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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비례대표 공천 관련 특별당비 금품수수 혐의로 구속됐던 서청원 전 친박연대 대표는 가석방으로 풀려나며 이렇게 말했다.


 

 “박 대표 한국형 복지 세미나를 개최하는 것을 보고, 굉장히 많이 든든했습니다.


 “우정은 변치 않을 때 아름답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제가 그 말로 대신하겠습니다.”


 

참 아름다운 우정이다. 일찍이 "살아서 돌아오라"라며 감동의 생환 명령을 내렸던 박근혜 대표도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그를 격려했다. 이 자리에는 홍사덕, 조원진 등 친박이 대거 모여 불의에 맞서 싸운 그가 자유를 되찾음을 축하했다.


여기, 또 하나의 친박연대가 있다. 현대의 친박연대가 보여준 그 끈끈한 우정에는 다소 미치지 못할 정도이고, 받은 정치적 박해도 친박연대에 비해 미미하지만 그래도 서로를 향한 마음이 묻어나오는 표현은 제법 비슷했다. 18세기의 친박연대, 그들의 따거 박지원과 친박들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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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국옹(누구의 호인지 알 수 없음)麯翁과 함께 걸어서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에게 갔다. 풍무風舞 김억金檍은 밤에야 도착하였다. 담헌이 슬瑟을 타자, 풍무는 금琴으로 화답하고, 국옹麯翁은 갓을 벗고 노래한다. 밤 깊어 구름이 사방에서 몰려들자 더운 기운이 잠시 가시고, 현絃의 소리는 더욱 맑아진다. 좌우에 있는 사람은 모두 고요히 묵묵하다. 마치 내단內丹 수련 하는 이가 내관장신內觀臟神 하는 것 같고, 입정에 든 스님이 돈오전생頓悟前生 하는 듯하다. 대저 스스로 돌아보아 곧으매 삼군이 막아선다 해도 반드시 나아갈 기세다. 국옹麯翁이 노래할 때를 보면 해의방박解衣磅礴, 옷을 죄 벗어 부치고 곁에 사람이 없는 듯 방약무인하다. 


연암록, <하야연기夏夜讌記>


 


어느 여름날, 밤이 고즈넉히 깊었을 무렵. 홍대용의 집으로 사람이 하나둘 모여든다. 그런데 모인 양반들이 하나같이 익숙한 이름이다. 국옹이란 사람 빼고. 풍무 김억은 당대의 가객(歌客)으로 이름이 높았고, 담헌 홍대용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 글을 쓴 사람, 박지원의 이름 석 자를 모르는 당대의 조선 사대부는 없었을 것이다. 이 똑똑하신 양반님네들에게는 하나씩 다 특기가 있었던지 홍대용이 가야금을, 김억은 거문고를, 그리고 국옹은 노래를 한다. 추측컨데 연암은 박자를 보탰겠지. 그렇다. 이들이 모여 살던 곳이 백탑, 즉 현재의 탑골공원이니, 탑골공원 3인조 인디밴드의 결성이라 할 수 있겠다. "좌우에 있는 사람은 모두 고요히 묵묵하다"라는 글로 볼 때 주변에 관객도 몇 있었나 보다. 참으로 낭만적인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왜, 이들은 정조가 그토록 강조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여기서 놀고 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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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은 1737년, 명문가인 반남 박씨 노론가의 자제로 출생했다. 그런데 당시 기울어가던 양반계급의 경제 상황은 명망 높은 가문에도 영향을 미쳐, 연암이 자랄 때에 100냥도 안 되는 밭과 30냥도 안 되는 집 한 채밖에 없었다고 한다. 물론 공부 잘했다는 얘기야 뻔한 거지.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구고 책만 파셨단다. 이를테면 ‘쁘띠 브루주아 엘리뜨’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양반, 남들은 평생 과거 한 번 붙어보겠다고 대리 시험이다 뭐다 하면서 쌩난리를 치는데 거들떠도 안 보고 오히려 소설이나 쓰면서 양반사회를 까던 젊은 나날을 보낸다.


자신이 속한 계급사회의 모순점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지, 우울증을 얻어 거리로 쏘다녔단다. 18세 무렵에 지은 <광문자전>으로 시작해 <민옹전>, <방경각외전>이 쓰여진 30세 무렵까지 방구석에서 소설이나 쓰고 심심하면 친구집 가서 술이나 먹고 답답함을 해결하기 위해 거리로 나가며 지냈다 하니, 이거 참 한량이 따로 없다. 어머니, 할아버지, 아버지가 차례로 돌아가시자 가세가 기울고 1768년, 백탑으로 이사한다. 비록 가세는 기울었지만, 연암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뿐만 아니라 당 대의 조선에도 영향을 끼친 연암의 이사는 초고급엘리트들과의 친목질에 큰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친목모임을, 우리는 백탑파(白塔派)라 한다.

 

백탑파의 구성원은 누가 있을까? 홍대용, 박지원, 이서구 같은 사대부 계층과, 김용행 백동수 등의 서얼 지식인 계층을 포함하여 이희경 이희맹 이덕무 유득공 유금 서상수 등 제법 익숙한 이름이 여럿 보이고, 이덕무 같은 이는 이름을 널리 떨쳐 정조에게 중용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홍대용이 중국 가서 친목질로 뚫어놓은 중국 지식인들과의 편지 교유도 있었고. 이들은 예술적 감성과 학문적 깊이를 서로 공유하며 그 관계를 꽃피웠다.

 

이들의 낭만적 친목질을 훔쳐볼 수 있는 한 편의 글을 더 읽어보자.

 


7월 13일 밤, 성언聖彦 박제도朴齊道가 성위聖緯 이희경李喜經과, 아우 성흠聖欽 이희명李喜明, 약허若虛 원유진元有鎭, 여생과 정생, 그리고 동자 견룡이와 더불어 무관 이덕무에게 들러 그를 데리고 왔다. 그때 마침 참판 원덕元德 서유린徐有麟이 먼저 와서 자리에 있었다. 성언은 책상다리를 한채 팔꿈치를 기대고 앉아, 자주 밤이 깊었는가를 보면서 입으로는 가겠노라고 말하면서도 부러 오래 앉아 있었다. 좌우를 돌아봐도 선뜻 먼저 일어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원덕도 또한 애초에 갈 뜻이 없는지라, 성언은 마침내 여러 사람을 이끌고 함께 가버리고 말았다.

 

한참 뒤 동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은 이미 가셨을테고 여러 사람들이 거리 위를 산보하면서 나를 기다려 술을 마시려고 한다고 하였다.

원덕이 웃으며 말하였다.


“진秦나라 사람이 아니면 내쫓는구만.”


마침내 일어나 함께 거리 위로 걸어 나섰다. 성언이 나무라며 말하였다.


“달이 밝아 어른이 문에 찾아왔거든 술을 차려 내와 즐겁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귀한 사람만 머물려두고 이야기하면서, 어이해 어른으로 하여금 오래 바깥에 서있게 한단 말이야?”


내가 불민함을 사과하자, 성언은 주머니에서 50전을 꺼내서는 술을 사오게 하였다.



술 먹기 좋은 7월의 밤, 박제가의 형인 박제도가 무리를 이끌고 연암의 집을 찾는다. 그런데 웬걸? 생각지도 못한 먼저 온 손님(원덕 서유린)이 연암과 함께 있다. 박제도는 먼저 온 손님과 연암의 대화에 끼기에는 예가 아닌지라, 잠자코 그가 가길 기다린다. 하지만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박제도는 "동자야 지금 몇 시냐? 어흠 슬슬 가야겠구만."라며 혼잣말을 하기를 몇 번째. 그러나 이것은 눈치게임, 박제도는 먼저 온 손님 서유린에게 "연암하고 많이 놀았으니 이제 집에 가시오~"라는 무언의 압박을, 서유린은 "싫은데? 연암은 나만의 것!"이라며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인기 폭발하는 연암의 매력이 어마어마했나 보다. 마침내 지친 박제도 무리가 다른 곳으로 갔다.

 

하지만 이것은 페이크. 박제도가 동자를 연암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동자야, 연암 선생 댁에 가서 손님 갔으면 빨리 이쪽으로 합류하시라고 전해라. 한잔 하자고." 허나, 서유린도 강적이다. 아직 안 갔다. 그리곤 웃으며 "나 왕따시키고 지들끼리 잘 놀아라 그래!"('진나라 사람 운운' 한 것은 전국시대 진나라에서 진나라 사람이 아닌 이는 모두 추방조치 한 고사)라고 쏘아붙이자, 연암은 그를 달래 박제도 무리와 합류했다.

 

합류하자마자 아까 오래 기다리며 삐졌던 박제도도 연암에게 볼멘소리를 한다. "아니 이 어른이 왔으면 당연히 술을 내와야지! 손님 와 있다고 어떻게 나를 쌩까!" 이거, 이 양반님네들 속이 참 좁다.



조금 술이 취하자 인하여 운종가雲從街로 나와 달빛을 밟으며 종각鍾閣 아래를 거닐었다. 이때 밤은 이미 삼경하고도 사점을 지났으되 달빛은 더욱 환하였다. 사람 그림자의 길이가 모두 열 길이나 되고 보니, 자기가 돌아보아도 흠칫하여 무서워 할만 하였다. 거리 위에선 뭇개들이 어지러이 짖어대고 있었다. 오견獒犬이 동쪽으로부터 왔는데 흰빛에다 비쩍 말라있었다. 여럿이 둘러싸 쓰다듬자, 좋아서 꼬리를 흔들며 고 개를 숙이고서 한참을 서 있었다.

 

(중략)

 

무관懋官이 술에 취해 ‘호백豪伯’이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잠시 후 있는 곳을 잃게 되자, 무관은 구슬프게 동쪽을 향해 서서 마치 친구라도 되는듯이 ‘호백아!’하고 이름을 부른 것이 세 차례였다.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고 떠들자, 거리의 뭇개들이 어지러이 내달리며 더욱 짖어댔다. 마침내 현현玄玄의 집에 들러 문을 두드려 더욱 마셔 크게 취하고는 운종교를 밟고서 다리 난간에 기대어 이야기 하였다.



어쨌든 이들은 모두 함께 술에 즐겁게 취해 종각 아래를 걸었다. 꽤 즐거운 모임이었던지 밤 1시가 넘어서까지 술을 먹었으니 새벽같이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던 옛날 사람들 기준으로는 현대인이 한 새벽 5시까지 술을 퍼먹은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달빛이 무르익고, 달빛이 진해지니 그림자도 더욱 길어진다. 연암이 뒤를 돌아보니 자신의 어마무시한 그림자를 발견하곤, 아이처럼 순간 섬뜩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풍채는 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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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했으니 그 그림자도 엄청났겠지.

 

길을 가다 개 한 마리가 이 무리에게 다가왔는데, 이놈은 몽고에서 들어온 개인지라 여러 사람들이 제법 신기해하며 쓰담쓰담 했나 보다. 개는 또 그게 좋다고 꼬리를 살랑살랑하며 애교를 부렸나 본데, 여기에 심쿵한 이덕무는 내친김에 개에게 '호백이'란 이름을 붙여 준다. 똑똑한 사람답게 펀치라인 라임이 예술이다. 胡白(오랑캐 땅에서 온 흰 개)를 豪伯(호걸중에 으뜸)이라는 뜻으로 싹 바꿔주는 이 작명 센스란.


이윽고 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덕무는 아쉬웠는지 동쪽을 향해 "호백아!" "호백아!" "호백아!!!"라고 세 번 외친다. 이걸 보고 사람들은 또 왁자지껄 웃으니, 덩달아 동네 온 개들이 짖어 싼다. 이거, 완전 인근소란과 음주소란에 해당하는 경범죄다.

 

여기서 해산하지 않고, 현현이라는 사람의 집에 도착해서 2차를 즐긴 후 운종교 다리에 기대어 수다를 떤다.

 


지난 날 대보름 밤에 연옥 유련은 이 다리 위에서 춤을 추고, 백석白石 이홍유李弘儒의 집에서 차를 마셨었다. 혜풍 유득공은 장난으로 거위 모가지를 끌고 몇 바퀴 돌면서 마치 하인에게 분부라도 내리는 시늉을 지어서 웃고 즐거워들 하였다. 이제 하마 여섯 해가 지났다. 혜풍은 남쪽으로 금강錦江에 놀러갔고, 연옥은 서쪽으로 관서關西 땅에 나가 있으니, 모두들 별고나 없는지?

 

다시 수표교에 이르러 늘어 앉았자니, 다리 위 달은 바야흐로 서편에 기울어 덩달아 한창 붉고, 별빛은 더욱 흔들려 둥글고 큰 것이 얼굴 위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슬은 무거워 옷과 갓이 죄 젖었다. 흰 구름이 동편에서 일어나 가로로 끄을며 둥실둥실 북쪽으로 떠가자, 성 동편은 짙푸른 빛이 더욱 짙게 보였다. 개구리 소리는 마치도 멍청한 원님에게 어지러운 백성들이 몰려들어 송사하는 것만 같고, 매미 울음은 흡사 공부가 엄한 서당에서 강송講誦하는 날짜가 닥친듯 하며, 닭 울음소리는 마치 한 선비가 똑바로 서서 간쟁함을 제 임무로 삼는 것만 같았다.

 

연암록, <취답운종로기>



다리에서 한참을 떠들다 보니 연암은 문득 옛 생각이 났는지, 연옥 유련이란 사람은 다리 위에서 스트리트 댄스를 선보이고 유득공은 거위 학대를 자행하며 우스꽝스러운 꽁트를 선보이던 정경을 추억한다. 그런데 그 때가 벌써 6년 전이니, 세월 참 빠르다고 느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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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운종가. 왼쪽에 보신각이 보인다

 

이렇듯 풍류와 흥취를 알았던, 놀 줄 알았던 백탑스타일은 이 그룹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사극을 보면 양반들은 꼭 기생집에 모여서 그녀들의 악기 연주와 춤사위를 보며 박자도 안 맞는 박수를 치는 모습이 대부분인데, 이렇게 제대로 놀 줄 아는 양반들도 꽤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광경은 조선 후기 사농공상의 계급해체와 더불어 대중문화예술의 발달과 저변확대에 따른 양반문화의 변화에서 야기된 것이지만. 그래도, 퍽 흥겹지 않은가? 춤추는 훗날의 판서, 거문고 타는 훗날의 규장각 연구원, 노래하는 훗날의 현감님이라니. 연암이 후에 두고두고 이때의 즐거운 나날들을 잊지 못하는 것이 이해가 갈 따름이다.

 

1780년. 연암 일생에서 가장 큰 경험이었던 5개월간의 중국유람은 2년 뒤 <열하일기>로 엮어졌다. 그런데 출간도 되기 전에 필사본이 유출돼 조선 사대부들에게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양반은 엄격 진지하게 "이딴 건 글이 아니다!"라 일갈했고, 어떤 이는 삼국지를 읽듯 밤새워 읽은 뒤 또 친구에게 전해줬다. "싫든 좋든, 나는 전설을 써내려간다"고 말한 호날두처럼 연암도 그렇게 레전드가 되었다.

 

그러나 1792년. 또 엄격 진지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정조가 이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는지 문체반정을 일으킨다. 실록의 기사를 참조하자.


 

"그 가운데에서 금조는 《경국대전》과 《대전통편》에 있기는 하나 항례(恒例)로 무역한 물건이 많으므로, 공문 외 석 자 이하를 첨서(添書)한 것은 개요(槪要)하는 것이 행하기 쉽기 때문이다. 병오년의 정식으로 말하면, 조령(條令)이 조금 오래 되면 법이 해이하기 쉬우니, 이번 사행 때에 다시 더욱 더 밝혀서 엄히 경계하라. 서책으로 말하면 우리 나라 사람의 집에 넘치고 찬 것이 모두 당본(唐本)인데, 이미 나온 본에서라도 탐독하면 해박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문장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니, 선비가 다시 무엇하러 많이 사겠는가? 가장 미운 것은 이른바 명말(明末)·청초(淸初)의 문집(文集)과 패관 잡설(稗官雜說)이 더욱이 세도(世道)에 해로운 것인데, 근래의 문체(文體)를 보면 경박하고 촉급하여 관각(館閣)의 대수필(大手筆)이 없는 것이 다 잡된 책이 많이 나온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법을 만들어 금지할 것은 없더라도 사신인 자가 그 중에서 심한 것을 금할 수 있다면 오히려 아주 없는 것보다 나을 것이니, 이 뜻을 사신이 알게 하라. 잡술의 글로 말하면 원사목 가운데에 특별히 과조(科條)를 세워서 반드시 매우 금하도록 하라."

 

11년 10월 10일 갑진 (1787년) <비변사에서 사행 재거 사목을 바치다>



조선왕조실록 페이지에서 '문체'를 검색하면 정조 대의 검색결과가 가장 많다. 정조는 꼼꼼하고 세심하기가 타의 추종을 불의하는 사람이라 과거시험에 즉위 초기부터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문체의 반듯함을 강조하였고, 꼼수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열하일기>의 대유행으로 그런 문체를 본뜬 글이 공문서에도 올라오기 시작하자 경고를 내린다.

 

"성균관 시험의 시험지 중에 만일 조금이라도 패관잡기에 관련되는 답이 있으면 비록 전편이 주옥같을지라도 하고(下考)로 처리하고 이어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어야 할 것이다. 내일 승보시(陞補試)를 보일 때 여러 선비들을 모아두고 직접 이 뜻을 일러주어 실효가 있게 하라. 엊그제 유생 이옥(李鈺)의 응제(應製) 글귀들은 순전히 소설체를 사용하고 있었으니 선비들의 습성에 매우 놀랐다.

 

(중략)

 

오늘 이 하교가 있었음을 듣고서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올바른 길로 가기 전에는 그가 비록 대궐에 들더라도 감히 경연에 오르지는 못할 것이며 집에 있으면서도 무슨 낯으로 가묘(家廟)를 배알하겠는가. 공철의 지제교 직함을 우선 떼도록 하라. 그 밖에 문신들 중에서도 너무 좋아하는 자들이 상당히 있으나 일부러 한 사람 한 사람 지명하고 싶지 않다. 정관(政官)으로 하여금 문신 중에서 그런 문체를 쓰는 자들을 자세히 살펴 다시는 교수(敎授)의 후보자로 추천하지 말도록 하라."

 

16년 10월 19일 (1792년)

<동지 정사 박종악 등에게 당판의 수입 금지와 소설 문체 사용의 금지를 명하다>


 

정조가 영점을 조준한 주 인물들은 성균관 유생과 신진관료들이었다. 이제 갓 사회에 들어온 이들에게 엄혹한 사회의 쓴맛을 제대로 보여줬다. 삭탈관직뿐 아니라 문체를 고치지 않을 시 다시는 관직에 나서지 못하게끔 했다. 여성적인 감수성으로 서정적인 글을 썼던 성균관 유생 이옥은 시범 케이스로 말려 이후에도 상당히 고달픈 인생을 살아야 했다. 이때 훗날 세도정치로 이름을 날린 안동김씨의 김조순도 규장각 신인 관료 시절에 문체로 걸려 반성문을 써야 했다. 그리곤 급격히 보수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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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문체반정은 단순히 품위 유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청에서 들어오는 소설들과 백탑파를 중심으로 한 글들의 핵심에는 양반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과 당시 패쇄적이었던 조선 체제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양반 사회 개혁하자!" "청나라에게 배우자!" 정조는 이 두 외침을 체제 위험 요소라 받아들였을 것이다. 따라서 문체반정은 일종의 사상검증이었다.

 

당연하게도 정조의 탄착군 안에는 백탑파의 수장, 박지원도 있었다.


 

하루는 임금님께서 규장각 직각(直閣) 남공철(南公轍)에게 다음과 같은 분부를 내리셨다.

"근자에 문풍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다. 『열하일기』를 내 이미 익히 보았거늘 어찌 속이거나 감출 수 있겠느냐?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된 후로 문체가 이같이 되었거늘 본시 결자해지(結者解之)인 법이니 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을 한 부(部) 지어 올려 『열하일기』로 인한 죄를 씻는다면 음직(蔭職)으로 문임(文任) 벼슬을 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너는 즉시 편지를 써서 나의 이런 뜻을 전하도록 하라!“

 

(중략)

 

이 때문에 당시 서울에 있던 여러 분들은 이렇게들 말했다.

"임금님께서 『열하일기』를 거론하신 건 기실 노여워하여 하신 말씀이 아니라 장차 파격적인 은총을 내리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님의 분부 중에 여러 사람의 잘못을 일일이 지적하면서도 특히 박아무개를 들어 죄인 중의 우두머리라고 하신 것은 임금님께서 박아무개에게 주의를 주어 그 글이 좀 더 발전되게 함으로써 장차 문임(文任)을 맡기려는 의도이다. 더군다나 『열하일기』를 가리켜 문체를 그르친 장본(張本)이라 하시면서도 그것을 익히 보았노라고 하여 애호하는 뜻을 나타내셨음에라! 반드시 바른 글을 한 부 지어서 얼른 바치도록 해야 한다.“

 

(중략)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임금님의 이번 분부는 참으로 전무후무한 은총이오. 임금님께서 『열하일기』의 문체가 잘못 되었다고 하여 죄를 주셨으니 신하된 도리로서 그 죄를 받는 것이 마땅하오. 견책을 받은 몸이 새로 글을 지어 올려 자신의 글이 바르다고 자처하면서 이전의 잘못을 덮으려 해서야 쓰겠소? 더구나 잘못을 반성하고 바른 글을 지어 바치면 음직으로 문임(文任) 벼슬을 주는 것도 아깝지 않다고 하신 것은 스스로 반성하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거늘, 만일 이에 편승해 우쭐하여 글을 지어 바친다면 이는 바라서는 안될 것을 바라는 것이겠지요. 따라서는 안될 것을 바라는 건 신하된 자의 큰 죄라오. 그래서 나는 새로 글을 지어 바치려고는 하지 않으며, 예전에 지은 글 몇 편과 안의에 와 지은 글 몇 편을 뽑아 서너 권의 책자로 만들어두었다가 임금님께서 또다시 글을 지어 올리라는 분부를 내리시면 그때에 가서나 분부를 받들어 신하의 도리를 다할까 하오."

 

<나의 아버지 박지원> 박종채 중


 

박지원은 문체를 포기하지 않았다. "씨바.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라고 외친 것이다. 이덕무가 <무예도보통지>를 지어 올릴 때 정조는 "다 좋은데 연암의 글체를 본떴네? 잡았다 요놈!" 할 정도로 불온서적들을 야기하고 사회를 분열하며 반국가적 사상을 퍼뜨리는 배후세력이 박지원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암은, 정든 백탑을 떠나고 연암곡이라는, 깡촌으로 홀라당 도망가버린다. 남은 이들은 관직에 나가고, 지방으로 흩어지며 백탑파의 친목질은 서서히 저물었다.


그럼에도, 연암의 문체에 대한 곤조는 변하지 않았다.

 



사마천과 반고가 다시 살아 난대도 班馬若再起


사마천과 반고를 배우진 않으리라. 決不學班馬


새 글자 만들긴 어렵다 해도 新字雖難刱


내 품은 생각은 써내야 하리. 我臆宜盡寫


어이해 옛법에 얽매이어서 奈何拘古法


두고두고 여기에만 매달린단 말인가. 劫劫類係把


지금이 천근淺近타 말하지 말라 莫謂今時近


천년 뒤엔 응당히 높을 터이니. 應高千載下

 

〈증좌소산인贈左蘇山人〉 중



이렇듯 정조가 그토록 강조하는 고문형식으로 쓴 시에서 조차 고문을 까고 있다. 독한 양반이다. 그리고 그는 옳았다. 천 년이 되기도 전에 지금에 와서 그는 조선 최고의 문장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니. 그가 고문을 까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나의 자유로운 생각을 막는 형식'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즉, 그가 '자유로운 사고'를 맘껏 하길 원했음을 뜻한다. 훗날 관직에 나가긴 하지만, 제 발로 과거에 응하지 않은 까닭도 거기에 있다. "나의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 하지마!"라고 외치는 '쁘띠 브루주아 엘리트' 계급의 '리버럴'이랄까? 어쩐지 누군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현대의 친박연대와는 달리, 또 현대의 박지원과의 달리 백탑파와 그 때의 박지원은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 사회의 모순을 현저히 느꼈으나 그것을 체제 내에서 개혁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정치적, 또는 그 이외의 이익을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지적 탐구와 지적 유희를 위해 모였다. 그들의 눈에는 스러져가는 조선의 모습이 파편처럼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박지원의 가풍은 이후 박규수로 이어져 개화파를 낳았지만, 박지원의 문체는 결국 주류가 되지 못한 채 스러졌다. <열하일기>는 그가 죽고 난 후인 1820년에야 와서 제대로 탈고되었다.

 

그들의 우정도 세상의 풍파와 함께, 또 나이가 들어감과 함께 하나둘 흩어지고 세상을 떠났다. 모든 인연이 그러하듯이.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쓰고 싶어 하던 문체로 적은 '친목질 풍경'은 참 멋스럽고 한편 고즈넉한 것이었다. 비록 그들은 나이도, 출신도, 집안도, 때때로 사상도 조금씩 달랐지만 맘껏 자유로운 사고를 하기 위해 뭉쳤던 그들의 모습이 그 시절에는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나 느끼게 된다.

 

마지막으로, 박제가와 유금이 나눈 시를 부쳐본다.

 



올 때는 달이 희미하더만

술 취하자 눈이 잔뜩 쌓였군.

친구가 없다면

내 어이 견디리

나는 ‘이소’를 안고

그대는 해금을 품고

이 밤에 문을 나서

무관을 찾아가세.


박제가의 ‘밤에 유금의 집을 방문해’

 


객은 ‘이소’를 품에 안고서

눈 오는 밤 나를 찾았네.

그대의 불평스런 맘을 알기에

내 한 번 ‘광릉산’을 연주하노라.



이에 대한 유금의 화답시





 

* 참고

- 정민교수의 연암읽기 페이지 http://jungmin.hanyang.ac.kr/front/korea/08?page=3

- 한국고전데이터베이스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 고미숙 저,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박종채 저, <나의 아버지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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