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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08. 29. 수요일

산하


 


한 사람의 이름이 우리의 귀를 잡아당깁니다. 제발 자기 얘기를 들어달라고요. 자신이 왜 억울한지, 그리고 얼마나 억울한지, 그저 앉아만 있어도 피가 거꾸로 솟고 생각만 해도 간이 타들어가는 사연을 들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강기훈입니다. 이른바 '민자당 해체를 외치며 분신자살하는 친구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참람한 혐의를 감수해야 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자살방조'혐...의였지요.


 



<노태우 정권의 퇴진을 외치며 분신한 고 김기설 민주 국민장>


 


1991년 당시의 이 나라 공안당국이 조금 더 현실 지각력이 있었다면 강기훈은 자살 방조가 아니라 살인 혐의로 구속되었어야 합니다. 자살의 형태로 누군가를 살해하려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유서만큼은 자필로 쓰게 할 겁니다. 칼을 목에 대든 총구를 머리에 밀착하든 그렇게 할 겁니다. 그래야 자신들의 혐의를 벗어날 수 있고, 자신들과의 연관성을 부인할 수 있기 때문이겠죠.


 


유서 쓰기를 거절하는 친구에게 유서를 써서 들이밀어 품에 넣어 주었다면 어떻게 그것이 '자살 방조'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살인입니다. 반대로 과연 유서 쓰기도 거절할 만큼 심약하던 사람이 남이 써 준 유서를 남기고 제 몸에 불을 당기는 일이 가당한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살이 아닙니다.


 


친구의 분신을 돕기 위해 버젓이 자신의 필체로 공개적인 유서를 써 주어 친구의 분신을 방조했다는 이 C급 영화 스토리로도 못 쓸 범죄 사실이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 검사들에 의해 쓰여지고, 증거 하나 없는 사건에서 판사들은 그 증거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정황만으로 유죄를 선고합니다.


 


그 유죄 판결 앞에서 강기훈은 어떤 심경이었을지를 짐작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친구의 슬픈 죽음 앞에서 네가 그 죽음을 사주했고 심지어 네가 그 친구의 유서까지 쓴 것이 분명하다는 윽박지름과 마주해야 했던, 그 죄값(?)으로 3년의 옥살이까지 치러야 했던 한 청년의 마음을 무슨 수로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강기훈>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시되어야 할 것은 강기훈의 이념적 성향도 아니고, 분신자살한 김기설의 유서 내용도 아니며, 인간의 존엄함의 구현을 목적으로 하는 공화국의 시민의 하나인 강기훈이 그가 응당 향유하여야 할 권리는 무참하게 짓밟혔다는 것입니다. 공안당국과 법원은 터무니없는 증거로 한 사람의 청춘을 구속했고 판결로써 그 미래를 망가뜨렸습니다. 심지어 그 유일한 '증거'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음에도, 경찰들조차 그 증거 채택 과정이 공정하지 못했음을 인정했고 분신자살한 고인의 필체임을 입증하는 새로운 증거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그 '재심'을 2년 동안이나 미적거리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강기훈의 부모님은 그 오랜 세월의 울화와 포한을 이기지 못하시고 세상을 뜨셨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냉수를 들이켜야 속이 가라앉을 분노, 자신 때문에 속앓이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간 부모님에 대한 죄스러움이 불의 범벅이 되어 자신의 가슴을 태우는 고통을 견뎌야 했던 강기훈 자신도 간암에 걸려 삶과 죽음 사이의 외나무 다리에 위태롭게 서 있습니다.


 


80년대의 젊은 사자들이 숱하게 국회의원 배지도 달고 청와대에서 국정도 호령했었건만, 그들과 나란히 80년대를 내달렸던 강기훈이라는 한 개인은 정말로 속절없고 대책없는 피해자가 되어 자신의 무고함만은 밝혀 달라고, 아니 그 이전에 일단 재심 결정이라도 내려 주십사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게 2년입니다.


 


"가장 천사 같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우리 곁을 떠나갔다." (공지영의 고등어 중에서) 맞습니다. 우리는 이미 역사라는 이름의 밤 하늘에 별들로 남은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기립니다. 그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우리들이라면, 역시 자신의 일신의 안락에 굴하지 않고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었으되 터무니없는 오명을 쓰고 일종의 희생양이 되어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는 세력의 장난감이 되어 버렸던, 그러면서도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진실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어찌 무심할 수가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의 그것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죽음이 더럭 가까워져 버린 한 사람의 한맺힌 포한이라면야 더욱요.


 


드라마 <추격자>에서 대통령이 되기 위한 욕심에 한 소녀를 죽여 버렸던 강동윤은 계속 자신을 추적하다가 납치되어 온 소녀의 아버지 백홍석 형사에게 악을 씁니다. "너 때문이야, 니가 PK준만 안 잡았어도, 법정에서 죽이지만 않았어도, 탈옥만 안했어도.. 백홍석 니가 포기를 했으면은! .왜 왜 왜 왜 포기하지 않는 거야!!" 그러자 백홍석이 대답합니다. "나는 수정이 아버지니까." 그 대사를 들으며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누구의 아버지라는 간단한 사실이 백홍석의 행동을 이해해 주는 열쇠였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키워드였겠지요.


 


대법관까지 지낸 당시 지검장 강신욱, 1심 노원욱, 2심 임대화, 3심의 박만호 재판관의 서울법대 후배이자 현재 재심 청구를 뭉개고 있는 양창수 대법관 기타 등등은 강기훈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을 것 같습니다. "니가 데모만 안했어도, 니가 김기설하고 친구만 아니었어도, 그냥 3년 군대 다시 갔다 온 셈치고 포기를 했으면은! 다른 놈들처럼 정치를 하건 돈을 벌건 잘 먹고 잘 살았으면 되었을 것을! 왜! 왜! 왜! 포기하지 않는 거야." 과연 강기훈의 대답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대신 답변해 줄 수는 없을까요. "너 같으면 포기하겠냐. 이 개새끼들아."라고.


 


강기훈씨를 도웁시다. "생존 확률 50퍼센트"라는 선고까지 들었다는 그를 이렇게 하릴없이 죽게 내버려 둔다면, 최소한 그에게 진실을 찾아주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이 더러운 세상을 버리기라도 한다면 대한민국이라는 자칭 민주공화국을 살았던 우리 모두는 죄인이 됩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 관용어가 되는 법치국가에서 출생과 사망신고를 하는 우리 전부는 나무로 깎은 등신 이상은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을 기본원리로 한다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산다고 자부하는 우리들 하나 하나는 모두 누군가의 손짓 하나에 춤췄다가 삿대질했다 울다가 웃는 꼭두각시 그 이하로 전락하게 됩니다.


 


강기훈씨를 도웁시다. 그의 치료비와 법정 비용이 많이 모자란답니다. 우리은행 계좌 1002-946-922550 예금주 권형택...... 으로 백시일반 만시일반 십만시일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강기훈 개인을 돕는 것만은 아닙니다.


 


다시는 그런 어둠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이며, 우리 스스로 등신과 죄인과 꼭두각시가 되지 않겠다는 각오이고, 결국 우리 스스로를 돕는 일입니다. 여유가 없으면 전화 한 통화라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법원 홍보실이든 양창수 대법관 사무실이든 전화 하셔서 강기훈 재심 청구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검토는 하고 있는지, 언제 결정할 예정인지 끔찍할만큼 물어 봐 주시기 바랍니다. "안되면 담벼락에 욕이라도 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사진 속 젊은이가 나이 쉰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는..... 결백을 구하고 있습니다.


 


 


산하

트위터 : @sanha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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