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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즈음, 어느 강연장이었다. 연단에 오른 노년의 남성은 자신의 인생을 뒤바꾼 경험을 차분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말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어린 청년의 머리가 박살나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그 순간,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이다. 그는 이후 재야시민운동에 투신했고, 그 바닥에서 그의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의 인사가 되었다. 그가 말한 경험은 1980년 5월의 광주였다. 그리고 그해 말인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대화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대대적인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사면 대상자의 이름에는 당시 어린 청년을 향해 발포한 군을 장악하고 있던 전두환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국민대화합'이란 구호는 내게 가장 치졸하고 더러운 면죄부의 제목으로 각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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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사망하자 전두환은 그해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을 장악하고 계엄을 선포했고,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1980년 서울의 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군으로 무력 진압했다. 상식적인 구호를 외친 무고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덕분에 전두환은 장충체육관에 모여 간접회의를 통해 지 멋대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의 선배 박정희가 그러했듯 전두환이 대통령을 한 번 더 해먹고, 그의 후계자인 노태우가 그 자리를 이어받고, 노태우와 손잡은 김영삼에게 이어지며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논리는 바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전두환의 평화는 상식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역사의 판단에 맡겨두자'는 김영삼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향한 수많은 고소·고발이 이어졌고, 결국 1995년 구속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또 다른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12.12 군사반란, 5.17 내란음모, 불법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에 5.18 관련 내란목적의 살인죄 등이 추가되어 구속된 전두환은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무기징역수 전두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면'받기에 이른다. 당시 대통령 김영삼의 사면에 의해 무고한 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게 만든 장본인의 죗값은 2년의 수감생활로 '퉁'치게 된다. 고작 2년으로 말이다.




2006년 10월 23일, 특수목적법인을 이용한 분식회계를 통해 2만 1천 명의 직원을 삶을 순식간에 허공에 날려버린 에너지 기업 ‘엔론’의 CEO 제프리 스킬링이 휴스턴의 연방법원에 섰다. 재판 내내 엔론에 의해 피해를 본 증인들이 연달아 증인석에 서서 분노를 토해냈다.


"당신이 샴페인에 바닷가제 요리를 먹을 때 나와 내 딸은 쿠폰을 모으고 남은 음식을 먹었어."


판사는 스킬링에게 24년 4개월이라는 경제사범 역대 최고 형량을 선고했다. 스킬링의 변호사는 10개월만 감형해 달라 요청했다. 그래도 한때 <포춘>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의 수장이었음을 감안해달라는 것이었다. 더욱 중요한 건 감형이 확정되면 교정국 정책에 따라 강력범들과 함께 하는 험악한 수감생활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까"


판사는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 전해진다. 2006년에 구속수감된 제프리 스킬리는 2013년 재선고 공판에서 10년을 감형받고 현재 콜로라도 교도소에서 강력범들과 함께 복역 중이다. 탈옥을 하지 않는 이상 그가 채워야 할 형량은 정확히 14년 4개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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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전두환은 서면을 통해 제출한 재판 최후 진술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본인은 1989년 12월 30일, 당시 여·야 4당 합의에 의해 국회의 증언대에 섰을 때, 이미 과거에 있었던 모든 잘못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 한 사람에게 있으며, 이를 위해 국민이 원한다면 감옥이든 죽음이든 그 무엇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한 본인의 마음은 5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두환의 마음은 1997년 특별사면으로 달랑 2년여의 수감생활을 마친 뒤 변했다. 추징금 논란에 '통장 잔고 29만 원'이라는 헛소리를 씨부리고, 국가 권력을 동원해 시민의 죽음으로 내몰고는 1989년 광주청문회가 열리자 "노태우가 우릴 쫓는 것 같아 무서워 백담사로 갔다."며 호소를 하고 자빠졌다. 곧 자서전이 출간될 것이라는 소식과 함께 "광주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한 인터뷰 내용이 전해졌다. (5월 17일자 동아일보 보도 내용) 이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수많은 무고한 목숨이 공권력에 의해 사라졌음에도 그 어떤 책임도, 교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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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이 이스라엘을 방문, 유대인을 향해 저지른 나치의 만행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자 당시 이스라엘 총리였던 골다 메이어는 "진심은 받아들이고 용서하겠다. 하지만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설령 사죄하는 대상의 진심이 느껴진다 하더라도, 그래서 용서했다 하더라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 우리는 그러한 기억의 지침을 역사라고도 부른다. 우리는 당시 우리를 대신해 거리에 나섰던 5월 광주의 시간이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특별법이 제정되고 기념일로 지정되었으니 이젠 잊고 치유를 마무리하는 기억 저편의 시간으로 남겨둬야 하는 것인가.


2007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한 박근혜 당시 대선 예비후보는 "당시 광주의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고 희생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으나 취임 첫해에만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고 그 이후론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기념사도 쓰지 않았다. '한 기업을 파산으로 이끈 경영자와 수많은 시민의 목숨을 빼앗은 독재자 중에 누나 더 나쁜 넘이냐?'는 질문은 하지 않겠다. 책임을 특히 권력의 책임을 묻지 않는 사회는 언제든 치욕스러운 과거사의 한 장면으로 회귀하기 쉬운 위험한 사회를 의미한다.


전두환은 '역사적 책임감으로 사과할 의향은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광주에 내려가서 뭘 하라고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우리의 역사가 그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았는데 그에게 역사적 책임감이 있을 리 만무하다. 이 무책임의 사회적 허용이 만들어낸 부끄러운 한 장면만으로도 우리가 5월의 광주를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해야 할 이유로 충분하다. 일 년에 단 하루, 5월 18일 오늘만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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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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