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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매년 이 때가 되면 제가 꼭 여기 글을 씁니다. 돌아가신 그날로부터 벌써 일곱 해 째입니다. 그 7년 동안 이 자리를 지나간 제 감정도 가지각색입니다. 슬픔과 절망, 분노, 뭐 비분강개, 다짐, 전망….


그런데 이 두서 없는 감정들 속에서 한 가지 못 보여드린 게 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바로 기쁨입니다.


왜냐구요. 도무지 기뻐할 일이 있었어야 말이죠. 형님 돌아가시고 저희가 목소리는 컸죠. 이제 3년만 참으면 된다든가, 표로 복수를 하겠다든가, 이제 하늘에서 편히 쉬시고 우리한테 맡겨 달라든가 나름 비장했더랬습니다. 하지만 다 헛된 말이었습니다. 총선, 대선 다 패하고 세상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저들의 판이 되고만 말았어요. 정의라서 이기고 그런 건 역시 없더군요.


그러는 와중에 세상은 엉망진창이 됐죠. 유신 때로 돌아간다는 말이 과장이나 농담이 아니었으니까요. 형님 다 보고 계실 테니 자세히 설명은 안 하겠습니다만, 법도 뒤집고 제도도 바꾸고 교과서에 뭐에 안 건드린 게 없습니다. 이승만, 박정희를 재평가한다면서 동상이니 석상이니 세우고 기념관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붇기도 했고요. 표 얻으려고 저들이 내뱉은 공약은 지켜진 게 하나도 없고, 돈 있고 힘 있는 자들과 위정자들이 마음대로 해도 그만인 세상이 되고 말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헬조선이라는 기괴한 말이 생긴 건 아십니까?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형님 말씀이 귀에 선한데 그 대신에 만들어진 세상이 바로 저겁니다. 노인이면 노인, 젊은이면 젊은이, 중장년은 중장년대로 각자 나름의 지옥 속으로 빠져들어 간 거죠. 물론 그 뒤에 상황을 그렇게 끌고 간 악덕 위정자와 언론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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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못 들어보신 이상한 말들이 많이 보일 겁니다.
한 마디로 돈 많고 힘 있는 넘들 말고는 다 찌그러지라는 게 헬조선의 정신입니다.
(그림 출처: <참여연대>)


형님. 저는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형님 돌아가셨을 때 이문열이라는 소설가의 <장려했느니, 우리 그 낙일>이라는 단편이 떠올랐습니다. 저 양반이 좀 이상합니다만 예전에는 그래도 괜찮았거든요. 일종의 대체역사 소설인데, 클라이막스에서 나라를 빼앗기게 된 고종이 각계각층의 백성들을 다 모아 놓고 감동적인 연설을 한 다음에 뛰어내려 자결하고 말죠. 그 순간 고종의 몸에서 빛 같은 것이 나와 삼천만 백성들의 가슴에 하나씩 들어갑니다. 그 힘으로 조선은 되살아나고요.


저건 판타지 소설에 가까운 거니 똑같지는 않더라도, 저는 형님의 죽음이 그런 뭔가가 되어 국민들 가슴에 꽂혀 이 나라를 좋은 길로 이끌어 갈 줄 알았더랬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어요. 아뇨, 형님한테서는 그 빛이 나왔었습니다. 그저 그걸 볼 줄 아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너무 적었고, 보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 적었으며, 받아들여도 간직할 사람들이 적었고, 간직해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적었던 겁니다.


그래서 지난 7년간 매일 조금씩 더 깊이 낙담하고 절망했습니다. 권력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악해지고 뻔뻔해져서 언젠가 부터는 역사도 국민도 안중에 없는 걸 아예 숨기지 조차 않더군요. 하긴 지옥이라는 데가 원래 한 번 빠지면 고통이 더 심해질 뿐 벗어날 수 없는 곳이죠.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는 제일 좋은 날조차 ‘그래 봤자 넌 지옥에 있어’라고 악마가 귓전에서 속삭이는 듯 그 수치와 낙심과 좌절의 그림자가 사라지질 않더군요. 


지옥에서의 행복, 그런 것은 가능하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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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니다. 차라리 안 보시는 게 나았을 겁니다.
돌아가시게 한 것도 모자라 넋을 위로해 드리지도 못하고 도리어 욕되게만 했지요.


그런데 형님,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만 계속 드려놓고는 이제 좀 놀라게 해 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까 못 보여드린 감정이 있었다고 했잖아요. 바로 기쁨 말입니다. 그걸 이제 좀 전해 드리려고요.


네. 저희가 드디어 총선에서 이겼습니다.


쑥스러워서 담담하게 말씀드리지만 그날은 좋아서 좀 팔짝팔짝 뛰기도 했죠. 총선이 다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형님의 교훈으로 진짜 승리가 선거에서 이긴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 올바른 생각을 보편적으로 구현하는 길이 얼마나 어렵고 먼 것인지 깨닫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방정떨고 싶진 않았지만, 아 정말 좋더라고요.


왜 그렇게 좋았냐 하면요, 다른 거 아닙니다. 형님 가신 이후로, 아니 퇴임하신 이후로 저는 이제 이 사회에서 우리가 다시는 못 이기게 된 줄 알았거든요.


생각해보면 2007년 대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듬해 총선에서 그렇게 박살나지만 않았어도 형님이 그렇게 가시도록 만들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한나라당과 친박연대에 각각 153석과 14석, 여권 성향의 자유선진당에도 18석을 준 와중에 통합민주당은 겨우 81석에 그쳤으니 개헌 저지선도 못 지킨 겁니다. 형님 돌아가신 그 ‘3년’ 후인 2012년에 서슬 퍼렇게 치른 총선에서조차 고작 127석이었고, 나중에 탈도 많았던 통합진보당의 13석 합쳐봐야 근근이 140석이었고요. 뒤이어 유신 공주가 대통령까지 됐으니 저들도 오만할 대로 오만해져서 점점 본색을 드러낸 게지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우리는 이제 이기지 못하는 존재가 된 건가. 막말로 형님 목숨과 맞바꿔서도 총선, 대선 한 번 못 이긴다면 이제 이 헬조선에 대체 무슨 희망이 있단 말인가. 바로 그런 7년이 흘러갔던 겁니다. 아 정말 형님, 저 속으로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었습니다. 그러니 이번 승리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제가 이번에 느낀 게 많습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믿음도 부족했고요. 생각이 짧았다는 건 보편적 가치의 힘을 가벼이 여겼다는 것이고, 믿음이 부족했다는 건 산전수전 다 겪고 여기까지 온 우리 국민들을 불신했다는 겁니다. 항간에서는 뭐 공천 파동 때문에 여당이 진거다 운운 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사람들 의외로 그런 사정 잘 모르고 큰 관심도 없거든요. 나라를 지옥에 비견되는 곳으로 만들었으니 심판한 거지요. 그리고 그 반대에 ‘사람 사는 세상’이 있다는 걸 조금씩 느끼기 시작한 거지요. 이 사람들이 그렇게 계속 당하고 사는 호구들이 아니더이다.


앞으로 또 어떻게 될지는 모르죠. 아마 산 넘어 산이겠죠. 하지만 이제쯤 한 번 값진 승리의 경험을 얻어 낸 것, 해일처럼 밀려오던 무능과 부패와 거짓의 물결을 일단 막아 선 의미가 어찌 적다 하겠습니까. 그래서 적어도 제게 이번 승리는 그냥 총선에서의 승리가 아니었어요. 죽은 줄 알았던 이 나라의 민주 정신이 아직 면면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확인한 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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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이 옳습니다.

한 것도 없이 너무 쉬이 절망해서 죄송합니다.


형님 돌아가신 지 한두 해 지나서인가, 제가 이런 약속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조금만 참고 계시면 통쾌한 승리의 소식과 함께 우리가 ‘결국 해냈다’고 막 자랑하겠다고요. 그 때는 내심 그런 날이 금방 올 줄 알았습니다. 형님 돌아가신 그 몫으로 총선이고 대선이고 다 이길 걸로 기대했으니까요.


지금은 아닙니다. 총선에 이긴 것은 무척 기쁘지만 이 정도를 승전보라고 형님께 전하면서 생색을 낼 수는 없죠. 이번에 이겼다고 대선에서 이기는 것도 아닐테고, 또 대선에 이긴다고 그게 최종적인 승리도 아니고요. 이제 그 말씀 고쳐서 다시 드리겠습니다.


제 내면에서 일상이 되던 절망의 고리를 끊어낸 이번 승리로, 저는 사람 사는 세상으로의 길이 잡초가 우거지고 험할 망정 결코 끊기지 않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약속을 드립니다. 뭐, 주제 넘은 불패의 선언 같은 건 아닙니다. 어쩌면 크고 작은 선거에서 또 질 지도 모르죠. 하지만 또 지더라도, 그리하여 이 길 앞에 천길 낭떠러지와 깊은 숲과 험한 짐승들이 가득해 보여도, 그 길이 반드시 거기 있다는 것만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때로 넘어지고 돌아가고 쉬어 가더라도 이리 험한데 길은 무슨 길, 이런 의심만은 이제 하지 않겠습니다.


하긴, 루쉰이 말했던가요. 희망이란 땅 위의 길 같은 거라고요. 길이란 원래 있는 게 아니라 그 곳을 걷는 사람이 만든다고요. 그렇다면 사람이 있으면 길도 있다는 뜻이죠. 사람으로 살며 사람으로 걸으면 결국 길이 생기는 거죠. 거창한 건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는 쉽군요. 굳이 길이 있네 없네 할 것도 없이 사람으로 살기만 하면 되는 거네요.


어쩌면 형님이 원하신 게 바로 그것 아닌가요. 저희들, 사람으로 살라는 거요. 그러면 되는 거죠. 결국 사람, 길, 희망은 전부 같은 말이었군요. 그렇게 한해 한해, 형님 다시 뵙고 이렇게 보고도 드리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 사는 세상으로 가는 대로를 성큼성큼 걷고 있겠죠. 우리는 아니더라도 우리 후손들은 언젠가 그 곳에 발을 디디게도 되겠죠.


그 날은 이제 형님이 비로소 함빡 웃음을 지으며 부활하실 테죠.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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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