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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08. 21. 화요일

논설우원 파토


 



 


1973년, 시대의 효웅(梟雄)이었던 이소룡(李小龍)이 사악한 독마(毒魔) 감기약(感氣藥)에게 살해되자 정파 무림계는 혼돈(渾沌)의 도가니에 빠져든다. 지존(至尊)의 급작스러운 유고와 부재는 강호에 거대한 진공 상태를 유발했고, 그날 이후 한다하는 고수들은 본의던 아니던 하나같이 이소룡이 빠져든 무저갱(無底坑)의 입구로 몰려가기에 이르렀다.


 


그곳에 모인 그들은 급속히 변신해갔다. 다리가 있는 자는 훅킥을 감아 차고 입이 있는 자는 괴조음(怪鳥音)을 우지졌으며, 손이 있는 자는 코를 퉁기고 런닝구가 있는 자는 찢어 발겼다. 그렇게 그들 일군의 무림인들은 서서히 죽은 지존의 외양으로 화(化)해 갔으니...


 


전대미문(前代未聞).


 


이런 기괴(奇怪)한 사건은 3천년 무림사에서 듣도보도 못한 것이었고, 무림인들은 이소룡의 모습으로 변해 강호에 나타난 그들을 ‘용화십걸(龍化十傑)’이라 부르며 두려움에 떨었다. 바야흐로 군웅할거의 난세가 시작된 것이다.


 


허나… 적벽대전도 세월이 지나면 호사가들의 이야기 거리일 뿐이라던가. 그 호기롭던 영웅의 시대 이후 또 오랜 시간이 지나고 지금은 그 이름들마저 일부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대만인(臺灣人)으로 Bruce Li 라는 용명(龍名)을 사용한 하종도, Bruce Le 혹은 여소룡으로 불린 이여룡, 여기에 브루스의 유작 <사망유희>에 모습을 드러낸 바 있는 한국인 당룡 김태정 등이 그들이다.


 



<용화십걸 중 4인. 그들 중 일부는 이름도 기록도 없이 중원에서 사라져갔고

심지어 무공이 아예 없거나 전혀 닮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용화십걸임을 드러내는 필수 도복, 노란 추리닝.>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가히 일룡(一龍), 무공과 외모의 양면에서 유달리 찬란하게 빛나던 거성(巨星)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늘의 영웅, 거룡(巨龍)인 것이다.


 



 


얼핏 보기에도 위의 인물들에 비해 브루스에 훨씬 가까운 외모와 박력(迫力). 거기에 용쟁호투 풍의 복근 상처마저 찬란한 그를 보고 있노라면 얼핏 이소룡 본인으로 착각되는 미혹에 빠지게 된다. 거기에 거룡이라는 이름과 과하게 희번덕대는 눈매에 이르면 되려 지존을 능가하고 넘어서고자 하는 남아(男兒)의 당찬 야망과 담대(膽大)한 결의마저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 그의 본명은 문경석. 그렇다. 놀랍게도 바로 우리와 같은 한국인이다.


 



<정무문에서의 브루스를 연상케 하는 거룡의 절대적 위용과

그에게 보호받는 무리들의 연약한 모습>


 


브루스 레이 Bruce Lei, 드래곤 리 Dragon Lee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던 그. 불과 한 세대 전의 인물임에도 영웅호걸(英雄豪傑)이 의례 그렇듯 그 과거는 도무지 베일에 싸여 있다. 일설에 따르면 홍콩과 한국을 넘나들며 많은 무술영화를 찍었다고 하고, 다른 일설에 따르면 그가 찍은 영화는 전부 한국에서 만든 짝퉁 중국무술 영화라고도 한다.


 


그러나 우원을 진정한 혼란에 빠트린 것은 영문 위키백과에 있는 한 페이지의 정보였다.


 



<원문 링크>


 


위에 따르면 드래곤 리, 문경석은 1958년 대한민국에서 출생하자마자 구 소련(蘇聯)으로 가족 전체가 이주하여 ‘브야차슬레프 야크시스니’ 라는 러시아 이름으로 살게 되었단다. 거기서 십대 때까지 있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뭐?


 


1958년이면 그 몇 해 전쟁으로 남한과 소련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이던 때이며 적성국으로 서로 왕래는커녕 교신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영웅 거룡의 가족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떻게 해서인지 시골 촌구석에서 농사짓고 살다가 갑자기 소련 땅으로 이주해 십 몇 년을 지내고 돌아왔다는 것이니, 이게 사실이라면 가족 전부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할 일 아니냔 말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다른 정보를 수집했지만 이 이야기는 영문 위키 외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잘못된 정보인 걸까, 아니면 CIA의 극비 기록에만 남아 있는 현대사(現代史)의 숨겨진 비밀인 거냐. 소련 땅에서 자란 의문의 한국인 소년 브야차슬레프 야크시스니는 대체 누구이며 그와 가족들이 소련에서 한 일은 무엇인가. 또 그들은 왜 죽음을 무릅쓰고 귀환했고 아무 벌도 받지 않은 거냐…


 


이런 불가사의, 아니 불가능한 이력은 태어나던 집 주위에 상서러운 연무가 가득했다던가 논두렁에 놔둔 젖먹이를 맹호(猛虎)가 보호하고 있었다는 등 옛 영웅들의 일화, 혹은 서른 살이 되어 사람들 앞에 나타나기 전 예수의 모호한 행적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영웅과 그들의 운명… 우리 범인들로서는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일 뿐이다.


 



<거룡의 그림자에 가려있지만 소련이 키워낸 고려인으로

빅토르 초이라는 무명 가수도 있었다.>


 


이제, 이렇듯 신비와 놀라움으로 가득 찬 거룡의 무(武)와 용(勇)을 직접 우리 눈으로 확인해 보자. 본 시리즈를 첨부터 쫓아온 사람들이라면 첫 영웅 볼로와 우주를 뒤흔드는 웅대(雄大)한 합을 겨뤘던 그의 위용을 기억할지 모른다. 허나 그것은 단지 서곡에 불과할 뿐.


 


이소룡이라면 아무래도 쌍절곤. 그런 만큼 우리의 거룡 또한 그 대가임은 두말하면 잔소리. 당당하게 적수를 노려보며 무한한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브루스와 달리 몸을 마구 뒤틀면서 눈을 이상하게 치뜨는 등 다소간의 백치(白痴)적 분위기가 맘에 걸리나, 어차피 싸움은 이기면 그만인 거다. 폼이 어쩌고 하는 잡소리는 초라한 약자들의 생트집에 불과하며 사생결단(死生決斷)의 전장에 나선 영웅이 귀담아 들을 말이 아닐 터.


 



 


이렇듯 브루스조차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쌍절곤 하나로 진검을 든 검객(劍客) 수십 명을 상대하는 신기. 이어 한 손에는 쌍절곤을, 다른 한 손에는 뺏은 검을 든 채 마구 베고 찌르는 모습은 브루스에 의해 창시된 살육(殺戮)의 미학이 그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된 모습이라 하겠다.


 


한편 모방은 창조를 부르는 법. 아래에서 보듯 거룡은 쌍절곤에 만족하지 않고 지금껏 무림에 등장한 바 없는 신무기를 세상에 내어놓기에 이른다. ‘단절곤’으로 명명해 마땅할 이 가공할 괴무기가 그 이후로 명맥이 끊긴 것은 거룡 외에는 이 위험한 것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얼핏 도무지 평범한 작대기보다 나아 보일 게 없는, 큼직한 열쇠고리라고 해도 부정하기 힘든 이런 것을 휘두르며 비열한 악당들을 매로 훈육(訓育)하는 거룡. 역시 진정한 고수의 손에서는 지푸라기 조각이라도 생사를 가르는 치명적(致命的) 무기로 돌변하고 만다.


 



<강인한 흑인(黑人)을 때려눕히며 동아인의 기상을 드높인 거룡의 기합(氣合)>


 


그러나 영웅에게도 시련이 있는 법. 그의 영광이 언제나 이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아래 <마지막 정무문>에서는 사파무림의 암수였던 필름 빨리 돌리기 마공의 오류를 드러내고 있는데, 비록 거룡은 1:10 무렵에 강렬하고도 영웅적인 표정 연기로 이를 무마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허나 이는 용렬(庸劣)한 감독과 비천(卑賤)한 제작진의 문제일 뿐 영웅의 위대한 성정(性情)에 티끌만큼의 그늘도 드리우지 않는다.


 



 



<이 사진을 <용쟁호투(Enter the Dragon)>의 포스터와 혼동함으로써 우리의 영웅을 욕보이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뒤에 흑인, 백인, 여자 한 명씩 데려다 놓은 것마저 용쟁호투를 빼다 박은 것 같지만 이 역시 단지 우연일 뿐. 다만 맨 뒤의 여자가 실은 영화에 나오지도 않는다는 점에 이르면 우원도 조금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러나 영웅의 시대도 결국은 저물어가는 법. 영원할 줄 알았던 거룡의 지배도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모르는 당돌한 후진의 암습으로 흔들리게 된다. 하늘은 왜 거룡을 보내고는 또 이자를 보낸 것일까...


 



 


동아(東亞) 오천년 역사의 격투와 무의 전통을 파괴한 무림의 이단자(異端者)인 이자는 이제 거물인 양 행세하고 있으나, 이소룡에게 쳐 맞던 굴욕적인 과거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런 경험이 심어놓은 열패감과 심리적(心理的) 혼돈이 그로 하여금 무의 본분(本分)을 저버리게 하고 무림을 한낱 웃음거리로 만드는 뒤틀린 심성을 제공했음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


 



<굴욕의 과거>


 



<파파라치가 촬영한 실제 모습>


 


이자를 앞세운 교활(狡猾)한 무리의 농간으로, 한때 단절곤으로 천하를 호령했던 우리의 영웅은 이제 불러주는 이 없는 쓸쓸한 무림을 떠나 생소한 사업의 세계에 뛰어든다. 그러나 거룡이 누군가. 그런 그의 앞날에는 승승장구(乘勝長驅)라는 넉자만이 아로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위 사진은 이후 청년 사업가로서 그의 성취와 영광을 증거하는 소중한 한 컷이다. 화려한 청색 수트와 이에 부착된 성공의 증거인 뱃지. 큼지막한 수화기(受話器)를 들고 중대한 비즈니스 이슈를 논의하는 중에도 카메라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승리자의 여유. 배경으로 힐끗 드러나는 세계경영(世界經營)의 상징 지구본은 자신에 찬 그의 얼굴 앞에서 되려 초라하기까지 하다.


 


허나 이런 영광스러운 제 2의 인생 속에서도 무림의 지배자로서 자신의 옛 모습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는 없는 터. 진정한 남자라면 중년(中年)에 이르러 응당 돈과 명예의 야망을 추구함이 마땅하나, 그 영혼의 한 구석에는 수컷의 육체를 통한 투쟁심(鬪爭心)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의 정체 모를 포스터는 강호를 그리워하는 그런 장부의 고독이 표출된 것이리라.


 



 


그런데 오랜 세월 그의 삶을 추적해 온 우원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올해인 2012년, 그가 덜컥 한국영화배우협회의 이사장으로 선출된 것이다. 어떤 단체인가 봤더니 문화체육관광부 아래의 사단법인(社團法人)으로 전임 이사장은 이덕화였던, 아주 멀쩡하고도 공식적인 곳이었다. 하긴 동아의 거장, 액션무비스타인 그에게는 그저 당연한 지위일 뿐 무에 놀랄 일이런가.


 



<합성 아님>


 


초인적 무공과 신묘(神妙)한 능력으로 악적을 타파하며 정의를 세우고 소련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우리의 영웅 거룡. 때를 잃은 듯 했지만 불사조(不死鳥)처럼 다시 일어나 이렇듯 우뚝 섰음이니, 잊혀진 영웅인 줄 알았던 그의 성취는 아직도 현재진행형(現在進行形)이었다.


 


브루스를 두고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입네 위대한 무술인입네 하며 그를 짝퉁이라 폄하하는 무도(無道)한 자들이 있다. 그러나 무인의 진정한 도는 모든 난관(難關)을 뚫고 생존(生存)하는 것. 소룡은 갔지만 거룡은 이렇듯 살아남아 아직 우리 곁에 있었다.


 


그런 그를 알아보고 뫼시지 못한 것은 단지 우리들의 미욱함일 뿐. 우리는 대체 언제 참 진리에 눈을 뜰 손가…?


 


그럼 다음 시간에.


 


 


 



 


 


논설우원 파토

@pato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