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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위협이 되기에는 그 수가 적다.

가장 위험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다.

프리모 레비



교사가 된 후 처음 몇 년간 내 머릿속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내가 유독 고약한 관리자와 유난히 말 잘 듣는 교사들의 조합을 만난건지, 학교란 곳이 원래 이런 곳인지 처음에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신규 시절이었던 어느 날, 교육청 장학을 앞두고 교실 환경에 대해 교감이 무리한 지시를 했다. 협의실에서 지시 내용을 전해 들은 교사들이 일제히 ‘자율권 침해다. 이건 정말 아니다.’ 라고 외쳤다. 나는 신규답게 다소곳이 앉아 생각했다.


‘후훗, 역시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어, 교감의 이따위 전횡을 사람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지.’


몇몇 선배 교사들이 교무실에 찾아가기로 했고, 나는 구경삼아 신나게 그들을 따라 내려갔다. 앞장선 부장교사가 교무실 문을 활짝 열었다.


"아휴~교감 선생님 넥타이 색깔 좀 봐. 역시 미술과 출신답게 안목이 뛰어나시다니까!"


어? 대단한데? 저렇게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무장해제 시킨 뒤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모양이군!


"그런데 말씀하신 환경 정리는 언제까지 해놓을까요? 이번 주요? 에이~ 교감 선생님 이틀만 더 주시면 안 될까요?"


어랏? 모든 교실의 환경판을 다 똑같은 형식으로 해놓으라고 해서 다들 화가 났던 게 아니었나?


"네, 감사합니다. 완성되고 나면 교감 선생님이 한번 쭉 둘러봐 봐주실 거죠? 홍홍홍"


어? 어라? 얼떨떨하게 교무실을 나서는데 같이 왔던 교사들은 이미 학급운영비 중 얼마를 환경 물품에 지출해야 하나에 대해 토의를 하고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혼란스러운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했다. 물론 처음부터 내가 교사들의 대화 내용을 잘못 해석했을 가능성도 있다. 즉, 그들은 교감의 지시내용에는 처음부터 불만이 없었는데, 내가 내 멋대로 메시지를 확대 해석했을 가능성 말이다.


어쨌든 이와 비슷한 일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혼란의 연속이었다. 다른 학교에 근무하는 친구들과 대화를 해봐도 너무나 극단적인 사례들이 많아서 (극단적으로 좋거나, 나쁜 사례들) 나만 시작부터 유난히 똥 밭을 구르고 있는 건지, 그나마 비교적 나은 환경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 학교는 관리자들이 유난히 꼰대였던 것이 분명해'라고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두 번째 학교로 옮긴 나는 곧 더한 혼란과 분노에 휩싸였다. 내가 미친 건지, 세상이 미친 건지 알아내기 전에는 분해서 잠도 잘 수 없을 것 같았던 나날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이명박 정부가 도입한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일제고사)와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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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학교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평교사들의 느낌이 좋았다. 대개가 밝고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밝고 선량한 교사들 틈에서 ‘이딴 짓거리를 할 바에 이 직업을 때려 치고 말겠다’ 는 생각을 매일 하기 시작했다. 첫 학교에서 이상한 관리자들에게 아무리 시달려도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생각이었다.


두 번째 학교의 학부모들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들이 많았다. 학교의 성적이 몇 년간 좋지 않았고, 경쟁에서 뒤처진 학교의 모든 관심은 부진아를 ‘제거’하는 일에 맞춰져 있었다. (사실 고압적이고 봉건적인 문화로 보자면 첫 번째 학교가 훨씬 심했다. 하지만 학교가 워낙 좋은 학구에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성적은 늘 평균 이상으로 좋았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일제고사로 인한 영향은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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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오마이뉴스>


6학년 수업 현장은 정말 가관이었다. 평가일 전까지 거의 한 학기 내내 미술과 음악 등의 수업이 시행되지 않았다. 시험을 치르는 다섯 개 주지교과, 그것도 해당 범위에만 집중해 문제 풀이만 반복하는 수업 파행이 매우 당연한 듯 진행되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다 보면 성적이 낮은 학생들이 하염없이 빽빽이를 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학생들이 들고 다니던 오답 노트를 펼쳐보면 도대체 왜 이런 걸 손으로 쓰도록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예: 다음 글을 읽고 철수의 대답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 꼬물꼬물 적혀 있었다.


내가 담임이 아닌 6학년 주지교과의 교과 전담 교사라는 사실은 책임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덫에 걸린 듯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미도달’ 학생이 되면 그 학생들은 학교의 명예를 구기는 천덕꾸러기가 되고, 나는 무능한 교사가 되고, 열심히 하는 동료 교사들과 내가 속한 학교에 피해를 주게 되는 개미지옥.

 

성적이 낮은 학생들을 위한 당연한 지원의 차원에서 보충 지도를 하고 있을 뿐인데 누군가 지나가며 ‘열심히 하시네요!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파이팅’이라고 상쾌하고 따뜻한 격려를 하면, 힘이 나기는커녕 욕이 나오는 이상한 구조.


만약에 내 동료 교사들이 이렇게 말했다 치자.


“학생들의 지적 발달을 가로막는 좋은 방법 있어?”

 

“일단 학교에서 문제풀이 수업을 많이 하는 게 좋겠어. 학생들이 생각을 발산시키지 못하고 수렴하기만 하면서 늘 정답만을 찾는 데 익숙해질 테니까.”

 

“빽빽이를 많이 시키는 건 어때?”

 

“와우, 배움에 대한 즐거움을 근본적으로 말살시키는 좋은 방법이야.”

 

“맞아, 어차피 있는 집 아이들은 리더로서 필요한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능력, 의사소통 능력까지 사교육으로 다 사버리잖아.”

 

“공교육에서는 이런 주입식 교육을 통해 노예를 만드는 교육만 하면 돼.”

 

“그거야! 기득권을 공고히 하고, 없는 집 아이들이 시스템에 대해 의문을 가질 능력을 원천 봉쇄해 버리자!”


아무리 나 같은 소시민이라도 이런 말을 들었다면 ‘대한민국 학교 X 까라 그래!’를 외치며 학교 창문에 마구 돌을 던지고, 일제고사용 문제집들과 빽빽이 들을 모조리 운동장으로 들고 나가 활활 태워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느냐고 대화를 시작하려는 내게 상대가 이렇게 나온다면


“힘들죠? 이놈의 평가 때문에 나도 힘드네요.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우리 조금만 더 힘내요. 선생님 덕분에 학생들 성적도 많이 올랐어요. 다들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올해는 결과가 좋지 않겠어요? 학교 체면도 서고, 선생님과 애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도 알아주겠죠. 감사합니다. 선생님, 파이팅!”


맑은 얼굴을 한 보통 사람들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곤 했다. 나 역시 내가 속한 조직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인정받고 싶고, 분란을 만드는 것이 두려운 ‘보통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2013년, 초등학교에서나마 일제고사는 폐지됐다. 하지만 상처는 매우 깊고 견고했다. 그들은 아마 목적한 바를 많이 이루지 않았을까 싶다. 낮은 성취도를 보이는 학생의 배경과 원인을 분석해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아닌, 그 상태의 ‘제거’를 우선시하는 이상한 인식이 학교 현장을 깊게 할퀴었다.

 

시국선언 등을 통해 반대 의사를 표시했던 교사들에게는 ‘공부 좀 시켜보겠다는데 그게 싫다고 애들을 내세워 난리 법석을 떠는’ 반사회적, 비교육적 이미지를 씌워버렸다. ‘이건 정말 아니지 않은가?’ 라는 의심이 똬리를 틀기 시작했을 평범한 교사들은 국가 시책에 반대하는 선언을 했다가 징계를 받는 교사들을 지켜보며 ‘역시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안 튀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을 굳혔을 것이고, 그 덕에 잠재적 저항 세력도 많이 제거됐을 것이다. 학생들이 떠안은 교육기회 손실의 피해는 너무나 커서 상상이 안 될 정도다.


개인적으로 나는 당시에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내가 속한 교직 사회, 교육 구조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너무 화가 나서, 한동안은 학교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공무원’ 상에서 무조건 벗어나려고 최선을 다하기도 했다. 누가 욕을 하든 말든 ‘무조건 반대로만 하기’가 습관적으로 젖어있던 노예적 타성에서 벗어나는 데 개인적으로는 나름 도움이 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니 그 기준조차 어느새 다른 형태의 타성과 속박이 돼서 지금은 그로부터도 벗어나려는 중이다. 일제고사를 통해 개인적으로 '배우고 느낀 게 있다면 있다'라고 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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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상한 선생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학교에 정말 이상한 선생이 많을까?

학교는 이상한 사람들을 꼬이게 하는 페로몬이라도 방출하는 걸까?


교사들 ‘하나하나는’ 대체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다. 처음에 제시한 교무실에서의 일도, 글로 표현됐기 때문에 그 찌질함이 배가 되었을 뿐이다. ‘자신도 모르게’ 권위에 순응하는 사람들, 그 가운데 우왕좌왕하는 나 같은 사람들, 이런 모습들이 왜인지 낯설지 않을 우리 모두가 특별히 나쁜 사람들이라기보다 그냥 ‘보통 사람들’이다.


그래서 너무 힘들었다. 그들도 나도 너무 보통 사람들이어서.



이상함은 그것을 보는 자의 눈 속에 있다


보통 사람들: 순리대로 움직이는 사람들, 사회에 잘 편입되어 있는 사람들, 상냥하고 사근사근한 사람들, 한나 아렌트가 기술한 바에 따르면 ‘진중하고 체계적인 공무원’들


교사들은 정말이지 ‘보통 사람들’이다. 매우 거친 일반화의 오류를 무릅쓰고 보자면,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학창 시절에 대개 중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선생님 말씀도 꽤 잘 듣는 축에 속했던 사람들이다.

학교에서 원하는 모범적인 학생 상과 자신의 정체성을 일치시키는 데 크게 무리를 겪지 않았을 사람들이 많다.

큰 사고 없이 무난히 학교를 졸업하고 착실하게 임용시험을 공부해 교사가 됐을 거다.

학생 신분으로 학교를 다니다, 학교에 ‘취직’을 했기 때문에 평생에 걸쳐 학교가 바라는 도덕적 가치판단 기준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았을 가능성도 크다.

소득수준, 생활양식, 교양 수준도 몹시 평범에 가까울 것이다. 상류층은 아니지만, 딱히 현재의 상황을 뒤엎어야 할 필요를 느끼는 사회적 계층도 아니다.

‘양심을 어기는 것’과 ‘관습을 위반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온몸으로 느끼며 기존 세력과 마찰을 빚기에는, 너무 착하게 순리대로 살아온, 그냥 보통 사람들이다.


심지어 학창 시절에 우리에게 모욕과 상처를 줬던 수많은 교사도 대개는 당대의 ‘보통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얼마나 보통 사람들이었는지를 생각해보기 위해 (지금도 크게는 다르지 않지만)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도덕적 가치들을 학교에 대입해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다.


(사회): 자격 있는 소수에게만 기회를 주는 것이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보다 비용과 자원 활용 면에서 효율적이다.

(학교): 우열을 명확히 나누어, 공부 잘하는 소수 학생들에게 기회를 더 주는 것이 당연하고 효율적이다.


(사회): 어디에나 승자와 패자,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있다.

(학교): 학교에는 좋은 학생과 나쁜 학생이 있다. 교사는 ‘절대 선’이다. 학생은 나쁜 본성을 갖고 있으니 선한 사람으로 길러내야 한다.


(사회): 물질적으로 부족한 이들을 진정으로 돕는 길은 원조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해 먹고 살 능력을 기르도록 하는 것이다.

(학교) : 괜한 동정은 학생 개개인의 의존성을 심화시킨다. 그들을 진정으로 돕기 위해 학생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실패는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학생의 책임이다.


지금의 우리가 생각할 때 한없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교사들조차 그들 딴에는 위와 같은 ‘도덕적 가치 판단'에 의해 행동했을 것이다. 차별, 권위, 폭력에 무감각한 사회에서 그 흐름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는 이들은 바로 ‘보통 사람들’이다.

 

가장 강한 도덕성을 요구받는 ‘학교’에서 교사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비리와 악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의문을 이해하는 시작이 여기 있다. 즉, 당대의 ‘보통 사람들’이 그 사회의 도덕적 가치를 ‘가장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집약적으로 실현’해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일부 특별히 이상한 교사들의 행위는 개인의 가학성향이 보태졌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악의 평범성’을 말한 대표적인 인물인 한나 아렌트조차 괴물들의 존재를 언급한 바 있다. 더구나 학교 체제, 적어도 과거의 학교 체제는 가학 성향을 지닌 일부가 그 성향을 맘 놓고 발현하기 매우 좋은 환경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보통 사람인 것이 잘못은 아니다. 다만, 많은 사회 심리학자들이 밝혔듯 일단 판이 이상하게 짜여지면, 본인이 의식하지도 못한 채 악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다른 집단에 비해 이 ‘보통 사람들’에게서 더 높아진다. 선량하고, 충돌하길 싫어하는 그래서 사회적으로 호감형으로 여겨지는 성격이 잘못된 구조 속에서는 오히려 악행으로 이어지는 길의 윤활유가 된다. 나무랄 데 없이 성실하고 스스로 학생들을 아낀다. 여기는 교사들의 이상한 행동들, 학교 현장의 광기들을 나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했다. 그래서 권력 집단이 보통 사람들을 혹 괴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약한 고리를 틈타 나 자신도 모르게 약자들을 학대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끝없이 지켜보고 고민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내 눈에는 한국의 교육 현실이 사회의 모든 모순이 망라되어 집약된 총체적 난국이다. 나뿐만 아니라 교육 체제에 대해서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불만족 상태인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모두가 인정하는 모순덩어리인 교육 체제에 대해 싸우고, 반항하는 유일한 교사집단은 사지가 절단되다시피 해서 법외로 밀려났다. 학생들에 대한 책임감에 직언이라도 할라치면, 교사는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며 입을 틀어막아 버린다. 그러나 교사 가입률이 가장 높은 친정부적 교원단체는 교육감 직선제와 같은 정치적 이슈에 대해 늘 강경 발언을 해도 절대로 탄압받지 않는다. 아주 상식적인 질문, ‘왜 정치적 중립은 늘 한쪽 편에서만 지켜야 하는 걸까’라고 고민을 시작하면 몹시 고달파지는 곳이 교육계다. 그래서 내 눈에는 가장 이상하게 짜여진 판에 들어와 가장 말 잘 듣고 있는 교사들이 이상하게 보인다.


전교조가 내세우는 교육적 가치들에 우리 모두가 적극적으로 동의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학생들에게 삐딱한 사상이나 주입하는 불순세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뒤틀린 교육 문화에서 교육의 ‘책임에 대한 고민을 제시하는’ 유일한 교사 집단이라고 주장해봤자 어차피 하나 마나 한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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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오마이뉴스>


전교조도 인간의 집단이다 보니 어느 정도의 이상한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고, 전교조의 활동 방식이 모두에게 호감을 줄 리도 만무하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 체제가 총체적 난국이라는데 동의한다면 이런 체제를 향해 유일하게 뻗대고, 반항하는 힘을 가진 교사 집단이 적어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것과는 별개로 교육 환경에서 이 집단이 하는 ‘역할’, 이 집단이 제시하는 ‘고민과 대안’을 큰 그림 안에서 바라봐 주었으면 한다.

 

아인슈타인이 그랬다. 끝없이 같은 것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 수십 년에 걸쳐 같은 교육을 반복하고, 같은 구조를 유지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교육 체제의 끝없는 반복, 끝없는 미친 짓의 책임을 보통 사람인 교사 개개인에게 물어서는 절대로 답이 나오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을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한국 교육의 판을 갈아 엎으려면, 모든 시민이 큰 틀에서 협력해야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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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너클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