고 보면 됩니다.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이론과 경험들을 통해 납득을 했다 하더라도, 수령론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믿는 자만이 뛰어오릅니다. 유일신 신앙으로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천주교에서 1년 동안 교리교육을 받고도 마지막 순간에 결심을 하지 못하고 세례를 포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물며 수령론은 어떻겠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후에 기술합니다. 물론 주사/비주사 NL의 구분은 사회적으로 의미가 없습니다. 비주사NL인지 진짜 주사파인지 그걸 외부에서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보이는 만큼 비판하면 그만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주체사상의 일반적 내용과 관련한 것들은 서점의 자기개발 코너에 가면 쌓여 있습니다. 혁명가의 자세 이런 것도 따지고 보면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같은 자기개발 내용이고, 대중사업의 요체 이런 것은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과 대동소이합니다. 그게 김일성의 항일유격대 버전으로 쓰여져 있고, 이전의 엄중한 분위기에서 진지한 자세로 받아들여졌을 따름입니다. 주사파 출신들은 운동을 정리하고 사회에 진출하면 조직에서 인정을 받습니다. 우리 사회의 조직이 원하는 인간형으로 수 년간 단련이 되기 때문입니다. 항일유격대 정신으로 청춘을 보내는데 그 얼마나 단단한 인간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바보 과대표'에서 보여주는 내용들은 주체사상이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 사회에서 요구하는 이상적인 대중활동가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낮은 단계의 목표라고 제목을 지었구요. NL이 이상적으로 설정하고 있는 대중사업의 모습은 아름답기도 합니다. 학우들에게 다가가도 절대 '언젠가는 꼬셔야지'라는 생각을 안 합니다. 일단 그런 생각을 하면 티가 납니다. 그래서 정말로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냥 다가가서 헌신합니다. 이 사람이 결국 운동에 관심을 갖지 않고, 때로는 비판자로 변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냥 관계로서의 사람만 남으면 됩니다. 그러니 신입생 시절 여러분들께 다가왔던 운동권 선배들을 모두 흑심 품은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돌아보니 정말 좋았던 사람들은 분명 그때도 좋은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위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이상입니다. 운동가들에게 위와 같은 모습들이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강조가 되는 거겠죠. 저 역시도 처음 선배가 되었을 때에는 티를 내면서 접근해 후배들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았던 못난 사람이었습니다. 전국의 수많았던 바보 과대표들의 말로는 대개 씁쓸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상의 어느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거나 동의를 못하면 결국 조직의 하부에만 있다가 쓸쓸히 운동을 정리합니다. 때로는 싸가지 없는 후배들에게 치이기도 합니다. 변증법적 발전이라는 것은 책에만 있는 것이지, 조직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Ma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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