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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08. 16. 목요일


논설우원 파토


 


 


다시 광복절이었다. 해방이 1945년이었으니 어느덧 67년이나 흘러 버렸다. 초등학교 때 케비에스 광복절 기념 프로그램 중 <반일 36년, 반공 36년> 이라는 게 아직도 기억나는데 그게 어느덧 31년 전이니, 우원도 이제 30년 전 광복절을 회상할 만큼 나이를 먹고 만 거다.


 


머 해방 후 이 땅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 그리고 우원이 그 프로그램을 본 그 시절 이후에 벌어진 또 다른 많은 일들은 다들 잘 아는 거니 일일이 열거할 이유는 없다. 다만 우원은 그 옛날과 비교해 달라진, 혹은 달라져야 할 해방이라는 말과 그 언저리의 의미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일제강점기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일단 그들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거기에 필요한 최대의 동력원이 민족주의였다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정치, 사회적인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고유의 정체성들, 즉 언어나 풍습의 유지 발전 등 모든 면에서 민족주의를 통한 일제의 극복은 그 34년 11개월간 우리 모두의 지상과제이자 절대선이었다. 근본적으로 민족 개념과는 거리가 먼 공산주의도 우리나라에서는 민족주의와 결합될 수 밖에 없는 측면이 있었고 그런 성향은 북한에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렇게 일본 지배에서 벗어난 다음의 과제는 이제 독립국가의 건설. 지금 우리는 별로 인식을 안하고 사는 부분이지만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 곧 말 그대로의 독립이었던 것은 아니다. 1945년부터 3년간 한반도에는 그 중간에서 어중간하게 위치했던 '해방공간' 이라는 열라 불안하고 혼란스런 시대가 있었다.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를 벗어났으니 이제 뭘 어떻게 해서 어디로 가야 하냐는 숙제를 풀어야 하는 때였다.


 


그러나 그 선택의 권리는 우리 손에 고스란히 있지 않았다. 38선을 기준으로 미국과 소련이 진주하자 신탁통치 문제와 선거 및 정부수립에 이르는 많은 문제들이 불거지고, 남북간에는 물론 남측 내에서도 폭력과 학살마저 동반한 엄청난 갈등과 분열상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는 48년 남북한의 개별적인 정부 출범이라는 결과로 나타났고 현재까지의 분단으로 이어지고 있다.


 


 



1948년 4.3 항쟁에서 희생된 제주도민들의 유골


 


 


그런데 이 일련의 사태에서 눈 여겨 봐야 할 부분이 있다. 이 분열상은 그때까지 오랜 세월 사실상의 성역이자 절대적 명분이었던 민족주의가 불과 한두 해 만에 다른 이데올로기들에 그 자리를 내줬다는 의미라는 점이다. 그토록 믿고 추구했던 민족 개념, 그 해방과 독립과 번영이라는 이상은 막상 일본 제국주의에서 놓여나자마자 일종의 허깨비가 되고 말았던 거다.


 


그리고는 이제 새로운 이념들이 득세하여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그 힘은 해방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작은 나라를 둘로 나누어 버릴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그래서 잘 알다시피 불과 2년 후에는 그 이데올로기들에 기초해 엄청난 희생이 따르는 전쟁까지 치르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남과 북은 원수로 척을 지고, 서로간에는 끊임없는 견제와 경쟁 속에서 - 건강한 의미가 아닌 - 불안하고 위험한 공존을 계속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의 상황이다.


 


 




 


 


그럼 민족주의의 현실적 힘은 왜 이렇게 어이없이 무너진 것이며, 한편으로는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우리의 정신 밑바닥에서 꿈틀대고 있는 걸까.


 


사실 유럽에서는 민족주의(nationalism)가 부정적이고 위험한 단어다. 단지 그런 면이 있다는 게 아니라 아예 그렇다. 이건 작은 나라들이 서로 맞닿아 불분명한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교통하고 왕래하고 싸워 온 얘네들의 특성에서 나온 거기도 하지만, 그 위험성에 대한 경계와 극복을 위한 노력이 근대정신과 현대적 가치관을 잉태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게 사실이다.


 


식민지배 등 특정한 상태를 극복하는 데는 유용한 민족주의가 고정된 이데올로기로서 위험성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어쩔 수 없이 함의하는 배타성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로마시대 이후 이런 민족간 배타성이 수시로 표면화되면서 갈등의 불씨가 되었고, 특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중반에 걸쳐서는 공식화된 증오와 차별, 나아가 학살에 이르는 형태로까지 나타났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들은 민족 지상주의 개념, 즉 혈연이나 전통적 지연 공동체를 이상화하는 사상의 부작용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히틀러를 악마로 치부하는 것은 속 편한 일이지만,

실은 그를 통해 발현된 극단적인 사상의 일단을

누구나 조금은 갖고 있다.


그것은 자기 것을 보존하고 보호하려는 방어 본능의 공격적 표출이다.

이는 민족주의, 국가주의 등 다양한 형태의 우익적 전체주의로

공식화 될수도 있지만 일종의 생활 습관으로 일상화, 내면화되기도 한다.

현대 대부분의 인종주의는 후자의 결과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현대사는 물론 과거에도 그런 경험을 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우리의 세력권은 늘 한반도 안에 머물러 있었고, 대국으로의 지위를 갖던 중국과 전투국가라고도 할 일본 사이에서 우리가 겪은 것은 주로 일방적 침탈이었다. 대등한 입장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외교적 압박이나 전쟁의 참화 등으로 발현되는 외국과의 관계라면 생존을 위해서라도 배타적 민족주의가 자연스레 생겨나게 되고, 그것의 부작용이랄 것도 별로 드러날 일이 없다. 이런 상태가 일제 강점기까지 계속 이어져 왔던 거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자 올림픽에서 5위를 하는 이 나라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부를 묶어주는 가치로서의 한계를 뼈저리게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습관적으로 방어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 사고방식에 젖어 산다. 도움을 받는 나라가 아니라 원조를 주는 나라, 세계 각국에서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벌기 위해 찾아오는 나라가 되어 있는데도 아직 바깥의 사소한 공격에 움찔하고 의례적인 칭찬에 우쭐하면서 일희일비할 뿐 아니라, 우리보다 가난한 외국인들에 대한 비뚤어진 우월의식을 갖고 그걸 대놓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은 아직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역사의 습관, 식민지배에서 온 관성, 우리에게 남은 8.15식 민족주의의 한계다.


 


 



민족주의와 반민족주의, 반공 이데올로기, 자유주의와 전체주의 등 상반된 가치들이

마구 혼재된 우리나라 극우 집단의 혼란상은 우리 근대사의 사상적 질곡을 상징한다.


 


 


이렇게 사는 과정에서 지난 수십 년 간 우리 삶의 지상덕목으로 애국애족이라는 말이 또 널리 쓰여 왔다. 그런데 해방 이후 이 애국의 의미도 분화되기 시작해서 어떤 이들에게는 민족, 어떤 이들에게는 ‘자유민주주의’ 같은 정치 이데올로기, 나아가 ‘정부' 등 다양한 개념들이 애국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그래서 이제 극우 파시스트에서부터 극좌 주사파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각자의 애국애족을 논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의 이런 사랑은 서로 전혀 달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중심적 공통점이 있다. 그건 그 대상이 구체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민족은 얼핏 사람인 것 같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실은 개념이며, 이런 개념들에 대한 맹목적이고 비뚤어진 사랑의 크고 작은 예는 얼마든지 널려 있다. 예컨대 내 민족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수도 있지만 그 외의 사람들 – 설사 이 땅에서 이웃으로 살고 있다 한들 - 은 어떻게 되도 좋다거나,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면서도 가난한 이웃을 멸시하고 천하게 보는 삶이라면 결국은 공허한 이데올로기를 추구하는 껍데기일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한가지 질문을 던져 보자. 요즘 독도 관련해서 이래저래 이슈가 많은데, 사실 우원은 10년쯤 전 본지 지면을 통해 독도보다 위안부 문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큰 오해와 질타를 받은 적이 있다. 근데 여전히, 우리는 과연 독도를 사랑하는 만큼 이 사회의 구성원들을 (덩어리로의 민족 말고) 사랑하고 존중하나? 독도 사랑하고 지키는 게 뭐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영토에 대한 주권의식도 열라 중요하다. 문제는 그 영토와 주권이 뭘 위해 존재하냐는 것, 그걸 우린 충분히 생각하며 살고 있냐는 거다.


 


여기에 대한 고민과 각성이 없이는 애국애족이고 민족이고 독도고 뭐고 결국은 공허한 슬로건이자 잘못된 신앙의 대상에 불과할 뿐인 거다.


 


 



5.18 때 광주가 비극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해방구로 불렸던 건

사사로운 이익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인간애에 기본을 둔 정서가

잠시나마 지역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 인간애는 광주 시민이라는 모호한 덩어리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내 앞에서 지금 함께 고난을 나누고 있는 한사람 한사람을 향한 것이었다.

반면 진압군이 시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폭도’만을 봤을 뿐 인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래 전 이맘때, 우리는 일본 식민지로부터의 벗어나 독립 국가를 세우고 주권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인 뜻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해방은 조금 더 내밀한 무엇이다. 그것은 자결(自決), 즉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우원은 생각한다.


 


근데 이건 국가나 민족 등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도 최대한의 자유와 권리를 향유하고 그 책임을 진다는 의미다. 독립국가의 수립 같은 집단적인 주체성의 확보는 기본이고, 그 단계를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이제 개인의 차원으로 중심이 옮겨와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사회 시스템의 기계 부속으로 이용되거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희생당하지 않는 세상, 나아가 사회가 도리어 나의 행복을 위해 복무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복지의 현대적 의미고, 이게 달성되지 않으면 진정한 인간의 해방은 요원하다.


 


이렇게, 당장 일제에서 벗어나 나라를 세워야 했던 1945년의 우리 선배와 선조들이 가질 여유가 없던 통찰과 방향성을 지금의 우리는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해방은 민족이나 애국애족 같은 거창한 슬로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원과 열분들 같은 구체적 인간들의 자유와 행복을 통해서만 비로소 달성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그래서 이제 광복절은 우리가 그 모든 혼란과 질곡을 넘어 여기에까지 도달한 것을 각자 축하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직 충분하진 않더라도, 우승을 한 게 아니었어도 우리의 성취를 열렬히 기뻐하고 축하했던 2002년 월드컵 때처럼 말이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지루한 기념식에서 가카의 반일 발언이나 보면서 조는 대신 수십 년 전 우리가 얻은 자결과 해방의 기회를 오늘에 비추어 진심으로 반기고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추신>



 


1990년, 한국계 혼혈 소련 가수 빅토르 초이가 28세로 요절했다. 자유를 염원하면서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찬 그의 음악은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촉발한 요인 중 하나였고, 따라서 정부 입장에서는 반국가적 위험 인물로 KGB에 암살되었다는 설도 파다하다. 하지만 빅토르는 아직도 러시아를 포함한 구 소련 전체 인민의 그리움의 대상이다. 심지어 소련 시절의 가난의 평등과 경쟁의 부재를 그리워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와 자부심마저 남겨둔 러시아 소시민들 사이에서도 그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이라는 점, 우원은 실제로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국가나 민족, 이데올로기 같은 것은 결국 변하고 사라져 간다. 오직 인간만이 늘 그 자리에 있다. 젊은 빅토르는, 휴머니즘의 이름 하에 발흥했지만 결국 인간이 실종되고 만 체제 속에서 그것을 노래해 일깨웠고 그렇게 죽어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국가도 민족도 아닌 그들 자신의 삶과 마음을 노래하며 어루만져 준 빅토르를 떠나 보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이 바로 우리의 광복절, 8월 15일이라는 것은 물론 우연일 뿐이다.


 


 


논설우원 파토

@pato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