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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6. 금요일

한불로

 

 

 

 

졸필에도 불구하고 지난 필자의 글에 대해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보여주었다. 감사할 따름이다. 댓글을 보면서 필자가 느낀 점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클린턴의 정치 슬로건이 상기될 만큼 경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모두들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필자의 역량 부족으로, 한국의 경제 발전과정과 그 의미를 좀 더 정치한 논리로 풀어가는 데에는 미흡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박정희 경제 정책에 대한 논점을 부각하지 못했는데, 이 주제는 박정희는 물론 현 야당의 성격을 밝히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쟁점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구하기에는 필자의 능력도 한계가 있거니와, 책 한 권의 분량도 부족할 것이다. 다만 독자들이 지적한 문제 중에 주요한 몇 가지 논점을 다룸으로써 지난 글에서 부족했던 논리를 보충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이 글은 지난 두 편의 글에 대한 보론의 성격을 갖고 있다.

 

 

 

 

 

야권 열성 지지자들이 펼치는 박정희에 대한 표준적인 비판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박정희의 경제 발전 전략은 이미 장면정권에서부터 수립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의 모사일 뿐, 박정희의 독창적인 작품은 아니다.

 

(2) 박정희는 미국과 일본의 원조와 차관에 기대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경제적 보호와 지원 때문에 고도성장을 했으므로 다른 정치세력이 집권을 했더라도 적어도 그 정도의 성과는 냈을 것이다.

 

(3) 박정희의 관치경제로 인해 거대한 독점 재벌 체제를 구축했고 이들과의 정경유착으로 인해 중소기업의 발전이 저해되고 왜곡된 경제구조로 부익부빈익빈이 심화되었다.

 

(4) 박정희는 만주군 출신으로 그의 친일적 행적은 물론, 4.19의 민주혁명을 짓밟은 쿠데타 세력으로서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

 

 

 

 

 

박정희에 대한 이러한 통념적 비판에 대해 장하준, 정승일 등은 이미 여러 매체와 저술을 통해 통렬하게 반박한 바 있다. 필자 또한 장하준 등의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그들의 논지에 기대어 몇 가지를 더 얘기해보겠다.

 

 

 

 

 

 

 

 

1. 박정희의 경제 발전 전략은 장면 정권과는 성격이 다르다.

 

 

 

 

 

 

 

 

 

 

박정희와 그가 이끌던 군부세력들이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제1의 과업으로 설정한 것은 경제부흥을 통한 빈곤 근절이었다. 그러나 의욕만 앞섰을 뿐 경제개발의 청사진을 제시할 역량을 갖고 쿠데타를 일으킨 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와 군부엘리트들이 민주당에서 구상했다는 경제개발계획 문건이라도 구해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찾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때문에 쿠데타 직후 박정희는 경제 계획을 수립할 인재를 찾게 되었고, 그 결과 유원식, 백용찬, 정소영 등을 추천받아 이들에게 경제개발 기본계획 수립을 명하게 되었다. 바로 이들 20~30대 젊은 소장파 경제학자들이 최고회의 안 골방에서 대략 2주 동안 토론과 연구를 하면서 계획안을 입안하게 되었는데, 이 때 당시 이들은 자유당판 '경제개발 3개년 계획안'이라든지, 민주당 때 작성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시안)을 입수하여 내용을 정밀 검토해보았다. 애초에 그들은 노력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가급적이면 그것에 기초하여 경제계획안을 만들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검토결과 지난 정권에서의 경제개발 전략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데에는 이용가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폐기되었다. 그 내용은 대체로 외국의 원조에 기대어 농어촌 지원하고, 탄광 사업 등 원자재 사업과 생필품 등 수입대체산업화 전략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경제엘리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만이 아니라 수출주도형 모델과 모방 성장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2차 산업에 대한 집중 육성을 수출전략으로 삼았다. 한정된 재원으로 1차 산업(농업)과 3차 산업(교육)과 더불어 발전시키는 균등발전 모델은 '거지가 헌옷 꿰매듯'한 전략이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교육은 20년 뒤에나, 그리고 농업의 종자개량, 수리사업은 최소 10년 이상이 소요되는 것으로서 자본 형성이 더디거나 정체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그들은 5년 내에 이윤을 낼 수 있는 2차 산업 공업을 집중 육성하고 이 또한 부품 소재를 수입하여 조립 수출하는 것으로 출발한다는 전략을 선택한다. 여기서 얻은 이윤으로 점차 부품을 국산으로 대체하면서 고용을 크게 확산시키며 경제성장을 도모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발상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민간 주도보다, 국가 주도형 경제운영 방식으로 추진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러한 기본 구상은 이후 추진과정에서 다소간의 수정을 거쳤지만 5.16 세력들의 전적인 동의와 전폭적인 지원 속에 박정희판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구체화되어 향후 20여 년간 한국 경제 발전의 모델의 시원이 되었다.

 

 

 

 

 

이처럼 박정희판 경제개발 계획은 민주당 장면 정부나 자유당 때의 경제개발 계획과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하는 노선이었다. 추진 역량의 유무를 차치하고 보더라도 장면 정부의 경제발전 전략은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한 수입대체산업화 노선으로서 남미식과 유사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더구나 당시 민주당과 윤보선은 경제발전 전략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도 결여되어 있었다. 피터현이라는 뉴욕헤럴드트리뷴 특파원 기자가 있었다. 그는 1963년 박정희와 맞붙었던 윤보선을 인터뷰했다. 이 기자는 윤보선과 집안 교류가 있을 뿐만 아니라, 5.16으로 인해 한국대사관 문정관에서 해임당한 경험도 있어서, 박정희에 대한 감정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윤보선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으로 취재를 했었다. 그러나 국내 현안과 비전에 대한 질문에 대해 거의 알맹이 없는 대답과 무대책으로 일관하여 충격적인 실망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예컨대 윤보선은 "본인이 집권하면 다 잘 될 것이다. 그런 것은 집권 후에 생각해 볼 문제다"라는 식이었던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방 유세 때 박정희가 제시한 분명한 경제철학과 노선을 보고서는 오히려 박정희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의 경제 전략이 민주당의 것을 일방적으로 베낀 결과라는 얘기는 터무니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2. 박정희의 경제프로그램은 미국과는 무관하다.

 

 

 

 

 

[caption id="attachment_94202" align="aligncenter" width="465" caption="박정희와 지미카터"]박정희와 지미카터[/caption]

 

 

 

 

 

박정희의 경제 발전 전략은 미국에 의해 지도받은 프로그램이라는 설도 '로비로 김대중이 노벨상 탔다'는 얘기만큼 황당하기 이를데없다.

 

 

 

 

 

한국 전쟁 이후 냉전 체제하의 지정학적 요건으로 인해 미국의 지원과 관대한 시장개방이 한국 경제 발전에 주요한 계기를 만들어 준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미국이 제3세계에 권고한 전통적인 경제발전 정책은 일반적인 비교무역론에 따른 특화된 분업 모델이었지, 박정희가 추구한 선진국 모방 캐치업 모델을 권고한 적이 없다.

 

 

 

 

 

60년대 중반, 당시 미국에서는 박정희 정부에 대하여 시장 경제 노선을 채택하라고 수없이 촉구했다고 한다. 맥키논 같은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자본 자유화나 시장 개방 정책 등을 실시하라고 권고하는 식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권고한 금융자유화 조치를 취했다가 시장 이자가 삽시간에 뛰어올라 경제가 거덜 나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8.3 사채 동결 정책까지 시행할 정도였고, 이후 미국의 시장주의 권고는 박정희에게 'OUT OF 안중'이었다고 봄이 정확하다.

 

 

 

 

 

미국이 만류했던 조선과 제철 등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전략을 박정희가 강고하게 추진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 미국은 이것에 투자할 상업 차관은 거의 해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배상금으로 포항제철을 만들었고, 유럽에서의 차관과 베트남 파병으로 들어온 돈으로 조선 등 중화학 공업에 투자한 것이다.

 

 

 

 

 

모든 산업 선진국들은 자신들이 산업 경쟁력을 갖춘 후, 자신들이 발전했던 경로를 개발도상국들에게 '친절히' 안내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장하준이 '사다리 걷어차기'라고 표현했듯 산업 선진국에 진입했을 때 '자유무역론'을 개발도상국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다.

 

 

 

 

 

더구나 박정희가 중화학 공업을 본격적으로 육성했던 70년대는 미국과의 관계도 그리 좋지도 않았다. 닉슨은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카터는 미군 철수 문제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는데, 박정희가 핵개발에 나서고 '자주 국방'을 강조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때부터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미국이 권고하는 전형적인 경제 정책은 아마도 유신 독재와 비슷한 시기에 쿠데타로 집권하여 수만 명을 학살한 피노체트의 칠레에서의 경제 실험이었을 것이다. 피노체트 정권에서의 경제 관료 그룹은 '시카고 보이스'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신자유주의의 이념의 산실이 되었던 시카고대학 경제학과 출신들로 포진되었다.

 

 

 

 

 

그리고 그 이념에 충실하여, 세계에서 처음으로 칠레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전면적으로 시행했다. 국가 산업 부문 대부분을 죄다 민영화하였고, 자본 시장을 개방화하였다. 그 결과 남미에서 비교적 소득 분배가 그런 대로 잘 되었던 칠레가 가장 불평등한 나라로 전락하게 되었고, 피노체트가 사라진 지금에도 OECD 국가 중 멕시코보다도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가 되어 버렸다.

 

 

 

 

 

피노체트는 잘 알다시피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옌데 정권을 CIA의 비호 속에 무너뜨리고 칠레를 세계에서 가장 친미적인 국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의 경제 원조를 많이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는 농산물과 구리 등 광산업 외에 이렇다 할 제조 산업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만일 60~70년대 박정희가 미국의 권고대로 선진국과 다른 산업 부문(경공업)으로 특화시켜서 경제발전 전략을 수립했다면 단언컨대 우리는 멕시코 같은 나라처럼 다국적 자본의 하청 공장으로 근근이 먹고사는 나라로 전락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독재를 실시했던 칠레라는 나라와 전적으로 대비되는 박정희의 경제 노선은 10년 후에 경제의 펀더멘털이 선진국 형의 산업화 국가로 만드는 기틀이 되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를 우상화하고 신격화하는 것이 우스운 것만큼, 그를 미국의 꼭두각시나 황당한 인물로 폄하하는 것도 유치한 짓은 마찬가지다.

 

 

 

 

 

 

 

 

3. 박정희의 관치경제는 재벌만 살찌우고, 중소기업의 희생과 빈부격차만 확대시켰나?

 

 

 

 

 

[caption id="attachment_94203" align="aligncenter" width="400" caption="박정희와 이병철"][/caption]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필자의 첫 번째 글에서 체험적인 면에서 반박한 바 있는데, 좀더 거시적인 측면에서 보충해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흔히들 싱가포르와 대만과 비교해서 한국에서의 재벌과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 문제를 거론한다. 그리고 중소기업이 상대적으로 발전된 대만을 대안적 모델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중소기업이 발전했다고 해서, 소득이 평등해지고 대기업이 많다고 해서 불평등해진다는 것은 경험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전혀 관계가 없는 얘기이다.

 

 

 

 

 

싱가포르와 대만 그리고 한국 등 '아시아의 용'들은 모두 강력한 국가 개입주의로 경제가 발전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성장전략에 있어서 한국과 대만, 싱가포르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대만은 공산당에 패배한 국민당이 옛 포르모싸 섬을 장악함으로써 대륙출신이 토착 타이완인을 지배하게 된 나라였다. 국민당 정부는 국가안보에 결정적이라고 간주한 중화학 공업의 경우, 공기업을 통해 발전시켰으며, 그 공기업 인사들은 대륙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대신 토착 타이완인들에게는 중소기업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유는 허용하고 그들에게 광범위한 지원을 제공하였다.

 

 

 

 

 

싱가포르는 도시국가이고 영어사용 인구가 다수인 이점을 발판삼아 주로 다국적 기업을 유치해서 발전시켰는데, 당시 싱가포르에 적대적이었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같은 주변국들로부터 국가안보를 보장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싱가포르와 대만도 처음에는 다국적 기업에 주로 저임금 노동력을 보완적 자산을 제공하면서 성장했다. 대만의 경우 반도체산업과 같은 고비용, 고위험 분야에 뛰어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 되면 다국적 기업들을 유치하거나 자국 기업들이 그들과 제휴하는 것을 주선하기까지 했다. 이들 나라들은 선진국 기업들과 직접 경쟁을 하는 대신 그들의 하위파트너로 확고히 자리 잡으면서 성장하였다.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를 경험하면서도 사회 전반적으로 친일적인 분위기가 강한 이유는 산업 구조 속에서 일본의 OEM 생산 부문이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일본과 경제적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성장을 하였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일본에 대한 호감도가 더 높아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만의 경제구조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는 것이, 일본의 경제 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때문에 90년대 이후 일본의 불황으로 대만의 경제는 정체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대만의 중소기업이 일본의 하청업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체 브랜드를 갖고 유럽 등의 시장에 수출하면서 자립하는 기업들도 상당히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유럽 역시 경기 침체가 지속되자, 가장 먼저 파트너십이 짤리면서 고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대만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고 있는 한국의 대기업 제도를 부러워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대만은 우리와 비슷한 국민 소득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임금도 우리나라에 비해 60~70%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중소기업들 대부분이 인건비 싸움에 몰두하고 있는 탓이다.

 

 

 

 

 

 

 

 

 

 

싱가포르와 대만이 선진국 기업의 보완적 관계 속에서 중소기업 위주의 경제가 성장했다면, 한국은 이와 대조적으로 선진국의 산업 부문과 직접적인 경쟁을 목표로 두고 성장했다는 것이 큰 차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규모의 자본이 동원되어야 했고, 이를 위해 산업정책의 지침에 따라 금융시스템은 광범위하게 동원되었다. 여기에 보조금, 보호정책, 전략산업의 참여 기업 수 제한 등 국내 산업의 업그레이드를 강력히 추진했다.

 

 

 

 

 

그렇다고 한국의 재벌들이 온실 속의 화초처럼 국가의 일방적인 보호와 육성에 따라 시혜를 받아가며 성장한 것만은 아니다.

 

 

 

 

 

80년대 정부는 반도체 부문에 지원하기를 꺼렸음에도 불구하고 재벌의 과점적 경쟁 속에 기업 부문들은 활발히 이 산업에 진입을 하였다. 재벌들의 공격적인 투자는 민간 부문 연구개발(R&D) 비용지출이 현저하게 증가한 것에 대해서도 확인되는데, 그 지출은 1976년 217억원에서 90년 2조 6988억 원으로 14년만에 명목상 128배가 성장했다. 이처럼 재벌들은 연구개발 투자에서 신속하게 주도적인 역할을 떠맡았다. 타이완과 싱가포르에 비해 한국 민간부문에서 국내총생산 대비 연구개발비 총지출은 대체로 2~4배 정도 차이가 날 정도로 많은 투자를 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런 요인들이 오늘날 삼성과 엘지, 현대 등이 일본과 같은 선진국 기업들을 추격하게 된 배경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재벌이 울트라 성장을 한 이면에 중소기업이 상대적으로 저 발전된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는 없다. 선진국 기업과 직접 경쟁을 목표로 조립-가공 산업으로 시작했던 재벌들의 사업 방식은 부품 소재가 국산화되기를 기다리며 수출을 미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제조업자들 입장에서는 국내의 토착 중소기업들이 생산한 부품과 중간재들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가까운 일본에서 그것을 조달하는 것이 더욱 편리했다. 따라서 영세한 한국의 중소기업은 기술력 등을 갖추기 전부터 일본과의 경쟁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결과를 가져와 상대적으로 취약하게 발전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박정희 정권이 재벌의 육성을 위하여 중소기업의 도태를 의도했다고 보는 건 말이 안 된다. 주요 부품과 중간재를 수입에만 의존한다면 막대한 달러를 소진하면서 경상수지 적자가 치솟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국산화를 거의 의무적으로 추진하였다.

 

 

 

 

 

예를 들어 자동차 부품의 73% 이상의 국산화 계획을 제출하지 못하는 회사에게는 부품 수입을 위한 외화를 쓰지 못하게 했다. 이 때문에 현대가 자동차 생산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여 포니를 생산했던 70년대 중반부터 자동차의 부품 중 90%를 이미 국산화를 달성했을 정도였다. 비록 핵심적인 부품과 기술에 있어서는 한동안 이태리 디자인 회사와 미쓰비시에 의존했지만 말이다.

 

 

 

 

 

재벌을 위주로 한 대기업의 존재가 중소기업 발전에 대척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기업이 발전하면 전후방 연계사업이 활성화되면서 하청계열화 하는 등 중소기업이 동반 성장하는 것이 일반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재벌의 성장세만큼 중소기업이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하지 못했지만, 80년대까지 중소기업은 그런대로 꾸준하게 성장했었고, 박정희 때는 중소기업 고유업종 지정과 더불어 중소기업 은행과 신용보증기금을 통하여 수출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도 많았다.

 

 

 

 

 

오히려 중소기업과 대기업간의 격차가 심하게 벌어진 것은 국가가 경제부문에서 본격적으로 퇴각했던 90년대, 그리고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금융부문이 산업의 젖줄 역할에서 자산 운용으로 이익 제일주의로 돌아섰던 시점에서부터였다. 더구나 '중소기업 발전'을 부르짖던 민주 정부 시절에 박정희 때 만들어진 중소기업 업종 제도마저 폐지되었다.

 

 

 

 

 

한때 은행 여신의 90%가 산업 대출이었는데,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면서 은행 여신의 70%가 쉽게 이자 놀이할 수 있는 가계 부문으로 몰렸고, 나머지 30%도 신용도가 높은 대기업에 편중되었던 것이다.

 

 

 

 

 

만일 80년대 3저 호황 이후 재벌 대기업이 규모의 경제를 확립하며 자립적인 발전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때, 정부가 60~70년대 산업 정책에 버금갈 정도로 중소기업에 대한 발전 계획을 주도면밀하게 세워서 R&D 투자와 정책금융 등을 통해 부품 소재 등의 분야에서 중소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였다면, 다시 말해 국가 개입주의를 좀 더 지속했다면 지금과 같이 재벌-중소기업간의 불균등의 양상은 많이 완화되었을 것이다.

 

 

 

 

 

박정희 사후, 특히 최근의 20년 동안 산업 부문 내의 격차 해소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더욱 심화했다면, 그 문제를 30년 전의 정권 탓으로 돌리려는 것만큼 한심한 일도 없을 것이다.

 

 

 

 

 

 

 

 

4. '친일파' 박정희와 5.16

 

 

 

 

 

[caption id="attachment_94204" align="aligncenter" width="500" caption=""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습니다" - 박정희"][/caption]

 

 

 

 

 

만주사관학교 경력과 일본왕에 대한 혈서 맹세 등의 에피소드로 그를 친일파 역적으로 공격하는 논자들도 제법 있다. 그러나 나는 박정희 개인에게 있어서 부끄러운 이력으로 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점이 박정희 정권의 성격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박정희 정권은 민족주의적 정서를 가장 많이 함유하였다. 박정희 정권 이래 한국에서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크게 두 가지 축, 즉 반공과 민족주의였다. 한국인들에게 마치 유전처럼 각인된 민족주의적 정서는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심화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 경제의 민족주의적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대만과 싱가포르와 같은 선진국 산업에 대한 '보완 전략'을 통한 발전보다는 선진국의 산업 자체를 따라 잡으려는 '대체 전략'을 통한 발전을 추구했다. 그래서 외국인들의 직접 투자 대신, 국내 자본 육성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민족주의'는 부국을 향한 집념과 경제개발을 향한 총력 동원의 이데올로기 역할도 아울러 갖게 되었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 6.3 사태를 야기한 한일 국교 정상화의 대가로 받은 8억 달러의 유,무상 차관은 역설적으로 당시 1억 달러 수출고에 머물렀던 한국의 자립적 경제에 큰 의미가 있었다. 또 사실 그것이 왜 굴욕외교인지도 근거가 명확하지도 않았다. 이처럼 60~70년대 저항엘리트들의 지배적인 저항이데올로기 역시 민족주의였다. 지배세력과 저항세력은 정치적으로 격렬한 대립 양상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공유된 한 패였다.

 

 

 

 

 

때문에 저항 엘리트세력은 70년대에 자본-임노동 관계가 일반화된 70년대의 사회 구조 속에서 전태일로 상징된 사회경제적 모순과 그 문제를 조직화해야 할 좌파적 전망을 세우는 데 무능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런 이데올로기적 잔재가 여전히 '민주 세력'에 통용되면서 그들의 무능은 위장되고 있는 현실이다.

 

 

 

 

 

5.16은 참으로 독특한 평가를 받는 쿠데타이다. 거의 명예혁명에 준할 정도로 피를 부르지 않은 쿠데타였는데 심지어 정권을 찬탈 당한 야당 세력마저도 그것의 필연성을 인정할 정도였다. 윤보선조차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다. 박 장군은 위대한 일을 했다'라고 발언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국민적 지지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반체제 매체로 유명했던 '사상계'와 장준하를 비롯하여 당시 잔존해있던 혁신 세력들 또한 5.16을 지지하였다. 이후 그들 군부세력을 중심으로 창당된 공화당은 그 성격에 있어서, 친일 지주파 출신들이 지배적이었던 민주당보다는 훨씬 서민 친화적이었고 가난한 농민들의 지지를 월등히 많이 받았다.

 

 

 

 

 

그런 점에서 4.19 민주 혁명을 짓밟은 군사정변이라는 세간의 말끔한 평가는 그 당시 복잡했던 정치 상황에 비추어볼 때 잘 들어맞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

 

 

 

 

 

 

 

 

5. 소결

 

 

 

 

 

 

 

 

 

 

지금까지 열성 야권지지자들이 전개해왔던 박정희와 그의 경제 정책에 대한 통념적 비판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았다. 그렇게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박정희를 쉴드치는 글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박정희 개인에 대한 존경의 발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의 재임시절 경찰과 중앙정보부를 통한 수많은 인권 유린,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 군사주의적 사회문화 조성 등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또 그가 피살되지 않고 계속 집권했었다면 지금보다 더 큰 경제 번영을 가져왔을 것이라는 예상도 불확실하다. 그가 키워놓은 한국 자본주의의 덩치와 중산층 세력의 등장은 그의 통치스타일과 조응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력의 속성상 그가 자행했던 인권유린, 집권세력 간의 이해관계 등 때문에 그가 자발적으로 정권을 이양할 가능성이 적었던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영구적인 집권을 했을 때 5.18 못지 않은 비극이 발생했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비명횡사한 그의 비극은 한편으로 '적절한' 시점에서의 죽음일수도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후대의 역사가들로부터 좀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지금 현역 정치인 박근혜의 존재로 인해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민주 세력'들로부터 과잉 비판되는 측면이 있다. 또 그 반대편의 입장에서는 역으로 그를 맹렬히 우상화한다. 둘 다 정상은 아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조선일보와 새누리당 등 한국의 우파 세력들이 '신자유주의'에 깊이 경도되어 있으면서도 그를 추종한다는 점이다. 전경련 부설 자유기업원은 정부 부처 해체를 요구하는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곳인데, 그 연구소장은 박정희를 옹호하며 온갖 궤변으로 그를 신자유주의의 시원으로 내세우기까지 한다. 그들은 무역 일반을 신자유주의로 환치시키고 그를 옹호하는 것이다.

 

 

 

 

 

박정희는 골수 국가 개입주의자인데다가 제조업 중시자로서 금융투기를 골간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와는 전혀 무관한, 심지어 적대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만약에 무덤을 열고 나타나서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철두철미한 시장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관뚜껑을 다시 덮을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의 경제정책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현 한국의 보수세력들의 이데올로기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비판하는데 역으로 박정희가 활용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 세력'들은 박근혜를 공격하는데 있어서 '줄푸세'라는 사회경제적 테마대신 '유신 공주'라든가 '정수장학회' 등 철지난 테마를 선택하였다. 바로 여기에 현 야권의 근본적 한계가 있는 것이다.

 

 

 

 

 

정치적 스탠스나 선악에 대한 강박으로 박정희를 부정하거나 우상화하는 일방적 평가는 소모적임에는 마찬가지다. 이같은 이분법적 강박에서 벗어나 과연 한국이 급속하게 경제성장을 하게 된 사회경제적 배경과 박정희에 대한 대중적 지지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말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 과거로부터 교훈의 광맥을 찾아 현재에 의미 있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 해방과 한국 전쟁이후 이승만 정권에서의 토지개혁이 갖는 사회경제적 의미, 제조업 중심의 경제성장이 갖는 경제학적 의미는 매우 중요하게 고찰해야 할 테마로 다음 주에 한 번 더 디벼보겠다. 오늘마저 원고 펑크가 날 경우, 신상털기에 따른 여성 팬들의 전화 폭주로 인해 집필에 지장이 있을까 우려되어 현저히 낮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일단 출고하는 것을 양해 바란다.

 

 

 

 

 

 

 

 

 

 

한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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