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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28. 목요일

딴지뮤직 수석셰프 너클볼러


 



 


들어가며...


 


몇 해 전 딴지일보 게시판에 스리슬쩍 필자의 등장을 알린 글은 바로 '음악'에 대한 것이었다. 첫글을 나름 공들여썼던 것 같고, 너댓 개의 리플이 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름 읽히겠거니 싶어 몇 개의 글을 더 올렸으나, 몇개의 글들은 하나같이 죄다 외면 받았다. 나라도 내 글에 리플을 달아야 하나 심히 고심했다. 정말 아무 재미도 없는 어떤 글들에도 왠 듣보들이 난입해 쓸데없는 리플을 주고받고 난리인 경우도 있는데, 내 글은 고요와 적막 그 자체였다. 다른 글들에서 논쟁하며 분통이 터진 이들이 내 글을 열어보고는 마음의 안정을 찾고 그냥 떠나는갑다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다. 그 어떤 호응도, 그 어떤 문제 제기도 없었다. 하도 답답해서 '비틀즈의 전 멤버가 사실 여자였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려 준비하기도 했다. 하다못해 '듣보' 소리라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게시판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일기를 쓰는 것 같은 공허함이 찾아왔다. 난 그렇게 딴지의 게시판을 홀연히 떠났다. 아무도 찾는 이 없었다. 떠나는 길은 제법 가벼웠다.


 


1년 하고 몇 개월이 지난 뒤, 필자 다시금 '음악' 얘기를 해보자는 구국의 용단을 내리고야 말았다. 이 한 몸 던져 '읽은 척 매뉴얼'이라는 너불 편집장의 경전을 등에 지고, 거칠은 가시밭길 다시 한 걸음 내딛고저 출사표를 내던진 것이다. 다른 필진인 춘심애비님의 빨간펜 컨설팅과 필독 부편집장의 독촉에 힘입어 드디어 '들은 척 매뉴얼'의 서막을 알리는 '마이클 잭슨' 편을 인고 끝에 탈고할 수 있게 되었다. 미리보기 창을 띄워 놓고, 창 밖 깊고 푸른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심연의 어둠과 적도의 고요함이 마치 1년 하고 몇 개월 전 내가 써올린 게시판의 글을 보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조땔 것 같은 비운의 불안이 스쳤다. 그 어느 때보다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었으나, 불안은 용기를 잠식하고도 남았다.


 



'아이고... 아이고... 너클님. 내용이 제법 괜찮으니 다음 주 중에 함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스마트 폰 너머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필독 부편집장의 목소리는 어둡지도, 그렇다고 밝지도 않았다. 마무리는 늘 그랬듯이 '다음 글 내놔라'였다. 지금 막 써서 넘기면 좀 있다 전화해 '다음 편 거의 다 쓰셨죠?'라 묻는다. 가끔은 졸라 무섭다. 진짜다. 헌데 이 무지막지한 부편집장은 그렇게 독촉을 해대면서도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다.


 



마지막 문장에 담긴 꼼수에 주목하라. 딴지일보 부편집장의 위용이다.


 


딴지일보의 부편집장이 독자들을 상대로 리플 앵벌이, 아니 리플 상납을 뻔뻔하게, 노골적으로, 염치 없이, 줏대 없이, 가오 없이, 기타 등등... 대놓고 요구하는 사상 초유의 일을 벌인 것이다. 게다가 700개의 리플이 달리믄 '하겠다'가 아니라 '고려해보겠다'는 '아 말고'식의 멘트와 편집장의 리플 1개는 100개로 친다(편집하느라 고생한 카인 기자는 달랑 2개로 쳐줌)는 다분히 중세 신분제적인 발상에서 비롯한 꼼수도 숨어있었다. 그래 모두들 나처럼 알아채겠지. 이렇게 대다원의 막을 지리멸렬하게 내리는게 좀 안타깝기도 했다. 진짜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뿐하게 리플은 700개를 넘어서고야 말았다. 그렇게 가볍게 리플 700개가 넘어가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눈을 의심했다. 천 개가 넘어서는 모습을 본 후 의심은 확신이 되었고, 나 역시 로그인을 하고야 말았다.


 



버틸 수가 없었다.


 


호평일색의 댓글 속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단연 돋보적인 리플을 결국 나도 달고야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물결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깐. 리플이 천 하고도 몇백 개가 더 달릴 무렵, '들은 척 매뉴얼'은 마빡 업데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거침없이 쭉쭉 치고 나가는 세바스찬 베텔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는 F1 드라이버들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문득 탈고하고 바라보았던 서쪽하늘이 떠올랐다. 즉시즉종(卽始卽終) 새로운 유형의 연재가 탄생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해왔다. 그냥 조용히 짐을 싸기로 했다. 업데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4박 5일의 출장길에 올랐다. 그리고... 지금...


 


볼품없는, 그것도 '음악'을 소재로 한, 게다가 너불 편집장의 '읽은 척 매뉴얼'을 대놓고 패러디, 아니 베낀 '들은 척 매뉴얼'에 대한 독자제위덜의 열화와 같은, 아니 캄브리아기 대폭발과 같은 성원에 폭풍감동을 받았슴을 솔직하게 알리는 바다. 테무진 마지막 편의 1/60 수준의 리플 가지고 폭풍감동하고 자빠졌다고 생각들 마시라. 필자의 첫 글에 비하면 무려 7배의 관심이이다. 그거믄 되었다. 필독 부편집장의 '다음 편 빨리 내놔라'는 연통이 슬슬 들어오는 걸 보니 나름 선전한 듯해 뿌듯하기까지 하다.


 


다시 한 번 독자제위덜께 감사의 마음 전한다. 더불어 초기 컨셉에서 지금의 컨셉으로 좌표 변경을 가능케 한 춘심애비님의 조언과, '안 쓰면 조때겠다'는 자각을 심어준 필독 부편집장의 독촉에도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야심차게 준비한 2탄은 바로... 두두둥...


 


'사랑과 전쟁' 되시겠다.


 


 


시작하기 전에...


 


세상엔 사랑도 있고, 전쟁도 있다. 만남도 있고, 이별도 있다. 뭐 그렇다. 누구가 사랑을 원하고 만남을 원한다. 가끔 무작정 전쟁, 이별 같은 것만 원하는 무식하고 탐욕스런 넘들도 있지만 뭐 세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 보고싶은 것만 볼 수 있지만 보고 싶은 것만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것. '사랑과 전쟁'과 같은 프로가 '선정적'이네 '저질'이네 하면서도 시즌제로 장수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 그럼 케이스 바이 케이스. 우선 훈훈한 케이스부터 함 디벼보자.


 



4주 후에 봅시다.


 


사랑...


 


필자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976년 아일랜드. 열네 살이었던 래리 뮬렌은 자신이 다니는 마운트템플 고등학교 게시판에 '나는 밴드를 결성할까 한다. 나와 뜻이 같은 넘들 모여라'는 공고를 올린다. 그 공고를 본 몇몇이 모여들었다. 이렇게 딱히 포지션도 정해지지 않은 밴드가 결성된다. 그 중 한놈아가 '기타는 내가 좀 튕겨 볼께'하며 나섰다. 하지만 기타를 잘치는 친구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보컬을 맡게 되었지만 이제 막 시작한 그의 목소리는 별볼일 없었다. 오히려 보컬 때려치우고 매니저가 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연습에 연습을 거쳐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의 4인조 밴드 진용을 갖춘 그들은 The Hype란 이름으로 오디션에 참가한다. 그러나 The Hype란 이름이 맘에 들지 않았던 그들은 밴드명을 바꾸고 몇 년간의 연습 끝에 데뷔, 몇 장의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4명의 친구가 상의한 새로운 밴드명은 록히드 마틴사의 정찰기 모델명이었다. 딱히 뭐 대단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4명의 친구는 몰랐다. 새로 바꾼 밴드명이 지구촌 음악팬들의 머릿속에 기억될 거라곤 말이다. 그 이름은 바로 U2였다.


 



풋풋함.


 


1987년 발표한 [Joshua Tree]를 시작으로 최고의 밴드 반열에 올라, 대중적, 음악적 성취 모든 것을 이룬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그들의 멤버쉽이다. 멤버들은 스스로를 '네 발 달린 테이블'이라고 부르곤 한다. 작사는 보노가 주로 하지만 작곡은 멤버 전체가 함께 임하기 때문이다. 멤버 모두가 밴드를 '공동체'라 인식한다. 2003년, 2005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까지 오른 보노가 가장 튀어보이긴 하지만 밴드 멤버는 물론 매니저까지 비슷한 사회적 인식을 공유하고 있어 갈등이 벌어지진 않는다. (매니저인 폴 맥기니스는 폴 맥카트니를 화끈하게 비난한적이 있다. 폴 맥카트니와 같은 돈 많은 슈퍼스타가 비자카드에 후원받으며 엄청난 이윤을 챙기고, 공연 예매를 비자카드만 되게 하믄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손해본다는 궁색한 변명이나 늘어놓는다는 이유에서 였다.) 


 



'저는 한 밴드의 멤버들이 성실함을 잃지 않고, 서로에게 충실할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 보고 싶습니다. 계속해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우리가 깨어 있어야만 만들 수 있는 음악... 그러러면 돈의 힘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겠죠.' - 보노



 


이렇게 멤버는 물론이요, 매니져까지 공통적인 가치관으로 똘똘 뭉친 그들은 1976년 결성 이후 심각한 불화도, 멤버의 변동도 없었다. 더욱이 변함없는 그들의 음악 역시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랑이 있으면 전쟁도 있는 법. 이렇게 훈훈한 '들은 척'만 늘어놓게 되면 자칫 꼰대 취급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게다가 '니는 절대 그러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며 뜬금없이 공격받게 될 수 도 있다. 그러한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고, 더불어 싸움구경, 불구경 좋아하는 우리 전통의 계승차원에서 살짝 반대의 경우를 들이대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들은 척을 보장한다 할 수 있겠다.


 


 


전쟁...


 


1990년대 초반 F1의 성공은, 급격히 인기가 상승한 아일톤 세나라는 슈퍼스타의 등장으로 가능했지만, 동시에 같은 팀에서 활약하며 1-2위를 다투고 때론 서로를 비난했던 알랭 프로스트와의 갈등도 한 몫 했음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음이다. 같은 팀 동료이면서 동시에 가장 살벌하게 경쟁하고, 서로를 디스하기 바빴던 그들. 전세계 팬들은 그들의 환상적인 실력만큼이나, 시시때때로 벌어진 디스 배틀을 흥미로워 했다. 사실 싸움구경이 더 즐거운 법 아니던가. 음악계에도 그런 밴드가 있었으니 바로 오아시스다.


 


1993년 노엘 갤러거, 리암 갤러거 형제를 중심으로 결성된 오아시스는 2009년 해체한다. 영국밴드로 미국에서도 인정받는 등 분명한 성취가 있었으나 이 밴드의 역사는 갤러거 형제의 다툼과 화해의 역사이기도 했다. 노엘이 밴드를 탈퇴해 실질적으로 밴드가 해체될 때 드러난 이유는 '리암의 보컬이 존나 형편없다'는 노엘의 분노(?)였지만 이들의 갈등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경호원은 리암과 나를 떼어놓기 위해 고용됐다'고 노엘 갤러거가 대놓고 말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형제애.


 


유명한 일화 하나 더. 노엘 갤러거는 그들의 최고 히트곡 'Don't look back in anger'를 만든 후 자신이 부르고 싶었지만, 보컬인 동생 리암이 자신에게 양보하지 않을 듯 했다. 노엘은 안되겠다 싶어 다른 곡 'Wonderwall'를 자신이 부르겠다 꼬장을 피자 리암이 그곡은 안되니깐 'Don't look back in anger'를 노엘에게 양보했다는 것이다. 같은 피를 나눈 형제인데도 이러고 있었다. 이 형제의 갈등으로 결국 밴드는 해체되었는데, 서로의 기타를 막 때려부수고 지랄을 하다 결국 노엘이 '씨바 다 조까' 그러고 탈퇴했다는 설도 있다. 어쨋거나, 오아시스는 아무렇지 않게 해체, 노엘 갤러거는 솔로와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시티의 서포터를 병행(진짜 졸라 광팬이다), 리암과 나머지 멤버들은 비디아이로 활동하고 있다.


 


이쯤에서 U2의 음악이 흘러나올 때나, 얘기를 꺼낼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면, 일단 가볍게 그들의 멤버쉽 역사로 '들은 척'을 푼다. 그리고 '어디 세상사 다 그리 좋은 것들만 있겠는가'라는 가히 득도틱한 멘트를 던진다. 그리도 정반대의 케이스를 살짝 들이댄다. 여기까지 제대로 들은척을 시전한 뒤 본 게임은 지금부터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모든 플레이엔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 이쯤에서 이런 멘트를 던지는 것이다.


 



'사실 그런 경우가 좀 있죠'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들은 척 매뉴얼.


 


PLAYLIST


 



1. Hotel Califonia - Eagles (1976. Hotel Califonia)


2. Wasted Time - Eagles (1976. Hotel Califonia)


3. Bridge Over Troubled Water - Simon and Gafunkle (1970. Bridge Over Troubled Water)


4. El condor pasa - Simon and Gafunkle (1970. Bridge Over Troubled Water)


5. Dacing Queen - Abba (1976. Arrival)


6. The Winner Takes it all - Abba (1980. Super Trouper)



 


이글스, 사이먼 앤 가펑클, 아바. 모두 70년대를 풍미했던 슈퍼스타들이다. 그러나 화려한 정점을 찍고는 모두 헤어졌다. 레드제플린처럼 멤버가 사망한 어쩔 수 없는 이유는 아니었다. 모두 불화였다. 이글스는 돈 헨리와 글렌 프라이 콤비의 활약과, 돈 펠더의 영입을 통해 국민밴드가 되어가고 있었고, 동네 XX친구인 사이먼과 가펑클은 세계적인 포크 듀오의 자리에 올랐으며, 아바의 인기는 비틀즈 다음이었다. 그렇게 모두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영원하진 않았다.


 



'나는 가펑클에 맞춰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가펑클이 부를 노래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죠. 하지만 엄청난 성공을 거둔 후에 대중이 모두 가펑클에게만 환호하는 듯했습니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의 성공 이후 모든 게 끝났습니다. 너무 젊었던 탓에 그 순간에 인생이 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트 가펑클과 헤어지고 난 폴 사이먼의 말이다. 이글스와 사이먼 앤 가펑클의 이별에 경쟁과 열등이 작용했다면, 아바의 이별은 그것과 좀 달랐다. 밴드를 이루는 두 쌍의 부부가 모두 이혼했지만, 음악을 만들었던 두 남자, 비욘과 베니 콤비는 여전했기 때문이다.


 


아바가 평론가들에게 외면받았던 이유라든지, 이글스 최고의 앨범 [Hotel Califonia]에 담겨진 미국사회의 성찰에 대한 내용이라든지, 사이먼 앤 가펑클의 음악이 전통적인 포크와 어떻게 같고 또 다른지, 뭐 이런 것들은 임진모 선생이나, 배철수 선생에게 묻도록 하자. 우리는 이글스가 잘 나가다 어떻게 깨졌는지, 사이먼과 가펑클이 왜 빠이빠이를 했는지, 아바가 해산할 때 도대체 뭔 일이 있었는지 바로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다시 한 번 '들은 척 매뉴얼은 성공을 보장해주지 못할 뿐더러, 동시에 실패를 책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차분하게 Josh Groban & Brian McKnight 버전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 함 듣고 시작하자.


 



 


들은 척 세부 스킬.


 


Hotel California


 



어두워진 사막의 고속도로. 시원한 바람이 내 마빡에 스치운다.


훈훈한 클리타스 스뭴이 대기중에 퍼져가네.


저 멀리 어딘가. 난 한들거리는 불빛을 발견했쥐.


머리가 슬슬 둔탁해지고, 시야는 흐려져만 가.


하룻밤을 묵기 위해 거기서 멈춰야만 했어


 


**클리타스(colitas)의 뜻은 함 찾아 보시라.



 


내가 하룻밤을 어디서 묵었냐고? 그곳은 바로 '호텔 캘리포니아'다. 그렇다. 한시대를 풍미했던 밴드 이글스(Eagles)의 1976년작 [Hotel California]에 수록된 동명 타이틀곡 'Hotel California'의 한소절이다. 이글스는 이 앨범으로 밴드가 성취해야 할 대부분을 이뤘다. 앨범은 8주간 1위를 달리며 천만 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으며, 그래미 주요부분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했다. 멤버들조차도 의아할 정도의 성공이었다.


 


그들의 시작은 린다 론스태드의 백밴드였다. 백밴드 멤버였던 돈 헨리, 글렌 프라이, 랜디 마이즈너, 버니 리든이 의기투합해 이글스를 결성한다. 그리고 슬슬 활동을 시작하더니, 2집 발표 후 린다 론스태드가 자신들이 발표한 곡(Desperado)을 부르게 되는, 백 밴드가 아닌 주목받고, 인정받는 밴드의 자리에 오르는 상황이 된다. 이어 앨범 Hotel California라는 슈퍼히트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성공의 결정은 계기는 아마도 버니 리든을 대신한 기타리스트 조 월시의 영입일 것이다. 롹밴드 제임스 갱 출신인 그로 인해 이글스의 색깔이 컨츄리에서 롹으로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그 과정의 결과물이 바로 앨범 Hotel California였다. 이글스와 조 월시의 만남은 이렇게 완벽하고, 성공적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1994년 재결성 당시 이글스. 가장 왼쪽이 조 월시. 가장 우측이 돈 펠더


 


화려한 쌍기타 듀오인 조 월시와 돈 펠더. 하지만 돈 펠더는 조 월시가 맘에 들지 않았다. 조 월시로 인해 밴드의 색깔이 바뀌는 것이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최고의 쌍기타 플레이가 가능했던 이유는 틀어진 사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실 'Hotel California'는 조 월시의 가입으로 위기감을 느낀 돈 펠더가 30분이 넘는 대곡을 샘플로 가져오자, 돈 헨리와 글렌 프라이 콤비가 가다듬어 만든 곡이다. 후반부 쌍기타 플레이를 가만히 듣고있자면 서로 막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것 같기도 하다. 조 월시는 이렇게 말했다.


 



'마치 둘이 경쟁하듯 저돌적인 에너지를 담고 서로를 향해들이 댔다. 'Hotel California'의 기가 막힌 연주는 그 덕분에 가능했다'



 


조 월시와 돈 펠더의 균열은 곧 밴드 전체의 분열로 이어졌다. 찰떡 궁합이었던 돈 헨리와 글렌 프라이의 사이도 이미 틀어져있었던 것이다. 이글스는 한 장의 앨범을 더 발표한 뒤 공식적으로 해체한다. 82년의 일이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


 


1957년 Hey schoolgirl라는 곡으로 톰과 제리(Tom&Jerry)라는 듀오가 데뷔를 한다. 톰과 제리는 실패를 거듭하여 만남과 이별을 되풀이 한다. 톰은 헤어진 동안에도 솔로로 활동하며 송라이터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제리는 뭐 틈틈이 노래 연습하면서 대학생활을 즐겼다. 그러던 중, 그들의 실패한 1집 앨범의 프로듀서 톰 윌슨이라는 양반이 톰과 제리에게 말도 않고 그들의 곡을 지멋대로 편곡해 발표한다. 헌데 '어머나' 그 곡이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이름이 알려지자 톰과 제리는 재결합해 왕성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영화 '졸업'의 사운드 트랙에 참여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더니, 1970년 최고의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바로 Bridge Over Troubled Water. 톰과 제리로 시작한 이 듀오의 이름은 바로 사이먼 앤 가펑클이다.


 



Fire Egg Friend 인증샷.


 


앨범 [Bridge Over Troubled Water]는 천만 장에 가까운 성적을 올렸다. 동명 타이틀 곡 Bridge Over Troubled Water는 물론이요, The boxer, Cecilia, El condor pasa등이 연속으로 히트하며 그래미 6개 부문 수상이라는 당시 최고 기록을 세운다(복습: 훗날 마이클 잭슨에 의해 이 기록은 깨진다). 최고의 성공과, 성취였다. 폴 사이먼의 송 라이터로서의 역량과 아트 가펑클은 아름다운 목소리는 최고의 조합이었으며, 앞으로도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이들 역시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숨막히는 멜로디. 아름다운 가사. 환상적인 하모니. 그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녹음할 당시 사이먼과 가펑클의 균열은 이미 심각한 상태였다. 가펑클은 사이먼의 능력에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했고(훗날 헤어진 후 솔로공연을 하던 아트 가펑클은 '이곡은 폴 사이먼이 만든 노래가 아니다'고 멘트했을 정도였다), 녹음 중에 해외로 영화촬영을 가기도 했다. 항간에 이르기를 폴 사이먼은 'Bridge Over Troubled Water'을 만들고 아트 가펑클에게 부르라고 했으나, 아트 가펑클은 오히려 사이먼에게 부르라고 했단다. 서로를 위해 그랬다고 하기도 하고, 서로 자기가 부르겠다고 다퉜다고 하기도 한다. 결국 아트 가펑클이 부르게 되었고, 엄청난 히트를 치게 되자 폴 사이먼이 땅을 치고 후회했다고도 한다. 물론 백뿌로 확인 된 건 아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은 이 앨범을 끝으로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많은 팬들이 그들의 노래를 듣고 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보자 의지는 다지는 동안, 그들 사이의 다리는 이미 붕괴되어 철거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화 '톰과 제리'의 주인공인 톰과 제리도 결국 이별했듯이, 뉴욕출신 톰과 제리 역시 그렇게 이별하고 만다.


 


 


The Winner Takes It All


 


1976. U2가 고등학교에서 밴드를 결성할 무렵. 아그네사, 애니프리드, 베니, 비욘으로 구성된 스웨덴 그룹 아바(ABBA)는 그해 발표한 앨범 Arrival에 수록 그 유명한 춤의 여왕(Dacing Queen)으로 첫 빌보드 1위를 달성했다. 이듬해 스웨덴 기업 중 최고 수익을 올린 기업은 볼보로, 90억이었다. 그리고 아바의 수익은 110억으로 스웨덴 수입 '갑'을 차지하게 되는 상상키 힘든 기록을 남긴다. (사실은 2위였다는 설도 있다. 스웨덴 정부가 자국이 문화강국임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순위를 바꿨다는 것이다). 1973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등장하며 순식간에 세계적인 슈퍼스타의 자리에 오른 아바. 그들의 시작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아바를 결성하기 전, 비욘과 베니는 자작곡 파트너였다. 그렇게 몇 해를 알고 지내던 중 비욘은 한 텔레비젼 쇼에서 당시 잘나가던 여성 싱어 아그네사를 만나게 된다. 같은 시기 베니 역시 콘테스트 출신인 애니프리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사랑을 키우게 된다. 1971년 비욘과 아그네스가 결혼, 베니와 애니프리드는 약혼, 동거에 들어간다. 이렇게 두 쌍의 부부로 아바는 탄생하게 되는데, 이름 역시 돈독했던 관계처럼 자신들의 이름 앞글자를 따 ABBA로 정하게 된다.


 


당시 스웨덴엔 같은 상호의 통조립 기업이 있었으나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아바는 대신 B를 하나 뒤집어 사용했다. 이렇게 탄생한 아바는 1973년 유로비젼 송 콘테스트 스웨덴 예선에 참가하지만 3위를 차지하며 본선에 진출하지 못한다. 스웨덴 예선 당일은 사실 아그네사의 출산 예정일이었다. 예선을 마치고, 아그네스의 순산과 산후조리가 완벽하게 마무리 된 1974년 스웨덴 대표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참가, 영국대표로 참여한 올리비아 뉴튼 존을 제치고 'Waterroo'로 1위를 차지한다. 스칸디나 반도의 두 부부가 유럽은 물론이요, 전세계의 스타로 등극하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선포와도 같았다. 그들은 머지않아 미국 정복은 물론이요, 러시아에서까지 앨범이 고가에 밀거래되는 진짜 슈퍼스타가 된다.


 



부부친목계가 아니고 ABBA.


 


아바의 열풍은 70년대를 넘어 80년대를 향하고 있었다. 오랜 동거를 했던 베니와 애니프리드가 78년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려 팝스타에게선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부부애를 팬들에게 확인시켜주는 듯 했으나, 몇 달 뒤 비욘과 아그네스가 이혼 수속을 밟기 시작한다. 이듬해 비욘은 이혼의 아픔을 담아 술김에 1시간만에 The Winner Takes it all을 써재낀다. 스튜디오에서 아그네스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곡으로 유럽 각국에서 1위, 미국에서 7위를 거둔다. 하지만 이 곡이 사실상 그들의 마지막 히트곡이었다. 81년 베니와 애니프리드 역시 갈라선다. (비욘과 아그네스는 '육아'문제로 인한 갈등 때문이었고, 베니와 애니프리드는 원래 다툼이 심했다고 한다. 뭐 부부간의 일, 당사자 아님 누가 알겠는가.)


 


두 부부의 이별과 함께 밴드의 인기 역시 하락. 83년 공식 해산한다. 사랑하는 두 쌍의 부부로는 가능했으나, 헤어진 네 명의 돌싱으로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부부간의 사이는 물론이요, 환상적인 화음을 보여준 아그네스와 애니프리드는 불화도 심각했다. (아그네스는 부유한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받고 자랐고, 애니프리드는 사생아에 힘든 유년기를 보낸, 애초부터 잘 맞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비틀즈 다음의 성공은 누구냐?'는 질문에 존 레논은 망설임없이 '아바'라 답했다. 그러나 1970년대를 주름잡았던 슈퍼그룹은 그렇게 끝이 났다.


 


 


지금...


 


이글스는 1994년 MTV가 주최한 Uplugged 공연을 통해 컴백한 후, 투어를 통해 다시 한 번 슈퍼밴드임을 확인했고,(현재 조 월시와 경쟁했던 돈 펠더는 탈퇴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은 1981년 그 유명한 50만 명이 운집한 뉴욕 센트럴 파크 공연 등 종종 함께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2000년 투어조건으로 10억 달러를 제안받았으나 '쌩'깐 아바의 재결합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헤어진 연인이 친구 사이가 되지 못한다는 일부 의견을 증명하는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여전히 뮤지컬, 영화로 '맘마미아'의 흥행이 계속되고 있으니 뭐.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는 옛말로 깔끔하게 들은 척을 마무리 하도록 하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 들은 척 매뉴얼을 깜지 백장 페이스로 숙지했다고 하더라도, '들은 척' 은 넘치믄 조땐다. 같은 자리에 진정한 고수가 있다면 언제든 튈 준비를 하자. 아무쪼록 이번에도 독자 제위덜의 성공적인 '들은 척'을 기원하는 바다.


 


 


추신.


자료를 찾다 보니 SG워너비의 'SG'가 사이먼 앤 가펑클처럼 되고 싶다는 의미라는데... 난 그 말이 뭔 소리인지 아직 이해를 못하고 있다.


 


 


딴지뮤직 수석쉐프 너클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