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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국부'라고 칭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12년 동안 재임을 했으니 정말 많은 사람을 기용하고 부렸을 것이다. 이승만 주변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지 몇 차례에 걸쳐 정리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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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독재자니까 임기 시작부터 마음대로 사람을 임명하고 잘랐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달랐다. 1948년 국회의원들의 투표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싶었으나 정치적 지형이 애매했다. 그를 추대한 것은 미국의 보호 아래 범 우파 진영의 합의에 의해서 자리에 오른 것이다. 따라서 장차관 임명·교체 시 여러 정파의 이해관계를 종합해야만 했다. 심지어 장관보고 '당신 사직하고 나가라'해도 안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허약한 이승만의 권력을 지탱해주는 곳은 바로 경찰이었다. 지금 경찰과 당시 경찰은 천지 차이였다. 보통 경찰과 군대를 비교하곤 하는데, 당시 국군은 창군 초기였기 때문에 병력도 적을뿐더러(한국전쟁 발발 당시 9만 5000명), 일제시기 우리 민족은 군대를 보유·운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백지상태에서 시작한 상태였다.


반면 경찰은 이미 일제 치하에서 약 1만 명이 고용돼 주구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제로부터 지역을 통제·감시하는 법을 익히 배웠으며, 일제가 남겨 놓은 시설과 시스템으로 그대로 이어 받았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최강의 관료·지배조직이 바로 경찰이었던 셈이다. 지금으로써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여순사건 때 경찰이 검사를 좌익으로 몰아 쏴 죽이기도 했으며, 여순사건 이후 일어난 숙군(좌익 군인을 찾아내 처벌)과정에서 경찰이 군인을 총살하는 일도 있었다. 대부분 친일반민족 전력이 있는 경찰 입장에서는 이승만이 필요했고, 허약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권력을 유지하려면 경찰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승만은 경찰조직을 총애했다.


그런 경찰 내에서도 이승만에게 특별한 총애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먼저 노덕술이란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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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울산에서 태어난 노덕술은 1918년 최말단 순사로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빽도 없고 학력도 없었지만 일제에 대한 엄청난 충성심으로 그는 승승장구, 1943년 경시로 승진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조선인으로 경시를 단 사람은 불과 8명에 그쳤다. 오늘날의 시 단위 경찰서장급 직책이다. 일설에 따르면 노덕술은 일제시기 개발(?)된 고문기술의 70%를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고문의 달인이었다. 또한 일 처리도 용의주도했다. 만주사변·중일전쟁 이후 군수 보급의 중요성을 깨닫고 군수 보급 차량 징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37~1940년 사이 총 188회 차량을 징발해 군수물자를 만주로 보냈다. 이런 점이 인정돼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위직에 오른 것이다.


노덕술은 해방 이후 요직인 수도경찰청(서울경찰청) 수사과장으로 등용된다. 이 당시 그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우익 거물 송진우 암살범을 잡는가 하면, 1947년 2월에는 일제에 한 번도 검거되지 않았던 약산 김원봉 선생을 검거(라고 쓰고 납치라 읽는다)해서 온갖 고문과 모욕을 줬다. 1946년에는 조선공산당 정판사 사건(조선공산당이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조작 사건)를 일으켜 공산당 간부들을 줄줄이 잡아 넣고 조선공산당 세력을 크게 위축시켰다.


이런 노덕술이 이승만과 정확히 언제부터 인연이 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 취임 전부터 그를 신뢰했다. 하루는 이승만이 이화장 자택에 그를 불러 담소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그대 같은 사람이 있어 내가 발 뻗고 잘 수 있다"며 극찬했다. 


그런 노덕술이 범했던 실수가 하나 있었다. 1948년 1월 24일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당연히 노덕술이 움직였고 노덕술은 박성근이라는 사람을 잡아 모진 고문을 하고 있었다. 결국 1월 27일 고문 도중 노덕술 휘하 경찰에 의해 박성근이 죽고 말았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경찰의 위상은 매우 높았다. 수도경찰청장을 암살하려 한 시도는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용의자가 죽어 버렸으니 어쩐다. 그날 밤 서울중부경찰서 2층 창문이 벌컥 열리더니 '저놈 잡아라'는 고함이 조용한 서울 시내를 흔들었다. 그리고 누군가 후다닥 뛰어가고 있었고 형사 두어 명이 그 사람을 쫓고 있었다. 그 사이 노덕술은 잽싸게 박성근의 시신을 동여매고 자동차에 실었다. 당시 서울 한강은 얼어 있었고 드문드문 낚시꾼이 뚫어 놓은 구멍이 있었다. 그중 한 곳에 박성근의 시신을 유기했다. 물론 박성근은 탈옥한 것으로 공식 발표됐다. 그러나 얼음이 풀리고 박성근 시신이 떠오르면서 의외로 쉽게 조작은 드러났다. 결국 노덕술은 감옥에 갇혔다. 


아마 이승만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놀랐을 것이다. 1948년 7월 24일, 제헌의원 중에 몇 안 되는 이승만의 직계이면서 초대 내무부 장관을 했던 윤치영이 '주군'의 심정을 헤아리고 나선 것으로 보인다. 윤치영은 수도경찰청 부청장인 김태일을 보내 "잠시 얘기할 것이 있으니 노덕술을 보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 길로 노덕술은 잠적했다.


노덕술이 잠적 중이던 1948년 10월, 드디어 반민특위가 결성됐다. 반민특위 결성 소식을 들은 노덕술은 곧바로 우익테러분자로 악명 높은 백민태를 찾아간다. 노덕술은 백민태에게 "백 동지는 나와 우리 경찰을 위해 전적으로 협력할 의사가 있는가?"라며 접근했다. 노덕술은 백민태에게 반민특위 위원과 반민특위 특별검찰관, 반민특위 특별재판관 등 15명을 암살하라고 지시했다. 또 암살한 김에 방해가 되는 권승렬 검찰총장도 제거하기로 했다. 제거 대상자들을 38선 근처까지 끌고 가서 총살하고 '월북하려던 것을 만류했으나 끝내 고집을 꺾지 못해 죽였다'는 정도로 둘러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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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모에는 노덕술이 총 책임자였고, 실행에 백민태, 재정에는 친일 재벌인 박흥식, 언론에는 친일 경찰 출신이면서 극우 언론인 <대동신문> 이종형 사장, 경찰 쪽 수사 무마에는 수도경찰청 노덕술 후임 수사과장인 최난수와 수도경찰서 사찰과 차석 홍택희가 맡기로 했다.


이 엄청난 음모는 1949년 1월 24일 노덕술이 반민특위 특경대(반민특위 직속 특별 경찰대)에 체포되면서 무산됐다. 당시 노덕술은 호위 경관 4명, 지프차 1대, 권총 6자루, 현금 30만 원을 들고 있었다. 현금 30만 원은 당시 80kg의 쌀을 4만 섬이나 살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얼마나 그를 아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덕술 체포에 놀란 이승만은 직접 3가지 조치를 취한다. 먼저 반민특위 위원들을 경무대에 불렀다. 반민특위 위원들에게 "노덕술은 애국자(혹은 반공투사)니 풀어달라"고 했다. 이에 반민특위 위원들이 거절하자 화를 냈다고 한다. 다음으로 이승만은 국무회의를 열고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특경대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특경대를 해산하고 물리적으로라도 노덕술을 빼내려 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국무회의를 열고 "정부가 보증을 써서라도 노덕술을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봐라"고 지시했다. 그야말로 모든 방법을 써서 노덕술을 석방시키려 했던 것이다. 


노덕술의 두 번째 감옥생활도 그리 길게 가지는 않았다. 1949년 6월 6일, 경찰과 우익깡패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함으로써 반민특위는 유명무실해졌고, 노덕술은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이어 박성근 고문치사, 반민특위 암살 음모에 대해서도 모두 무죄선고를 받았다.


1950년 이승만은 노덕술을 제1사단 헌병대장(중령)에 임명했다. 당시 이승만에게 노덕술은 어떤 위치였을까? 1951년 5월 5일 당시 주한 미 대사인 무초 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다. 당시 서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미 양국) 신뢰의 결여는 공식적 한국 연락망이나 유엔 연락망을 통해 이용될 수 있는 정보보다 청년 모임, 타이거 김(김종원), 몬태나 장(장석윤), 노덕술과 같은 준군사적 조직에 의해 얻어지는 소위 정보 보고서에 무게를 주는 것에서 반영됩니다."


즉, 노덕술 등이 올리는 정보보고서만 믿고 미국이 제공하는 정보를 믿지 않음으로써 한미 양국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노덕술은 여전히 이승만이 신뢰하는 측근이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헌병들을 동원해 국회의원이 탄 버스를 통째로 납치하면서 그는 이승만의 신뢰에 보답했다.


그러나 이후 노덕술은 이승만에게서 점차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승진을 하거나 요직을 맡은 것도 아니었다. 이 무렵 이승만에게는 노덕술보다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1955년, 이승만의 사랑을 받던 노덕술은 뇌물을 먹은 혐의로 파면됐다. 그의 마지막 직책은 제15육군범죄수사단 대장(중령)이었다. 이후 노덕술은 재기를 위해 총선에도 나오고 장면 정부 핵심 인사인 선우종원에게도 접근하는 등 애를 썼지만 모두 허사였다. 


1968년 4월 1일, 노덕술은 69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살던 집은 서울 궁정동 무궁화 동산이었다. 노덕술이 죽은 뒤 이곳에 궁정동 안가가 들어섰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총을 맞은 그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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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임종금, <대한민국 악인열전>, 피플파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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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금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