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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4.금요일

 

논설우원 파토


 

 

 

 

 

 

 

2010년 말 배낭여행 말미에 이집트에 갔다. 고대 이집트에 대해서는 관심도 많았고 아는 것도 나름 꽤 있는 편이었지만, 막상 그 나라의 현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저 찬란한 문명과 역사, 유적과 유물 등이 주는 막연한 느낌들이 호감을 만들고 있던 정도였다.


 

 

 

 

 

 

그런데 이집트 전에 갔던 요르단 암만의 숙소의 주인 아저씨가 단단히 주의를 주는 거다. 이집트 들어가면 사기 당하기 십상이니 하나에서 열까지 조심해야 한다고 말이다. 아무도 믿으면 안 된다는 말까지 한다. 하지만 그 분야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도를 통과하고 살아남은 우원이었기에 그래봤자 머 어떻겠냐 싶었다. 그랬더니 이 팔레스타인 아저씨 말씀이 이집트가 되려 더하다는 거다. 우리나라 사람도 아니고 같은 아랍 민족인데 굳이 욕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인도보다 더할 수가 있을까.


 

 

 

 

 

 

머 그런 생각 속에 이집트 땅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어떻게 당했는지 구구절절 이야기 하지는 않기로 한다. 근데 진짜로 더 했다. 인도는 그래도 나름 순진한 구석이나 있지 이 나라 사기꾼들은 너무 집요하고 교활해서 어쩌면 인간이 이렇게 돈독이 오를 수 있나 싶어 열라 불쾌했다. 야 그래도 인류 최초의 문명을 일군 사람들의 후옌데, 다들 흙집이나 초가집 짓고 살던 때 높이 145미터의 돌 피라미드를 건설한 이들의 자손인데 이렇게 찌질할 수가 있을까. 실망과 짜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고 막판에는 빨리 그노무 나라를 떠나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들 정도였다.


 

 

 

 

 

 

그리고는 연말에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지 몇 달 후, 카이로에서 우원이 전철 타러 왔다 갔다 하던 타흐리르 광장에서 혁명이 일어났단다. 왠지 남의 일이 아닌 느낌때문에 알 자지라 중계방송도 보면서 열심히 응원했다. 결국 수십년간 철권통치하던 독재자 무바라크가 졸지에 밀려나던 날, 우원은 광장의 시민들의 함성을 들으며, 그 모습을 컴퓨터 스크린상에서 사진으로 저장하면서 같이 환호했다.


 

 

 

 

 

 

 

 

 

 

그렇게 혁명이 일어나는 동안, 우원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던 이집트의 근대사를 들여다보게 됐다. 오랜 세월 반복된 침략의 역사와 식민 지배, 독립, 이어진 쿠데타, 전임 대통령의 횡사와 암살, 그리고 무바라크의 장기 독재. 정치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근현대사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은 우리는 지난 수십 년 간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겪으면서 선진국에 가까워 져 있는 데 반해 이집트는 자원도 없는데다가 제조업도 미약해서 관광수입에 의존해 살아가는 아랍권의 가난한 나라라는 점이다. 고대의 영광과 비교되는 현재의 초라한 모습과 현대사의 질곡은 그들의 자부심과 명예심에 큰 상처와 그늘을 드리웠음에 분명해 보였다. 그들에게서 받은 비굴하고 비뚤어진 느낌은 어쩌면 거기서 온 것이지 싶었다.


 

 

 

 

 

 

그래서 기뻤다. 우원이 피자를 먹은 가게가 불탔다는 소식이나 카이로 시내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를 사람들이 상처입고 죽어간 것은 가슴 아팠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이 바로서는 새로운 나라를 세워 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고대 이집트의 영광을 재현하는 명예롭고 우아한 나라로 거듭난다면 그 피는 결코 헛되지 않을 터이다(그래서 여기까지의 벅찬 느낌들을 혁명 직후에 기사로 쓰기도 했었다. 근데 이후 서버가 날라가는 바람에 지금 검색이 안되니 양해해라)


 

 

 

 

 

 

그러나 이후에도 혁명과 민주화의 도정은 멀고도 험했다. 우여곡절 끝에 무바라크가 물러난 다음에도 이집트 정국은 계속 불안하게 흘러갔다. 이슬람 원리주의적 성격을 가진 무슬림 형제단이 정권을 잡는 것이 과연 시민혁명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인지 좀 의아한 생각이 들다가, 이어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다던 군부가 민선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에게 권한을 충분히 넘겨주지 않으려는 모습이 드러나며 대규모 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그러다가 결국은 얼마 전, 시민들이 시위를 통해 지키려던 그 무르시 대통령 자신이 속칭 '파라오법'이라는 헌법선언문을 통해 스스로에게 무소불위에 가까운 권력을 부여하려 들기에 이른다. 다행히 지금은 한발 물러났다고 하는데 여전히 새 헌법을 국민투표에 붙이려 하고 있고 시위도 계속되고 군부의 경고가 나오는 등 분위기는 어수선하다. 이렇듯 타흐리르 광장의 감동이 채 식기도 전에 이집트는 다시 격랑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다.


 

 

 

 

 

 

글타... 권위주의 체제를 극복하고 민주적 시민사회를 만드는 일은 이렇게 어려운 거다. 한고비 넘으면 다음 고비가 가로막고, 스트롱맨을 물리치면 딕테이터가 등장한다. 와중에 군대가 총포로 쓸어버리기도 하고, 그들이 조용해지면 또 다른 군대가 움직인다. 그러다가 외세가 개입하기도 하고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고 자칫 엉망진창이 되기 십상인 거다.


 

 

 

 

 

 

이집트가 그 모든 상황을 넘어 성숙하고 건강한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데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풍파와 긴 세월이 필요할까.


 

 

 

근데 말이다. 지금 남 걱정 할 때가 아니다.


 

 

 

 

 

 

저 이야기, 1945년 해방 이후부터 노태우 정권까지 50년 넘게 우리가 겪어 온 바로 그 상황들이다. 사실 우리가 훨씬 더 심했다. 외세와 이데올로기로 크지도 않은 나라가 둘로 갈라졌고, 이어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수백만 명이 죽었고, 그 담에는 정치적 탄압과 고문과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독재와 부패와 부조리가 일상적으로 판을 쳤던 것, 다들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굴하지 않았다. 고난과 가난 속에서도 정신줄을 놓지 않고 폭압에 목숨 걸고 항거해 왕처럼 모셔지던 이승만을 하야시키고 부마항쟁으로 촉발된 10.26으로 유신을 끝냈고 광주에서는 목숨을 버리면서 부당한 권력의 총탄에 저항했다. 그렇게 87년 결국은 그토록 염원한 직선제를 끌어낼 수 있었다. 머 결국 양김이 분열해서 노태우에게 정권을 내주긴 했지만 이 때가 분수령이다. 그리고는 소위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적어도 그 한심하던 시대는 졸업한 줄 알았다. 아직 선진국만큼 잘살지도 못하고 이런저런 문제도 많지만 우리가 반백년이 넘도록 그 많은 피를 흘려가며 얻어낸 가치들, 그것만큼은 지키고 이어나갈 수준은 됐다고 믿었다. 근데 그게 순전히 착각이었던 거다. 부자 되게 해주겠다고 꼬드긴 이명박한테 넘어간 건 순진해서 그랬다고 치자.


 

 

 

 

 

 

박근혜라니.

 

 

 

 

 

 

 

 

그가 누구의 딸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그도 피선거권을 가진 국민이고 연좌제 적용 받아 불이익 당할 이유는 없다. 스스로 노력해서 자기 능력으로 성장한 인물이라면, 그래서 아버지가 역사에 진 빚을 갚으려는 바른 역사관을 갖고 있다면야, 정치에 나서거나 그 과정에서 아빠의 공 부분도 좀 이야기한다손 이해할 구석이 있는 거다.

 

 

 

 

허나 문제는 이 분이 그런 분이 아니라 철저하게 아버지 빽으로 먹고 살아왔고 그 후광으로 정치를 하게 된 사람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역사의 교훈 속에서 뭔가를 배울 만한 그릇을 갖추지도 못한, 아버지만큼이나 수구적이고 비민주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별볼일 없는 인물이다. 능력 면에서도, 좋게 봐줘도 평범한 그 또래 사람들 이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최근의 토론이나 이런저런 계기들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났다. 결국 박정희의 딸이라는 점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인 거다. 그런데 지금 자그마치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되어 있다.

 

 

 

 

그 모든 독재와 탄압의 질곡을 이겨낸 이 나라다. 그리하여 이제는 웬만큼 성숙했으리라고 여겼던 이 사회가 지금 이런 걸 용인하고 있다. 아니 용인을 넘어 절반 가까이가 지지하고 있다. 어떤 자들은 권력을 유지하려는 욕망, 어떤 이들은 어리석은 향수, 또 다른 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죽은 국부의 딸이라는 이미지에 현혹되어 말이다.


 

 

 

 

 

 

이 어이없는 뒷걸음질의 천박함을 대체 어찌할 거냐?


 

 

 

 

 

 

함 생각해 바라. 이집트가 저 상황을 극복하고 고생 끝에 진정한 민주정부를 세운다 치자. 그렇게 한 10여년 리버럴이 정권도 잡고 언론의 자유나 종교의 자유 같은 것도 많이 향상되어 국제적인 위상도 높아졌다고 치자.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무바라크의 40넘은 아들이 등장한다. 별로 한 일도 없고 정치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와중에 아버지를 등에 업고 얼렁뚱땅 국회의원이 되고, 출석도 안하고 발의도 안 하면서 무위도식하다가 불쌍한 아버지 공도 많았는데 억울하다면서 은근슬쩍 구세력의 구심이 되어 대통령 후보가 된다. 그걸 국민의 절반 정도가 지지하고 손잡고 눈물 흘리고 자빠져 있다.


 

 

 

 

 

 

우리가 밖에서 이 나라의 이런 꼴을 보고 있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에이그 한심한 넘덜, 그 고생하고 얻어낸 민주주의와 인권, 자유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스스로 말아먹는구나. 시민혁명이니 뭐니 잘난 척 하더니 결국은 저런 넘들이구나.


 

 

 

 

 

 

우리가 지금 딱 그 꼴이다. 과장이라고? 박근혜 대통령 후보에 대한 아래 세계인들의 시각을 봐라. 말 많았던 타임지는 물론 우리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후진하다고 생각했던 나라들에서조차 '독재자의 딸'이라는 표현을 쓰며 이 나라의 쪽팔린 꼴을 지금 예의주시하고 있다.


 

 

 

 

 

 

 

 

 

 영국 로이터


 

 

 

 

독일 슈피겔


 

 

 

스페인 엘 문도


 

 

 

인도의 더 힌두


 

 

 

터키의 후리예트 데일리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클로브


 

 

 

파키스탄의 파키스탄 투데이


 

 

 

사우디 아라비아의 사우디 가제트


 

 

 

이집트(!) 알 아람


 

 

 

 

 

 

…그럼 이제 진보고 보수고 다 떠나서 아래 질문에 함 답해보자.

 

 

 

 

독재자의 딸임에도 '불구하고'도 아니고

 

 

독재자의 딸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곳이

 

 

정녕 우리가 피땀 흘리며 만들려고 했던 그 나라냐.


 

 

 

 

 

 

이러다가 박근혜가 진짜 대통령 되면 이 땅에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을 심고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스러져간 선배들의 얼굴을 어떻게 볼 건가? 한국의 민주주의의 발전과 시민사회의 성숙을 경이롭게 지켜보던 세계인들에게는 대체 뭐라고 하냐? 우원, 노무현 시대에 영국에서 4년 유학하면서 내내 울나라 민주주의의 도정을 자랑스럽게 말했더란다. 이제는 자칫 쪽팔려서 배낭여행도 못나갈 판이다.


 

 

 

 

 

 

이렇게 저급하게 살지는 말자. 못난 국민, 못난 후배, 못난 인간이 되는 것도 정도가 있다. 차라리 이회창이 나왔다면, 심지어 이인제가 나왔어도 이런 소리까지는 안 한다. 적어도 우리가 그렇게 어렵게 일군 것들, 그 소중한 깨달음과 가치들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빙충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거다. 그렇기에 심지어 김영삼하고 3당합당하고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일조하고 이 정권 하에서 국무총리까지 했던 양반들조차 박근혜는 안 된다고 나서는 거 아니냐.


 

 

 

 

 

 

그래서 이번 대선은 우리가 문명인으로서 최소한의 자존과 인간됨을 찾기 위한 선거인 거다. 야당을 위해서도, 이념을 위해서도, 노무현이나 문재인을 위해서도 아니고 박근혜를 단죄하기 위해서도 아닌, 우리 스스로의 명예와 이 땅의 역사를 지키기 위한 선거인 거다.

 

 

 

 

지금 우리 손에는 이 나라의 미래뿐 아니라 과거까지 소급해서 달려 있다. 여기서 지면 이제 과거로의 나비효과가 시작된다. 가깝게는 촛불에서 멀게는5.16과 그 너머까지의 모든 것이 뒤집어진다. 그렇게 이 나라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으로 돌아가 버리고, 우리는 그 비틀어진 나비효과의 세상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존재가 되어 살아야 한다.

 

 

 

 

이것이 황당한 공상과학 호러물이 될지 무시무시한 이 땅의 현실이 될지는 전적으로 19일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러니 가라. 보내라. 내 손가락 하나로 댐의 구멍을, 홍수를 막는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밤을 지나 새벽녘에 저들의 이 모든 짓거리가 한바탕 꿈으로 여겨진다면…


 

 

 

 

 

 

역사는 다시 한번 승리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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