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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인생에 한 번은 촛불을 든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도, 비리와 사기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사람도, 삶의 궤적이나 노력 따위와 무관하게 언젠가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 부당함을 해소할 충분한 권력과 돈이 있다면 문제 없겠으나, 언젠가는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기 마련이다. 스스로의 힘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바로 그 순간에 촛불을 든다. 그러니까 촛불을 드는 쪽은 대개 연대가 필요한 약자다.

 

그러나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뛰쳐나오는 타이밍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공산주의자, 노조, 유대인이 잡혀가는 데 침묵하고 있다가 자신이 잡혀가게 되자 말해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어느 유명한 일화의 교훈처럼 자신과 직접 관계가 없음에도 부당하다고 판단해 나설 수도 있고, 내 밥그릇이 작아졌을 때 혹은 목에 칼이 들어왔을 때 비로소 움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전선을 어디에 긋느냐는 개개인의 결정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최초의 촛불은 비교적 최근인 2002년이다(87년 6월 항쟁에서도 촛불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때는 촛불보다 화염병이 앞섰을 테니 논외로 하자).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의 무더운 6월, 미군 장갑차에 치어 효순, 미선양이 숨지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두 소녀를 추모하기 위해 촛불을 들었다. 집단기억에 촛불이 각인된 최초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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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한국일보>

 


각인된 기억은 오래지 않아 재현됐다. 2004년 3월,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등 야당은 선거개입을 구실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다. 8:2로 나뉠 정도로 탄핵 반대 여론이 압도적이었지만, 오만한 정치꾼들은 민심을 외면했다. 분노한 시민들이 국회로, 광화문으로, 시청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저항의 촛불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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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해 촛불이 일었다. 학생, 학부모, 넥타이부대, 예비군부대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해 촛불 문화재를 만들었다. ‘촛불정국’이라 불릴 만큼 집회가 잦던 때였다. 10만이 넘는 촛불 행렬을 보고 누군가는 배후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집회에 참석한 이들이 느낀 것은 짜릿한 연대감이었다. 이들의 연대는 추가협상을 이끌어 검역기준을 강화하는 작은 성과를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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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가장 가까운 촛불은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촛불이다. 지난 11월에는 2008년 이후 최대 규모인 10만 명(주최 측 추산)이 모여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촛불을 들었다. 세월호 침몰의 진상이 규명될 때까지 꺼지지 않을 촛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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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시민들은 옳지 않은 일 혹은 부당하다고 판단하는 일에는 언제나 맞서서 촛불을 들었다. 이는 퇴보하는 사회의 마지노선과 같았다. 우리의 집단기억 속에 촛불은 점차 추모와 저항, 참여와 연대 등의 의미로 남았다.


그런데, 이 집단기억을 공유하지 않는 것으로 강력하게 추정되는 낯선 이들이 촛불을 들었던 적도 있었다. 누구나 인생에 한 번은 촛불을 든다는 명제에 가장 어울리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누구도 이들의 촛불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보여 준 것은 절박함이 뚝뚝 묻어나는 저항과 끈끈한 연대였다.


2004년 12월 16일. 서울시청 앞에서 1만 5천여 명(주최 측 추산)이 모인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의 전면에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정치인 두 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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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현 대통령. 당시 집회에서 두 거물 정치인이 전면에 나서서 “투쟁”을 외치며 촛불을 든 기념비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나라당의 대표였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집회 현장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서울시청에 출근하던 시장이었다(둘 사이에 엉거주춤 서 있는 사람은 강재섭 한나라당 원내대표). 권력의 중심에서 ‘저항’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이 이 추운 겨울에 촛불을 들다니. 무슨 일일까.

 

촛불 든 시위대를 종북 빨갱이라 규정하며 배후를 찾기 바빴던 이들을 차디찬 바람이 부는 광장으로 불러내 촛불을 쥐어 준 것은 다름 아니라 ‘사립학교법’이었다. 당시 두 대통령은 참여정부에서 추진하던 사립학교법 개정안에 저항하기 위해 낯선 촛불을 들었던 것이다.

 

두 정치인뿐 아니라 한나라당 차원의 저항도 극렬했다. 한나라당은 사학법 개정안이 통과된 12월 9일을 ‘우리나라 사학이 죽은 국치일’로 규정하고 장외투쟁에 나섰다. 이 사안을 대하는 그들의 비장함은 같은 날 이규택 한나라당 최고의원이 시청광장 연단에서 내뱉은 다음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12월 9일 사학법이 통과되던 날 김정일 위원장은 사학법이 통과된 것이 기뻐서 이제는 때가 왔다며 기쁨조와 함께 폭탄주를 마시고 광란의 춤을 췄다.”



근거나 출처조차 없는, 기쁨조 관리부장과 핫라인이 닿아있지 않고서야 알래야 알 수 없는 이런 정보를 그는 어디서 어떻게 입수했는지 자뭇 궁금하지만 호기심은 잠시 접어두자. 발언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당시 한나라당이 무척 급하고 절박했으며, 이 문제를 기어코 북한과 연결시켜 이념대립으로 몰아가고자 했다는 것이다. 두 대통령은 물론 보수 세력이 이처럼 극렬히 저항하고, 촛불까지 들고 광장에 섰던 일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유례가 없다.

 

도대체 사립학교법이 뭐가 어쨌길래 이들이 이토록 저항했던 걸까. 당시 사립학교법 개정의 골자는 '사립학교의 막강한 재단 권력을 감시할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안을 두고 한나라당 전체는 물론, 후에 대통령이 되는 유력 정치인이 둘씩이나 나와서 생전 해보지도 않은 촛불집회를 하다니.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이들의 반응을 보자면, 이 사안이 결코 가벼이 넘길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들이 사립학교법 개정에 반대했던 표면적인 이유는 '사학 자주성 훼손'이었다. 국가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하면, 사립학교에서 주체적으로 교육을 할 수 없게 되고, 교육의 다양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다. 더 오른쪽에 서 있던 사람들은 한 발 더 나아가, 재단의 권력이 약해지만 전교조 '청정지역'이었던 사립학교에 전교조 교사들이 들어와 주체사상을 가르치고, 학생들이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명랑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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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익숙한 어법을 구사하는 박 모 한나라당 대표

출처 - 근혜 "현정권은 나라 무너뜨리는 파괴정권" (오마이뉴스. 2005.12.16)


두 번째 주장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교육의 다양성 훼손에 대한 지적은 부분이나마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 근거에 매달려 여당의 차기 대선주자 두 명과 한나라당 전체가 사활을 걸 만큼 심각한 문제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여론이 완벽하게 개정 반대로 쏠렸다면 모를까, 민심도 팽팽히 맞서고 있던 때였다. 선뜻 이해할 수 없는 절박함이다. 이 온도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기실 사립학교 문제는 그 중요성이나 심각성에 비해 피부로 와 닿는 면적이 극히 좁은, 쉽게 체감할 수 없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문제가 오랜 시간 이어지며 꼬일 대로 꼬여 복잡하기도 하거니와, 학교를 졸업하면 자식을 학교에 보내기 전까지는 쉽사리 학교에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학생 신분이라 하더라도 사립-국공립을 체감으로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법 조항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하니, 어렵기도 하다. 무엇보다, 위 사례에서 나타나듯 표면에 드러나는 이야기만으로는 상황이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 크다. 그러니 사립학교를 대하는 저들과 우리의 인식에 안드로메다급 간극이 생긴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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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간극은 무엇이냐', '사립학교법이 왜 중요한 것이냐' 하는 질문은 일단 뒤로 미뤄두기로 하자. 다만, 지금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립학교 문제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세력이 있고, 그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 정도다. 교육계에는 발끝조차 디뎌본 적이 없으면서 관심은 꿀단지 묻어놓은 듯 많은 본인도 그와 같은 생각이다. 체감하기 어렵고 복잡하지만, 사립학교는 꽤 중요한 문제라는 것.


하여, 그 간극을 찾아 나가는 작업을 해볼까 한다. 사립학교법 개정에 급소를 스친 것처럼 저들이 민감하게, 격렬하게 저항했던 이유를 조금씩 조금씩 찾아가 보자. 살짝 스포일러 하자면, 그 과정에서 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될 것 같다는 것 정도.


사립학교에 대한 저들의 인식과 우리의 인식 사이의 틈이 한 뼘 이나마 좁혀질 수 있기를 감히(?) 기원하며, 사립학교와 사학재단, 사립학교법에 대한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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