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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천재 물리학자이며, 인류 최고의 지성, 그리고 노벨상을 받았던 인물. 물리학의 ‘물’자도 모르는 이들도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자란 사실은 알고 있다. 좀 더 나가면 E=MC²이란 등식까지 알고 있는 사람들도 무척 많을 것이다.

 

얼마나 천재면 그의 고향에서 지구 반 바퀴를 돌아야 하는 한국 땅에서 아이들 마시는 우유의 모델로까지 등장하겠는가? 여기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공적인 모습, 학자로서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의 사생활, 가정생활은 어땠을까? 그가 두 번의 결혼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의 두 번째 부인이 그의 사촌인 엘자(Elsa)였다는 것 정도는 아인슈타인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에 관한 글에서 그의 첫 번째 부인인 밀레바 마리치(Mileva Maric)에 관한 이야기를 찾는 건 어렵다. 한때 아인슈타인의 아내이자, 아인슈타인과의 사이에서 3명의 아이를 낳은 어머니이며, 그가 ‘광양자 이론’으로 노벨상을 받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밀레바 마리치! 어째서 그녀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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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스위스 취리히의 스위스 국립공과 대학 앞. 대학 합격자 명단을 바라보던 한 학생이 고개를 떨어뜨린다. 이때 이 학생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예? 알버트 아인슈타인인데요.”


“자네가 아인슈타인인가? 지금 당장 학장실로 오게. 학장님이 보자고 하네.”

 

천재로 유명한 아인슈타인이 대학입학시험에서 낙방을 하다니 믿겨지는가? 당시 아인슈타인의 성적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수학 한 과목을 제외한 모든 과목이 과락이었다. 그러나 수학 한 과목에서 보여준 독창적인 천재성이 수학교수와 학장의 마음을 끌었던 것이다.


 

‘재수’ 덕분에 운명적인 여인을 만나다

 

“고등학교 때 학적부를 보니까. 역사, 지리, 어학에서는 완전 낙제더군. 그러나 수학 하나만은 탁월하다 못해 빛이 날 정도야.”


“그럼 합격입니까?”


“아니.”


“그렇다면, 왜 절 부르신 겁니까?”


“올해는 합격시킬 수 없다는 거네. 다른 학생들과의 형평성도 고려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년도에 우리 학교에 들어오게. 자네가 1년 동안 감나지움에서 공부했다는 증거만 가져오면 내년에는 무시험으로 입학시켜줌세.”

 

아버지 사업이 망하는 통에 가정적으로 힘들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아인슈타인의 성적은 처참하다 못해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독하게 공부 편식을 했던 아인슈타인. 그 결과가 대입시험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수학에서 보여준 탁월한 천재성 덕분에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의 국립공과 대학 ‘예비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1년 동안의 입학유예 뒤에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이 1년의 시간이 자신의 운명을 어떤 식으로 뒤바꿔 놓을 줄 아인슈타인은 몰랐다. 1년 늦게 대학에 입학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은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1896년 아인슈타인이 감나지움에서 1년 동안 공부한 뒤 공과대학에 입학하던 해, 한 명의 여성이 스위스 국립공과 대학에 입학하게 되는데, 바로 밀레바 마리치(Mileva Maric)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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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학번 새내기로 나란히 입학하게 된 밀레바와 아인슈타인. 학교는 떠들썩했다. 1년 동안의 입학유예 기간을 채우고 입학한 수학천재 아인슈타인도 아인슈타인이었지만, 스위스 국립공과 대학 역사상 다섯 번째로 입학한 세르비아계 천재 소녀 밀레바 마리치 때문이었다.

 

밀레바는 입학 전부터 주목을 받았다. 요즘 세상에도 공대에서 여자 찾기가 쉽지 않은데, 19세기 말 유럽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스위스 국립공과 대학 역사상 다섯 번째 여학생이자 96학번 중 유일한 여성인 밀레바 마리치는 그렇게 남학생들의 주목을 받았다.

 


밀레바의 세 가지 약점

 

“밀레바 마리치의 집이 제법 잘 사는 집이라면서?”


“아들도 대학 보내기 힘든 세상에 딸을 대학에 보내다니, 보통 집안이 아닌가 봐.”


“돈만 있다고 다 대학 들어오는 건 아니잖아. 어지간히 똑똑하지 못하면 대학 문턱도 못 넘지. 더구나 여자라는 핸디캡도 있는데…”

 

밀레바 마리치가 만약 여자라는 약점 하나만 가지고 있었다면, 그녀의 인생은 좀 더 평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에게 ‘출신성분’으로 가질 수 있는 모든 약점을 거의 다 몰아주었다. 대충 손에 꼽을 수 있는 것만도 세 가지였다.

 

첫째, 여자로 태어났다는 점이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여성의 위치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참정권은 물론, 교육의 혜택에서도 멀찍이 밀려나 있는 것이 당시 여성들의 위치였다. 잘해봐야 남성들의 부속품 정도의 대우가 당시 여성들에 대한 평가였다.

 

둘째, 그녀 가문의 출신성분이다. 밀레바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티델이란 곳에서 태어났는데, 부친은 세르비아인으로 군인이었다. 당시 세르비아인은 유태인과 함께… 아니 유태인보다 더 혹독한 멸시를 받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녀의 아버지가 지성을 겸비한 재력가란 점이었다. 딸의 재능을 인정해 주는 식견과 그 재능을 지원해 줄 경제력. 이 정도면 축복이라 할 수 있겠지만, 어찌할 수 없는 가문의 출신성분이 족쇄처럼 그녀와 아버지를 괴롭혔다.

 

셋째, 결정적인 약점이라 할 수 있는데 그녀는 장애인이었다. 선천적 좌골통으로 한쪽 다리를 절어야 했다.

 

멸시받는 세르비아계에, 여자에, 장애까지 얻고 태어난 그녀. 이런 악조건 속에서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 준 건 바로 그녀의 아버지였다. 일찍부터 딸의 총명함을 눈치 챈 그녀의 부친은 딸을 세르비아 왕실 인문고등학교에 입학시키게 된다. 고등학교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총명함을 보고 아버지는 딸을 대학에 진학시키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 여학생을 받아들이는 대학은 거의 없었다. 오로지 바로 스위스 국립공과대학만이 여학생을 받아들였다.

 


아인슈타인의 속도위반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입학하게 된 밀레바를 기다리는 건 4살 연하의 알버트 아인슈타인이었다. 이 둘은 소리 소문 없이 캠퍼스 커플로 맺어지게 된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의 풍부한 지식에 매료되었고, 밀레바는 다른 공부는 좀 못해도 수학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에 반했다. 이들의 사랑은 뜨거웠다. 특히나 아인슈타인은 자기와 말이 통하는 여자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이들은 서로에 대한 애정도 애정이었지만, 서로가 가지고 있는 학문적 영역에 더 집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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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때부터였다. 아인슈타인과 밀레바는 서로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 결혼을 결심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집에 밀레바를 소개한다. 아인슈타인의 나이 스물한 살 때였다.

 

“어머니! 저희 결혼을 승낙해 주세요!”


“알버트… 잘 들어라. 그 여자는 책이다. 너처럼 말이다. 너는 여자가 필요해. 책이 필요한 게 아니잖아!”

 

그랬다.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아인슈타인과 밀레바의 관계를 ‘책들이 모여서 한 질을 이루는 관계’로 정의 내렸다. 가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반대 앞에서 결혼을 잠시 미뤄야 했던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이들은 학사과정을 마치고, 석사과정에 들어가게 된다. 현실을 잊기 위해 학문에 매진했다고 해야 할까? 이들의 연구는 탄력을 받았고, 드디어 석사논문 완성 직전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일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데…

 

“아인슈타인… 나 임신한 것 같아.”

 


결혼을 위해 취직한 천재

 

아직 결혼 전인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이들은 덜컥 사고를 쳤던 것이다. 천재 물리학자라는 사람이… 배란일 계산에서는 실수를 범한 것 같다.

 

“어쩌지?”


“내가 석사논문을 좀 뒤로 미루고… 낳을까 해. 그래도 우리 둘 사랑의 결실이잖아.”


“그래야… 겠지?”

 

1902년 밀레바는 주변 사람들 모르게 혼자 고향으로 돌아가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첫 딸인 리저렐의 탄생이었다. 밀레바는 그렇게 리저렐을 낳고 나서는 홀로 스위스로 돌아왔다.

 

“밀레바, 아이는?”


“알버트, 지금 우리가 한가롭게 애 키울 수 있을 거 같아요? 당장 사람들이 애를 본다면 뭐라고 하겠어요? 가뜩이나 우리를 보는 눈이 곱지 않은데…”


“그래… 그럼 우리가 안정되면 다시 아이를 데려 오자.”


“그래요. 저는 석사논문이나 마저 쓸게요.”

 

아인슈타인과 밀레바의 불안한 관계는 1903년 1월이 되서야 안정궤도에 올라서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수학교사로 취직을 하게 된 것이다. 안정된 직장이 생기자 아인슈타인은 당장 밀레바와의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고, 마침내 둘은 결혼에 이른다.

 

“밀레바, 이제 우리 딸, 리저렐을 데려와야 하지 않을까? 장모님이 키우기에는 너무 벅찰 거 같은데 나도 우리 딸을 보고 싶고.”


“지금 이 시기는 우리한테 정말 중요한 시기야. 딸은 나중에도 볼 수 있지만 우리 연구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아. 우리 조금만 더 참자. 응?”

 


상대성 이론의 숨겨진 공헌자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을 다독였다. 그러나 이미 리저렐은 아인슈타인 부부의 곁은 떠난 지 오래였다. 리저렐은 베오그라드의 한 가정에 입양 보내진 후였다(이는 나중에 밝혀진다). 어쨌든 이들의 어려운 사랑은 이루어지면서, 이때부터 아인슈타인 부부는 ‘혼합복식조’의 무서움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결혼하기 전부터 알버트-밀레바 콤비는 공동 논문들을 만들며 서로의 호흡을 맞춰나갔었다. 이런 상황에서 결혼을 통해 몸도 마음도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고 나니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내가 이번에 특수 상대성 이론이란 걸 생각해 봤는데…”


“그게 뭔데? 한번 설명을 해봐.”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밀레바에게 설명하면, 밀레바는 이를 수학적으로 체계화 시키는 작업을 맡았다.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밀레바는 내 아이디어에서 수학적 문제를 해결한다든지… 아니면 난잡하기 그지없는 수학적 체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었다.”고 한다.

 

이들의 혼합복식은 물리학계 최강이었다. 물론 사소한(?) 문제도 있었다. 결혼 전에 공동으로 연구해 발표한 논문들은 아인슈타인(Einstein)-마리치(Maric) 공동저자로, 두 사람의 이름이 따로 명기 되었었다. 결혼 후의 이들의 공동연구 논문은 아인슈타인(Einstein)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발표된 것이다.

 

“이제 결혼도 했으니까, 논문 나갈 때도 같은 이름으로 나가도 되겠지?(어차피 성은 똑같으니까)”

 

이들은 1903년 결혼과 동시에 ‘특수 상대성 이론’을 비롯해 5편의 논문을 2년 동안 발표한다. 엄청난 스피드였다. 문제는 이때 나갔던 논문들은 저자로 아인슈타인 한 명의 이름만 나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밀레바는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고, 문제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과학자의 길 vs 아내의 길

 

이런 연구 중에도 이들 부부는 ‘부부 본연의 임무’에도 충실했으니, 1904년 첫 아들인 한스가 태어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 부부에게는 별 문제가 없는 듯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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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10년 둘째 아들인 에두아르트가 태어나면서 갈등의 불씨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에두아르트는 병약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제 자식을 챙겨주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밀레바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밀레바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인슈타인과 결혼한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이 자신을 한 사람의 여자가 아니라 한 명의 과학자로 인정해 줬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생각은 달랐다.

 

“이제는 나도 조수가 있고, 대학에서 지원도 받아. 더 이상 당신을 번거롭게 만들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이제 아이들에게 좀 더 신경을 써 줘.”


“전 아이들의 엄마이기 이전에 한 명의 물리학자예요!”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밀레바와 같이 연구한 논문들이 학계의 주목을 끌면서 아인슈타인은 여러 대학에서 러브 콜을 받게 된다. 이제 아인슈타인은 저명인사가 되었고, 이는 밀레바에게 새로운 ‘역할’을 요구하게 된다.

 

밀레바에게는 스타 물리학자의 아내로서의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아인슈타인의 연구 파트너가 아니라 안주인으로서 손님들의 접대나 사교계에서의 활동을 요구받게 되었다. 그러나 한쪽 다리를 절어야 하는 장애인으로써 사교계의 활동은 언제나 부담스럽기만 했다. 이런 밀레바를 바라보는 아인슈타인의 속도 답답했다.

 

“밀레바! 당신이 그 자리에 나오지 않으면 나는 어떡하라고? 당장 연구비를 받으려면 학장에게 잘 보여야 한다니까!”


“꼭 내가 가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부부동반이라니까!”

 


아인슈타인, 바람을 피우다

 

삐걱거리기 시작한 아인슈타인과 밀레바의 결혼생활. 이때 아인슈타인 곁으로 다가온 묘령의 여자가 있었으니, 바로 아인슈타인의 사촌인 엘자(Elsa)의 등장이다. 여성적 매력과는 거리가 있었던 밀레바와의 결혼생활에 지쳐있던 아인슈타인의 눈에 엘자는 ‘여신’이었다.

 

이때가 1914년이었다.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이 자기 말고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른 채 아이들을 데리고 잠시 스위스로 떠났다. 둘째 아들인 에두아르트의 요양 겸 자신의 청춘이 묻어 있는 스위스를 둘러보기 위한 여행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1914년 6월 28일이 다가온다.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피살된 것이다.

 

“여보 전쟁이 터졌어!”


“아인슈타인 어쩌죠? 제가 갈까요?”


“아니! 지금 한참 전쟁이야… 유럽은 지금 난리라고, 차라리 잘됐어. 중립국인 스위스라면 안전할 테니까, 거기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당신이라도 안전해야지.”


“여보…”

 

아인슈타인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밀레바 역시 아인슈타인이 자신과 아이들을 배려하는 모습에 감동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랬다. 밀레바가 스위스에 가 있는 동안 아인슈타인은 엘자와 밀회를 즐겼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죠?”


“엘자…”


“나는 오빠의 아내가 되고 싶어요. 이런 정부 생활은 지긋지긋해요.”

 

결국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에게 이혼을 요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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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과학자, 과외 교사로 먹고살다

 

“어떻게 당신이 나한테…”


“미안해… 대신 아들들의 양육권은 당신에게 주겠어.”

 

1919년, 아인슈타인과 밀레바는 이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마흔네 살의 애가 둘이나 달린 이혼녀가 살기에 세상은 막막했다. 반면 아인슈타인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1919년 5월 29일 런던 왕립학회는 기니 만에 있는 프린시페 섬 일식 사진을 찍었고, 아인슈타인이 내세운 일반상대성이론에서의 예측을 검증시킨 계산 값들을 냈다고 공표했다. 아인슈타인은 일약 세계적인 스타 과학자가 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그렇게 한참 이름을 떨치던 그때, 밀레바는 어떻게 살았을까.


“피아노 레슨, 수학지도 다 가능합니다. 스위스 국립공과 대학 출신의 여교사입니다. 파트타임 과외 가능합니다.”

 

밀레바는 과외로 생계를 연명하고 있었다. 당장 그녀 하나 챙기기에도 빠듯한 생활에서 맏아들 한스의 교육과 둘째 아들 에두아르트의 치료비까지 감당해야 했던 밀레바의 생활은 막막함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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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 아인슈타인은 아무런 생계지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운명의 1922년이 다가왔다.

 

“아인슈타인 당신이 발표한 ‘광양자 이론’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축하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인생은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노벨상까지 받게 되었으니 그는 완전한 스타 과학자로 전 세계에 위명을 떨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 ‘광양자 이론’이 그와 밀레바가 신혼 초에 발표했던 논문이었다는 점이다. 분명 밀레바와 공동연구한 논문이었지만, 이름은 아인슈타인 혼자 올린 논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에게 연락을 한다.

 


그들의 사랑의 결말은?

 

“우리가… 예전에 발표했던 광양자 이론이…”


“들었어요. 노벨상 받는다구요?”


“그래…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됐어.”


“축하해요.”


“상금은 전부 당신에게 보낼게.”


“무슨 의미죠?”


“… 위자료라고 생각해.”

 

그랬다. 아인슈타인은 상금 전액을 밀레바에게 건넨 것이다. 밀레바는 이 상금으로 집 세 채를 샀고, 임대수익으로 생활을 하게 된다.

 

한때 캠퍼스 커플로 만나 불같은 연애와 연구를 하던 밀레바와 아인슈타인… 밀레바의 지식을 사랑했던 아인슈타인은 결국 그 지식 때문에 밀레바를 멀리하게 된다. 그의 어머니가 예언했듯 그녀는 ‘책’이었던 것이다.

 

밀레바는 1947년 8월 4일 72살의 나이로 쓸쓸히 죽었다. 아인슈타인은 밀레바가 죽고 나서 7년 뒤 밀레바의 길을 따라나섰다. 그들의 씁쓸한 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펜더


편집: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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