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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9. 월요일

정우성


 


변별력에서 아이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래 전부터 내게는 뚜렷한 믿음이 하나 있다. 중년으로 접어든 나이가 돼서는 그 믿음은 인생을 사는 기본 자세로 자리잡았다. “인생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상상력이 풍부하다”라는 신조다. 돌이켜 보면 길지 않은 내 인생에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었다. 지금의 아내와 아이들도 그렇다. 변수는 많고 인연은 무궁하다. 십대의 어린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게다. 이십대의 혈기 어린 시절조차 지금의 나를 그릴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남아 있는 인생도 있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 우리 인생에 깃들고 또 기다리고 있는 상상력이야말로 ‘인권’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든지 그 상상력을 만끽하고 애통하고 행복해 할 권리가 있다. 육아와 자녀교육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갖게 되는 인생의 상상력을 위협하고 핍박할 권리가 없다. 인생의 상상력을 앗아가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공적이다. 공교육도 그렇다. 변별력이라는 이유로 아이 인생의 상상력을 함부로 핍박하는 것은 죄악이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운이 없었다. 내가 갖고 있는 사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중학교 졸업앨범에 나온 사진이다. 그 흔한 학창시절 사진도 없다. 과거는 언제나 지워지기 위해 존재했다. 추억은 너무 문학적이었다. 우리 가문(광주대단지 도시빈민 출신이 무슨 가문을 언급할 수 있겠냐만) 에서 최초로 중학생이 되었다. 형들은 나보다 더 운이 나빠서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몇만 원을 빌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나는 가방끈 신기록을 세웠다. 그렇지만 운이 나쁘게도 주위에 내게 뭔가를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게 키다리아저씨는 오지 않았다. 주위에는 모두 고만고만한 사람들만 있었다. 가난은 일용할 양식이었고 해결되지 않는 과제였다. 나는 늘 고통과 싸워야 했고 뭐든지 스스로 해결하고 자립해야 했다.


 


그러나 꼭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 소위 명문사학에 들어갔다. 학사경고를 여섯 번이나 맞았지만 좋은 시대에 학교를 다녀서 졸업장을 건질 수 있었다. 느즈막히 군대에 간 까닭에 군대문화에 맞설 수 있었다. 변리사 시험에 합격했고 전문가 자격증을 취득했다. 뒤늦게 안 것이지만 몇 가지 재능도 있었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았으므로 겸손해질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미 십대, 이십대에 깨친 것들을 나는 서른, 마흔이 돼서야 비로소 알게 되곤 했다.


 


이런 일련의, 절반의 인생을 경험하면서 인생은 좀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고, 상상력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고 습관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고통은 도처에 있으며 고통의 무게는 한결같이 절실하다. 자기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낙관할 필요가 있지만, 남의 고통에 대해서는 좀 더 ‘절실하게’ 들어야 한다. 그게 교양이고 인간적인 염치다. 인생은 이런 것들을 깨닫는 과정이었다. 물론 지금 이 시대에 내가 이십대였다면 내 허리는 부러졌으리라 생각한다. 이 시대가 인간의 상상력을 쥐어뜯고 함부로 걷어차기 때문이다. 아귀도, 축생도, 지옥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인생에서 상상력을 앗아가면 바로 거기에 삼악도가 있다.


 


우리나라는 학벌사회다. 소위 SKY가 사회 곳곳을 장악하고 있으며, 계급은 학벌화되고 학벌은 다시 계급을 재생산한다. 부잣집 아이들은 학벌로 다시 부와 권력의 세습을 지킨다. 공교육은 진작에 무너졌다. 사교육 시스템은 학벌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욕망 덩어리다. 높은 대학진학률은 욕망의 크기를 드러내며 높은 등록금은 소수의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 욕망을 적절히 통제한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생각을 지우며,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는 등록금을 마련하거나 스펙을 쌓기 위해 생각을 지운다. 우리에게 생각의 힘이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공교육은 완전히 망가졌다. 그러나 진짜 망가진 것은 공교육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오늘과 미래다. 부모 세대를 잘못 만난 것이 우리 아이들의 운명적인 죄이지만, 죄책감은 오직 이런 시대를 만든 우리 어른들의 몫이다. 우리 스스로가 주범이며 공동정범이다.


 


 


국공립대학부터 문턱을 없애야 한다


 



 


학벌사회가 사라지기를 바란다고 해서 엘리트 교육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꿈이 다르며 열정이 다르고 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기록된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소수의 권세가와 귀족이 세상을 지배한 적이 더 많았다. ‘보편적인 인권’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인간이 깨닫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그 가치를 깨닫는 순간부터는 모든 게 달라진다. 인간은 신분에 의해서 존엄성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 이 사실을 ‘상식’으로 새겨넣기 위해서 수천만, 수억 명의 인류가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우리가 엘리트 교육을 말할 때에는 적어도 이 목숨의 대가를 생각해야 한다. 엘리트 교육은 꿈과 열정과 의지 이외에 다른 문턱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국공립대학의 등록금을 폐지하고 국공립대학의 서열화를 없앰으로써 문턱을 낮춰야 한다. 국가가 사학을 원하는 대로 통제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게 지난 정부 시절에 증명됐다. 법적으로도 고충이 따른다. 힘을 함부로 소모하지 말자.


 


 


EBS 교육은 공교육 정상화의 적이다


 



 


EBS 교육은 폐지되어야 한다. 이것은 공교육이 아니라 공적인 목적으로 포장된 사교육이며 공교육을 망가트리는 주범이다. 수능시험의 70% 가량 EBS 교재를 연계하겠다는 것은 망언에 가깝다. 교과서와 학교수업을 EBS 강의로 위협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래가지고서는 공교육의 정상화는 요원하다. 교육방송으로 사교육시장을 억제하겠다는 것은 책상에서나 생각할 수 있는 편리한 발상에 불과하다. 전두환 시절에 생각해낸 유산에 지나지 않다. EBS 수능 강의는 사교육을 잡지도 못한다. TV 방송교육의 역사는 얼추 30년이다. 이것이 효과가 있었으면 진작에 사교육시장이 사라졌어야 한다. 그렇지만 사교육시장은 줄어들기는커녕 여전히 왕성하다.


 


 


문제해결능력을 변별한다는 것은 망상이다


 



 


물론 대학입학시험의 방향성을 바꾸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 EBS 교육을 당장에 폐지하는 것은 온갖 비난과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사교육시장이 커지고 EBS 교육이 정당화되는 까닭은 수능시험이 학생들에게 “문제해결능력”을 강조하고 그것을 변별하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10대 학생들에게 “문제해결능력”을 변별력 있게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멍청한 일이다. 대부분의 문제해결능력은 사회 속으로 들어와서 인간관계와 조직 안에서 배우고 경험하면서 체득되는 것이라서 교수가 출제한 문제를 통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차라리 단순 암기하는 지식이 더 변별력이 있을 수 있다. 나는 학력고사 세대다. 수능시대의 전문가들은 단순암기식이었던 학력고사를 경멸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동의하기 어렵다. 어떤 지식은 이해할 필요가 있지만, 어떤 지식은 암기로 습득되는 게 있다. 전자가 후자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한 게 아니다.


 


오히려 수능이 사교육을 조장하고 학벌의 세습을 더 강화시킨다. 수능시험의 방향성은 “문제해결능력”의 평가로부터 “공교육을 통해 습득된 지식이 적절한 수준인지”에 대한 평가로 바뀌어야 한다. 이런 입장으로 방향성이 수정된다면 공교육 정상화는 훨씬 수월해진다. 굳이 문제를 비틀거나 어렵게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굳이 정상적인 학교 교육과 교과서에서 벗어나 사교육 시장에 기웃거릴 필요가 없어진다. 고득점자가 많아질 것이고 변별력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만큼 내신이 중요해진다. 이게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입학사정관 제도나 수시합격 제도 등을 이용해서 대학이 학생을 선발할 기회가 열려 있는 상황에서 굳이 수능시험자체의 변별력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변별력’이라는 용어 자체가 항상 논쟁거리이기 때문에 사용하는 데 조심해야 한다. 변별력이라는 단어는 ‘수학능력’이라는 표현에 기생한다. 그러므로 ‘수학능력평가’라는 단어를 공격하는 게 더 유용한 일이다. 즉, 대학입시시험은 ‘수학능력’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상식적인 ‘지식수준’을 평가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모든 문제가 단순화된다.


 


 


수학자들의 허튼 생각


 



 


수리영역, 즉 수학 과목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서는 사실상 공교육 정상화를 논하기 어렵다. 학생들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를 줌과 아울러 사교육의 주된 요인이 바로 수학이기 때문이다. 수학시간에 배우는 ‘개념적인 지식’은 여러 가지로 유용하다. 그렇지만 ‘수학문제’는 수학자나 일부 과학자를 제외하고는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수학에서 문제해결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외곬수, 외고집이 아닐 수 없다.


 


수학자들 혹은 수학교육자들은 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한다. 그리고 입시전문가(대학이나 공무원)들은 수학과목을 통해서 우수한 인재를 채용할 수 있다는 어떤 믿음이 있는 것 같다. 수학교육을 통해서 논리적 사고력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얼핏 맞는 이야기 같지만 일부 수학에 심취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수학에 미친 듯이 시간을 쓰는데 왜 이렇게 비논리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는지 의문이다. TV토론을 보면 패널들(수학시험을 잘 받았을 학벌좋은 교수나 정치인)이 나와서 너무나 비논리적이며 거짓된 이야기를 지껄인다. 심지어 그런 비논리성이 통용되기도 한다. 수학을 통해서 논리적 사고력이 키워진다는 주장은 의심할 만하다. 게다가 반드시 수학을 통해서만 논리적 사고력을 얻는 것은 아니다. 철학, 논리학, 언어학을 통해서도 충분히 논리적인 사고를 키울 수 있다.


 


설령 수학교육의 목적으로 거론되는 “정신도야성”이 의미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개념과 범주와 연역으로서의 ‘수학’이 아닌 ‘문제해결능력’의 가늠자로서의 ‘수학문제’로 바뀌는 순간, 정신도야는 언감생심이다. 강문봉이라는 교수는 다음과 같이 미친 소리를 지껄였다.


 



“정신도야가 수학교육의 중요한 한 목적이 될 때 주목할 점은 정신적인 인내와 고통을 수반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육체의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할 때 땀을 요구하듯이 정신 능력의 신장을 위해서 정신 적 인내와 고통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 땀을 흘리지 않고 육체적 건강을 유지할 수 없는데도 유독 수학 학습에서만은 수학이 어렵다, 쉽게 해라와 같은 요구를 하는데, 그러한 주장을 납득할 수 없다. 쉽게 가르치라고 하고 써먹을 수학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운동하지 않고 쉽게 건강을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수학은 본질적으로 사고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한 달 이상을 문제에 매달리기도 하는 힘겨운 학문인 것이다.”


- “수학과 교육 목표 및 내용 체계확 연구” (한국교육과정평가원, 2000년)에서



 


이 사람은 ‘중고등학생’과 전문가인 ‘수학자’를 혼동하고 있으며, 다른 학문을 통해서도 충분히 정신도야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고, 또 수학을 가르치는 것과 수학문제를 출제하는 것을 혼동하고 있다. 당신 혼자 골방에 처박혀서 한 달 이상 수학문제에 매달리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바로 당신의 정신도야를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 전문가는 수학이 중요한 선발 도구로 이용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수학적 능력이 있는 사람은 다른 데에서도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둘째는, 수학이야말로 다른 어떤 교과보다 선발 도구로서 적합하다는 점, 즉 변별도가 높은 교과라는 점이다. 셋째는 수학적 능력이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자원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수학사랑이 지나친 전문가의 비논리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수학을 구원하는 방법


 



 


강문봉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터무니 없다. 그의 수학사랑이 오히려 수학을 대중들로부터 외면받게 만든다. 오히려 수학을 죽이는 것이다. 수학은 더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첫째, 수학적 능력이 있는 사람이 다른 데에서도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믿음은 정말로 순전히 ‘개인적인 믿음’에 불과하다. 수학에 대한 재능이 전혀 없다는 사람이 다른 데에는 귀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너무나 흔히 볼 수 있다. 문학, 음악, 예술, 스포츠, 비즈니스 분야에서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 중에 수학적 능력까지 겸비한 사람은 오히려 드물다.


 


둘째, 수학이야말로 변별도가 높다는 것은 수학과목을 이용해서 아이들을 일렬로 쫙 세우기에 용이하다는 것을 뜻한다. 서열화의 수단으로 이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학벌사회가 세습되도록 하는 데에 수학이 기여하는 바가 크다. 수학의 변별력을 높이면 사교육이 더욱 조장될 수밖에 없다. 경쟁이 극심해지는 것이야말로 사교육시장이 원하는 바다. 오히려 수학과목에 대해서 문제해결능력을 평가하지 않는다면 ‘수학문제’의 속박으로부터 수학을 구원할 수 있다.


 


셋째, 수학적 능력은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자원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거짓말이며 환상조각이다. 중고등학생의 수학 능력은 개인의 인생에도 별로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특별히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것도 아니다. 초중고 학생들에게 무슨 국가경쟁력인가. 그들 중 일부가 대학에 진학하여 또 일부가 과학분야 학문을 하고 기술을 연마할 때, 분야에 따라서 수학실력을 키워야 할 필요가 있다. 수학은 과학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라도 ‘수학적 능력’은 ‘배배 꼬인 수학문제를 푸는 능력’을 뜻하지도 않는다. 일부에게만 필요한 능력을 침소봉대해서는 안 된다. 수학적 능력이 내 인생에 선사해 준 것이라고는 과외할 때 도움이 되었다는 점, 잠시간의 학원강사 시절 아주 유용했다는 점, 딱 그 정도였다.


 


나는 수학과목에 대해서, 적어도 입시에 관한한 변별력을 없애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수학문제로부터 수학을 구원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수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학문제는 80%의 학생이 80%의 정답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쉽고 정직하게 출제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단순한 수학적 지식, 정직한 연산규칙, 개념으로 충만한 세계,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기준, 몇 가지 암기할 필요가 있는 공식과 기호의 세계들 위주로 출제하는 것이 좋다. 수학하는 즐거움을 함부로 빼앗아서는 안 된다. 대신에 공교육의 수학 수업은 수학사를 소개한다거나 수학과 철학의 통섭을 시도한다거나 다양한 응용 예를 가르침으로써 스트레스 대신 즐거움을 주는 방향으로 수학교육의 방향성을 잡기를 바란다.


 


 


다른 과목에 대한 짧은 생각


 



 


현재 수능시험 과목은, 언어영역, 수리영역(수학), 외국어영역, 탐구영역(사회탐구/과학탐구선택)으로 구분되어 있다. 지나치게 일본냄새가 난다. 이 냄새를 도대체 몇십 년이 지나도록 지우지 못하고 있다. 수리영역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소상히 소견을 밝혔다. 각각에 대해서 내 짧은 생각을 여기 밝혀본다.


 



▷언어영역: 의사소통능력과 논리력을 키움에 있어서 수학보다 비교할 나위 없이 중요한 과목이 언어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국어가 중심이겠으나, 소망하는 바가 있다면 철학과목이 언어영역에 결합되었으면 한다. 언어와 문학과 철학은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소통과 생각하기가 서로 잘 어울어지지 않을까 싶다. 언어영역은 곧 의사소통와 생각하기의 시금석인 과목이므로 가장 비중 있는 과목이 될 수밖에 없다.


▷외국어영역: 영어가 필수이며, 다른 외국어는 제2외국어로서 선택과목으로 되어 있다. 지나치게 급진적인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영어와 다른 외국어를 차별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도 영어를 가르친다. 영어에 환장했다. 이것도 어느 정도 통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아랍어 등등등...에서 한 과목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닐까 싶다. 영어를 다른 외국어와 같은 레벨로 강등했다고 해서 영어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어는 지속적으로 학습되고 훈련되고 있기 때문에 입시에서 중요한 과목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의 실력은 부모 세대보다 더욱 나아질 것이다. 또 절실히 필요한 사람은 대학에서, 또는 사회에서 다시 공부할 수 있다. 언어의 다양성은 문화와 사고의 다양성으로 이어진다.


▷탐구영역: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이렇게 단순하게 구분해서 전영역에 걸쳐 문제를 출제하는 것이 통섭의 시대에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배움과 지식에 대해 지나치게 분업화된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신 탐구영역에서는 지식수준과 이해력을 테스트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수준”을 묻는 문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개 알게 되는 상식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문제가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폭넓은 지식을 얻는 즐거움을 시험문제가 방해해서는 안 된다. 이를 통해서 공부의 양을 줄이는 것이다. 교과서와 사회적 상식만으로 충분히 문제를 풀 수 있게 출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교과목의 수를 줄이고, 대신 교재를 통합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주제 넘게 고등학교 교과과정과 대입시험의 평가 방향성에 대해 소견을 밝혔다. 교육은 너무 중요해서 전문가에게 맡겨놓고만 있을 수가 없다. 그들은 오히려 수십 년간, 갑오개혁 이후 100년이 넘게 교육을 망가뜨리고 있다. 내가 여기서 이런 기사를 쓴다고 해서 우리나라 공교육 시스템이 1마이크로미터라도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허튼소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의 오늘과 미래를 위해서 이 완고한 벽을 만져서 밀어보는 것이다. 동참하는 사람이 늘고 또 저마다 이 벽을 밀다 보면 언젠가 이 벽이 우리의 힘에 의해 밀릴 날이 오지 않을까? 물론 서로 미는 각도가 다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언젠가 그 힘이 서로 공명하게 되는 날에는 저 완고한 벽도 더는 버티지 못할 터이다.


 


어린 아이들은 늘 불가능한 것을 꿈꾼다. 나도 그 꿈의 방식에 동참한다. 아빠의 역할이다.


 



 


정우성


트위터 : @hanaeserin


 



 


두 아이의 아빠이자 변리사, <특허전쟁> 후속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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