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2. 08. 27. 월요일

 

한불로

 

 

 

 

 

 

 

 

지금까지 이 '대한민국의 뒤통수' 시리즈를 이어오면서 많은 독자들의 성원과 질책을 받았다. 깊은 관심에 감사하다. 그러나 시리즈 연재 텀이 필자의 게으름과 무능으로 인해 다소 길어지면서, 이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문제의식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를 느꼈다. (※편집부 주 : ‘다소’ 길어지지 않았다. 매우 길었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박근혜를 쉴드치기 위해 박정희를 재평가하자는 것도 아니고, 김대중-노무현을 비난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필자가 박정희를 다시 끄집어내고 한국의 경제성장을 되돌아본 것은 박정희나 박근혜를 지지하는 국민적 여론, 다시 말해 현재의 여권 전체를 지지하는 민의가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허상이 아니라는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모두가 틀린 말을 할 수는 없다. 어떤 주장이든 모두 '일리'는 있다. 어떤 주장이 오류인 것은 그 말이 일면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헤겔은 '진리는 총체적이다'라고 말했으리라.

 

 

 

 

 

마찬가지로 어떤 정치세력들이건 미치광이가 아니라면 자신들이 추진했던 노선이 완전히 틀리거나 옳다고만 주장할 수는 없다. 틀린 것(틀리다고 생각하는 것)만 쫓아서 보다보면 그 정치세력의 모든 것이 나쁘게만 생각된다. 반대로 옳은 것(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보면 모든 것이 합리화되거나 미화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총체적인 관점에서 얼마만큼 민생과 민도(民道)에 근접해서 정책적 성과를 냈느냐를 두고 판단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을 두고 판단해 보건데, 지난 '민주정부'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 비해 민생 문제와 관련해서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우리사회에 심어놓았다. 이에 대해서는 정말 진지한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함을 지적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한 '민주정부'는 DJ-노무현 정부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김영삼과 이명박 정부모두를 포함시키는 개념이다. 따라서 필자는 현재의 새누리당과 통합민주당이라는 두 정치집단 내의 차이를 거의 두지 않는다. 특히 경제정책과 관련해서 두 집단은 변별성을 판가름하는 일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때로 현재의 야권세력은 '50보 100보'라는 개념을 들어 두 집단의 차이를 두지 않는 일을 억울해 하기도 한다.

 

 

 

 

 

과연 50보, 100보로 도망갔던 병사 중 누가 더 혼나거나 용서받게 될까? 정답은 '먼저 반성하는 놈'이 그나마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 현실적으로 볼 때 '50보'가 '100보'를 나무라면서 자신을 변명하게 될 공산이 크다. 그러면 그는 오히려 괘씸죄로 더 강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더욱이 현 야권은 상대적으로 서민층과 사회적 진보를 원하는 계층의 지지를 많이 받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무능과 몰개혁성은 더욱 가혹하게 비판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야권은 '민주적 정통성' '도덕적 우월감' 등에 도취되거나 안주하면서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변별성을 확보하는 대신, 주로 정치/도덕적 차원에서 현 여권과의 차별화되려고 했다. 따라서 대중들의 외면을 자초했다.

 

 

 

 

 

60년이 넘은 역사를 갖고 있다는 민주당이 박원순에게 밀려 시장 후보를 내지 못하고, 대선 후보 경연에서조차 안철수라는 개인에게 압도당하는 현실은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대중들의 삶과 유리된 정치/도덕적 우월감을 갖고 여권과의 차별화되려는 야권의 관성적 대응은 반독재 투쟁 때부터 이어져왔다. 그렇게 하다 보니 정치의 본령인 ‘정책 대결’은 실종되고 선거는 오로지 각자가 응원하는 진영의 승리와 패배를 둘러싸고 열광하는 아드레날린 분비량 대결로 전락한 것이다. 마치 프로 스포츠 경기를 둘러싼 응원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노사모에서 비롯된 정치의 팬덤 현상은 이를 더욱 가속화했다.

 

 

 

 

 

이렇게 해서, 정치 진영간의 대결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대신 상대방이 얼마나 더 나쁘고 악마인지를 입증하는 게임으로 대체되었다. 이것이 '민주화' 이후 지체된 한국 민주주의 정치의 현실이다.

 

 

 

 

 

알에서 막 깨어난 조류는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각인하고 평생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다. 영화 '아름다운 비행'을 보면 야생거위가 부화할 때 처음 인지한 주인공을 어미로 여기면서 쫓아다니는 모습이 나온다.

 

 

 

 

 

오늘날 486세대는 반독재 투쟁 속에서 극적인 정치의식화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런 '의식화'된 세계관은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강하게 남아, '민주(진보)-독재(수구)'라는 프레임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고 있따. 알에서 부화된 조류처럼 처음 각인된 의식의 틀에 갇혀있는 것이다. 마치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레드컴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과 흡사하다.

 

 

 

 

 

 

 

 

 

 

'레드컴플렉스'에 사로잡힌 전쟁세대는 우익진영의 그 어떤 잘못도 북한의 만행으로 덮어버리고 진실을 호도한다. '반공진영'에 사실은 기억 장치에서 자연스럽게 삭제된다. 이런 불구와 같은 인식 행태는 전쟁을 겪지 않은 우리 같은 전후 세대들이 볼 때 황당할 정도로 비합리적이고 몰상식이다. 그렇게 황당함을 느낀 세대들이 오늘날 486 꼰대들이 되었고, 그들의 '민주-독재' 프레임은 '반공-좌익'의 프레임과 정확히 대응한다. DJ-노무현을 비판하는 사람,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긍정적인 요소를 얘기하는 사람은 거의 반사적으로 '수꼴'로 인식된다. '20대 개새끼론'이 나온 것도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서다.

 

 

 

 

 

‘개새끼’로 치부된 20대들은 민주화투쟁 이후 세대이다. 그들은 현실의 정체세력들을 '있어서는 안 될 존재'로 바라볼 필요가 없다. 그들이 먹고살기 힘든 세상을 선사한 'DJ-노무현'의 10년 정권을 심판하고자 한 것은 그들 나름대로 당연하고 정당했다. 실질적 양당체제 속에서 그것을 심판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정치세력은 한나라당 뿐이었으므로 자연스레 그들에게 투표했을 뿐이다. 어차피 두 정치집단이 현실적, 정책적으로 별 차이가 없었더라도 말이다.

 

 

 

 

 

한국의 반공 프레임에 찌든 세대가 이후 세대들에게 외면을 받아도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오늘날 '민주화 세대'들은 자신이 조롱받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임수경의 '변절자 새끼' 발언에 대중이 뜨악한 표정을 짓는 이유를 그들은 알지 못한다.

 

 

 

 

 

물론 반공 세대가 겪었던 험난한 현실과 그것을 극복했던 '노고'는 분명 존중받을 만하다. 사회정의를 향한 민주화세대들의 '헌신'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들의 '노고'와 '헌신'이 진리를 독점할 권리가 될 수는 없다.

 

 

 

 

 

필자가 이 '뒤통수' 시리즈에 서문에서 말했던 대로 '닥치고 반공세대'는 이제 한 시대의 저편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른바 '민주화세대'는 아직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중추이다. 그러나 시대의 주인공으로 활동하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민주화 운동' 시절에 갓 태어난 거위마냥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정치적 가치관-진영논리를 전면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아름다운 비행>의 주인공은 그들의 어미가 아니다. 그저 비행만이 목적이라면 누구를 어미로 안들 상관없겠지만, 비행이 가치를 생산하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우리들의 비행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럴 때만이 50년 넘은 양당체제가 안철수라는 개인에게 붕괴되는 이유를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다음 몇 가지를 '야권 민주진영'에게 제언하고자 한다.

 

 

 

 

 

 

 

 


 

 

 

 

 

<제언1. 진정성 독점의 환상에서 깨어나라.>

 

 

 

 

 

 

 

 

'무학의 통찰': 좌적 인간 VS 우적 인간

 

 

 

 

 

김어준 총수의 <닥치고 정치>를 보면 총수는 '무학의 통찰'에 기대 좌-우적 인간 유형을 인류학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좌우 이념형 인간의 심리적 기원을 사바나 시절로 돌아가 고찰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원시시절 불확실성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생존의 공포를 느꼈다. 따라서 그 근원적 공포에 대해 대처하는 방식에 따라 좌우파적 인간으로 성향이 구분된다. 우파적 인간은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존하여 포식자의 지위에 올라서려고 애쓰는 성향이고, 반대로 좌파적 인간은 이런 공포를 공동체가 분담해서 나누어 갖으려 한다.

 

 

 

 

 

때문에 우파적 인간은 '쎈 놈은 더 가져가도 된다는, 질서와 위계를 당연시하는 수직적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반면 좌파적 인간은 '누구나 같은 조건에선 같은 정도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 수평적 관계를 지향'한다.

 

 

 

 

 

따라서 김어준은 '우는 동물의 반응이며, 좌는 이성적 작용'으로 본다. 이 두 가지는 인간의 본성인데, 그는 개개의 인간은 두 개의 본성 중에 하나를 기질적으로 타고난 것으로 보는 것 같다.

 

 

 

 

 

동물적 본성을 지니면서도 이성적 능력을 개발해왔던 인간에 대한 묘사는 굳이 '무학의 통찰'을 운운할 것도 없이 상식이다. 그러나 총수의 '직관'이 빛나는 것은 각 개인을 '종특'의 반열로 올려놓은 데 있다.

 

 

 

 

 

 

 

 

 

 

예컨대 조갑제나 이명박 같은 경우는 우파적 기질을 타고났지만, 이명박은 자존심조차도 상실한 '겁먹은 우파'와 같은 인간인 것이다. 이재오, 김문수 같은 경우 좌파 쪽에서 성장했지만 기질 상 결국 우파적 인간으로 회귀했음에 불과하다.

 

 

 

 

 

필자는 총수의 이런 '무학의 통찰'을 처음엔 메타포 혹은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헌데 얘기가 쭈욱 이어지는 것을 보아하니 그것은 그의 정치관의 입론인 듯하다. 따라서 필자는 약간 '진지'를 먹고 총수의 '직관'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편의상 총수가 말한 '우적 기질'과 '좌적 기질'을 각각 '이기성을 지닌 유전자'와 '이타성을 지닌 유전자'로 치환해 본격적으로 논의해보기로 하자.

 

 

 

 

 

원시시절부터 형성되어온 그좌우의 기질이 대물림 된다면, 그것은 유전자 차원의 문제일 것이다. 해당 유전자가 존재하든 안하든 일단 '사고 실험' 차원에서 그 존재를 상정해보기로 하자.

 

 

 

 

 

이기적 인간과 이타적 인간이 종별 특성으로 나뉘어진다고 치자. 어느 한 쪽의 유전형질이 어느 시점에서 '우위'를 점한다면, 다른 한 쪽은 자연선택 과정에서 소멸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같은 종별 내에서 대립된 성격의 유전자가 나란히 수만 년을 독립적으로 각 개인에게 유전되는 건 상식적으로 보나 진화학적으로 보나 불가능하다.

 

 

 

 

 

원시시절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기적 유형의 인간과 이타적 유형의 인간은 한 공동체에서 같은 구성원으로 지속적으로 지내왔을 것이다. 따라서 혈통을 공유했을 것이며 모든 개인은 양측의 유전자를 어느 정도 함유하고 있을 것이다. 즉 개똥이는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를, 이를테면 각각 4:6의 비율로 지니는 등 일정한 비율이 존재했을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저작을 읽어본 사람들을 알겠지만, 진화는 통계와 확률의 게임이다. 수백만 년 진화의 과정을, 진화학자들이 개발한 통계 프로그램을 돌려 산출할 수 있는 이유다. 간단히 말해 주사위를 굴리면 세 번 연속 6이 나올 수 있겠지만, 수만 번을 굴린다면 1부터 6까지의 숫자가 나오는 비율이 각각 1:1:1:1:1:1의 양상으로 수렴될 것이다. 즉 부모세대의 생식을 통해 어쩌다 발생하는 ‘돌연변이’는 그 자체로 우연이지만, 긴 시간을 통해 보면 각각의 돌연변이는 진화론적으로 유의미한-<이기적 유전자>의 논지에 따르면 ‘유의미해 보이는’- 커다란 밑그림을 그리게 된다.)

 

 

 

 

 

총수의 '가설'은 각각의 유전자가 어느 정도 비율로 포함되어야 '좌적' 혹은 '우적' 인간으로 발현이 되는지 논하고 있지 않지만, 편의상 이기성이 50%가 넘으면 '우적 인간'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보자. 만일 51%의 이기성과 49%의 이타성이 지닌 인간이 있다고 할 때 그 '이기적' 인간에게 들어 있는 49%의 '이타적' 유전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성격에 발현되지 않고 그냥 묻히는 걸까? 다시 말해 80%의 이기성을 지닌 인간과 동일해지는 걸까?

 

 

 

 

 

만약 그런 사람들끼리 군집할 경우 그 세계는 오로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로 탈바꿈할 것이다. 총수의 기준에 따르면 우리는 김문수, 이재오가 속한 그런 군집을 우리는 현실적으로 보고 있다.

 

 

 

 

 

예컨대 100%는 아닐지라도, 우파 정당은 그런 유형의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새누리당(혹은 미국 공화당 등)의 조직 구성 원리나 그 행동이 다른 야당집단과 완전 별종으로, 무슨 짐승처럼 돌아가지 않음을 본다. 혹은 그 반대되는 정당이 현재의 여당과 별 차이 없다는 사실을 목도한다. 그러므로 '51%=80%' 가설은 일단 기각된다.

 

 

 

 

 

그렇다면 49%의 이타성을 지닌 '우파적 인간'은 어떻게 이기성의 잔여분인 이타성을 사회적으로 발현시키는 걸까? 생활 속에서 51%의 이기성과 49%의 이타성을 시간상으로 배분할까? 아니면 사안의 경중에 따라서 배분할 것인가? 그리고 그걸 계산하는 게 가능할까? 그리고 어떤 시점에서 그를 '우파적 인간'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인가?

 

 

 

 

 

총수는 말한다.

 

 

 

 

 

 

 

 

 

 

"(북유럽) 사회민주주의는 양육과 학습의 결과물이야. 좌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유독 북유럽에서만 더 많이 태어나게 만든 건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 우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조차 둔감해질 정도로 생존의 공포가 약화되는 안정적인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낸 거지.

 

 

 

 

 

시대 상황이나 학습의 결과로 우의 기질을 타고난 이들이 좌의 이념 체계를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있거든. 특히 정치, 경제적 약자인 젊은 시절에는 더욱.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가진 것이 점점 많아져서 지킬 것이 늘어나면 우의 기질이 드러나는 거지. 이게 내가 보기에는 김문수 같은 사람의 케이스지."

 

 

 

 

 

총수의 이러한 진술에 따르면, 우의 기질이 있던 사람이 자신의 기질을 여러 가지 사회 조건상 숨기거나 잠재하고 있다가, 어떤 일정한 조건(나이, 재산 등)이 채워질 경우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거다. 마치 같은 종의 물고기가 성체가 되어 바닷물에서는 붉은 무늬가 생기고, 담수를 만나면 전혀 다른 형질을 띄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자연계에서 이런 현상은 흔하디흔하다.)

 

 

 

 

 

그러나 인간이 조건에 따라 다른 유전형질이 발현되는 생명체가 아닌 이상, 어떤 것을 기준으로 '우의 기질'을 판별할 것인가? 이재오, 김문수처럼 정치적 선택을 기준으로? 그렇다면 보수여당에 실망해서 나중에 야당을 찍는 경우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또는 젊었을 적 남과의 경쟁에서 악착같이 승리해서 말년에 베푸는 사람은 '우적 인간'인가 '좌적 인간'인가? 보수적 정치관이 뿌리 깊은 사람 중에 '봉사 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부지기수다. 이런 사람은 어떤 기질인가?

 

 

 

 

 

무엇보다 이러한 규정은 ‘진화의 과정’이 없다. 그저 결과론적인 해석일 뿐. 어떤 선택의 시점에서 "넌 원래 '우적 기질'의 사람이었어"라고 하는 얘기밖에 안 된다는 거다.

 

 

 

 

 

북유럽 복지국가에도 우적 기질을 잠재한 인간들이 많지만 사회, 제도적인 영향으로 발현이 되지 않는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기'와 '이타'의 선택이 자유로운 환경조건에 놓일 수록 우적 기질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라고 추론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본성은 이타적인가 이기적인가

 

 

 

 

 

이 대목에서 잠시 그니지와 러스티치니가 98년도에 이스라엘 하이파 지역에서 행한 실험을 한번 살펴보자([이타적 인간의 출현], 최정규. 참조)

 

 

 

 

 

이 지역 유치원에서 학부모들은 오후 1시에 아이들을 데리고 와야 한다. 그러나 종종 학부모들은 바쁜 일이나 게으름 때문에 늦게 애들을 찾는 경우가 있었다. 이로 인해 유치원은 운영에 애로가 많았다. 그래서 유치원은 부모가 늦게 오는 경우 벌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하지만 벌금 제도가 실행되면서 외려 부모들이 아이들을 늦게 데리러 오는 확률이 높아졌다. 높게는 기존의 60%까지 급증하게 되었다. 벌금제도라는 물질적 유인 구조가 도입되면서 부모들이 상황을 기존과 다르게 판단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존에 '무임승차'를 하던 부모의 선택은 사회적/윤리적으로 ‘숨어 있었다.’ 이들은 물질적 유인 구조, 즉 금전적으로 손해를 보기 싫다는 욕구에 반응하여 정시에 데리러 왔어야 했다. 그러나 벌금제도가 있었을 당시보다 아이를 늦게 데리로 오는 비율이 훨씬 더 늘었다. 기존의 부모들이 미안함, 책임감으로 억제한 행동이 이제는 '떳떳함‘으로 바뀌었다. 벌금을 냄으로써 ’책임‘을 다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런 실험의 결과는 사람들의 성향이, 이기적인 것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을 해석함으로써 유동적으로 이기적, 혹은 이타적으로 반응함을 시사한다.

 

 

 

 

 

이번엔 본성이 더 잘 드러나는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살펴보자. (김영하의 에세이집 [포스트잇], [굴비낚시] 참조)

 

 

 

 

 

쥐 여섯 마리가 있다. 두 개의 방을 만들고 두 방 사이를 수중터널로 연결한다. 쥐가 모여 있는 방은 먹이를 주지 않는다. 다만 수중터널을 지나는 건너편 방에만 먹이가 놓여있는데 그 방은 너무나 비좁아서 거기선 먹을 수가 없다. 여섯 마리의 쥐가 굶어죽지 않기 위해선 그 수중 터널을 통과해서 먹이를 집어 와야 한다. 쥐는 천성적으로 수영을 굉장히 싫어한다. 하지만 굶어죽지 않기 위해선 누군가가 그곳을 갔다 와야만 한다. 결국 여섯 마리의 쥐 중 용기를 낸 두 마리의 쥐(샐러리맨 쥐)가 그 수중터널을 통과해 먹이를 물어다 왔다. 나머지 네 마리 중 두 힘센 쥐 두 마리는 그것을 빼앗아 먹는다.(조폭 쥐) 마지막 두 마리는 인생 포기한 듯 그냥 대책 없이 잠만 잔다(노숙자 쥐). 샐러리맨 쥐 두 마리는 조폭 쥐가 먹고 남은 것을 겨우 먹게 된다.

 

 

 

 

 

그런데 이들 '조폭 쥐', '샐러리맨 쥐', '노숙자 쥐'를 분리해서 각각 같은 성향의 집단을 ABC 그룹으로 나누어 여섯 마리씩 배치해 동일한 실험을 했다. 결과는 자못 흥미로웠다. 즉, 노숙자 쥐들로만 구성한 실험실의 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왕초 노릇 시작한 두 마리의 쥐(조폭 쥐)와 갑자기 성실해져서 먹이를 구하러 가는 쥐 두 마리(샐러리맨 쥐), 그 와중에도 의연하게 노숙자의 본분을 지키는 두 마리(노숙자 쥐)로 삽시간에 분리돼버린 것이다. 다른 그룹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결과는 동물마저도 본성과 기질이 가변적이고 상대적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만일 쥐가 실험된 조건에 인간이 놓여 있었다면?

 

 

 

 

 

그랬다면 협동성, 공평성이라는 인간적 '본성'과 의사소통 능력에 따라 쥐들과는 다르게 반응했을 것이다. 인간의 언어 자체가 협동의 산물이니까.

 

 

 

 

 

이 문제를 좀 더 본격적으로 탐구하려면 '인간의 본성'은 과연 무엇이냐는 본질적인 질문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흔히들 '성선설'과 '성악설'로 표현되는 이런 고전적인 질문은 현대에 들어서 심리학, 생물학, 경제학 등 각 학문 분야에서 여전히 실증적으로 탐구되고 있지만 합의된 결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이클 토마셀로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24개월 미만의 유아들과 침팬지를 비교하여 실험, 관찰한 결과 유인원은 공동 관심을 형성할 능력이 부족하고, 신뢰와 관용은 훨씬 더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기적 원숭이와 이타적 인간] 참조)

 

 

 

 

 

반면 인간은 공평성에 대해 무척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다.

 

 

 

 

 

최후통첩 게임이라는 것이 있다. 이 게임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가령 1만원을 갖고 있는 제안자가 상대방에게 일정한 금액을 제시했을 때 이를 받아들이면, 두 사람은 제시된 그대로 금액을 갖게 되고 거부하면 둘 다 가질 수 없다.

 

 

 

 

 

포도알을 갖고 한 실험을 보자. ‘제안하는 침팬지’가 있고 ‘받아들이는 침팬지’가 있다. 제안하는 침팬지는 거의 항상 8:2나 9:1의 비율로 매우 이기적인 제안을 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0이 아닌 한 항상 이것을 받아들인다. 외냐하면 비록 공평하지 않더라도, 하나 혹은 두 개의 포도알이나마 먹는 편이 유리하다. 상대방이 포도밭에 뒹굴건 굶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무것도 못 먹는 편보다는 한 알이라도 먹는 편이 낫다. 사실 근대경제학에서 전제하는 '합리적인 인간'은 이러한 침팬지에 가까운 것이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다면 상대비교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는 거의 어느 문화권을 막론하고 대체로 5:5의 비율을 제안하고 수락하였다. 8:2나 7:3과 같이 이기적인 제안은 보통 거부당했다.

 

 

 

 

 

물론 이러한 몇 가지 실험과 관찰만을 갖고 인간의 본성을 쉽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인간은 외부 집단에 대한 공격성을 분명 갖고 있으며, 권력욕과 이기심 등은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특성들은 각 개인마다, 문화권마다 매우 복합적인 양태로 드러나는 것도 사실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어디서부터가 본성이고 어디서부터가 학습과 환경의 영향인지 불분명해진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인간에게는 분명히 협력적이고 이타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본성 또한 확실히 존재한다. 이타성은 이기성 만큼이나 확고한 진화적 기원을 갖고 있다. 인간은 이타적인가, 이기적인가? 둘 모두이다. 확실한 것은 이타적 기질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회/문화적으로 발전하고 강화되고 있다는 생물학계와 인류학계의 설명이다. 인간은 최소 100만년 이상 ‘사회성’을 키워왔다.

 

 

 

 

 

한편으로 협업(協業)의 강화를 위해 등장한 제도와 규범은, 동시에 인간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는 역설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규칙을 잘 따르는 만큼 권력과 시스템에 복종하기도 쉬워지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문제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사회제도의 변화에 대한 깊은 고민을 던져주는 매우 복잡한 과제라고 볼 수 있다.

 

 

 

 

 

허나 분명한 것은 총수의 말처럼 '좌적 기질'과 '우적 기질'의 인간 유형으로 딱 부러지게 나뉘거나 그렇게 유전적으로 개개인이 태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진정성 독점의 끝은 조롱뿐

 

 

 

 

 

총수가 농반 진반처럼 이야기한 '무학의 통찰'을 너무 정색하고 반론하는 것 같지만, 그의-많은 야권지지자들이 공유하는- 정치적 세계관은 놀랍도록 이런 '농담'에 가까운 인간관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심각한 반론이 불가피했다.

 

 

 

 

 

우적(동물적) 인간과 좌적(이성적) 인간의 구분은 비록 노골적이지는 않았만 '선악의 인간관'으로 미끄러지기 쉽다. 이는 곧바로 정치적 사태를 선악의 이분법적 시각으로 재단하도록 이끈다. 때문에 제도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기 보다는 도덕성 문제에 더욱 민감해진다. 가치에 대한 판단이 '진정성'에 대한 판단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예컨대, 이승만의 ‘토지개혁'은 북한을 의식해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개혁에 불과하고, 박정희의 '산업화'와 '근대화'는 "정통성 없는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한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반면에 김대중의 직선제 투쟁은 '민주주의를 위한 헌신'이고 노무현의 자유화는 '국민의 권리를 위한 헌신'이 된다.

 

 

 

 

 

더구나 야권 진영은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 따라서 권위주의적인 구(舊정)권과 그 세력에 대한 도덕적 우월감이 아예 정치적 기반으로 자리 잡았다.

 

 

 

 

 

아마도, 보통의 어른들이라면 선악의 세계가 분명한 동화책을 읽으면 유치해서 감흥을 받지 못할 것이다. 또한 비슷한 구조로 만들어진 '막장 드라마'를 보면 그 수준을 욕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야권지지자들은 정작 현실의 정치에 대해서는 동화책과 막장드라마의 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이 아이러니의 비밀을 바로 이런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정치적 관점이 이렇다보니, 사회공동체 유지와 직결되는 분배문제 등 사회경제적 테마를 고민하기 보다는, 상대진영이 진정성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도덕적 하자와 부패 문제 등을 공격하는데 모든 정치적 역량과 관심을 동원하게 된다. 가십거리가 되는 문제든, 제도적 차원의 문제든 상관없이 이슈가 되어 정치적 타격을 입히면 그만이다.

 

 

 

 

 

'진정성'을 기준으로 한 선악적 세계관에 갇혀 지내다보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총수는 '어버이연합'으로부터 고소를 당하게 된 것이다.

 

 

 

 

 

 

 

 

 

 

총수가 '어버이연합' 노인들이 모종의 단체로부터 용돈을 받아가면서 시위를 했다고 발언한 것이 고소 사유이다. 사실 그의 인간관에 기초하여 보면, 그런 발언을 할만하다.

 

 

 

 

 

그들은 전형적인 '우적 기질'을 갖고 있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현실적 이익과 무관하게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사회운동을 할 만한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총수가 그 발언을 하기 얼마 전에 한겨레 기자가 그 단체와 노인들의 통장까지 뒤져가며 취재해 보니 그 노인들이 돈을 받기는커녕 회비를 내가면서 운동을 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겨레 허재현 기자 취재 후기 참조 링크)

 

 

 

 

 

진보 언론의 기자답게(?) 그 역시 김어준과 비슷한 의심을 품고 처음에 취재했다. 스스로 실례라고 생각될 만큼 꼼꼼히 그들을 의심했다. 그러나 그가 현장에서 확인한 것은 그들 노인들의 '진정성' 뿐이었다.

 

 

 

 

 

월간조선에서 취재한 기사는 더욱 극적이다. '아스팔트위의 보수'라는 제하의 기사 내용은 열성 우파 단체 구성원들이 이명박 정권에 대해 극도로 분노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 중에는 개인 병원을 말아먹으면서까지 운동단체를 이끄는 내과의사 출신도 있었다.

 

 

 

 

 

'일베저장소'(일베)라는 사이트는 '오늘의유머'(오유)와 쌍벽을 이루는 사이트인데, 두 사이트의 정치적 성격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일베'는 반노무현-반DJ 정서가 가득차 있는 '우파' 사이트이고 '오유'는 그 반대로 친 노무현 야권사이트이다. 서로가 '일베충'과 '씹선비'로 일컬어지는 적대적인 관계인데, '일베'는 디시 정사갤과 함께 김용민의 막말동영상을 찾아서 이번 총선에서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개의 사이트는 '수꼴'과 '좌좀' 세력 의식의 전형적 원형질이 날 것으로 드러나 있어서 비교해보면 무척 흥미롭다. 디시에서 파생되었다는 '일베'는 친노와 야권을 조롱하고 비난할 뿐 아니라 노무현과 김대중을 거칠게 욕하고 심지어 한국 여자 일반에게까지 막장스러운 언어를 구사한다. 한마디로 인터넷 쓰레기로 불릴 만할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서조차 '진정성'이 깃들여진 '수구꼴통'의 모습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제목 : 수구꼴통인 내가봐도 요즘 보수진영은 좀암담하다 -링크->

 

 

 

 

 

나꼼수나 딴지에 버금가는 우파사이트를 하나 구축하라는 전두환 추종자(필명:영웅전두환)가 쓴 글이다. 자신이 서버비와 사이트제작 비용 일체를 부담할 테니 같이 행동할 글쟁이를 모집한다는 내용이다. 자발적인 동참을 약속한 이들도 몇 명 눈에 띈다.

 

 

 

 

 

요컨대 '진정성' 문제만을 두고 본다면 야권 성향이나 여권 성향의 '풀뿌리' 단체들은 별 차이가 없다. 그런 점에서 '민주정부'시기 지원을 받았던 '시민단체'들 역시 예전 관변 단체와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지난 반독재투쟁 시기, 운동권들이 오로지 사회민주화에 대한 신념 하나로 시위에 뛰어들고 '현장'에 투신하였던 경험이 있다. 또 그 때문에 대중적 존경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의 경험을 절대화하면서 그와 같은 '진정성'은 오로지 자신들만이 있을 뿐이고, 기성세대나 구여권세력들은 오로지 자기의 이익만을 좇는 부패한 자들로 구성된 것마냥 독단적 규정을 하게 되고 말았다.

 

 

 

 

 

때문에 자신들이 부정부패를 하더라도 언제나 상대에 비해선 '새발의 피'에 불과한 것이 되거나, '진정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진해서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악의 무리인 '수구세력'들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존재들로 스스로를 포장한다.

 

 

 

 

 

곽노현 사건의 본질은 사퇴의 대가성 여부였는데, 1심 판사는 김명기의 자살을 예방하려고 했다는 곽노현의 '선의'를 최대한 생각해줬다. 그런데 만일 곽노현 교수가 당선되지 않았더라도, 그런 선의로서 2억 원을 주었겠냐는 질문에 곽노현 교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 뿐 아니라 진보통합당 이정희나 이석기 등의 사례는 진보가 갖고 있는 도덕적, 정신적 분열증(이런 증상이 의학적으로 있다면)의 끝을 보여주었다.

 

 

 

 

 

또 한 가지를 예로 들자면, 진보적이고 개혁적으로 평가받는 인사가 조선일보에 칼럼을 쓰거나 인터뷰를 할 경우 그는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일단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조선일보의 '수구 논객'으로 평가받는 류근일이 '진보적인' 경향신문의 칼럼란을 맡아서 쓰기로 했을 때 논란이 빚어졌다. 보수'가 아니라 '진보'쪽에서 말이 나왔다.

 

 

 

 

 

그런 '수구 보수적인' 인물에게 고정 칼럼란을 제공한다는 것은 경향의 정체성을 의심케 한다는 내용이었다. 전자의 경우 조선일보에 기고하거나 칼럼을 쓰는 것은 비록 논조가 달라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조선일보의 좌우 균형이라는 화장술에 활용당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논리인데, 만일 그와 같은 논리가 맞다면 후자의 류근일 역시 경향의 '화장술'에 활용되는 걸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처럼 '진보 개혁' 진영의 편협성과 도덕적 오만함은 상식의 선을 이미 넘어섰다. 이런 분열증적인 증상은 비단 개인의 도덕적 스캔들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한미FTA를 추진하고 타결한 노무현 정권과 이를 통과시킨 이명박 정권에 차별적으로 대응하는 모습도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국민참여당 최고위원을 지내고 전 청와대 비서실 대변인이었던 천호선이 '짝퉁 한미 FTA' 운운하며 1인 시위에 나선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 사태였는지, 아마 천호선 본인은 지금도 모를 것이다.

 

 

 

 

 

바로 이런 '자가당착'과 도덕적 오만에 대중의 당혹스러움이 있는 것이며, '일베충'과 '정사충'들의 조롱과 비난이 야기되는 것이다.

 

 

 

 

 

'일베'에 들어가면 간첩들이 광주사태를 일으켰다고 하고, 김대중이 북한을 지원해서 나라가 망했다고 하며, 전라도를 비하하는 등 병신 같은 드립들이 거칠게 난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젊거나 어린 그들이 야권(지자들)의 자가당착적인 모습을 지적하는 것은 때로는 날카롭다. 이명박의 '병신짓'에 나꼼수가 날카로운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내용을 발견했는데, "'일베충'들은 자기가 병신 짓을 하는걸 아는 병신인데, '오유충'들은 자기가 병신인줄 모르는 병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최대한 선의로 해석한다면 이것이다. 즉,

 

 

 

 

 

"일베의 유저들은 다소 위악적으로 오유 '씹선비'들이 싫어하는 말만 골라서 하려고 병신 같은 드립을 마구 거칠게 구사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현실적으로 옳은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오유의 유저들은 자기들이 항상 옳고 정의롭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야권 지지자들은 바로 이런 지적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진정성' 정치의 문제

 

 

 

 

 

앞서 말한 대로 정치를 도덕적 프레임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상대방의 '악행'만을 수집하고 쫓아다니면, 상대는 거대한 절대악으로 형상화된다. 그런 인식이 갖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는 절대악이 지배하는 세계를 거부하는 행위를 최우선 과제로 상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옥만 아니면 된다'는 방어적인 희망 속에서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라는 구체 현실적인 고민은 부차적이 과제로 밀려난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정치가 발전하지 못하고 답보만 계속한 근본 원인은, 야권 지지자들이 이런 타성적 인식하에 '한나라당'(새누리당)이라는 '절대악'을 상정하고 그들을 이겨야 한다는 절대적 명제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현실세계에 그런 정치적 절대악의 존재는 없다. 내가 이기적인만큼 상대도 이기적이며, 내가 진정성 있는 만큼 상대방 역시 진정성 있는 존재다.

 

 

 

 

 

김대중이 민주주의에 대해 진정성이 있던 만큼이나, 근대화에 대한 박정희의 열정 역시 누구 못지않았다. 김대중이 직선제를 통해 권력욕을 채우려 했던 만큼이나 박정희 역시 산업화를 통해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려고 했던 것이다.

 

 

 

 

 

현재 집권세력의 족보와 계보가 한결같지 보수-수꼴인 것도 아니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엄연히 다른 정치세력이었고, 이후에도 서술하겠지만 전-노 세력과 김영삼의 신한국당 역시 전혀 별개의 세력이었다. 친노동 대신 재벌과 친기업 정책 중심으로 돌아선 것은 한나라당 뿐만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어떤 면에선 그 이전 정권에 비해 훨씬 더 친재벌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여-야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처럼 규정되는 것이 현실이다. 각각의 열성 지지세력들 간 대립은 내용 없이 과열되어 있다. 오로지 자기 진영의 유불리만이 진실을 가르는 기준이 될 뿐이다. 누가 더 비도덕적이고(양심적이고) 탐욕스럽고(진정성 있고) 권력욕에 불타오르는(청렴한) 존재인지를 폭로하거나 자랑하기에 바쁘다.

 

 

 

 

 

그러나 최장집이 지적한대로 이익, 당파성, 권력추구 등의 욕구 모두 정치의 세계를 구성하는 중심 질료이다. 이런 요소들을 존재해서는 안 되는 부도덕한 것으로 규정하는 한, 민주주의는 현실에 기반을 둘 수 없는 공허한 것이 되고 결과적으로 인간적인 토대를 가질 수 없게 된다.

 

 

 

 

 

정치에 대한 도덕주의적 접근은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도덕주의는 그 자체로 긍정적이나, 현실에서는 의도한 것과는 달리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문제의 책임을 개개인의 도덕성으로 환원함으로써 위선적인 인간이 되게 한다. 또한 현실의 다층적 요소와 정치세력들 간의 갈등 속에 제도적 개혁을 모색할 가능성을 줄이게 된다.

 

 

 

 

 

 

 

<루시가 말한 내용은 마치 '노빠'들의 혼란스러운 정신상태를 보여주는 우화를 연상시킨다. "진정성과 선의로 가득찬 노짱이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고,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얘기가 맞는 말인지 의심스럽지 않니?" /만화 출처 : 부자나라는 어떻게 부자가 되었고 가난한 나라는 왜 여전히 가난한가(부키)>

 

 

 

 

 

자비로운 해석의 원리

 

 

 

 

 

논리학의 규칙은 아니지만, 논증하기 전에 지켜야 할 전제로서 '자비로운 해석의 원리'라는 것이 있다. 논증의 목적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에 있는 것이라면 상대방의 논증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가정해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상대방의 주장을 가급적 선의로 해석해서, 상대방을 합리적인 사람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허수아비 공격'의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이하 [논리는 나의힘] 최훈. 인용)

 

 

 

 

 

예를 들어 홍길동이 이런 발언을 했다고 하자.

 

 

 

 

 

"심청이는 스튜어디스래. 틀림없이 예쁠 거야."

 

 

 

 

 

이 얘기를 들은 콩쥐가 홍길동의 논증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했다고 해보자.

 

 

 

 

 

"심청이는 스튜어디스다. 스튜어디스는 모두 예쁘다. 고로 심청이는 예쁘다."

 

 

 

 

 

논증을 이렇게 해석하면 반박하기 어렵지 않다. 예쁘지 않은 스튜디어스 한 두 명만 골라내면 되니까. 그러나 홍길동의 논증을 선의로 해석해서 다음과 같이 구성하면 어떨까?

 

 

 

 

 

"심청이는 스튜어디스다. 스튜어디스는 대체로 예쁘다. 고로 심청이는 예쁠 가능성이 높다."

 

 

 

 

 

이러면 콩쥐가 예쁘지 않은 스튜어디스 몇 명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논증이 잘못된 거라 볼 수 없다. 즉, 홍길동이 심청이가 예쁠 확률이 그만큼 크다고 말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해석 중, 비난을 위해서라면 전자의 해석을 선택해 손쉽게 공격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힘없는 어린아이의 손목을 비트는 일과 다르지 않다. 어린아이와 팔씨름해서 이겼다고 기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것을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라고 부르는데, 반성 없이 편안하게 독단에 빠진다는 점에서 논리적인 사고라고 볼 수 없다.

 

 

 

 

 

17세기 양명학자 정제두는 이를 두고 말한 바 있다.

 

 

 

 

 

"남의 학설을 변론함에 있어 먼저 그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 그 근본 자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어구에 얽매이거나 문자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이론 자체가 드러나지 않고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 문제로 돌아와 보자.

 

 

 

 

 

지금 진영논리에 빠져 있는 자들은 모두 이러한 '자비로운 해석의 원리'는커녕 '악의적인 해석의 원리'로 상대방의 발언을 최대한 나쁘게 해석하고 그 진심을 오도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지지자들은 그런 정치공방에 함께 뛰어들어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데 모든 정력을 쏟아 붓는다.

 

 

 

 

 

정신 나간 자들이 아니고서야, 나라를 망치려고 작정한 정치인은 없다. 모두 각자 권력욕과 사욕이 마음 한 켠에 깃들어 있을지라도, 다른 한편에선 각자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최대한 선의로서 정책을 입안하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이 남다른 명예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비난 대신 인정받고 칭찬을 듣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전제인 '선의'마저 의심한다면 생산적인 논의는 단 한 발자욱도 진전될 수가 없다.

 

 

 

 

 

 

 

 

 

 

총수는 [닥치고 정치]에서 역시 '무학의 통찰'로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마음은 한정된 자원"이라는 말이다. 듣고 보니 고개가 절로 끄덕일만한 내용이다. 비록 그의 입장에선 "(민주진영과 진보진영이라는)비슷한 곳에 여러 번 나눠줄 만큼의 여력이 없다"는 취지에서 나온 발언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이 통찰이 적절하게 인용될 곳은 따로 있다. 야권진영은 '한정된 자원인 마음'을 '허수아비 공격'을 하는데 남용하였고, 자신들만 갖고 있다고 믿는 '진정성'을 옹호하는데 탕진했다. 그 결과 우리의 현실은 남루해지고 마음은 공포와 증오로 가득 차 있게 되었다.

 

 

 

 

 

민주당이 집권한다고 해서 천국이 되지 않는 것처럼, 새누리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지옥이 되지는 않는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완벽한 세상'에 대한 인류의 공상과 실험은 현실적 파산 선고를 맞았다. 그러나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하다는 희망과 믿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정된 자원인 마음'은 이를 위하여 소중히 사용되어야 하며, 서로의 선의를 믿고 진지하게 토론해야 한다.

 

 

 

 

 


 

 

 

 

 

<제언 2: 현재의 여-야는 모두 87년 체제의 형제들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진영논리가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은 현재의 여-야가 지금의 상태로 구별될 필요가 없다는 걸 의미한다. 그 근거가 되는 이유는, 현재의 여-야 정당은 그 정책뿐 아니라 역사적 성격에서도 본질적으로 구별될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의 새누리당의 전신은 한나라당이고, 한나라당의 전신은 신한국당이며, 신한국당의 전신은 90년 3당 합당의 민자당, 즉 민주자유당이다. 그런데 그 민자당의 전신은? 전두환의 민정당인가, 김영삼의 민주당인가? 여기서부터 헷갈리기 시작한다.

 

 

 

 

 

새누리당의 뿌리를 군부독재에 바탕에 둔, 민정당과 박정희 세력으로까지 자동으로 링크시키고자하는 야권세력들의 발상은 그야말로 ‘반공-빨갱이’식의 전형적인 이분법적 두뇌 회로 구조와 닮아 있다. 물론 ‘독재-민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복잡한 현실을 살아가는 한 방편은 될 수 있겠지만, 편한 생각이 옳은 생각은 아니다.

 

 

 

 

 

3당 합당의 결과로 탄생한 민자당으로 집권한 김영삼은 구민정계와 6공화국 세력들을 집권 초기부터 제거해나갔다. 정치개혁을 표방하며 공직자 재산공개라는 제도를 만들었던 김영삼은 그걸 계기로 민정당 대표를 지냈던 박준규를 부정축재자로 몰아냈다. 그는 ‘토사구팽’이라는 단말마를 남기고 정치권에서 사라져야만 했다. 6공 황태자 박철언은 구속되었다.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12.12 사태에 대해 명확히 쿠데타로 규정지었고, 이에 대한 고발이 들어왔을 때 검찰은 눈치를 살피다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기자회견 열었다. 그러나 다음날 김영삼이 재수사하라는 말에 검찰은 스스로 한 말을 개소리로 만드는 수모를 감수하고 수사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민자당은 전두환, 노태우를 처벌하는 법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5.18 특별법까지 제정했다. 현행법상 공소 시효가 지났지만, 공소 시효 자체를 무효화하는 법률이었던 것이었다. 사실 명백한 소급입법이어서 법리상 헌법에 바로 위반되는 법이긴 했다. 전-노 세력이 헌법소원까지 했지만 헌재도 눈치를 보다가 4:5로 기각시켜 버렸다.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엄청난 부정축재 실상이 낱낱이 드러났고, 12.12와 5.18로 그들은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장세동과 ‘3허씨’를 비롯한 신군부 세력 모두 다 감옥에 들어갔다. 군 내부의 최대 사조직 하나회는 해체되고 장성급 멤버들은 모두다 옷을 벗었는데, 자다 깨면 별이 수십개 날아갔다고 회자될 정도였다.

 

 

 

 

 

김영삼이 83년도에 목숨을 건 23일 단식을 시작한 것이 광주 3주년을 맞이한 날이었으며, 단식투쟁의 첫 번째 요구 조건은 광주 진상규명이었다. 당시 광주 문제는 철저히 금기시되었음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투쟁이기도 했다. 그는 광주에 대한 명예회복 문제를 김대중 못지않게 중시했다. 김영삼 정부는 5.18을 과거 ‘광주사태’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였다.

 

 

 

 

 

한편, 김영삼의 과거사 청산 의지가 얼마나 굳건했던지 ‘역사 바로 세우기’를 명분으로 수백억예산을 들여, 나름 역사적 현장이었던 광화문 옛 중앙정부청사, 즉 구 일본총독부 건물마저 부셔버렸다. 그리고 5.16 역시 정부차원에서 처음으로 쿠데타로 규정하고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비난하면서, 박정희 기념관 추진 요청을 완전히 묵살해버렸다. 박정희에 대한 김영삼의 증오는 지금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부관참시 제도가 있었다면 마다하지 않았을 거 같다.

 

 

 

 

 

광주 진상 규명과 전노 처벌 등은 직선제 개헌과 더불어, 80년대 민주화 운동 진영의 최대치의 요구였었는데 불과 10년도 안되어 모두 이루어졌다.

 

 

 

 

 

김영삼은 야권 진영의 갖은 비난을 무릅쓰면서 3당 합당을 결행했는데, 당시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진짜로 그는 합당했던 그 세력의 주역들 모두를 보내버리며, 호랑이를 잡아버렸다. 신한국당 내에서 5공은 물론 6공 세력의 주역은 완전히 소멸되고 유신 본당을 자처한 김종필은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로선 구차한 변명으로 치부하고 냉소했던 말을 김영삼은 집권하고 모두 실현시킨 셈이다.

 

 

 

 

 

그러나 김대중이 당선된 직후, 그가 김영삼과 회동을 통하여 가장 먼저 취한 조치가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이었다. 그리고 그는 박정희에 대해서 “역사에서 존경받을만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며 ‘역사적 재평가를 위해서’ 박정희 기념관을 건립하는데 국고 200억 원을 지원하였다.

 

 

 

 

 

김영삼이 3당 합당을 집권의 발판으로 삼았다면, 김대중은 민자당에서 축출된 박철언을 필두로 한 TK 6공 세력, 유신본당을 자처한 김종필과의 DJP 연합을 바탕으로 집권을 하였다. 그런데 김영삼은 집권을 하면서 구세력의 핵심들을 거의 다 제거한 반면, 김대중은 공동정부를 구성하여 집권 말기까지 그들과 함께 했다. 내각제라는 개헌 문제를 제외하면 김대중은 자민련 몫으로 경제부처 장관, 실세 총리 등의 요구 조건을 모두 들어줬다. 심지어는 자민련이 16대 총선에서 17석밖에 얻지 못하자, 세 명의 국회의원까지 빌려주는 상상 초월의 꼼수를 동원해 그들이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게끔 만들어줬을 정도다.

 

 

 

 

 

이른바 민주화 세력이 증오하는, 보수 원류로 불리는 TK 세력과의 연합 역시 가볍게 볼만한 무게는 아니었다. 당시 박철언은 박근혜와 더불어 TK의 맹주로서, 대구경북에서 둘의 지지율 차이는 불과 1~2% 밖에 나지 않았다. 과거 3당 합당을 기획했던 박철언이 소극적이었던 김종필을 적극 설득하여 DJP연합을 또다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3당 합당을 야합이라고 비난하던 이른바 민주화 세력들이라면 이 DJP 역시 야합으로 격렬히 비난해야 마땅하지만, 호남 고립정책을 벗어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받아들인다. 전형적인 ‘나는 로맨스 너는 불륜’ 식의 치졸한 자가당착적인 발상이다.

 

 

 

 

 

더욱이, ‘민주화’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김영삼 정권은 운동권들조차도 깜짝 놀랄 정도로 과거 군부와 이른바 수구세력을 제거하고 과거청산을 확실하게 했지만, 오히려 그 세력들을 사면, 복권시키고 그들과 공동정부를 끝까지 유지한 것은 김대중 정권이었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노무현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노빠들의 심장을 일렁이게 만든 사진 ? 3당 합당에 격렬히 반대하며 주먹을 불끈 올렸던 그 사진-을 보면서 노무현의 진정성을 옹호했던 노빠를 비롯한 486세대들은 노무현의 대연정 제안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3당 합당을 비난할 때만큼의 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본다면 기상천외할만 한 것이었다. “권력을 통째로 내놓으라면 검토하겠다”라며 “실제로는 여, 야의 정책 차이는 별로 없다”고까지 말했다.

 

 

 

 

 

나는 김대중, 노무현정부가 민주화를 배반했다는 취지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 이 자리에서 DJP 연합과 대연정 제안을 판단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3당 합당을 절대악으로 치부하고 현 집권세력을 마치 독재 세력의 연장선으로 보려고 하는 야권 지지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일면적이고 허황된 관념의 산물인가를 지적하고자 할 뿐인 것이다.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3당 합당 자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흔히들 3당 합당을 ‘야합’으로 규정하고 호남고립정책을 심화시켰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5공 청문회와 중간평가 문제 등으로 시달리던 노태우 정부는 여소야대 국면을 어떻게든 타개해야만 하는 입장에 처해있었다. 그 때 박철언이 정계개편을 기획했는데, 처음에는 야당 모두를 대상으로 보수정당 모두를 합치자는 원대한 발상이었다. 그래서 김대중에게도 합당을 제안하였지만 김대중은 거부했다. 사실, 김대중은 대선에서 3등을 했지만 총선에서 제2당으로 올라섰고, 이는 여소야대 국면에서 3당으로 전락한 김영삼보다 주도권을 행사하는데 있어 유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인위적인 정계 개편을 그닥 반겨할 이유도 없었다. 어쨌든 박철언이 3당 합당 전날까지도 김대중에게 합당에 동참할 것을 권유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박철언이 추진했던 보수정당 합당의 정계개편은 ‘보수-혁신’ 구도로의 개편의 목적이 더 컸다. 박철언은 내각제 속에서 일본 민자당의 모델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보혁구도에 대한 생각은 당시 북방정책과 대북정책으로 통일한국의 꿈을 나름대로 갖고 있었던 박철언의 소신이기도 했다.

 

 

 

 

 

나는 차라리 그때 김대중도 동참해서 4당 합당을 하고 당시 민중당과 노동운동 및 재야 세력들이 진보정당을 창당하여, 보수-혁신으로 정치구도가 형성되었다면 지금보다 정치발전이 더 이루어졌을 거라는 생각도 해본다. 즉 노무현이 그토록 타개하고자 했던, 지역주의에 함몰된 정치구도를 넘어설 가능성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3당 합당을 마치 있을 수 없는 정치적 폭거처럼 평가하고 호남을 고립시키려 했다는 것은 정당한 관점이라고 볼 수 없다.

 

 

 

 

 

이미 노태우 정권에부터도 야당이 선명성 경쟁을 전개했다고는 하지만, 사회-경제적인 분야부터 대북정책에 이르기까지 집권당과 야당 사이에는 의미 있는 차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철언이 보수대통합을 주장했던 것이다.

 

 

 

 

 

당시 여-야가 각을 세웠던 현안들은 주로 정치적인 사안들, 예컨대 ‘5공 청산 문제’, ‘중간평가 문제’ 등이었고 국민들의 생활과 직접 관계된 경제 정책 분야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어쨌든 87년 대선에서 1등을 한 노태우, 2등을 한 김영삼, 3등을 한 김대중과 광주 청문회에서 전두환에게 재떨이를 집어던진 노무현은 모두 순서대로 대통령이 되어 집권을 했고, 신군부 세력은 이미 93년 김영삼 때부터 자취를 완전히 감추었다. 따라서 현재의 보수 정당 모두가 87년 체제에 바탕을 둔 ‘민주 정당’이지, 김대중-노무현 세력만이 ‘민주 정당’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래의 역사학자들은 87년의 민주화 과제를 철저히 이행한 것은 신한국당이었다고 평가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를 지배한 ‘민주-반민주’의 이분법적 관념이 지금까지도 정치판과 ‘민주세력’ 지지자들 사이에서 횡행하고 있는 모습은, 그것 외에는 도저히 ‘반민주세력’과 차별화가 되지 않는 현 야당의 무능과 정체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97년 당시 국민회의 정책위의장이었던 이해찬은 DJP연합을 위해서 자민련과 정책 공조를 해야 했었는데 우려와는 달리 일부 안보적 사안에 대해서만 이견이 좀 있을 뿐 다른 분야에서 의견 차이가 거의 없었다고 실토했다. 자민련이 어디인가? 당시 3당 체제에서 최고의 원조보수를 자처한 곳이 아니었나?

 

 

 

 

 

더욱이 김대중 정부 시절 이해찬은 교육부 장관에 임명되었는데 교육 행정에 문외한이었던 그는 김영삼 정부 때 청와대 수석 박세일이 만든 <5.31 교육종합대책>에서 제시된 모든 정책을 몇날 며칠을 암기하다시피 하며 신봉했고, 그 내용의 충실한 집행자가 되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 96년 노동법 새벽 날치기 파동이 일어나고 당시 야당이었던 국민회의는 격렬히 저항했다. 정리해고를 핵심으로 하는 그 노동법도 사실은 국민회의의 법안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차이가 있었다면 국민회의는 3년간 유보한다는 조항 정도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국민회의가 집권했을 때, 그 노동법은 IMF와의 약속을 이유로 1년 만에 통과되어 현대자동차 노동자 1만 5천명이 잘렸다. 대부분의 기업들 사이에 정리해고가 삽시간에 번져 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은 엄청나게 흔들렸고, 그것은 앞에서 말한 바대로 양극화와 자영업 범람으로 이어졌다.

 

 

 

 

 

김영삼 정부가 OECD에 가입하면서 선진화를 명분으로 공기업 민영화, 금융 자율화, 시장 자율 등을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도입하며 외환 거래에 대한 규제 장치 전부를 해체시켜 IMF 사태를 불러왔다면, 김대중 정부는 IMF 교리에 맞게 신자유주의를 전면적으로 확산시켰다. 노무현 정부는 이를, 금융 허브 등을 운운하며 금융자본주의로 완성시키려했다. 김대중이 김영삼 정부를 비판하면서 그것을 충실히 계승했듯,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을 격렬히 비난하면서도 그 노선을 이어나갔다. 역으로 현재 이명박 정권에 대한 야권의 공세가 말 바꾸기 비난의 역풍으로 이어진 것은 상술한 과정의 당연한 귀결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상 그 치열한 권력투쟁과 우여곡절의 정치사연과 권력 교체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이후, 우리 정치권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변한 것 없이 회전문 인사에 불과했다는 냉소적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열한 권력의 쟁투양상은 그들만의 궁정전투에 불과할 뿐, 굳이 여권과 야권 누군가를 선을 긋고 또렷이 선택해야 될 이유는 없어진다. 이번 총선은 그런 사실을 너무나도 극명하게 드러냈다.

 

 

 

 

 

‘왜 여권에 표를 몰아줬냐’는 질문은 곧바로, 그러면 ‘왜 너희들에게 국민들이 표를 줘야 하는데?’라는 분노를 품은 반문에 직면케 된다.

 

 

 

 

 


 

 

 

 

 

<제언3. 조중동 프레임은 잊어라>

 

 

 

 

야권 지지자들이 통념적으로 갖고 있는 개념 중 하나가 이른바 ‘조중동 프레임’이다. 조중동, 특히 조선일보는 보수 우파들의 만병통치약처럼 활용되는 색깔론으로 ‘민주진보세력’을 공격함으로써 야권 지지자들의 공분을 자아내며 보수 우파들을 결집시켰다. 김대중, 노무현의 지지도가 급격히 떨어지는데 크게 일조한 것이 조중동의 왜곡보도 탓이라는 생각이 그 바탕에 짙게 깔려있다.

 

 

 

 

 

특히 민주당 경선 시절부터 조선일보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던 노무현은 김대중 정권 때보다도 더욱 전투적으로 언론과의 불화를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김대중, 노무현 집권 기간 내내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 언론들의 공격이 집요했던 것은 사실이다. 정당한 비판도 없지 않았겠으나, 기본적인 스탠스는 침소봉대, 아전인수, 찔러보기, 왜곡보도 등으로 점철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김대중, 노무현을 지지하는 ‘민주 개혁’ 세력은 조중동을 ‘사회적 흉기’로까지 일컫고 그 해악성을 열정적으로 폭로했다.

 

 

 

 

 

그러다보니 이 구도는 진영논리로까지 자가발전하여, 조중동의 주장과 비판은 모두 왜곡 보도로 일축되거나 ‘민주개혁 세력’의 모순과 문제점을 지적하면 모두 그들로부터 세뇌당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조차 생겼다.

 

 

 

 

 

사회적 여론을 ‘조중동(우익-냉전수구 독재) VS 민주개혁세력’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바라보고 현실을 판단한 ‘민주개혁세력’은 자기 성찰의 기회를 스스로 봉쇄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사고방식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이 조중동탓’이라는 몰상식적인 사고방식으로 연결된다. ‘모든 것이 노무현탓’이라는 우스개 같은 사고방식과 정확히 대칭된다.

 

 

 

 

 

지금의 열성 야권지지 세력들은 조중동의 주장과 그 영향력에 대하여 거의 조울증 수준으로 과잉 반응하거나 과장하면서 자가당착적인 프레임에 스스로가 속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하는 듯하다.

 

 

 

 

 

애초부터 조중동 프레임에 놀아난 민심은 없었다.

 

 

 

 

 

생각해보자.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은 1989년 창간 이래 매년 전문가 설문조사를 통해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라는 특집기사를 싣는다. 한 해도 빼놓지 않는 이 조사는 잡지의 대표 상품이 되었을 뿐 아니라 관심과 신뢰도 매우 높다.

 

 

 

 

 

 

 

<2012년도 시사저널 언론인 순위>

 

 

 

 

 

언론 분야에서 매년 매체별 순위가 매겨진다. 조선일보는 2000년도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 분야에서 1위를 10년 넘게 차지했었다. 그러다가 그 자리는 2001년도부터 KBS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분야에서도 조선일보 주필 김대중이 거의 매년 1위를 차지했다가 2005년도부터 손석희에게 밀리고 점차 순위도 매년 내려갔었다.

 

 

 

 

 

매체 선호도에서도 조중동은 2000년대에 들어 1위를 한 적이 거의 없다. 그리고 종이 매체의 퇴조는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던 10여 년 전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종이 매체 구독자 수는 매년 꾸준히 감소하고 있고, 과거에 비해 종이 신문 구독자는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조중동의 필사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2002년도 노무현이 당선되었을 때, 노사모를 비롯한 그의 지지자들은 조중동 시대는 종지부를 찍었다며 환호성을 내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한 때 인터넷 정치혁명으로까지 불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집권 후 채 6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정권에 대한 지지도가 급전직하로 떨어지고, 각종 보궐선거 및 지방 선거에서 판판히 깨지자 노무현 정권과 그 지지 세력들은 다시 조중동의 영향력과 해악성을 과장되게 생각하며 그들과의 전면전을 일삼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최문순의 MBC, 정연주의 KBS가 매체별 영향력에서 상대적 우위에 놓여 있었던 노무현 정권 시절에 노무현의 지지도 추락을 조중동 탓으로 돌리는 것은 그야말로 자가당착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MBC-KBS가 이른바 ‘공정 보도’할 시기였던 그 때 이명박의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진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언론이 민심의 향배를 가르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졌다면, 조중동의 영향력이 아직 막강했던 시기에 김대중과 노무현이 당선되고, 조중동이 방송과 인터넷 등의 매체에 밀리기 시작하던 퇴조기 때 노무현 정권의 지지도가 하락한 일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더욱이 노무현 시절 파병반대 여론이 70%가 넘었다. 이는 조중동의 논조와 정반대의 여론이었다. 또한 이명박이 방송매체마저 장악했다고 평가받던 시기에 반MB 정서가 엄청나게 확산되고 촛불시위가 그렇게 폭발적으로 전개되는 것 또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듯 야권 열성 지지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 환경 속에 놓이면 조중동 매체의 영향력을 비웃다가도, 반대 입장에 놓이면 거꾸로 ‘적’들을 과대평가하는 좌충우돌의 사고방식에 찌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모순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황당한 사고 구조는 비단 야권 지지자들에게만 있지 않다. 그 반대 진영 역시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탄핵 역풍이 불었을 때 한나라당이 방송의 편파보도를 성토하고, 이명박이 무리수를 감수하면서도 억지로 방송을 장악하려는 시도 역시 마찬가지로 언론 매체의 영향력을 절대시하는 습성에서 비롯된다.

 

 

 

 

 

이런 사고 경향은 사회심리학적으로 연구된 바 있다. 이름하여 ‘제3자 효과이론’이다.

 

 

 

 

 

 

 

 

 

 

2차 세계대전 시기 미군과 일본군이 진주만 전쟁을 치룰 때의 일이다. 일본군이 미군의 항공모함에 삐라를 뿌렸다. 삐라 내용은 흑인들은 백인의 꼭두각시가 되어 총알받이가 되지 말고 같은 유색인종끼리 힘을 합치자는 내용이었다. 대체로 장교는 백인들이었고, 흑인들은 일반 사병이 많았는데 이 삐라 내용을 본 백인 장교는 흑인들이 동요할 것이 우려되어 부대를 철수시켰다는 일화가 있다.

 

 

 

 

 

사실 흑인들은 그것을 보고 별 영향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인 장교들은 지레 걱정을 한 것이다.

 

 

 

 

 

그 후 사회학자 데이빈슨은 이 황당한 사례를 듣고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이같은 사례가 사회 심리학적으로 일반화될 수 있음을 밝혀냈다. 즉, 사람들은 자신보다 남들이 언론매체에 영향을 더 받는다고 차별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TV에 선정적인 내용이 나오면, 자신은 별 영향을 안 받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쁜 영향을 많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언론의 검열, 규제에 찬성하는 심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사고 경향은 부정적인 내용일수록 더 강화된다. 특히 본인과 관계된 사안이라면 더욱 그런 심리가 증폭된다. 연예인들이 자신의 기사에 달린 악성 댓글에 크게 상처받고 심지어는 자살 충동까지 생기는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야권 세력들의 뿌리 깊은 사고-즉 자신은 왜곡보도에 영향을 받지 않지만 다른 사람은 크게 영향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습성은 이런 심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각 정치세력과 그 지지자들은 이와 같은 ‘제3자 효과’의 함정에 빠져서 자신의 진정성을 언론이 왜곡시켜 민심이 등을 돌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스스로 ‘오해’를 만든다.

 

 

 

 

 

바로 그런 심리 때문에 정작 민심이 이반되는 중요한 원인을 성찰하는 노력 대신 언론 장악이나 언론매체와의 전쟁을 선택한다. 노무현 정권과 그지지 세력은 이런 수렁에 빠진 전형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 대선 당시,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캐치프레이는 노무현 정권 말년 들어 ‘국민이 개새끼’라는 분노와 좌절로 전환되었다. 다시 말해 어떤 반성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는 ‘확증 편향’의 경향이 있어서 일반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강화하는 매체를 선택한다. 따라서 언론 매체로 인해 독자는 기존의 견해를 바꾸기 보다는, 기존의 견해를 강화시키곤 한다. 그렇게 본다면 언론이 민심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언론의 영향력이란 민심의 틀 안에서 제한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각종 사안에서 언론 보도 등으로 여론의 향방이 왔다 갔다 할 때도 있고, 단기적인 국면에서 그것이 중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매체의 논조는 저변에 깔린 본질적인 민심을 중장기적으로 좌지우지하지 못한다.

 

 

 

 

 

야권 열성 지지자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과연 이명박을 찍은 유권자들이 BBK 주인이 이명박이라는 것을 몰라서 지지한 것일까? 또 도곡동 땅이라든가, 의료보험비 꼼수 등 그의 부도덕함을 몰라서 지지한 것일까? 그렇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독재를 하고, 고문을 하고, 그가 궁정동 안가에서 유희를 즐기고 했던 것을 몰라서 박정희를 좋게 평가하는가? 국민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존경하는 것이다.

 

 

 

 

 

반대로 노무현이 사리사욕이 없고, 진정성이 있다는 것을 국민들이 몰라서 지지를 철회한 것일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심이 요구한 바를 외면했기 때문에 지지가 하락했던 것이다.

 

 

 

 

 

당대에 국민이 가장 기대하는 바를 채워준다는 확신이 있다면 국민은 바로 그 이유로 그를 지지한다.

 

 

 

 

 

 

 

 

 

 

따라서 언론이 이명박의 BBK를 욕하거나 노무현의 진정성을 옹호하거나 하는 일은 실제로 민심의 변화를 이끄는 데 별로 영양가가 없다. 다만, 옳든 그르든 간에 노무현을 욕하고 싶은데 그 이유를 조중동이 만들어준 것이고, 이명박을 욕하고 싶은데 나꼼수가 그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꼬리가 몸통을 흔들 수는 없다. 마치 어떤 한 무리가 모여 미운 친구를 돌아가며 험담할 때, 뒷다마 까는 내용의 진위 여부가 중요치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워하는 이유자체를 정면으로 깊이 있게 성찰해야지, 욕하는 내용에 일일이 응대하면서 그 ‘오해’ 여부를 해명하거나 진위여부를 따지는 것은 사태의 본질에서 벗어난 대응이다.

 

 

 

 

 

그렇다면 야권 열성 지지자들이 깨달아야 할 바는 명확하다. 민심의 변화와 흐름이 언론(나꼼수도 마찬가지)에서 기인한다는 사고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정당과 정치세력은 그 본령, 즉 각 사회 집단들의 실제적인 삶과 생활, 그리고 이해관계 속에서 어떤 세력의 이익과 입장을 충실히 대변했는지에 따라 지지도가 결정된다. 대중들이 한줌 언론 매체에 놀아난다는 사고야말로 얼마나 오만방자한가.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집단 지성’이라는 말이 회자됐었다. 그러나 이 ‘집단 지성’이라는 말의 뜻은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모여 얘기하다 보면 좋은 의견으로 수렴된다는 게 아니다. 신영복 선생이 예를 들어준 일화가 있다.

 

 

 

 

 

황소 몸무게를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각양각색의 대답이 나온다. 1톤이라는 사람부터 100kg라고 대답하는 사람들까지... 각각의 대답이 천양지차이긴 하지만 그 사람들 의견을 대충 모아보면 얼추 황소 무게의 근사치에 접근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치에 있어서도, 개별 사람 하나하나의 의견을 들어보면 얼토당토않은 주장과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얘기들이 많다. 하지만 그 전체가 모아지면 시대적으로 가장 필요하고 절실한 민심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물론 시시때때로 변하는 민심 모두를 절대적인 진리로 추수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다수의 민심에서 표출된 의견은 분명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고, 지식인들의 관념적인 이론과 오만한 논리 속에서 함부로 재단되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의 뒤통수> 5편을 마치며

 

 

 

 

 

총선 직후 '멘붕'이라는 단어가 회자되기 시작했다. 야권 지지자들 전체가 극심한 패닉에 빠졌다.

 

 

 

 

 

당시 각 언론마다 한결 같이 야권이 패배한 이유를 비판했다. 야권은 지난 정권에 대한 반성과 정책적 대안 없이 오로지 과거의 패러다임에 안주했다. 안일하게 반MB 정서에 기대는 것밖에 할 줄 몰랐던 야권은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넉 달이 지난 요즈음, 친 야권 성향의 언론조차 '안철수 기대기', '박근혜 때리기'에만 골몰하는 모습은 과연 이들에게 정권 교체를 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게 한다.

 

 

 

 

 

지난 대선 때 '20대들에게 희망이 없다'던 김용민 식 표현을 빌리자면, 현재의 민주당을 이끌며 문재인을 둘러싸고 있는 '486 친노 정치인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이미 지난 총선 때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라는 화두를 수년전부터 던졌던 이상이 교수나 주대환, 유종일 교수 등의 인물들 대신 '통일의 꽃' 임수경을 위시한 전대협 멤버들을 공천한 것에서부터 희망을 버리긴 했다. 지금까지도 '경제 민주화'라는 화두를 새누리당에 빼앗긴 채 5.16을 물고 늘어지고 있는 그들을 보며 이번 대선 결과에 대해서 그 어떤 기대도 가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다 긴 호흡을 갖고, ‘한정된 자원인 마음’을 사용해 진영논리 해체 이후를 전망해야 한다. 다음 시간에 바로 이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한불로

트위터:@hanbullo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