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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1.화요일

 

너클볼러

 

 

 

 

 

 


바다 건너 미국의 대선후보 TV토론은 1987년에 수립된 비영리 초당파적 기구 '대선토론위원회(CPD)가 주관한다. CPD는 세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후보에게만 토론회에 참가하도록 하는데, '대통령직을 수행하는데 하자가 없어야 하며, 이론적으로 전국단위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당선할 수 있어야 하고, 5개 여론조사기관의 조사결과 전국지지율 15%이상 얻어야 한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2012년, CPD의 자격요건을 갖춘 롬니와 오바마가 초청받아 3차례의 토론을 진행했다. 토론의 주제와 형식, 답변 순서, 답변 시간 등은 CPD에서 엄격하게 관리한다.


 

 

 

 

 

 

위 내용은 대충 12월 4일, 박근혜, 문재인, 이정희 3후보의 토론이 진행 후, '다까끼 마사오', '당신을 떨어뜨리기 위해 나온 거예요'라는 이정희발 어록이 나온 뒤 이틀 후 중앙일보의 기사되겠다. 미국식의 엄격한 초청기준과 품격 돋는 토론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 전자는 이정희 참여에 대한 불만일 테고, 후자는 지금의 듣보 토론방식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거나, 더욱 강력한 듣보 방식의 토론 규칙이 필요하다는 호소일 것이다. 얘들은 말을 해도 꼭 이런 식으로 한다.


 

 

 

 

 

 

10월 22일에 열린 오바마와 롬니의 3차 토론에 대해 뉴욕타임즈는 '이번 토론에서는 심지어 시리아 문제도 지루했다'는 배우이자 감독은 알버트 브룩스가 남긴 트위터 메시지를 인용했다. 유권자의 기대를 반영하지 못한 부족한 토론이었다는 것이다. 대선후보간의 TV토론은 미국서 인기 있는 풋볼이나 야구 시청률을 뛰어 넘을 만큼 가장 화끈한 이벤트다. 토론은 흡사 전투와 같다. 미국 정치쟁이들이 이번 토론이 실제 지지율의 변동에 미치는 영향을 대략 2.5%정도 예상했음에도 1-2차전은 롬니와 오바마가 1게임씩 차지할 만큼 한치의 양보 없이 뜨거웠다.


 

 

 

 

 

 

그 동네의 토론에는 선관위 같은 기관이 나서 듣보 룰 같은 것을 들이대지 않는다. CPD에서 양당의 의견을 종합해 필요한 룰을 만든다.(사실 토론을 제한하는 룰 자체가 거의 없다) 최소한 룰에 따라 서로가 문제를 제기하고 격렬하게 토론한다. 함 물리면 놓지 않는다. 오죽하면 10월 22일 벌어진 3차 토론에선 사회자 밥 시퍼가 질문만 던지고 뒤로 빠져 토론에 불을 붙이지 못했다고 욕을 먹기도 했다. 토론이 끝나면 실시간으로 후보들의 발언에 대한 진위여부를 체크하여 공개한다. 통계, 숫자, 출처 등 모든 내용이 검증되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면 토론을 반영한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다. 그래서 미국 국민은 가급적 만사 제쳐두고 TV토론을 시청한다. 일국의 대통령을 뽑기 위한 토론.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 반대로 우리의 토론은 듣보 룰을 적용하여 관심을 외면하려는 꼴이다. 어른들은 반면교사(反面敎師) 그러니까 부정적인 측면에서도 가르침을 얻으라 말하는데 긍정적인 면마저 외면하는 웃기고 자빠라진 딱 그 짝인 거다.


 

 

 

 

 

 

 

12월 4일에 열린 1차 TV토론에서 이슈로 등장한 것들은 박근혜에게 정조준된 이정희의 입에서 나온 '다까끼 마사오' '네. 너 님 떨어 뜨릴려고 출마했어요'등의 멘트였다. 이게 거대한 이슈가 되는 것이 사실 좀 신기하다. 박정희의 친일행적이 밝혀진 것이 어제오늘의 일인가. 게다가 이정희가 돌지 않고서야 박근혜를 지지하고 그와 단일화하려고 출마했겠는가. 조금 날이 섰고, 조금 솔직했을 뿐이다. 이정희의 발언이 저질폭로였는지, 필요 적절한 발언이었는지는 여론에서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뭐가 그리 당황스러워 토론 초청 자격 운운하는지. 얼마나 미웠으며 그깟 발언 가지고 국격 운운하는지. 국격이 그렇게 그립다면 이걸 봐라 '국격의 끝' (링크). 어때? 국격이 마구 돋지.


 

 

 

 

 

 

사실 1차 토론의 진짜는 이거였다. (경황없으면 받아도되는 6억)(링크). 독재자의 딸이 독재자의 사망 후 어린 동생들과 살길이 막막해서 다음 독재자가 배려하는 차원에서 건넨 6억을 경황없이 받았고, 자식과 가족 없으니 경황이 있을 때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것이다. 79년 기준 6억의 현재의 물가기준을 적용해 60억이니, 100억이니, 300억이니 이런 말 하믄 주뎅이만 쓰리니 하지 말자. Strongman의 Daughter가 그러니까 강력한 지도자 아니 독재자의 딸, 그러니까 Dictator의 Daughter가 다음 독재자 전두환에게 6억을 받았다는 말을 '배려'란 표현을 들이밀며 아무렇지 않게 말해버린 것이다. 이 멘트로 졸지에 경황없는 수많은 국민들이 '나도 6억'을 외치기 시작했고, 의식있는 수많은 국민들은 '경황있는 사회'를 꿈꾸게 되었다.


 

 

 

 나는 경황이 없었다. 줄여서 '나경황'


 

 

 

 

 

 

이 말이 살벌한 전투와 같은 미국의 TV토론에서 나온 것이라 가정해보자. 2차 토론에서의 롬니 패배의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크라이슬러와 GM등의 대한 구제에 대해 반대한 것이 맞냐?'는 오바마의 질문에 롬니가 '맞다'고 한 대답이었다. 이 대답으로 롬니는 지원, 도움 등을 반대하는 이미지로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6억 발언'이 미국 TV토론에서 등장했다 가정해보자. 토론은 3차전까지 갈 것도 없이 끝났을 것이다.


 

 

 

 

 

 

제가 정치를 15년 동안 하면서 정말 많은 국민 여러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국민 여러분들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 말씀들을 다 적으면서 다녀와서 일일이 예산에도 반영하고, 정책에도 반영하고 물론 야당 시절에 일일이 다 하지는 못했지만 최대한 노력하고 정당사상 처음 약속실천 백서라는 것도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의 정치는 항상 '민생'을 정치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12월 10일, 그러니까 어제 진행되었던 2차 토론에서 '국가적 위기관리 과제와 해결능력'에 대한 사회자 공통질문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답변 중 일부다. 뭘 했다고는 하는데 뭘 했는지는 전혀 확인 안 되는 말이었으나 '약속실천백서'라는 게 진짜 있다는 건 확인되었다. 2006년 박근혜 후보가 자신의 최측근이자 당시 최고위원이었던 이혜훈 전의원에게 지시해 만든 것으로 자신이 당시 2년 여간의 한나라당 대표 시절 국민에게 약속했던 공약의 실천 여부를 담은 백서가 있었던 것이다.


 

 

 

 

 

 

 

실존하는 '대국민약속 실천백서 : 국민과의 약속, 이렇게 지켰습니다.'라는 쓸데없이 긴 제목의 이 백서에 담긴 내용은 뭐 이런 것이다.


 

 

 

 

 

 

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고,

 

 

 

 

 

국민의 소리를 빠짐없이 정책에 반영했고,

 

 

 

 

 

부정부패와의 단절을 선언, 실천했고,

 

 

 

 

 

비리에 연루되면 스스로 의원직을 사퇴하는 풍토를 만들었고,

 

 

 

 

 

불법도청에 의한 국민인권침해 반드시 없어져야 하며,

 

 

 

 

 

대통령의 친인척과 권력형 부정부패를 뿌리 뽑겠으며,

 

 

 

 

 

음란, 패륜방송을 강하게 처벌하여 온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건강한 방송을 만들고,

 

 

 

 

 

비판언론은 속박하고 친여언론은 돈으로 지원하는 신문법을 개정하여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자 합니다. 외 구구절절 졸라 많음.


 

 

 

 

 

 

하도 많아 다 보기도 어렵다. 한 스포츠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백서발간을 주도했던 이혜훈 의원이 '그 백서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한지 아세요'란 했던 말, 목차만 봐도 이해가 간다. 양자론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들도 아닌데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주장하고 검증까지 해낸 쾌거니 그 고생 충분히 십분 이해된다.


 

 

 

 

 

 

만약 후보들간에 주고받는 상식적인 토론이었더라면, 그 토론에서 저 위에 언급한 몇 가지만 설전만으로도 2시간 토론은 가뿐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가 최초로 약속실천 백서를 만들었습니다'의 멘트로만 끝나고 말았다. '박근혜 후보가 얼마나 약속을 지켰으면 백서까지 만들었을 라나'라는 생각에 의문을 품으려면 일일이 검색해 들어가 하나하나 확인해보는 수 밖에 없다. 성의 없는 군주를 만나면 백성이 피곤하다. 후보 스스로 서로의 정책을 검증하고, 토론직후 내용의 사실관계가 바로 확인되고, 그 내용이 반영된 여론조사의 결과가 바로 발표되는 미국식 TV토론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대한민국약속 실천백서에는 실제 실천한 내용들도 몇 가지 들어있다. 그 중 하나가 2002년 불법대선자금에 대해 한나라당이 천안당사를 매각해 헌납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2002년 당시 한나라당의 닉은 '차때기당'이었다. 이회창이 후보로 나선 당시 한나라당에 흘러 들어간 불법대선자금은 무려 575억이었다. 이 첨예하고 화끈한 주제를 놓고도 토론은 없었다. 토론의 주제와 달랐기 때문이라고는 하지 말자. 토론이 불가능한데 주제가 뭔 상관이겠냔 말이다.


 

 

 

 

 

 

당시 자유로운 수사를 보장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도, 당시 담당 검사였던 안대희 대법관이 새누리당 대선 캠프에 합류한 것에 대한 토론도, '우린 천안 연수원 팔아서 헌납했으니 니덜도 매꿔라'는 주장도 없었다. 만약 논쟁이 되었다면 새누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였던 민주당 역시 32억원을 받지 않았냐'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을 것이다. 우린 그 공방을 통해 누가 나쁜 놈인지, 누가 나쁜 짓 척결에 걸맞는 사람인지 살짝 눈치 깔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토론이 되지 못하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니 '한 경제신문에서 자신의 경제민주화정책이 가장 파괴력 있다고 했다'는 것에 대한 확인도, '지하경제를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말실수에 대한 꼬투리도 없는 것이다. 동시에 재미와 흥분도 사라졌다.


 

 

 

 

 

 

실패와 한계를 넘어 대안과 가치를 기대하는 유권자에게 가장 중요한 판단수단인 TV토론은 뻔하고 지리멸렬해졌다. 이 지루함과 무력함은 누군가의 절실한 니즈(Needs)를 반영하고 있는 결과일 것이다. 결국 TV토론이 사라져 이쪽과 저쪽 모두의 검증이 증발한 덕분에 이번 대선에서 누구보다 바쁜 건 유권자인 '우리'겠다. 뻔뻔한 거짓말을 찾아 가려야 하고, 좋고, 필요한 약속들을 찾아 확인해야 하니 말이다. 힘들어도 어쩌겠는가. 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 팔자 아니겠는가.


 

 

 

 

 

 

토론을 가능케 하는 기본적인 룰을 거세해놓고, 끝나고 나면 잘했으니 못했느니, 토론의 격이 떨어지지 올라가니 그러고들 있다. '제대로 반격했다'는 4차원적 관전논평도 등장한다. 하기 싫으면, 힘들면 그냥 안 한다고 드러눕는 게 낫다. 그런 토론을 3번이나 한다는 것, 개드립도 그런 개드립이 없다. '이번 TV토론 어떻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날 바보로 보는 것 같아 기분 더럽다'고 답했다. 그 더러운 기분의 표현은 내가 가진 1표의 행사면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이제 8일 남았다.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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