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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면 하나의 잘 조직된 국가를 연상하는 이들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실제 미국은 남부와 북부라는 서로 다른 지역적 배경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남부는 기후가 온화하고 땅이 비옥해서 일찍부터 노예 노동력을 이용한 농업이 발달한 반면에 기후가 거친 북부는 강한 종교적 색채를 띤 집단들이 주로 정착하면서 공업에 바탕을 둔 산업사회를 형성했다. 그런 상이한 토대가 훗날 남과 북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낳게 되고 마침내 남북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되었다. 그러면 먼저 남부부터 시작하자.


 

<신세계>라는 영화가 있다. 테렌스 맬릭 감독이 2005년에 만든 영화다. 이 영화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설인 포카혼타스(Pocahontas)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1607년 세 척의 영국 배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는 데서 시작된다. 그 배에는 아메리카에 영국 식민지를 건설할 모험가들이 타고 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이 영화의 남자주인공인 존 스미스(John Smith) 선장이다. 그는 반란 혐의로 선실에 감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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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에 도착한 스미스 선장은 동료들과 밀림을 탐험하다가 포하탄(Powhatan) 인디언 부족에게 잡힌다. 그러나 포카혼타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그해 겨울을 그 부족과 함께 지내는 사이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다음 해 봄 그가 백인 정착지로 돌아왔을 때 그곳은 지옥이나 다름없다. 사람들은 굶주림에 허덕거리고 서로 분열되어 싸운다. 그는 위기에 처한 그곳을 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한편 혹한의 겨울에 정착지가 전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 포카혼타스는 부족을 설득해 식량을 가져와 그들을 구해준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녀는 결국 사랑을 위해 부족을 배신한다. 그녀는 부족장인 아버지가 백인 거주자들을 공격하려는 정보를 스미스에게 알려주며, 그것 때문에 부족에서 내쫓기게 된다. 스미스는 그런 그녀를 인질로 잡아두자는 동료들의 제안을 거절함으로써 반역자로 내몰리지만, 그녀는 결국 인질로서 그 정착지에서 지내게 된다. 그 사이 구호선이 오고 스미스는 왕의 명령으로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난다. 이후 포카혼타스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정착지의 다른 백인 남자와 결혼하며 영국 국왕의 초청으로 남편과 아이와 함께 영국으로 가서 국왕을 알현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스미스와 극적으로 상봉한다.


이 영화는 감독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스미스 선장의 일화와 포카혼타스의 실제 남편인 존 롤프의 이야기를 그는 무리 없이 그럴듯하게 연결하여 한편의 서사시를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포카혼타스의 신화를 미국인들의 가슴 속에 다시 한 번 재현했다. 그러면 이 영화는 어느 정도 사실일까? 정말 스미스 선장과 포카혼타스는 그렇게 평생에 걸쳐 애틋한 사랑을 하고 그리워했을까?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단지 감독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존 스미스는 실제 포하탄 부족에게 잡혀 며칠간 지낸 적이 있었으며 그사이 어쩌면 포카혼타스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가 쓴 <버지니아, 뉴잉글랜드 및 서머 섬에 관한 일반사>(1624)에서 그는 포하탄 부족에게 잡혀 머리가 박살이 나서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포카혼타스가 달려들어 그를 끌어안고 부족장인 아버지에게 애원해서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1608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똑같은 사건을 기록하면서 포카혼타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렇게 극적인 사건이 사실이었다면 당연히 기록했을 것이다. 그런데 언급이 없다. 더욱이 당시 포카혼타스는 겨우 열 살 정도였는데 반해 그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그런 그녀와 스미스가 단 며칠 사이에 평생 잊지 못할 사랑에 빠졌다는 것 역시 믿기 어렵다. 포카혼타스 이야기는 그가 훗날 각색한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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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 스멜...


실제 포카혼타스는 그녀의 부족과 백인들의 싸움 중에 백인들에게 납치되었지만, 아버지가 몸값 지불을 거절하자 백인 정착지에서 지내며 기독교도로 개종했고 1614년에 롤프와 결혼했다. 그 후 추장의 딸인 포카혼타스가 영국에서 선전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안 버지니아 회사의 주선으로 그녀는 1616년에 남편과 함께 영국을 방문하고 국왕을 알현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오기 직전인 1617년에 천연두로 그곳에서 사망했다.

 

포카혼타스 전설에는 아메리카를 차지하려는 백인들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아메리카 대륙은 포카혼타스라는 인물로 인격화되면서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순수한 처녀로 백인 앞에 나타난다. 그 포카혼타스가 백인과 열렬하게 사랑에 빠지고 마침내 백인의 품에 안기고 백인과 결혼한다. 아메리카는 유럽의 신부이고 백인의 신부이다. 그것은 유럽인들과 백인 미국인들의 상상력을 만족시켜주기에 충분하다. 이제 유럽과 아메리카는 결혼하여 하나가 되었으며 아메리카는 유럽의 소유이다. 그 당시 유럽에서는 결혼한 여성은 당연히 남편의 소유물이었다.

 

스미스 선장은 왕성한 모험심에 불타는 생애를 살았다. 젊은 시절에는 용병으로 발칸반도에서 터키인들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려가기까지 했다. 그는 노예생활 중 주인을 죽이고 탈출해서 우여곡절 끝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1606년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는 이민선에 몸을 실었다. 그 이민자들은 오늘날 미국에 영구 정착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영국인들이다. 그들의 정착이 성공하면서 비로소 미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초기의 정착에 스미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배에서부터 다른 사람들과 불화하여 반란혐의로 선실에 감금되었으며 아메리카에서도 주로 밀림을 탐험하고 원주민들과 접촉하면서 주변에서 떠돌아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훗날 그와 정착민들에겐 커다란 힘이 되었다.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은 스페인에 비해 한 세기 이상 늦었다.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서 사사건건 충돌했다. 이에 보다 못한 로마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중재에 나섰다. 그리하여 1494년에 맺어진 조약이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이다. 앞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서경 43° 7′을 경계로 동쪽은 포르투갈이 서쪽은 스페인이 각각 차지해 식민지를 개척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선은 지구가 평평하다는 가정 하에 그어진 선이므로 포르투갈이 동쪽으로 계속 가고 스페인이 서쪽으로 계속 가면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선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1529년에 다시 조약을 맺어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를 가르는 선을 또 다른 경계로 설정해 분할했다. 이 선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포르투갈 소유이고 일본은 스페인 소유이다. 한 마디로 유럽인들 마음대로 세계를 분할해서 나누어 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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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의미 없는 선


스페인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진출 이후 사실상 아메리카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행사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아메리카 대륙은 오늘날 브라질의 동쪽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스페인의 관할이었다. 더욱이 그 당시 스페인이 대서양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이 아메리카에 끼어들 틈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1588년에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름으로써 영국은 대서양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하려는 야망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전에 이미 영국은 스페인의 영향력이 미약한 북아메리카에 영구 식민지를 개척하려는 시도를 여러 번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아메리카에 영국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노력한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이 월터 롤리(Walter Raleigh)이다. 그는 1584년에 왕으로부터 아메리카 해안 탐험의 특허장을 구입해 아메리카 동부 해안에 탐험대를 보내 그들이 탐사한 지역을 버지니아라고 이름 붙였다. 처녀왕 엘리자베스 여왕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롤리는 그 기반 위에 1585년과 1587년에 잇달아 아메리카에 정착할 사람들을 보냈다. 1585년의 정착이 실패한 후 1587년에는 117명의 이민자를 실은 배를 다시 버지니아의 로아노크로 보내 정착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 정착민들은 불과 3년 사이에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수수께끼처럼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 이후 아메리카에 영구식민지를 개척하려는 영국의 열정이 다소 시들해졌다가 17세기에 와서 다시 불타기 시작했다. 그 첫 결실이 바로 제임스타운의 건설이다.

 

1606년에 영국 왕 제임스 1세는 런던회사에 북미 남부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할 특허장을 주었다. 그 특허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짐은…[그 지역의 이교도들과 야만인들에게 크리스트교 신앙을 전파하여 그들을 인간다운 교양과 평온한 통치로 인도하려는]…그처럼 숭고한 과업의 촉진을 위한 그들의 바람을 심히 가상히 여기고 관대히 용납하면서, 이 개봉칙허장을 통하여, 그들의 겸허하고 선의에 찬 바람을 관대히 용납하고 승낙한다.


영국 국왕의 인류애가 참으로 가상하지 않은가? 아무튼, 이 특허장에 따라 1606년 12월 19일에 템스 강 하구의 블랙월에서 갓스피드, 디스커버리, 수잔 콘스탄트라는 세 척의 배가 버지니아를 향해 출항해 1607년 4월에 체사피크 만에 도착했다. 원래 144명이 출발했으나 거친 항해 도중에 40명이 죽고 104명만 미국 땅에 발을 디뎠다. 그들은 해안에 닿자 강을 타고 내륙으로 들어가 마침내 정착지를 건설하고 왕의 이름을 따서 제임스타운이라고 불렀다. 그곳이 미국에 건설된 영국 최초의 영구 식민지이자 미국 남부역사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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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town


그들의 아메리카 정착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곳에서 유럽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기아와 말라리아 같은 질병에 시달리면서 하나씩 죽어가서 그 해가 지나기 전에 겨우 38명만 살아남았다. 그나마 1608년 1월에 영국에서 보급품을 실은 구호선이 도착하면서 전멸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후 존 스미스가 그 식민지의 지도자가 되자 주민들은 분열을 극복하고 단결하게 되었다. 그는 필요하다면 원주민들과 싸우고 그들을 습격해 식량을 약탈하기를 마다치 않았다. 그리하여 그해 겨울은 200여 명의 거주자 중 거의 사망자 없이 무사히 넘어갔다. 그러나 스미스는 영화에서와는 달리 1609년에 화약이 폭발해서 중상을 입는 바람에 치료를 받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으며, 그 후 다시는 버지니아로 돌아오지 못했다.

 

버지니아 회사는 초기에는 영구정착보다는 재화를 획득하기 위해 식민지를 개척했기 때문에 남자들만 보냈다. 그리하여 제임스타운은 남자들만의 세계였다. 그러나 1609년 여름 회사는 제임스타운 식민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600여 명의 이민자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버뮤다에서 암초에 걸려 꼼짝달싹 못 하고 그나마 도착한 사람들은 긴 항해로 지친 데다 질병으로 인해 겨울이 오기 전에 대부분 죽었다. 더욱이 1609년에서 1610년 사이의 겨울에 닥친 대기근으로 인해 그나마 남은 주민들이 거의 모두 죽는 참극이 벌어졌다. 1610년 버뮤다 해상에서 좌초되었던 배가 마침내 오니 500여 명의 사람 중 겨우 60명 정도만 살아남아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시신까지 뜯어 먹었다. 그런 현실을 목격한 이들은 결국 정착을 포기하고 남은 사람들을 싣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때마침 영국에서 온 구호선과 마주치자 다시 주저앉았다.

 

그들이 정착에 성공한 데는 포카혼타스의 남편인 존 롤프의 기여가 크다. 그가 1612년에 스페인 식민지에서 담배씨를 얻어와 재배하는 데 성공하면서 버지니아 식민지는 담배 산업으로 급격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담배 산업이 번창하자 많은 백인이 버지니아 식민지로 몰려들고 그들은 담배를 재배할 더 많은 땅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점점 더 내륙 깊숙이 파고들었으며 인디언들과 더 자주 충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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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들의 아메리카 정착은 처음부터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과 투쟁으로 얼룩졌다. 그 가장 중요한 충돌이 포하탄 인디언 부족과 백인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1622년 3월 아침에 원주민들이 백인 거주지를 기습해 존 롤프를 비롯한 347명의 백인을 죽이고 후퇴했다. 백인들은 그 보복으로 오래지 않아 포하탄 족을 전멸시켰다. 이 전쟁으로 버지니아 회사는 1624년에 파산했으며 그곳 식민지는 왕령 식민지가 되었다. 앨런 브링클리의 <미국인의 역사>에 따르면, 1607년부터 1624년까지 초기 정착기 17년 동안 8,500명 이상의 백인이 버지니아에 도착했지만 1624년에 백인 인구는 겨우 1,300여 명이었다. 대부분이 식민지에서 죽었거나 정주를 포기하고 귀국했다는 뜻이다.

 

영국인들이 이렇게까지 아메리카에 정착하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위의 특허장의 구절에서도 보듯이 야만의 땅에 기독교를 전파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회사가 이득도 없이 단순히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그렇게 험난한 모험을 하겠는가? 그들이 정말 원한 것은 스페인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금과 은을 캐고 부를 축적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정착 초기부터 투자자들의 이익을 위해 금과 은을 구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들에게 정말 시급한 것은 금도 은도 아니고 그곳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영국이 16세기 중엽부터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이 무렵 영국은 유럽의 분쟁에 자주 휘말려 들었으며 종교개혁의 몸살을 앓고 있었다. 또한, 양모 산업의 발달로 농촌에 유휴노동력이 급증하면서 그들이 도시로 몰려와 거지가 되거나 범죄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인구가 급격히 증가해 사회적인 압력이 커졌다. 1485년에는 300만이었던 인구가 1603년에는 400만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유럽대륙과 교역이 늘어나면서 상인계층이 해외 식민지 개척을 절실히 원했다. 여기서 잠시 토머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1516)의 한 구절을 보자.


양은 보통 아주 온순하고 조금밖에 먹지 않는 동물인데, 이제는 아주 게걸스럽고 사나워져서 사람들까지 먹어치운다고 들었습니다. 양 떼들은 경지, 가옥, 도시들을 황폐시킵니다. (…) 그들[귀족, 젠트리, 수도원장들]은 경작용 농지를 남겨놓지 않고 모든 땅을 울타리로 둘러막아 목장으로 만들고, 가옥을 헐어버리고 마을을 없애버립니다. 교회들은 남겨놓는데, 그것은 단지 양의 막사로 쓰기 위해서이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이미 16세기 초에 영국의 양모 산업이 전통적인 재배농업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농촌에서 양을 키우는 것은 밀과 같은 농작물을 재배하는 것보다 노동력을 훨씬 더 적게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농촌에서 밀려난 유휴노동력과 자연적으로 늘어난 인구가 영국에 상당한 압박이 되었을 것은 당연하다. 바로 그 남아도는 사람들을 내보낼 식민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채무자 부랑자 범죄자 같은 사람들을 호주와 뉴질랜드와 미국 같은 식민지로 보냈다. 더욱이 헨리 8세의 종교개혁 이후 영국은 국교인 성공회와 청교도 사이에 긴 투쟁의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 투쟁에 지친 이들 역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라는 새로운 땅으로 발길을 돌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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