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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11. 14. 화요일
딴지총수



 
 

편집부 주

 

한일군사협정, 정확히는 한일군사정보교류협정이 전국민적인 반대 속에 강행되고 있다.

일본이 원했던 것, 우리 정부가 내주려는 그것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2006년 11월 13일에 개재된 본지 총수의 기사를 다시 꺼낸다.

본 기사의 원제는 <북핵사태, 한 달 관찰기>이다.

총수의 예언이 틀리기를 바라는 것이 본지 수뇌부만은 아니리라 사료된다.

 

 

 

 

 

고백부터 해야겠다.

 

그 동안 북한 문제, 큰 관심, 가져본 적 없다. 북한을 실존하는 동족으로, 국가적 실체로 인정하고 좋든 싫든 '운명상당히공동체'란 사실, 수용해왔다. 하지만 내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인 적, 없다. 민족이나 통일은, 관념이었다. 그래도 내 한 몸 건사하고 사는 데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다 꼭 한 달 전, 북핵이 터졌다.

 

이건 좀 이야기가 달랐다. 재래식 무기는 구체적 물건이다. 전장, 중량, 속도, 사거리 따위가 중요하다. 그러나 핵은 이미지다. 살상반경이니 하는 스펙,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니다. 오로지 있느냐 없느냐, 그것만이 문제다. 왜. 공포를 통제하니까. 핵 억지력을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이라는 건 그래서다.

 

그걸 북한이 가진단다.

 

세계가 시끄럽다. 리더는 미국. 우측 선두 기준은 일본. 둘이 방방 뜬다. 그 사이 우린 '결의'하고 '규탄'하고 '촉구'했다. 우습다. 할 수 있는 게, 그게 전부다. 북한이 그런 남한을, 안중에 둘 이유가 없다.

 

이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공부 좀 해봐야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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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북핵으로 미국이 가장 먼저 뱉어낸 단어 중 하나가 '봉쇄'다. 경제 봉쇄, 해상 봉쇄, 금융 봉쇄... 봉쇄. 이 단어부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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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ai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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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g Telegram

 

1946년 2월 22일,

 

모스크바로부터 워싱턴 국무부에 전보 한 통이 도착한다. 무려 5,540 단어로 이루어져 훗날 'long telegram(장문의 전보)'라는 고유명사 하나를 미국 외교사에 등재시킨 이 전문은 동시에 한 인물을 세계사에 등장시킨다.

 

조지 케넌(George F. Kenna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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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외무상 짐머만의 '짐머만 전보(Zimmerman Telegram)'과 함께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전보 중 하나로 평가 받는 이 전보를 보낸 조지 케넌은 당시 러시아 주재 미 참사관이었다.

 

독일 외무상 짐머만은 미국이 세계1차대전에 뛰어들 것을 우려해 만약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면 미국을 후방에서 공격해달라며 멕시코에 전보를 보낸다. 멕시코가 미국의 후방을 교란해주면 멕시코의 과거 영토인 텍사스, 뉴멕시코, 아리조나의 회복을 도와주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전보는 중간에 영국 첩보국에 의해 인터셉트 되어 미국 정보국에 보내지고, 미국 신문에 대서특필 되면서 미국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결국 유럽인들의 전쟁에 뛰어들 이유가 없다던, 그래서 장사만 하고 있던 미국으로 하여금 1차 세계대전에 결정적으로 참전하게 만든 이 한 장의 전보는 그 이후로 '짐머만 전보'란 고유명사로 불리게 된다.

- Zimmerman Telegram

 

불과 1년 전인 2차 대전 때까지만 해도 군사 동맹국이었던 소련이 왜 당시 출범하던 세계은행과 IMF 동참제안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미 재무성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작성된 이 문서의 핵심논리는, 명료하다.

 

케넌은 소련을 "이성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 반면 힘의 논리에는 매우 민감하여(impervious to the logic of reason, highly sensitive to the logic of force)" 그 어떠한 형태의 이성적 설득도 통하지 않는 정치세력으로 규정한다.

 

나아가 전통적으로 불안정한 러시아의 세계관은 협력보단 갈등에 중점을 두고 대규모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으니 그 위험성에 대해 각성해야 하며, 그들이 침범하는 세계 어떤 곳에서도 미국은 '불변의 대항력(unalterable counterforce)'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Long Telegram 전문 보기)

 

한 마디로,

 

소련과 대화 중단하고 소련 팽창을 전세계적으로 저지하라!

 

는 것이다. 이 한 통의 전보는 당시 국무부 내무 문건으로 회람되며 미 행정부 내에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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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람의 표지

 

트루먼 대통령은 그 전보의 분석을 기조로 공산세력에게 위협받는 모든 지역에 군사, 경제적 원조를 제공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트루먼 독트린'을 천명하게 된다.

 

또한 이 구상은 소련연방을 병풍처럼 군사동맹으로 둘러싸서 압박하기 위한 NATO의 창설과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서유럽의 경제를 지원하여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했던 '마샬 플랜'의 논리적 기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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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과 마샬

 

이 전보에 담긴 문제의식은 이듬해 미 외교협회가 발행하는 회람에 'X'라는 필명으로 '소련 행동의 근원(The Sources of Soviet Conduct)'이란 제하의 문서로 발표된다. (The Sources of Soviet Conduct 전문 보기)

 

조지 케넌이라는 본명 대신 'X'라는 필명을 사용한 덕에 미 역사에서 'X article'이라 명명된 이 문서를 통해 이번에는 세계역사에, 불멸의 단어 하나가 등재된다.

 

 

'containment'

 

 

바로 '봉쇄'다.

 

'이상주의에 기반해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태도를 버리고 실현 가능한 현실적 이익을 위해 정치, 경제, 외교, 심리적으로 상대를 전방위로 압박하여 그들 내부의 결함으로 스스로 괴멸되도록 만든다'

 

는 정책 개념이다. 향후 수 십 년간 전세계를 이분법적 대결구도로 양분하고 무한군비경쟁으로 몰아넣었던 냉전은 그렇게 단 한 통의 전보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애초 비군사적 성격이었던 케넌의 봉쇄구상은 실제 정치가들에 의해 적용되며 오히려 군사적 수단을 합리화하는 논거로 동원되면서, 미국의 전세계적 군사개입과 일방주의 외교의 철학적 기원이 된다.

 

55년 후 부시가,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부시의 정책을 결정하는 네오콘들이,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은 지금 결정을 해야 한다. 우리 편이 되던지 아니면 테러리스트의 편이 되던지. Every nation, in every region, now has a decision to make. Either you are with us, or you are with the terrorists. (2001년 9월 20일 부시의 의회 연설)

 

라고 전세계를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고 양단하는 사고체계의 출발점도 바로 여기다.

 

'봉쇄'는 그렇게 탄생한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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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nnan's doctrine

 

'X article'을 게재할 즈음 케넌은 미국 국무부의 정책 적합성과 타당성을 검토하는 정책기획국(Policy Planning Satff)의 국장이 된다. 그리고 이 시절 그는 이 정책기획국을 통해 한반도와 일본의 운명과 밀접하게 연관된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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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와 히로히토

 

이 시점 패전국이던 일본은 연합군 최고사령본부(The General Headquarters of the 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Forces)의 사령관이었던 맥아더의 관할 하에 있었다. 맥아더는 1947년 초부터 일본에 총선거를 실시해 자신이 책임지고 있던 군정을 끝내고 일본과 미국은 평화조약을 맺은 후 미군은 일본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맥아더의 구상은 일본의 영구중립국화, 즉 아시아의 스위스를 만들겠단 거였다. 빨리 일본을 해결하고 대통령에 출마할 생각이었다는 게 사가들의 분석이다.

 

그러나 정책기획국 생각은 달랐다.

 

당시 정책기획국의 내부문서에 따르면, 일본의 미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은 더 이상 없다며 일본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미합중국 외교문서 FRUS 1947 Vol. VI .극동 편 486페이지)

 

일본은 두 강대국 중 하나의 위성국이 될 수 밖에 없다. It(Japan) can only gravitate into the orbit of one or the other of the super pow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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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두 강대국은 미국과 소련을 의미한다. 정책기획국은 그 둘 중 일본이 미국의 위성국이 되어야 한다는 걸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미군이 일본을 떠날 경우 일본이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에는 부족하다고.

 

우리의 점령 정책은 우리가 떠난 후 일본사회가 공산주의의 압력을 견뎌내는데 필요한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만들어내도록 계획된 것도 아니었고 그런 안정을 이룩해내지도 않았다. Our occupation policies have not produced, nor are they designed to produce, the political and economic stability which Japanese society will require if it is to withstand communist pressures after we have gone. (미합중국 외교문서 FRUS 1947 Vol. I .유엔 편 775페이지)

 

이어 케넌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내기 위해 일본을 극동지역에서 다시 중요한 세력으로 만들어야 하며, 미국과 일본이 평화조약을 맺을 시점에 러시아의 세력이 극도로 약화되어 있지 않거나 일본이 정치적으로 취약한 상황이라면, 그렇다면 평화조약의 연기 혹은 일본의 제한적 재무장이 필요하다고 분석한다.

 

평화조약을 연기하거나 혹은 일본의 제한적 재무장이 요구된다. we should either postpone the treaty or insist on a limited remilitarization of Japan. (미합중국 외교문서 PPS 28, 1페이지)

 

미군이 일본을 떠나야 하는 평화조약을 맺는 것이 과연 이익인지 충분히 따져봐야 하고 또한 한 동안은 아예 아무런 조약도 맺지 않는 것이 미국에 더 이익이며, 일본의 부흥을 위해 일본이 전쟁배상금을 피해국가들에 최소한으로 지급하도록 해야 하고 일본 전범들을 더 이상 문제삼지 말고 복귀할 수 있도록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보고서를 통해 역설한다.

 

즉, 케넌의 정책기획국은 일본을 철저히 공산주의 남하를 저지할 방어선이란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를 위해서는 평화조약의 연기, 배상금 지급중지, 전범에 대한 관용은 물론 일본의 재무장까지도 용인할 수 있다는 태도를 견지한다.

 

결국 종전 6년이나 지난 1951년 9월 8일에 가서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San Francisco)'을 맺고 동시에 미일안보조약도 체결한다. 그러나 단순히 평화조약만 맺고 떠나는 대신 미일안보조약을 따로 체결함으로써 미군이 원할 때는 언제든 일본을 미군의 군사기지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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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 안보조약에 사인하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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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먼저 케넌 정책기획국의 한반도와 관련한 이해를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지정학적으로 소련 남하의 길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반도라는 길목을 타고 내려오는 소련을 과연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관심사는 오직 거기 집중되어 있었다.

 

정책기획국은 소련이 미군의 일본 주둔을 의식해서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여타 획득한 '과거 일본영토'에서 대항력을 구축하려 할 것이라 예상한다.

 

일본에서의 미군 주둔을 심각하게 우려하는 소련은 한반도, 만주 그리고 과거 일본영토 중 새롭게 획득한 지역에서 대항력을 구축하려고 할 것이다. Deeply apprehensive of American military power based Japan and Okinawa, Soviets will attempt build counter power in Korea, Manchuria and on newly acquired former Jap territories. (미합중국 외교문서 FRUS, 1947, Vol. VI. 극동편 583페이지)

 

그러나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싼 바다와 섬에서의 소련의 위협은 대규모 지상병력보다는 공중전을 통해 효과적으로 저지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소련이 일본을 공격할 만큼의 군사력을 남한에서 수립하지 않는 한 한국에서의 미군 철수가 극동에서의 미 군사력을 약화시키지는 않을 것이기에, 극동에서의 미군병력이 부족한 상황이므로 한국에선 병력 철수가 필요하다 분석한다.

 

한반도에서의 철수는, 소련이 남한에서 일본에 대한 공격을 도발할 만큼의 군사력을 수립하지 않는 한, 극동방위군의 군사적 위치를 약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the withdrawal of these forces from Korea would not impair the military position of the Far East Command unless, in consequence, the Soviets establish military strength in south Korea capable of mounting an assault in Japan. (미합중국 외교문서 FRUS, 1947, Vol. VI. 극동편 818페이지)

 

게다가 한국에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질병 예방과 질서 유지에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어가 미국의 국익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현재 한국 점령은 질병 예방과 질서 유지에 너무 큰 비용을 요구하고 있어, 우리 점령군이 미국의 안보에 별 이익이 되지 못할 우려가 있다. At the present time, the occupation of Korea is requiring very large expenditures for the primary purpose of preventing disease and disorder which might endanger our occupation forces with little, if any, lasting benefit to the security of the United States.

 

일본을 제외한 극동지역은 미국에게 있어서 우선 순위가 떨어지는 지역이었다. 당시 미국에게 있어 최우선은 유럽, 그 다음이 중동 정도. 실제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에조차 한반도가 아니라 NATO에 4개 사단(제 2기갑사단, 제 4, 28, 43 보병사단)을 추가 파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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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뉴욕을 떠나 독일로 파견되고 있는 미 제4 보병사단

 

그리고 만약 유사시에는 극동 지역에서의 소련 남하를 저지하고 힘의 균형을 위해 일본의 한반도와 만주 재진입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구상을 한다.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에 재진입 하는 것을 우리가 현실로 받아들이고 반대하지 않아야 하는 날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올 수 있다. The day will come, and possibly sooner than we think, when realism will call upon us not to oppose the re-entry of Japanese influence and activity into Korea and Manchuria. (미합중국 외교문서 FRUS, 1949, Vol. II. 유엔편 178페이지)

 

여기서 특히 섬뜩한 대목이 하나 등장한다.

 

 

"re-entry of Japanese"

 

 

한반도의 일본 재식민지화를 '재진입'이라 표현하고 있다.

 

당시 미국 의사결정권자들에게 한반도는 '과거 일본 영토(former Japanese territory)'라고 계속해서 표현된다. 실제 그들에게 한반도는 그 정도 의미였다. 케넌 정책기획국의 구상은 소련 공산주의가 남한까지 팽창해 온다면 일본을 통해 만주까지 다시 밀고 올라가 세력 균형을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실제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2주 후 맥아더는 당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당시 일본 총리에게 7,500명 규모의 '경찰준비군'을 창설하라고 명한다. 이 '경찰준비군'은 일본 패전 후 최초의 실질적인 군대로 요시다 시게루가 특사 존 덜레스(John Foster Dulles)와 밀약을 통해 그 창설을 거래한 것이다. 1950년 8월 2일부터 1950년 12월 10일 사이에 이들 중 46명의 지뢰해체 전문가와 1,200명의 일본군 병력이 북한 동해상에 상륙해 UN 연합군의 초동 작전을 담당한다. 해방 이후 우리도 모르는 사이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해 군사작전을 실제로 펼쳤던 것이다. (<Sheathing the Sword: The Demilitarization of Japan> 228~242 페이지)

 

이러한 정황 하에 1949년 6월 미군은 남한에서 철수하고 1949년 12월 'NSC-48'이라 명명된 외교 정책이 수립된다. 한국전쟁 발발의 가장 주요한 요인 중 하나로 분석되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이 바로 이 정책의 소산이다.

 

당시 케넌의 직속상관이었던 국무장관 애치슨은 1950년 1월 12일 워싱턴 DC의 '전미기자협회(National Press Club)'에서 "Crisis in China: An Examination of U.S. Policy" 라는 제목으로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Crisis in Asia : An Examination of U.S. Policy 전문 보기)

 

미국의 (대 공산권)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와 일본 그리고 류큐 제도와 필리핀을 잇는 선이다. This defensive perimeter runs along the Aleutians to Japan and then goes to the Ryukyu. (중략) The defensive perimeter runs from the Ryukyus to the Philippine Islands.

 

이 방위선 바깥의 지역, 즉 남한과 대만에 대한 군사적 공격에 대해선 아무런 보장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위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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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치슨

 

최근 공개된 구소련의 비밀 문서에 따르면 스탈린은 처음에는 한국전쟁에 대해 반대한다. 1949년 3월 7일 스탈린과 김일성이 최초로 회동했을 때의 비밀 대화록에 따르면 남침을 제안하는 김일성에게 스탈린은 이렇게 말한다.

 

남침은 안 된다. 첫째, 북한군이 남한에 비해 충분히 우세한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했고, 둘째, 남한에는 여전히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셋째, 소련과 미국 사이의 38도선 협정을 소련이 먼저 위반한다면 미국에게 개입할 빌미를 준다. (“The Korean Conflict, 1950-1953: The Most Mysterious War of the 20th Century”, Evgenii P. Bajanov and Natalia Bajanova)

 

1949년 9월 3일, 김일성은 당시 평양 주재 소련대사 툰킨(Grigory Ivanovich Tunkin)을 통해 다시 한 번 스탈린에게 전쟁 승인 요청을 한다. 이에 대한 1949년 9월 24일 소련 정치국의 답변은,

 

북한군이 남한에 비해 압도적 군사력으로 준비된 상태가 아니고 미군의 참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란 같은 이유를 다시 한 번 들어 전쟁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AVP RF, Fond 059a, Opis 5a, Delo 3, Papka 11, listy 75-77)

 

하지만 '애치슨 선언'이 있었던 바로 그 달인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은 드디어

 

"그 사안에 대해 협력할 준비가 되었다"

 

는 전문을 김일성에게 보낸다. (AVP RF, Fond 059a, Opis 5a, Delo 3, Papka 11, list 92)

 

또한 스탈린은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초대하며 이렇게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련에 다시 오는 것에 대해서는 중공(中共, 중국)은 물론 북한지도부에도 비밀로 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스탈린이 스티코프 소련 대사를 통해 김일성에게 보낸 비밀 전문. 1950. 2. 2. APRF)

 

1950년 3월 30일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김일성과의 비밀회동에서 스탈린은

 

- 소련과 중공이 중소친선조약을 맺었고

- 소련이 이제 핵을 가졌으며

- 결정적으로 '미국으로부터의 정보'에 의하면 워싱턴 분위기는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발시 개입하지 않는 쪽

 

이라며 전쟁을 승인한다. (Bolshevik, APRF. Bajanov and Bajanova, 40-42페이지)

 

한국 전쟁은 그로부터 정확히 2개월 25일 후 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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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핵실험을 한 것이 전세계에 알려진 이 날, 전세계에서 가장 호들갑을 떤 것은 당사자인 남한도, 북한을 악의 축으로 선언한 미국도 아니고 바로 일본이었다.

 

이제부터 이 이야기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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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이 지하 핵실험' 제하의 <아사히 신문>호외

 

일본에서 10월 10일은 1964년 동경 올림픽을 기념하는 '체육의 날' 공휴일이다. 2000년부터는 10월 10일 아니라 10월 둘째 주 월요일에 쉰다. 그런데 2006년 10월 둘째 주 월요일은 바로 10월 9일이었다.

 

이 날, 일본 신문들은 호외를 찍어낸다. 전세계에서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고 가판에서 호외를 낸 유일한 나라가 일본이었다.

 

이 날은 마침 아베 신조(安倍晉三) 신임 총리가 방한해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던 날이기도 하다. 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아베 총리는 북핵에 관한 첫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일본의 독자적 대응에 관한 검토를 즉각 시작하겠다."

 

당시만 하더라도 북의 실험이 핵실험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분석이 득세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실험 직후 핵실험의 진위 여부에 대한 판단이 끝날 때까지는 기다리겠다는 입장을 번복하고 바로 이틀 후인 10월 11일 안전보장회의를 열고

 

- 모든 북한 선박의 입항 금지

- 북한으로부터 모든 상품 수입 금지

- 북한 국적을 가진 자의 원칙적인 입국 금지

 

를 결정한다.

 

그러니까 일본은 전세계에서 가장 신속하게, 독자적 대북제재 조치를 결정한 나라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실제 핵실험이었는지 아니었는지의 진위 확인조차 하지 않고 제재에 들어간 유일한 국가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 날 오전 일본언론들은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했다는 세계적 오보를 낸다. 니혼 TV, NHK, <아사히 신문> 등이 보도하고 로이터와 블룸버그 통신이 이를 받아 전세계에 타전한다.

 

또한 이 날 일본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아베 신조 총리는 "핵무기를 개발한다면, (북한) 자체의 생존이 심각한 상황이 될 것이다" 라고 경고한다. 북한의 체제붕괴를 언급한 것이다. 여행 금지는 이 날부터 바로 시행된다.

 

교역 금지와 항만 폐쇄는 3일 후인 14일부터 발효되는데 이날 북한 제재조치를 발표하던 기자회견에서 시오자키 야쓰히사(鹽崎恭久) 관방장관은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북한이 일본인 납치 사건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그간 보여주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추가적인 제재조치를 결정하게 한 이유 중 하나다.The fact that North Korea has not taken a sincere attitude toward the abduction issue was part of our decision to impose additional sanctions

 

일본인 납치사건이 북한에 대한 제재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공식적인 발언이다. 이 시오자키 관방장관은 아베 신조 총리가 신설한 소위 '납치담당상'을 겸임하고 있기도 하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만 전담하는 부서다. 이슈 하나만 전담하는 부서에 내각 2인자를 책임자로 임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납치와 북핵을 연계한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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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납치 사건


미국 하원이 2003년 11월 통과시킨 북한인권법(North Korean Human Rights Act)이란 게 있다. 북한의 인권을 개선하고 탈북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만든 법안이다. 내용은 크게 세 개 항목이다.

 

- 식량, 의약품 등 인도적 지원의 분배를 감시한다.

- 탈북자에게 미국 망명신청자격을 개방한다.

- 인권특사를 두고 북한과 인권개선을 위한 대화를 추진한다.

 

한마디로 북한은 인권이 없단 소리다.

 

부시 행정부 하에서 미국 보수단체가 입안했고 보수우익 성향의 의원들이 발의했다. 이런 법안이 미국에 생긴다고 북한에 있는 주민의 삶이 실제적으로 달라질 리 없다. 미국이 도덕적 정치적 우위에 서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 퍼포먼스에 해당하는 법안의 섹션 3의 25항에 이런 문구가 있다.

 

북한 정부는 다수의 일본시민의 납치에 대한 책임이 있다... the Government of North Korea has been responsible in years past for the abduction of numerous citizens of... Japan

 

그리고 북한이 다음과 같은 노력을 하지 않으면 북한에 대한 원조를 하지 않겠다고 하는 걸 내용으로 하는 섹션 202 중에서 C-3항을 보면 이런 문구가 있다.

 

북한 정부에 의해 납치된 일본시민에 대한 정보를 완전히 공개할 것.. fully disclosing all information regarding citizens of Japan... abducted by the Government of North Korea

 

북한인권법안에 뜬금없이 왠 일본인 납치인가.

 

2002년 9월 17일, 일본 총리의 사상 첫 방북에 이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납치 시인 발언은 세계적 뉴스였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70, 80년대 영웅주의에 빠진 자"들이 사람을 납치했다며 고이즈미에게 사과한 김정일의 납치시인과 고이즈미의 방북으로 인한 북일 관계정상화을 "외교적 쿠데타"라고 표현했다.("Mickey Mouse and the Diplomatic Coup", 2002.9.19, Art Bushwald, Wall Street Journal)

 

이후 일본은 이 납치 문제의 국제적 이슈화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경주한다. 2003년 G8 정상회담의 의장성명에서 일본인 납치 문제가 언급됐으며 2004년 코피 아난 UN 사무총장이 이 문제를 이슈화했고 같은 해 최연소 납북자였던 메구미의 부모와 부시 대통령의 만남도 정부 차원에서 주선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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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인권법의 문구는 그러니까 이 이슈가 전세계적인 것이 되도록 만들기 위한 일본 정부 차원의 치열하고 치밀한 노력이 만들어 낸 작은 흔적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처음부터 이 납북자 문제에 대해 이 정도로 적극적이었던 건 아니다. 고이즈미와 김정일의 정상회담이 있기 이전까지 일본 정부의 이들에 대한 공식입장은 납북이 아니라 행방불명이었다.

 

정상회담 한 달 후인 2002년 10월 15일 오후 2시 33분, 다섯 명의 생존자들이 북한으로의 귀환을 전제로 납치 이후 24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 땅에 발을 내디딘 날까지도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드라이했다.

 

하네다 공항에 내린 5명의 일본인 납북자들에 대해 고이즈미 총리는 일시 귀국이 전면 해결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이들을 직접 면회하지도 않았다. 관할이라 할 수 있는 관방장관 역시 "미해결 상태에서 그들을 만나야 할 지 의문"이라고 했다. 결국 공항에 마중 나간 일본 정부의 최고위 관료는 고이즈미 총리도 관방장관도 아닌 관방차관이었다.

 

그러나 이 날 이후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착륙한 비행기에 올라 납북자들을 맞이 했던 바로 그 관방차관 때문이다. 그는 고이즈미의 북한 방문에 동행했다 귀국과 동시에 '납치가족회'를 찾아 정부가 그 동안 납치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사과한다. 그리고 바로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기 시작한다.

 

그는 "납치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산다면 취업, 자식교육, 언어문제 등이 있을 것이며 이 모든 것을 정부가 보증할 책임이 있다"는 발언을 시작으로 "5명을 북한에 돌려보내지 말고 북한에 남아 있는 이들의 자녀까지 영주 귀국시켜야 한다"며 납북자 문제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발언을 계속한다.

 

일본 여론이 크게 호응한다. 결국 일본 정부는 그들 5명의 북한 복귀를 거부하고 오히려 북한에 남아 있는 그 자녀들까지도 일본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 관방차관의 인기는 치솟기 시작한다.

 

그는 그로부터 일년 후인 2003년 9월, 40대에 자민당 서열 2위인 간사장에 발탁돼 일본 정계를 뒤흔든다. 이후 그는 "북한의 체제 붕괴를 유도해야”하고 “평양에는 냉이도 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발언 등을 계속하며 대북 강경 대응의 선봉에 선다.

 

결국 2004년 5월 납북자들의 자녀 5명이 추가로 일본으로 송환되고 그는 그로부터 다섯 달 후인 2004년 10월, 역대 최연소 관방장관에 취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다시 일년 후, 드디어 일본 역대 최연소 총리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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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다.

 

39세였던 1993년 처음으로 중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한 지 불과 13년 만인 52세에 총리가 됐다. 어떻게 이런 초스피드가 가능했을까.

 

많은 부분 그의 외할아버지 덕이다.

 

그 역시 자신을 만든 건 그의 외할아버지라고 말한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아버지보다 외할아버지의 정치적 DNA를 이어받았다"며 "나에게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그의 어머니 요오코(洋子) 역시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정책은 외할아버지를 닮고 성격은 아버지를 닮았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56~57대 일본 수상,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다. 아베 신조가 지금 펼치고 있는 초강경 보수정책의 원류라고 칭해진다. 아베 신조 본인과 그의 어머니가 말한 이 둘의 정책적 유사점은 명백하다.

 

평화헌법 개정과 군사력에 대한 강한 집착.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에 오르자 가장 먼저 한 것이 평화헌법 개정을 연구하기 위한 헌법조사회의 설치였다. 평화헌법 조문 중에서도 군대보유와 무력행사를 금지하는 9조가 그 핵심 개정 대상이다.

 

평화헌법 9조 1. 일본 국민들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이 발동하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원히 이를 포기한다. 2.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그리고 그 외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베 신조는, 50여 년 후, 기시 노부스케가 그렇게 고치고 싶어했던 일본의 평화헌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현행 헌법의 전문은 패전국이 승전국(미국)에 바친 반성문이다. 자기 손으로 만든 헌법을 가질 때야 비로소 주권국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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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

 

또한 기시 노부스케는 군대보유를 금지한 일본 평화헌법 9조를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키고 일본의 군비증강을 적극 도모한, 새로운 미일군사동맹 - <신 미일안보조약>(Treaty of Mutual Cooperation and Security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Japan)을 체결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군국주의로의 회귀라며 결사반대하는 야당의원들을 경찰을 동원해 끌어내고 이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그 다음 달인 1960년 6월, 소위 '안보투쟁'이라 불린 일본 대중들의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결국 퇴진하게 된다.

 

다시 50년 후의 아베 신조는 일본의 군사작전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규모만 소형이라면 일본이 핵을 보유하는 것도 괜찮다", "북한이 미사일 공격을 해 올 것이 확실한 상황에선 먼저 미사일 기지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 확보도 검토해야 한다"

 

둘의 생각은 50년을 건너뛰어 그렇게 판박이다.

 

퇴진한 기시 노부스케는 이후에도 일본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그 영향력이 히로히토 시대(昭和, 쇼와)까지 막후 영향력을 누렸던 일본 최후의 유신 정치가를 닮았다고 해서, '쇼와의 요괴'라 불리게 된다.

 

 

 

미쓰야(三矢)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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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와 닉슨

 

1965년 2월 10일, 제 40회 일본 국회중의원예산심의위원회에서 일본 사회당의 오카다 하루오(岡田春夫) 의원은 고이즈미 준야(小泉純也) 당시 방위청 장관을 상대로,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북베트남까지 폭격을 확대하는 소위 북폭(Bombing of North Vietnam)으로 베트남전에 전면개입하기 시작한 미국이 일본에 비상경계태세를 요구하지 않았느냐며 질의를 시작한다.

 

그는 이어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당시 총리에게 바로 한 달 전인 1965년 1월 13일에 발표한 닉슨 미국대통령과의 닉슨-사토 공동성명에 관해 질의한다.

 

당시 공동성명은 그 바로 3개월 전에 있었던 중국 최초의 핵실험과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64년 10월 16일 오전 7시 신장 자치구의 고비사막에서 '596'이라 명명된 중국 최초 그리고 동양권 최초의 핵폭탄이 터진다. 중국의 핵개발을 지원하기로 했던 소련공산당이 미국에 의한 일본의 핵무장을 우려, 중국 지원을 중단하고 중국에서 철수한 것이 1959년 6월이다. 이 때 중국 수뇌부는 독자적인 핵을 가져야겠다고 결의한다. 당시 국방부장 린뱌오(林彪)는 이렇게 말했다. "땔나무로 불을 지펴서라도 핵을 터뜨리겠다 ". 중국 최초의 핵이 '596'이라고 명명된 것은 그런 사연이다.

 

오카다 의원은 이 공동성명에 담긴 당시 내각의 정세관을 문제 삼았다. 그의 질의를 속기록에서 그대로 옮기면,

 

(전략)... 공동성명을 보면 제5항에 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에 최대의 영향을 미치는 것은 중국문제이다, 라고 총리대신과 (미국) 대통령은 합의하고 있다... (중략)... 총리대신은, 중국문제와 안보체제를 대응시키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총리대신은 미국에 계시는 동안에 중국은 침략적 경향을 가진다는 의미의 연설도 했었다... (중략)... 이것은 명백히 미국의 중국봉쇄정책을 따르는 것이라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일본이 미국의 중국봉쇄정책에 보조를 맞춰 갑자기 중국을 가상적국으로 삼고 또 그것을 핑계로 위기를 과장해 일본이 다시 군국주의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추궁한다. 사토 총리는 이를 전면 부인한다. 속기록에서의 사토 총리의 답변이다.

 

매우 분명히 답할 수 있다. 가상적국으로 삼고 있지 않다. 전후 신생 일본의 성격을 잘 봐달라. 이 정도로 자유를 지키고 평화에 매진하는 나라는 없다. 어디에도 없다... (중략) ... 어떤 국가도 가상적국으로 일본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이렇게 공방을 주고받다 그는 질의의 방향을 남한 문제로 옮겨간다. 당시 한일 정부는 한일협정을 위해 분주히 오가던 중이었다. 그는 자민당 내에 부산적기론(釜山赤旗論)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다며 이들에게 군국주의의 냄새가 난다는 지적을 한다.

 

* 부산적기론 -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일거에 낙동강까지 진격하자 일본 정치권에 등장한 용어다. '부산에 공산주의의 붉은 깃발이 꽂히게 되면 일본도 위험해진다'는 뜻으로 당시 케넌의 상황인식 그대로다. 한일회담 수석대표였던 사와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38도선을 압록강까지 밀어 부치는 것이 한일교섭의 목적이다. 38도선이 부산까지 내려오면, 일본은 당장 위험하기 때문이다. 지하에 잠든 조선관계 선열들의 영을 생각해서라도, 이 일을 잊어선 안 된다. "

-일본 공산당의 기관지 <아카하타(赤旗)> 1958년 6월 21일자

 

이번에도 사토 총리는 부정한다.

 

그러자 그는 사토 총리를 직접 겨냥해 당신은 매우 극우적이며 현 내각은 일본에 군국주의적 국가체제를 다시 재건하려는 것이 아니냐며 몰아 부친다. 이어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방향을 틀어 이런 질의를 시작한다.

 

"방위청 장관에게 묻는다. 쇼와 38년(1963년) 6월경, '통합방위도상연구'라는 연구회가 열렸다. (중략) 이 연구는 미쓰야 연구라든가 쓰리 애로우(three arrow)라는 연구로 약칭되는데... "

 

이 질의가 진행되면서 위원회장은 자민당 의원의 욕설과 고성으로 뒤덮이기 시작되고 결국 질의는 중단된다. 그 다음 날 이 미쓰야 연구는 일본 언론에 의해 대서특필되며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진다.

 

이 날 최초로 폭로된 미쓰야 연구의 내용은 한마디로 일본의 한반도 재진출 시나리오다. 한반도 유사시라는 가상 시나리오 하에서 일본의 군사적 대응책을 기술하고 있는 이 작전 계획은,

 

한국 군대 내의 반란을 북한이 지원해 한국 전쟁이 재발하게 되면, 주한미군은 물론 주일미군이 참전하게 되고 이때 자위대 역시 한반도에 상륙하며 마지막엔 한반도에 핵폭탄을 투하하고 일본 자위대는 한반도에 주둔한다

 

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우리에겐 당연히 경악을 금치 못할 내용이지만 이것이 일본 사회에도 충격적이었던 것은 미군에 의한 자위대 출동, 일본 내로의 핵폭탄 반입 허용, 유사시 국민기본권 제한 등 평화헌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과거 군국주의로의 회귀를 뜻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게다가 이 모든 것이 군국주의 시절처럼 84명의 장교들에 의해 몰래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오카다 의원이 이 연구를 쓰리 애로우(three arrow)라 언급한 것은 단어 자체가 삼시(三失) 즉 세 개의 화살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이 말이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본 전국시대의 유명한 무장 모리 모도나리(毛利元就)가 죽기 전 아들 삼형제를 불러 힘을 합해야 화살을 부러뜨릴 수 있다며 협력의 필요성을 일깨운 일화에서 유래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3국 공조, 즉 일본 미국 그리고 남한의 군사적 공동작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케넌의 're-entry' 구상과 정확히 그 궤를 같이 하는 작전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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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준야

 

이 일로 결국 당시 방위청 장관 고이즈미 준야는 책임을 지고 사임하게 되는 데 그가 바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의 아버지다.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미쓰야 연구'가 있은 지 정확히 40년 뒤인 2003년, 바로 이 '미쓰야 연구'로부터 시작된 전시 자위대의 대응 및 관련 법규를 명시한 '유사법제(有事法制)'를 국회 통과시킨다.

 

이 법의 통과로 향후 일본에서는 총리가 위기상황이라고 판단하면 자위대의 출동과 국민의 각종 권리제한이 가능해졌다.

 

말하자면 이제 일본 국내법을 어기지 않고 북한을 공격할 수도 있단 소리다. 군대의 소유와 전쟁의 금지를 규정하고 있는 평화헌법을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일본이 전쟁을 수행할 수도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 때의 총리 사토 에이사쿠는 아베 신조의 작은 외할아버지다. 그러니까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 되겠다.

 

친형제임에도 서로 성이 다른 것은 처가의 양자로 들어가거나 사촌과 결혼하여 대를 잇는 일본의 전통 때문이다. 그들 아버지의 원래 성은 기시(岸)였으나 사토(佐藤)라는 성을 쓰는 처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성이 바뀐다. 그래서 아버지와 동생은 사토라는 성을 쓴다. 그런데 노부스케는 중 3때 아버지 가문의 사촌과 결혼하면서 다시 양자로 들어가 기시 가문으로 복귀하게 된다. 사토 노부스케가 아니라 기시 노부스케가 된 사연이다.

 

이 3인 총리 가계의 보스는 물론 기시 노부스케.

 

그는 1940년대 만주국 실업부 차장으로 만주의 산업을 총괄하고 도조 내각 하에서는 군수차관을 지내다 맥아더의 연합군최고사령부에 의해 체포수감된 A급 전범이었다.

 

포츠담 선언의 10조 '전범들에 대한 엄중처벌("stern justice shall be meted out to all war criminals")' 조항에 따라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히로히토의 생일인 46년 4월 29일, 극동국제군사재판(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소위 '동경재판'을 열고 A급 전범 총 70명 중 첫 번째 재판 그룹에 속한 28명을 기소한다. 나머지는 23명의 전쟁 관련 범죄자와 19명의 악명 높은 경제 관련 범죄자들 그리고 그 외 10명으로 나뉘어 재판 순서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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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정에 선 전범들

 

첫 번째로 재판을 받은 28명 중 도중 사망한 2명 그리고 정신이상이 된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25명 전원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중 7명은 1948년 12월 23일 새벽 동경 스가모 교도소에서 교수형 된다.

 

교수형 된 이들 7명은 꼭 30년 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막후정치를 하던 시절인, 1978년 10월 17일 야스쿠니 신사에 몰래 합사(合祀)된다. 이 신사 합사가 알려진 건 다음 해 <아사히 신문>이 폭로하면서다. 이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는 기시 노부스케 밑에서 우정상, 사토 에이사쿠 밑에서는 대장상을 지내고 사토 에이사쿠로부터 다음 총리를 물려 받은 자다.

 

그러나. 나머지 그룹은 모두 전범 재판을 받지 않는다.

 

기시 노부스케 역시 A급 전범으로 분류되었음에도 이 전범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전범 재판을 받지 않은 가장 고위직 관료이자 가장 중요한 전범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다른 A급 전범들이 처형된 바로 다음 날인 1948년 12월 24일 석방되어 불과 9년 후 총리가 된다. 미군정의 정보 자료는 미국이 그가 A급 전범이 아님이 밝혀져서가 아니라 A급 전범임을 알고도 석방했음을 드러낸다. ("Us Spares Top Japanese War Criminals" CIC IRR Box 116, ZF016127, 1948)

 

그는 왜 재판을 받지 않았고 풀려났는가.

 

우선 경제 관련 전범들이 모두 재판을 받지 않았던 것은 소련 팽창 저지를 위해 일본의 신속한 경제 재건이 필요하다 판단했던 케넌의 관용정책 때문이었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는 기시 노부스케의 석방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종신형 전범들의 석방과 완전 복권이 이뤄진 것은 그로부터 7년이 더 지난 1955년이었다. 더구나 그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총리 바로 밑에서 군수물자를 총괄하는 군수차관(장관은 도조 히데키가 겸임했다)으로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데 직접 관련된 주요한 A급 전범이었다.

 

이는 기시 노부스케가 케넌 정책기획국이 전략적으로 중요시했던 바로 만주지역 산업의 총책임자 경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이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케넌의 구상처럼 유사시 필요에 따라 일본이 만주지역에 "re-entry"하게 된다면 그가 필요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시는 생전에 "만주국은 내 작품"이라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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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 도조 히데키

 

또한 '일본 제국주의 기록공개법안(Japanese Imperial Government Records Act)'에 따라 2002년 공개된 CIA 비밀문서의 기시 노부스케 파일(RC Box 12 2002/A/10/3)은 미국이 그를 석방 후에도 지속적으로 그리고 별도로 관리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완전히 공개되고 정리되기 전의 일본 관련 미국 비밀문서들이 일본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일본에 반환되어 방위청 방위연구소와 국립공문서관에 분할 보관되는데, 일본 정부는 이들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어 어느 정도까지 미국이 그를 관리했는지 그는 어느 정도까지 미국에 호응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태평양 전쟁 당시 대본영 육군부 내 '오꾸노인(奧の院, 일본군의 비밀 작전참모실)' 소속이었으며 1950년대 후반 국회 중의원과 참의원을 지내며 기시 노부스케와 정치적으로 대립하기도 했던 츠지 마사노부(汁政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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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지 마사노부

 

패전 직후인 1950년도 일본군 출신의 장교들로 이뤄진 일본군국주의 부활모임 활동을 했고, 이 모임이 다름 아닌 바로 미군 정보국 관할 하에 활동했다고 하는 데에서 당시 미군과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밀월 관계를 짐작 할 수 있을 뿐이다. ("Disclosure"-Newsletter of the Nazi War Crimes and Japanese Imperial Government Records Interagency Working Group, 2001년 11월, 7페이지)

 

한 가지 분명한 건, 그의 영향력이 쇼와 시대를 건너 뛰어 그의 외손자를 통해 오늘날까지도 미치고 있으니 이제는 '헤이세이(平成)의 요괴'라 고쳐 불려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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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

 

미국은 정책을 유산으로 남기고 있었고 일본은 혈육이었다. 그리고 그 둘의 과거와 현재는 오랜 시간, 서로 인과를 주고 받으며 엮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에게 없는 것들을 통절하기 시작했다.

 

 

 

우린, 없다

 

남한엔 우익이 없다.

 

남한 우익의 이데올로그 <조선일보>가 북핵 실험 바로 다음 날인 10월 10일 쓴 사설은 "대통령과 대통령의 사람들"이 "북한정권의 본질에 무지했거나 자주라는 이데올로기에 가려", "7천만 민족 전체의 생사를 핵의 골짜기로 밀어" 넣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대결단이 필요"하다고 외친다. (<조선일보> 사설 전문 보기)

 

우습다.

 

현 정권이 7천만 민족을 핵의 골짜기로 밀어 넣었단 식의 아전인수 상황 인식도 절로 웃음이 나지만 지 혼자 비장하게 내뱉는 결단 촉구는 진정 우습다. 혹여 남한도 핵개발 하란 건지, 북으로 쳐들어 가란 건지 어떤 소리가 나올까 긴장하며 읽어가면 마지막에 민족의 생사를 걸고 요구한다는 결단이란 게 고작 한미공조다.

 

이게 우리 우익이다.

 

공조해야 한다는 바로 그 부시의 대북정책 자체가 실패했다는 마당에, 미국 보수언론의 논조조차 부시의 대북정책을 실패로 규정하는 마당에 도대체 어떤 정책과 공조하란 건가.

 

한나라. 대선후보 3명까지 포함해 회의실에 다들 모여 앉아 규탄대회 한 게 다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건만 그 사이 누구도 미국 갔다는 이 없다. 그렇게 공조해야 한다면서, 그 대상이 되는 미국의 정책결정권자들이나 유력 정치가들 만났다는 이, 아무도 없다.

 

공조란 게 이 쪽의 정책이 먼저 있고서 저쪽의 정책과 만나 조율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우리 우익은 자신들 정책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미국과 공조한다는 그 자체가 정책이다. 이건 공조가 아니라 복종이다. 그리고 오로지 한 단어만 반복한다. 한미공조. 무려 60년 전 조지 케넌이 설계한 세계관이 ROM 칩으로 뇌에 영구 장착된 게다.

 

일본 우익, 미국이 원하는 걸 고리로 미국과 거래한다.

 

1951년 '경찰준비군'이란 명목으로 실질적 군대를 창설해 한국전쟁에 파견했던 요시다 시게루 총리 시절부터 60년대 기시 노부스케의 '신 미일안보조약', 90년대 하시모토 료타로의 '신 미일방위 협력지침(New Guideline)'과 오부치 게이죠의 '주변사태법', 2000년대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유사법제'에 이르기까지 일본 우익이 일관되게 추구한 것은,

 

90년대 초반 우익 정객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가 '보통국가'란 단어 하나로 정리하고 당시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가 '전후 정치의 총결산'이란 논리로 합리화한,

 

일본의 재무장과 독자적 군사작전권의 강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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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우익은 일본을 대륙의 북방 세력을 견제할 군사기지로 활용하면서 동시에 군사적으로 통제가능한 범주 내에 두고자 하는 미국과 끊임없이 거래하며 일방적으로 불리했던 미일동맹을 개정해 간다. 조금씩 끊임없이 일관되게.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이라크 파병으로 자위대의 해외파병을 마침내 실현시켰고 동시에 이를 매개로 일본에 대한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부시 지지를 거래해낸다. 아베 총리와 마찬가지로 일본 교과서 개정 운동을 펼쳤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동경지사는 이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정당한 전쟁을 한 것이었다. 이제 전후 일본이 워싱턴과의 탯줄을 끊고 아시아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해야 할 중대 시점에 와 있다고 믿는다.”

 

그래, 니들은 우익답다.

 

우리 우익은 미국이 아빠다. 반공이 우익인 줄 안다. 그러다 무슨 일만 생기면 미국이 부르기도 전에 달려가 덥석 안긴다. 쪽 팔려서 못 보겠다. 무슨 이따위 우익이 다 있나.

 

 

 

한반도 상황통제권이 없다

 

우리에겐 우리가 있다 착각하는 만큼의 우리 상황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 전시작전통제권 이야기까지 할 것도 없다.

 

6자 회담. 여기 일본이 왜 끼는가. 인접국이라? 이란 핵 놓고 인접하고 있는 러시아, 이라크, 터키, 이스라엘, 미국이 6자 회담 안 한다. 그들도 대립하는 인접 이민족이다. 중국은? 그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미국의 결사저지와 소련의 반대 무릅쓰고 핵개발 했다. 물론 6자 회담 안 했다. 러시아는? 북한이 러시아를 핵으로 공격할까 봐? 중국은 일본, 대만의 핵무장을 우려하고 러시아는 동북아에서의 입지를 원해서라면 이스라엘도 중동에서 똑같은 걸 원한다.

 

이란은 직접 이해당사자가 아닌 UN 안보리 이사국 프랑스, 영국 그리고 독일과 협상한다. 이란의 불만은 미국이 직접 대화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인접국이란 이유만으로 이란과 협상 테이블에 앉는 국가는 없다.

 

북핵 문제에 있어 일본의 발언권과 국제적 영향력은 단순 인접국 수준이 아니다. 지난 11월 7일 미국, 일본, 호주는 우리 우익들이 그렇게 해야한다 주장하던 북한 선박의 해상화물검사를 당분간 하지 않기로 합의한다. 이유는 반대하는 러시아와 중국을 배려하기 위해서(2006년 11월 7일 <마이니치 신문>). 남한의 반대 때문이 아니라. 그나저나 미국이 일본이랑 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이제 우리 우익들 어쩔 건가. 이제 반미 할 건가.

 

지난 100년 간 한반도, 한 번도 뜻대로 된 적 없다. 특히 남한은 그 최종 결정의 자리에 있어 본 적도 없다. 3년 간 자국민 수백만이 죽고 다치고 했던 한국전쟁의 끝에서도 남한은 없었다. 정전협정, 북한 미국 중국이 모여서 사인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일본과의 전쟁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50여 개국이 모여 조인식을 한다. 그러나 조인국이 되길 간절히 원했던 독립국 대한민국은 그들 조인국에서 제외된다. 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 총리가 한국의 조인국 참여를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다(이 사실은 2000년 8월 22일자 <아사히 신문>을 통해 공개됐다).

 

이에 미국은 조약의 초안에는 분명히 들어 있었던 한국을, 일본 편을 들어, 한국은 일본과 교전국이 아니었으며 미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한 적 없다며 조인국에서 제외시킨다.

 

요시다 시게루와 '경찰 준비군' 창설을 밀약했던 존 덜레스 특사는 1951년 9월 5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당시 이렇게 연설한다.(연설문 전문 보기).

 

대한민국은 평화조약에 조인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과 교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의 개인들은 일본과 투쟁했지만 그들은 개인이었지 인정받은 정부가 아니었다. The Republic of Korea will not sign the Treaty of Peace only because Korea was never at war with Japan. (중략) Many individual Koreans steadfastly fought Japan. But they were individuals, not recognized governments.

 

인도네시아, 라오스, 파키스탄, 필리핀, 스리랑카, 베트남 같은 아시아 국가들은 물론 과테말라, 에콰도르, 아이티와 같은 별 상관도 없는 나라들도 다 조인했다. 그러나 40년 간의 수탈, 수많은 독립군들의 죽음, 멀쩡하게 존재했던 임시정부를 미국 한 마디에 모조리 인정받지 못한다.

 

 

 

전략을 가진 정치가가 없다

 

정치인들만 있고 정치가가 없다. 정치가가 없으니 전략도 없다. 이런 레벨의 문제를 장기적 전략과 비전을 가지고 대처하는 자, 도대체 없다.

 

우리 정치권이 북핵 이후 각 세우고 한 달 내 싸웠던 가장 시끄러웠던 사안은 금강산서 춤을 췄네 안 췄네, 만경대서 웃었네 안 웃었네 였다.

 

일본의 우익 정치가들이 강한 일본의 부활을 위해 구사했던 전략들, 큰 틀에서 일관된다. 적이 없으면 만들어내라고 히틀러가 그랬다. 기시 노부스케는 중국을 고리로 미국과 딜을 한다. 60년대 초반 군사적으로 부상하는 중국에 대한 미국 경계심에 편승, 그는 미국으로부터 군비 증강의 수락을 받아낸다.

 

아베 신조에게는 그게 북한이었다. 그는 납치 문제를 철저히 이용한다. 납치 사안의 파괴력은, 정치적으로는 그 일로 인해 일본이 전후 최초로 피해자의 입장에 설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정서적으로는 납치 대상이 일반인들이었다는 데 있다. 아베는 누구보다 먼저 이를 간파한다.

 

납치 문제를 전세계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북한에 대한 공포를 최대한 조장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자연스럽게 강경 대응과 군비 증강을 제시한다.

 

아베 신조가 북한 핵실험의 실제 여부를 확인도 하지 않고 대북 제재에 바로 착수한 것은 바로 그 강경 대응, 군비 증강의 결정적 빌미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이다. 핵실험이 실제였는지에 대한 확인보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 주장하는 것으로 만들어지는 긴장감이, 그에게는 더 필요한 것이다.

 

전쟁 기억이 고스란히 살아 있던 일반의 거부감을 돌파해야 했던 할아버지 때와는 다르게 바로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여기는 일반 대중의 공포를 포섭하는 데 성공한 아베는, 그렇게 북한을 완벽한 주적으로 만들어내며 대중의 지지까지 등에 업고 있다.

 

2005년 6월 <한국일보>와 <요미우리 신문>이 공동으로 실시한 '2005 한일 국민의식 공동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일본인의 절대다수인 81.9%가 북한을 최대의 군사적 위협국가로 여겼다. 같은 해 <서울신문>과 <동경신문>이 조사한 결과에 따라면 20대에서 40대까지 젊은 세대들은 북한을, 50대 이상은 중국을 가장 위협적인 국가로 꼽았다. '아베 신조'와 '기시 노부스케'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런데 1년 후인 2006년 <한국일보>와 <요미우리 신문>이 실시한 동일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북한에 실제 위협을 느낀다는 것이 2005년에 비해 더 상승해 87.1%에 이른다. 또한 북한 문제는 압력을 가해야 한다는 응답자가 56.7%,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고 밝힌 응답자가 24.2%였는데 이는 2005년 압력 (38.0%)보다는 대화 (41.1%)가 더 높았던 것이 역전된 결과다. 그 사이 핵실험이 있었던 것도 아닌 데 말이다.

 

북한의 핵실험이 있기 직전인 2006년 9월 29일자 <아사히 신문>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익인사들이 대거 포진된 아베 내각에 대한 국민 지지율은 63%로 역대 3위다. 특히 민자당 지지자 중 아베 내각에 대한 지지비율은 압도적 89%로 고이즈미 정권의 초기 지지율 74%를 능가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아베의 지지자 중 27%나 되는 비율이 왜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답했으며 내각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 24%에 이르는 사람들이 '아베가 리더이기 때문에' 지지한다는 것이다. 아베의 인기가 마치 연예인의 그것처럼 감성적이고 대중적이란 걸 반증한다.

 

그들에 반해, 한반도에서 남북관계에 대한 일관된 전략을 가지고 워싱턴 정가의 정치가들과 대화하며 남북문제의 국제적 주도권까지 행사했던 정치인은, 지난 100년간, DJ가 유일했다. <조선일보>가 수 십 년간 빨갱이라고 외쳐댔던 바로 그 사람 말이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들

 

그럼 우리 진보 진영은 영리했는가.

 

보수가 무식하거나 앵무새였다면 진보는 비겁하거나 무기력했다. 우리 진보진영은 북의 핵실험을 적극 비판하지도 그렇다고 제대로 변호하지도 못했다. 김근태와 민노당의 방북이 우익의 물타기에 힘 한 번 제대로 못쓰고 희석되고 만 것도 결국 스스로의 정치적 기획력 부족을 탓할 일이다. 언젠 물타기가 없었던가.

 

현정권도 무기력하긴 매일반이었다. 기껏 내놓은 아이디어가 아직 UN 사무총장에 취임도 하지 않은 반기문 외교부 장관을 북한에 보내자는 거. 그 신분의 반기문이 뭘 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실험 사실, 중국을 통해서야 통보 받았다는 거, 이 대목 특히 치명적이다. 북한이 체제보존을 위해 폭주하는 걸 막지는 못했어도 그들로부터 최소한의 존중은 받았어야 했다. 적어도 통보는 직접 받았어야 했다.

 

그렇게 대화 채널 열어두자고 욕 먹어가며 지원한 거 아니었던가. 핵 문제에 관해 최소한의 파트너로도 인정받지도 못한 게다. 당연하다. 현 정권, 대북 문제에 있어 북한에 신뢰를 주지 못했다. 대북 송금 문제로 시작한 출범부터 핵실험 직후 "포용정책 계속 주장하기 어렵다"고 하는 최근의 태도까지 무엇보다 흔들리지 않는 일관성, 부족했다.

 

북한도 역시 이기적이었다.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들을 지원한 현정권이 처하게 될 곤란을 뻔히 알면서도 하다못해 2시간 전 사전 통보라는 최소한의 배려도 하지 않았다는 건 일말의 정치적 염치조차 없단 비판받아 마땅하다. 정치적 명분과 의리를 그리도 강조하는 자들이 말이다. 그래놓고 지원이 필요할 때만 동족을 거론하는 건 앙상한 자존심만 남은 거지근성이라 욕 먹어도 할 말 없다.

 

그러나 현정권이 7천만 민족을 핵의 골짜기로 밀어 넣었다는, 마치 남한 하기따라 북한이 핵을 개발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조선일보>식 사태 판단은 북한 정권을 반드시 무너뜨리겠다며 압박하는 미국을 의도적으로 상황 해석에서 간과하는, 야비한 왜곡에 불과하다.

 

남한이 미국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는가. 전세계를 상대로 북한 정권을 '불량국가'로 공개 지목하고 반드시 무너뜨리겠다 공언했던 네오콘들에게 남한이 도대체 어떤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었던가. 남한이 북한의 체제존속과 관련해 실질적으로 북한에 보장해 줄 수 있는 거, 사실상 아무 것도 없었다.

 

더구나 남한은 정전협정의 당사자조차 아닌데 말이다.

 

 

 

이니셔티브가 필요하다

 

2006년 5월 8일, 이란 대통령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Mahmoud Ahmadinejad)는 "Mr. George Bush"라고 시작하는 장문의 페르시아어 편지 한 통을 미국의 이익대표부 역할을 하는 테헤란 주재 스위스 대사관을 통해 부시 대통령 앞으로 보낸다. 이 편지는 전자우편이 아니라 실제 종이편지였다.

 

이틀 후 이 편지는 <르 몽드>에 실리게 되고 다시 영어로 번역되어 5월 10일자 <뉴욕 타임스>에 실린다. (편지 전문 한글판 보기)

 

편지의 첫 문장은 이라크 전쟁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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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점령당하고, 10만명 가까운 국민들이 죽고, 상수원과 농업 산업이 파괴되고, 18만명에 이르는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시민들 개인 가정의 존엄이 파괴되고, 국가가 50년 전 수준으로 후퇴했습니다. (중략) 나중에 대량살상무기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물론 사담 후세인은 잔혹한 독재자입니다. 그러나 공표됐던 전쟁의 목적은 대량살상무기를 찾아 없애는 것이었지 그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략) 나는 사담이 이란과의 오랜 전쟁 동안 서방으로부터 지원을 받았었단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because of the possibility of the existence of WMDs in one country, it is occupied, around one hundred thousand people killed, its water sources, agriculture and industry destroyed, close to 180,000 foreign troops put on the ground, sanctity of private homes of citizens broken, and the country pushed back perhaps fifty years. (중략) Later it was revealed that no WMDs existed to begin with. (중략) Of course Saddam was a murderous dictator. But the war was not waged to topple him, the announced goal of the war was to find and destroy weapons of mass destruction. (중략) I point out that throughout the many years of the … war on Iran Saddam was supported by the West.

 

그는 이어 "신은 우리 편(God is on our side)"이라며 "신이 내게 이라크를 침공하라 했다(God told me to invade Iraq)" 직접 계시를 내렸다는 부시에게, "이 같은 행동들이 평화와 용서의 사도인 예수의 가르침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정면으로 질타한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 정부의 개입, 아프리카가 서방에 약탈당하는 엄청난 자원에 대해서도 그것이 어떻게 예수의 가르침과 인권에 부합하는 것이냐 따진다.

 

2005년 10월 BBC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에서 팔레스타인 전 외무장관 나빌 사트는 이런 증언을 한다. 2003년 부시가 자신과 현 팔레스타인 대통령 마흐무드 압바스를 만났을 당시, 마치 공산주의에 대한 전형적인 표현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 이슬람이 스페인부터 인도네시아에 이르기까지 전 국가를 삼키려 하고 있다면서, 자신은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신이 준 임무에 의해 움직인다. 신은 내게 '부시야 아프카니스탄의 테레리스트와 싸우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난 그렇게 했다. 또한 신은 네게 '부시야 이라크의 독재를 끝내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난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제 신의 계시가 다시 내게로 오는 걸 느낀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국가를 허용하고,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중동평화를 가져오라고.' 신이 시키는대로,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I'm driven with a mission from God. God would tell me, 'George, go and fight those terrorist in Afghanistan.' And I did, and then God would tell me, 'George go and end the tyranny in Iraq,' and I did. And now again, I feel God's words comimg to me: 'Go get the Palestinians their state and get the Israelis their security, and get peace in the Middle East.' And by God, I'm gonna do it.

- 2005년 10월 7일,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

 

또한 유대인들이 6백만 명 희생됐단 것이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중동 한복판에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며 그들 나라를 세울 근거가 되며(정작 6백 만 명의 유대인들을 죽인 건 서구인들이다) 그런 이스라엘을 왜 미국은 지원하는지 그리고 중동 과학기술의 성과를 미국은 왜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으로 해석하는 것인지도 묻는다. 과학적 연구는 국가의 기본적 권리 아니냐는 거다.

 

전세계의 미국에 대한 증오가 커지고 있다며, 세계가 얼마나 더 이런 상황을 견뎌야 하는 거냐며, 부시 당신은 이런 세계가 행복하냐며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력자의 자리는 특정 기간만 주어진 것입니다. 영원히 통치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권력자는 역사에 기록되고 끊임없이 심판 받을 것입니다. (중략) 우리가 정의를 실현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특정 이해집단만을 위해 봉사했는지를. Those in power have specific time in office, and do not rule indefinitely but their names will be recorded in history and will be constantly judged in the immediate and distant futures.(중략) Did we intend to establish justice, or just supported especial interest groups...

 

통렬하다. 백악관은 8쪽으로 영문번역된 이 편지를, 물론, 무시한다. 그러나 나머지 세계가 이 편지에 반응한다. 이 편지는 전세계 수많은 매체에 실리며 즉각적인 논평을 이끌어 낸다.

 

<워싱턴 포스트>는 부시에게 거절당한 이 편지가 적어도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긍정적인 언론의 반응이란 분명한 결과를 성취했다고 논평한다(Mahmoud Ahmadinejad's letter to President Bush has achieved one clear result: more positive press coverage than he has ever gotten. - "Iran Letter's Surprising Result", Washington Post 5월 9일).

 

영국의 <인디펜던트>는 이 편지를 "비상한 작전변경(an extraordinary about-turn)"이라고 평하고 독일의 <슈피겔>은 "이미지 제고를 위한 묘수(a deft move for Ahmadinejad's image)"라 논평한다.

 

그리고 바로 3일 후인 5월 13일, 코피 아난 UN 사무총장은 이란의 핵 문제에 유럽의 UN 안보리 이사국들이 아니라 미국이 직접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한다.

 

전임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역시 미국이 편지에 응답해야 한다는 대열에 동참("A Nuclear Test for Diplomacy", 5월 16일 <워싱턴 포스트>)하고 또 다른 전임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역시 미국이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것은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누가 더 나은) 아이디어를 가졌는지를 두고 다투고 있는("Rather than thinking it's a clash of civilizations, I think we are in a battle of ideas")" 거라 말한다.

 

그 사이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은 10일 인도네시아에서의 D8 정상회의, 15일 상하이 푸둥(浦東)에서의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 연속으로 참여해 자신의 입장을 세계 지도자들에게 설득한다.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이 공식적으로 미국와 이란의 직접 대화 촉구에 나선다.

 

특히 IAEA의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은 25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워싱턴에서 회동하여 이란 문제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란 문제에 대해 제가 명백히 선호하는 해결책은 협상을 통한 것입니다. "My preferred solution, obviously, to the Iranian issue, is a negotiated solution" (UN Daily News, 2006년 5월 25일)

 

이에 백악관 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고 결국 5월 31일 라이스 장관이 UN 안전보장이사국들과의 비엔나 회동에서 '이란이 핵을 동결한다면'이란 전제를 달고 이란과 직접 협상에 나설 수도 있다고 천명하게 된다("US agrees to talks with Iran in return for nuclear freeze" The Independent 2006년 6월 1일).

 

그는 시아파 지도자로서 아랍 세계 일반과 수니파들 사이에서까지 인기를 얻고 있는 최초의 케이스가 되고 있다.

 

이런 게 이니셔티브(initiativ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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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미국에게 수 십 년째 요구하는 거, 사실 심플하다. 미국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침략하지 않을 것이란 평화협정과 체제보장이다. 김정일은 1997년 "미국을 백년숙적으로 보려 하지 않으며, 조미관계가 정상화되기를 바란다"고 천명하기도 한다. 평화협정을 맺고 체제보장만 해준다면,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IAEA의 핵사찰을 받겠다고도 하고.

 

그러나 미국은 전쟁 끝나고도 유리한 조건을 위해 일본과 평화협정까지 6년을 조절했듯 북한과는 53년째 평화협정을 맺지 않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군사적 요충지에서의 주둔 명분이 취약해지기에, 미국으로선 당연한 전략이다. 북한이 그런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그리고 그 협상 테이블에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선택한 수단이 핵이다.

 

이제 막 원시적 핵실험을 한 북한과 기 보유한 핵탄두만 1만개 수준에 전세계 27개국에 전술 핵을 운용하고 있는 미국의 전력 차를 비교한다면 '최소한'이란 단어 이외에는 적합하지 않다. 미국은 2005년 현재 확인된 것만 9,96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고 이 중 5,735개가 운용 중이다. 이 중 5,021개가 전술핵이며 이를 다시 세분하면 1050개는 지상에서 발사되는 대륙간 탄도탄, 1,955개는 B-52와 B-2 폭격기, 2,016개는 오하이오급 잠수함에 장착되어 있거나 탑재되어 있다. 오하이오급 잠수함 단 한 척에 탑재된 핵만으로도 북한 전체 핵 능력을 수 천 배 압도한다. 오하이오급은 트라이던트형 미사일 잠수함 중 가장 최근 모델로 한 번에 24발의 핵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다.

 

또한 1발의 핵 미사일에는 각각 15kt이었던 히로시마의 20배 위력을 가진 8개의 200-300kt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고 각 8개의 핵탄두는 다른 목표물을 동시에 겨냥할 수 있다. 20배 x 8 x 24 = 3840. 말하자면 단 한 대의 잠수함으로부터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의 약 3800배 위력을 갖춘 핵이 발사된다. 히로시마 원폭에 의한 사상자가 13만 5천이었다. 이 정도 핵이 터지면 단순 계산으로만 사상자가 5억 이상이다.  북한 핵실험의 위력은 0.8kt 정도였다. 잠수함 딱 1척의 위력이 4만 배 이상 되는 셈이다. 잠수함 한 대가 아니라 딱 한 발의 핵탄두 보다 못하다. 이런 잠수함 9대가 태평양 함대에 소속되어 있으며 그 중 2대가 북한과 중국을 사정권 내에 두는동지나해에 배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006년 Natural Resources Defense Council 보고서

 

사실 잠수함 한 대가 아니라 거기 실린 단 한 발의 핵탄두보다도 못한 북한의 핵은 전술 무기가 아니라 정치적 카드로서의 핵일 수밖에 없다. 발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먹고 죽을 수도 없다.

 

이니셔티브의 기회, 바로 여기 있다.

 

북한과의 평화협정 필요성을 남한이 직접 나서서 공개적으로, 세계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역설하고 미국 내 반부시 정치인들과 연대하여 미국 내 우호 여론과 세계 여론을 조성하며 동시에 핵포기와 완전한 핵사찰을 북한에 등가로 요구하는, 그런 이니셔티브를 취할 공간이 전혀 없는 게 아니다. 최근에는 부시 행정부 내에서조차 북한이 원하는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필요성이 거론되어 왔다.

 

며칠 후인 5월 21일, 미국 NBC 방송의 'Meet the Press'("U.S. Said to Weigh a New Approach on North Korea" 2006년 5월 17일, The New York Times)에 의해 초안이 작성된 이 방안은 그러나 북한이 먼저 모든 핵시설과 무기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는 한 어떠한 양보도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강경파 딕 체니 부통령에 의해 계속 거절되어 왔다. 하지만 2006년 5월, 이란이 북한의 전철을 밟을 것을 우려하는 백악관이 다시 한 번 이 문제로 격론을 벌였고(Philip D. Zelikow)부시 행정부 내 북한문제 전문가들이 부시에게 2005년 9월부터 줄곧 제안했던 방안이 바로 북한과의 평화협정이다. 9/11 위원회의 위원장 출신으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자문관인 필립 젤리코라는 시사 프로그램에서 라이스 장관은 북한과의 평화협정이 언젠가는 매우 중요해질 것이라는 발언을 한다("at some point in time it's going to be very important to talk about the context -peace treaty- on the Korean Peninsula").

 

그러나 북핵 터지고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유럽 가서 정치인 하나 제대로 만났다는 자가 우리에겐 없다.

 

 

 

분명한 태도가 필요하다

 

남한은 북한에 대한 군사적 억지력으로서만이 아니라 일본 재무장에 대한 통제력으로 미국이 역할을 할 것이라 막연히 기대해왔다. 그러니까 혈맹 미국은 어디까지나 우리 편일 거란 믿음으로.

 

그러면서 우린 일본만 탓해 왔다. 일본의 사과는 진심이 아니라고. 사실 일본 우익은 진심으로 사과할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켰던 책임 세력이 살아 남았다. 그들은 잘못을 한 게 아니라 전쟁에서 졌을 뿐이다. 사과는 자기 부정이다. 못하는 게 정상이다.

 

책임을 따지자면 명백히 미국을 먼저 탓할 일이다. 전범들을 철저히 단죄했던 독일 뉘른베르그 전범 재판과는 다르게 오로지 미국의 필요에 의해 수많은 A급 전범들을 재판회부조차 하지 않았던 동경재판 이후, 미국은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이들까지 전원 석방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 남은 자들과 그 후손들이 지금 현재의 일본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악명 높았던 생체실험의사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사자' 요셉 멘겔(Joseph Mengele)은 국제적 추적을 받아 남미로 도주, 평생을 가명으로 숨어살다 브라질에서 익사 한 후 1979년 가명으로 매장된다. 그러나 그를 숨겨준 적이 있던 오스트리아 부부의 제보에 의해 사망 6년 후인 1985년 브라질 경찰에 의해 그의 무덤이 발굴되고("Exhumed body in Brazil said to be Mengele's" New York Times 1985년 6월 7일) 그를 그때까지도 추적하고 있던 이스라엘과 독일의 정보기관이 DNA 테스트를 거쳐 결국 사후 '체포' 된다.

 

반면, 14년간 수 만 명을 생체실험해 악명 높았던 731부대의 책임자 이시이 시로(石井四郞)는 세균전 기록과 각종 의료문서 등 연구결과를 미국에 넘기는 대가로 주택과 차를 제공받아 안락하게 살다 병사했으며, 그의 오른팔 나이토 료이치(內藤良一)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혈액 판매로 돈을 벌기 위해 '일본 블러드 뱅크'를 설립하는 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일본 '녹십자'라는 사실은 일본 전범의 석방과 복권이 얼마나 몰역사적이었는지, 그것이 지금 현재 일본 전분야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지, 여실히 상징하고 있다.

 

그런 일본의 아소 다로(麻生太郞) 외무장관이 지난 10월 25일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일본의 핵 논의 자체를 봉쇄해선 안 된다"며 핵 공론화 발언을 한다. 이 아소 다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당시 남한의 조인국 참여를 결사 반대하여 결국 무산시키고 패전 후 최초의 실질적인 군대인 '경찰 준비군'을 창설한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손자다. 일본의 정치, 진정 혈육으로 계승된다.

 

이 아소 다로의 말을 받아 '보통국가'를 신봉하는 나카소네 전 총리가 나서서 핵 논의가 필요하다는 동조발언을 한다. 이에 일본의 민주, 사민, 공산, 국민신당 야 4당은 아소 외무장관의 파면을 요구하는 성명을 낸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아소 외무장관이 일본 최고의 외교관이라며 파면요구를 거부한다.

 

일본의 우익화 경향, 명백하다.

 

이런 일본의 우경화, 지난 99년을 기점으로 가속화 되어왔다. 미국과의 탯줄을 끊을 때가 됐다는 이시하라 신타로의 동경지사 당선으로 상징되는 이 해에 일본은 일본 본토 방위를 넘어 '주변사태' 발생시 무력행사의 범위를 국외로 확대하는 '신 미일방위 협력지침(New Guideline)'을 국회 통과시키고, 기시 노부스케가 평화헌법 개정을 위해 내각에 뒀던 '헌법조사회'를 일본 헌정사상 최초로 국회 내에 두기로 여야합의한다.

 

그 동안의 일본 사회에서의 헌법개정 논의는 일본 정부의 개헌 노력과 시민사회의 반대라는 구도 아래 큰 진척 없는 소모전 양상이었다면 99년의 헌법조사회 국회 설치는 이제 국회에서 정식으로 평화헌법의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매우 중대한 결정이다.

 

이 헌법조사회는 1952년 자유당 시절 최초결성된 것으로 초대 회장이 기시 노부스케다. 그가 퇴임하면서 이 헌법조사회를 맡긴 사람이 바로 아소 다로 외무장관의 핵 발언에 동조하고 나섰던 나카소네 전 총리였다. 아베 총리는 지난 10월 국회 내에 있던 헌법조사회를 드디어 헌법심의회로 승격시킨다. 조사만 하는 건 그만두고 이제 실질적 개정을 위해 심의를 하자는 거다. 기시 노부스케가 헌법조사회를 설치한 지 50년 만이다.

 

이런 일본 우익의 질주를 막아줄 것으로 남한이 막연히 기대해 온 미국은, 그럼 과연 혈맹 남한을 의식해 일본의 재무장을 저지할 것인가.

 

작년부터 한국 정부는 전시작통권 환수 후의 정보전 능력 배가를 위해 미국에 고성능 무인 정찰기 글로벌 호크의 판매를 수 차례 요청해 왔다. 그러나 미국은 번번히 이 판매 요청을 거절해 왔다. 판매 거절의 공식적 이유는 글로벌 호크가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 받는 품목이라서 그렇다는 거다.

 

그러나 세계 최대의 안보정보 에이전시로 'Shadow CIA'라 불리는 스트래트포(Strategic Forecasting, Inc)는 2006년 9월 22일자 "남한 : 군사적 미래를 다시 생각한다(South Korea: Rethinking its Military Future)"라는 제하의 보고서에서 이 판매 거부를, 외교적 수사 모두 배제한 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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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은 정전협정 이후 미군이 도착하기 전 북한의 초기 공격을 흡수할 보조적 역할만을 맡아 왔고, (중략) 이후 미국은 한국이 그렇게 미군에 의존하는 취약한 전력 상태로 머물도록 유지해 왔다. since the 1953 armistice, South Korea's military has been primarily designed as an auxiliary force intended to absorb any initial assault by North Korea until U.S. reinforcements arrive (중략) Thus, the United States has kept South Korea militarily weak and dependent on U.S. forces

 

경제적으로 성장한 한국이 더 강력한 군사력을 원하지만, 글로벌 호크의 감시 능력이 일본 전역과 중국까지 커버한다면서

 

미국에게 있어서 한국은 북쪽을 봉쇄하는 데 있어서만 군사적으로 유의미하기에. (중략) 워싱턴은 북한을 봉쇄하는 데에 직접 관련 있는 전술적, 지역적 무기만을 제공할 것이므로 남한은 글로벌 호크를 결코 구입하지 못할 것이다. As far as the United States is concerned, however, South Korea is militarily useful only for containing its northern neighbor. (중략) Washington is really interested only in providing Seoul with tactical and theater-level assets directly relevant to containing the North, and it is unlikely that South Korea will ever see the Global Hawk in its inventory.

 

이 이후에도 한국 정부는 지속적으로 미국에 판매 요청을 하고 있고 현재까지 판매 승인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는 이 정찰기를 이미 판매했다.

 

미국은 미국 뜻대로 움직인다.

 

그러나 북핵 관련한 우리 보수우익 단어는 딱 하나 밖에 없다. 한미공조. 미군의 핵우산에 확실히 들어가야 한다는 거다. 그 주장대로라면 핵이 없는 우린 이제 미군 핵우산 밑에서 나올 길이 없다. 남한의 진보진영이 논하는 해결책 또한 공허하다. 한반도 비핵화. 도대체 어떻게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포기하게 만들겠다는 건지가 없다.

 

이래서는 길이 보이지가 않는다.

 

우선 각자 태도부터 확실히 해야 한다.

 

보수우익은 일본이 핵을 거론한다면 남한도 핵 소유 하겠다고 선언하는 게 우익답다. 파키스탄이 바로 그 전략으로 핵 보유했다. 그러자면 미국과 어느 선까지 결별해야 한다. 그 길 가려면 동북아에서의 핵 도미노를 우려하는 미국을 거스르고 대미 경제에 일정한 타격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우익이라면 자국의 자존심과 그걸 지켜낼 힘이 무엇보다 중요한 거 아니던가.

 

진보진영도 핵 개발한 북한을 지원했단 원죄의식에서 벗어나 보다 미국의 대북정책 실패를 과감하게 공격하고 중국, 러시아와 연대하여 미국을 우회 압박하는 것도 시도해야 한다. 우리가 미국 눈치를 보느라 1992년에 가서야 수교한 중국과 직접 전쟁까지 한 일본은 이미 1978년 '중일평화우호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강력한 포용정책 지속해야 한다.

 

진보와 보수, 각각의 색깔에 따라, 태도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자신은 어떤 길에 동참할 건지 선택할 수가 있고 그래야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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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총수, 생래적으로 시큰둥하다.

 

본능과 감각에 충실한 한 마리 동물로 살다 죽을 수 있다면 그게 장땡이라 여긴다. 해서 평소 정치 구경은 재미로 한다. 뭐가 그렇게 다들 지 혼자 심각한지 참 저 짓도 타고나야 한다 싶다. 그런데 북핵으로 지난 몇 주간 자료를 들여다보다 한 가지를 깨닫는다. 이건 좀 심각한 일이란 거. 해서 이제 중국과 러시아 자료 뒤지기를 시작해야 하는 시점에 멈추고 이 글을 쓴다.

 

뭐가 그렇게 심각하냐.

 

북핵 그 자체는 아니다. 북한이 핵으로 할 수 있는 건 사실 매우 제한적이다. 남한을 공격할 수도 일본이나 미국을 공격할 수도 없다. 그랬다간 몰살 당한다. 미국이 북한의 핵소유가 아니라 핵이전을 용인할 수 없다고 나중에 말을 바꾼 것도 중국과 러시아 때문에 북한을 폭격할 수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미국에 직접적 위협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미사일 수출과 핵수출은 차원이 다르다. 만약 알카에다 같은 곳에 북한이 핵을 줬고 그게 미국 본토에서 쓰이게 된다면 북한은 그 길로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북한이 도대체 알케에다로부터 돈을 얼마나 받아 얼마나 부자가 되겠다고 그 짓을 하는가. 그렇다고 핵 한 방으로 미국이 사라질 것도 아니고 말이다. 북한도 그걸 안다.

 

북한 핵이 상징하는 건 그렇게 미국 안보에 대한 유형의 위협이 아니라 미국의 절대권능에 대한 무형의 타격이다. 미국이 위협하면 세계가 두려워하고 복종해줘야 하는데, 그래야 미국이 구상하고 미국이 설계한 미국식 세계질서가 유지되는데, 북한이 미국의 규칙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경제를 희생하더라도 버틸 수 있는 북한 체제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다.

 

미국은 원시적인 북핵이 무서운 게 아니라 바로 그렇게 자신의 권능이 통하지 않는 상황을 세계에 보이기가 싫은 것이고 그리고 그런 통제불능의 상황도래가 두려운 것이다. 권력은 한 번 구멍이 생기면 그걸 만회하는 데 몇 배의 노력, 대부분의 경우 폭력이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별로 없다. 적어도 그 점 하나만은 대단히 통쾌한 북한 대미외교전술의 승리다. 물론 북한이 주민들의 최소한의 민생마저 포기하며 획득한 처절한 승리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일본 우익도 악의 화신 따위는 아니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논리와 방식으로 그들 국가를 사랑하는 거다. 평화헌법은 패전국의 반성문이라는 그들 인식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다. 자신을 위협하는 주변사태로부터 자신을 지킬 권리가 있는 보통국가가 되고자 하는 자기방어의 욕망도 사실은 당연한 거다. 제대로 된 자기반성만 선행되었다면 독일이 지금 그러하듯 그들도 주변국들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으며 그 길을 갈 수 있었을 게다. 일본 우익들도 미국이 전범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던 역사를 사실은 아쉬워 해야 하는 대목이다. 그 혈육들이 대대손손 권력을 쥐는 탓에 앞으로도 오랫동안은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미국의 정책결정권자들에게 지도상에서의 한반도가 북한봉쇄와 북방저지를 위한 미사일 발사대로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은 당연하다. 우리에게 미얀마나 수리남이 무슨 사람 사는 실존의 땅으로 감각되는가. 이미지 몇 조각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 진보진영이 우리 군대가 극동지역에서의 값싼 미군용병이라며 자조하며 비판하는 건 사실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미국 입장에선 그러는 게 당연해서 사실 쓸데 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역사상 어느 강대국이 안 그랬는가.

 

진정한 문제는 그러한 외부조건이 아니라 그렇게 복잡하고 이기적으로 벌어지는 국제적 게임의 룰을 지극히 객관적으로, 그들과 같은 수준의 눈높이로 이해하고 그 가운데서 우리 이익을 지켜 낼 일관된 전략과 그걸 관철해 낼 국제적 능력을 갖춘 정치인을 우리 내부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불균형은 무너지는 게 권력의 법칙이다. 극동에서 북한만이 핵을 보유하는 불안정한 엔트로피가 지속되는 데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다. 북한도 일본도 남한도 모두 핵을 가지거나, 북한도 일본도 남한도 모두 핵을 가지지 않거나. 필연적으로 다가올 미래다. 그리고 그런 미래를 그들과 같은 눈 높이에서 이해하고 같이만 놀아준다면 난 그것이 진보든 보수든, 삼국 모두 핵 보유국이 되든 삼국 모두 비핵 국가가 되든, 큰 틀에선 걱정할 게 없다 여기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국제적 안목을 가지고 이니셔티브를 취하고 그것이 가능해질 수 있는 조건을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를 오가며 협상해 내고, 그런 협상을 타결시킬 외교적 압력과 국제적 분위기를 기획해낼 역량과 비전을 갖춘 정치가를 우리 정치에서 발견할 수가 없다. 북한 주장에 동조한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지역이나 뜯어먹고 있느라고, 그럴 만한 능력이 없어서, 춤 췄네 안 췄네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는 우리 땅에서 남들이 중요한 결정을 우리 대신했던 지난 100년이 또 다시 반복될 수 밖에 없다.

 

이게 참으로 심각하다.

 

너무 오랫동안 출신지역이나 과거의 운동경력 이외 우리가 정치인을 선택할 근거라는 게 존재하질 않고 있다. 우리의 정치인 육성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참으로 심각하다.

 

실력 있는 정치인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지난 한 달 간 북핵 사태를 관찰하며 내가 내리는 1차 결론은, 그리하여, 사람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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