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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우리 말을 쓰고 한글을 사용하며 언어적 문화적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지역을 탐냈던 여러 외국과 이민족의 침략을 물리쳤거나 어떻게든 극복했거나 피해 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사를 보면 과거 우리 조상들은 꽤 잘 싸웠다. 세계를 제패한 몽골군도 어지간히 괴롭혔고 북중국을 석권했던 거란에게도 끝내 대승을 거두었고 역시 중국 대륙을 반 갈라 지배했던 금나라의 초기 명장들도 고려군에게 혼쭐이 나곤 했다. 그런데 조선 중기 이후 조선의 군사력은 그야말로 암담한 상태에 빠진다. 특히 임진왜란 초반의 전황은 읊기조차 구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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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선봉대가 부산에 상륙하고 단 20일 만에 도성이 함락됐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그저 걷기만 해도 이 정도 시일은 걸릴 것이다. 그런데 일본군은 경부축선의 웬만한 큰 고을을 죄다 두려빼고 탄금대 전투 같은 큰 전투까지 치르면서도 20일 만에 서울에 발을 디밀었다. 여기에는 물론 많은 이유가 있다. 일본군의 조총 등 우월한 전력이나 조선 측의 군사 제도의 파탄, 준비 부족 등등 백 가지도 넘는 이유가 있겠지만 지휘관의 무능 또한 큰 몫을 차지할 것이다. 문제는 무능하기만 하면 다행인데 무능하고 용렬할수록 높은 지위에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 수군 가운데 가장 큰 규모는 경상우수영, 그에 필적하는 것이 경상좌수영이었다 일본군이 들이친 부산포는 경상 좌수영 관할이었다. (부산에 지금도 존재하는 지명 수영구의 유래다.) 그런데 경상좌수사 박홍은 일본군 함대 수백 척이 몰려와 해변에서 밤을 보내는 상황에서도 멀거니 바라만 보았고 부산진성이 악전고투 끝에 함락되는 것을 그저 관전하기만 했다. 

 

"붉은 기가 부산진성에 가득하니 함락된 것 같다."는 밑도 끝도 없는 장계를 서울로 올려보내고 애첩과 수하들을 이끌고 달아났다. 경상도 해안의 반, 부산에서 영덕에 이르는 수군 총사령관이 싸움 한 번 치르지 않고 도망간 것이다. 

 

또 하나의 고급 군사 지휘관 경상좌병사 이각은 더 심했다. 역시 경상좌도의 육군 사령관은 울산 병영에서 군대를 이끌고 동래성으로 가긴 했지만 일본군의 군세가 강성한 걸 알고는 즉시 꽁무니를 뺀다. "성 밖에 나가서 돕겠소." 

 

성 밖에서 돕기는커녕 꽁지가 빠져라 울산 병영으로 돌아온 그는 다짜고짜 관고의 광목을 있는 대로 빼내 나귀 등에 실었다. 하급관리가 이러시는 법이 어디 있냐고 가로막자 이각은 적군에게는 한 번도 쓰지 않은 칼을 뽑아 부하의 목을 쳐 버렸다. 울산 병영에는 인근 고을의 병력들이 집결해 있었다. 하지만 광목을 바리바리 실은 이각이 첩과 함께 도망치는데 그 꼴을 보고 남아날 군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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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 조선군의 패퇴 장면

 

하지만 어떤 한심한 군대에도 충직한 군인들은 존재한다. 그리고 또 문제는 그들의 계급이 낮거나 심하게 물을 먹었거나 별 힘을 못 쓰는 직책에 처박혀 있다는 점이다. 광목 싣고 도망하려는 좌병사 앞에서 이러시면 안 된다고 두 팔을 벌렸던 사람처럼. 

 

경상좌수사 박홍 앞에서도 좌수영 군관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싸워야 한다. 동래성을 구원해야 한다. 좌수사 영감이 이러고 있으면 어떡하느냐. 하지만 좌수사 박홍은 굳건하게 도망을 택했다. 뭐 저런 놈이 좌수사라고...... 한탄이 날아가는데 한 군관이 활을 쟀다. "이 개시키 뒈져 버려라." 박홍의 등짝에 화살은 꽂혔으나 박홍은 그래도 달아났고 오억년은 부르짖는다. "남은 사람들이라도 좌수영을 지키자." 그리고 몇십 명이 활 부여잡고 좌수영 성벽에 늘어섰다가 일본군에게 휩쓸린다. 

 

다대포첨사 윤흥신. 한때 인종 임금의 외삼촌으로 권세를 누린 윤임의 아들이었지만 윤임이 역적으로 몰려 죽으면서 인생의 바닥을 헤매다가 세월이 흐른 뒤 아버지가 복권되면서 무관 벼슬에 오르게 된 사람이었다. 어려서 역적의 자식으로 노비 신세까지 경험한 터라 '글을 모른다'는 비난을 받을 만큼 배움이 부족했고 아버지 윤임(1487년생)이 나이 마흔다섯에 낳았다고 해도 임진왜란 당시 환갑에 가까웠을 나이에 다대포 첨사였으니 관운도 없었다. 하지만 임금의 신임을 받던 고급 장수들이 불가사의한 주력으로 도망을 택할 때 윤흥신은 동생과 함께 끝까지 성을 지키다가 죽는다. 


이순신이 발포 만호로 있을 때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발포 객사에 있던 오동나무를 베 가려는 좌수영 군관들과 충돌한 적이 있었다. 이때 성박은 오동나무를 베 거문고를 만들고자 했고 이순신은 나라의 재산을 그런 데에 쓸 수 없다고 맞섰다. 성박은 이 일을 두고 이순신을 찍어서 미워했고 후임자에게까지 꼬리표를 달아가며 이순신에게 해코지하려 들었다. 이순신에게 유성룡이라는 빽이 없었더라면 아마 이순신은 사소한 실수로 멱살이 잡혀 파직을 당하거나 목이 떨어져 역사 속에 이름 석 자 남기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문득 임진년 전쟁 발발 당시의 분위기가 눈앞에 선연히 떠옴은 당시 조선의 군대와 대한민국의 군대가 신묘할 정도로 겹쳐 보이는 장면이 많은 탓이다. 무슨 놈의 군대가 골프장 짓는 건 열심인데 기껏 만든 방탄복은 총알이 숭숭 뚫리며, 적이 쳐들어왔는데 광목 바리바리 싣고 애첩 손잡고 도망가던 경상좌병사같은 장교 놈들은 잠수 못 하는 잠수함을 도입하는 과정에 동남아에 '연수' 가서 여자들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지 않았던가 말이다. 사령관이란 자가 피터지게 싸우는 부하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다가 '적의 깃발이 가득해요. 함락당했나 봐요'하는 황망한 장계나 올려 보내는 모습이나 국민을 상대로 '댓글 전쟁'이나 벌이는 사이버사령부의 모습이 다르면 또 얼마나 다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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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안타까운 건 취재 혹은 이런저런 연유로 만났던 군인들은 참 맑고 꿋꿋하고 충직한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군대에 갔다 온 이들은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진급에서 밀리고 눈치 없다고 미움을 받고 부대의 천덕꾸러기가 돼 쓸쓸하게 하늘 보고 웃고 있던 풍경을. 

 

하지만 전쟁이 터지면 그런 사람들이 또 앞장을 설 것이다. 골프채 챙겨서 도망가는 고급 장교들의 뒷전에 욕을 퍼부으면서 어찌할지 모르는 병사들 모아 놓고 우리끼리라도 싸우자, 우리가 뚫리면 더 큰 일이 벌어진다고 호소하며 '최후의 1인까지' 싸울 사람들은 여전히 있을 것이다. 경상좌수영의 오억년처럼, 경상 좌병사 이각 앞의 하급 관리처럼. 


역사는 반복되지만 재연되지 않는다고 했건만 우리 역사는 왜 이렇게 무슨 '오마주'처럼 카피되는지 모르겠다.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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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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