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1620년 11월 11일 빼빼로데이, ‘메이플라워(Mayflower)’라는 이름의 배 한 척이 지금의 보스턴 남단인 케이프코드에 닻을 내렸다. 그 배에는 102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그들 중 35명은 스스로를 ‘성자(Saints)’라고 부르는 청교도였고 나머지는 이교도들(비청교도)이었다. 바로 오늘날의 뉴잉글랜드 지역에 최초로 정착한 ‘순례선조들(Pilgrim Fathers)’이다.


MayflowerHarbor.jpg


원래는 1607년에 건설된 버지니아 식민지 인근에 정착할 계획이었지만 항로를 잘못 잡아 훨씬 북쪽에 닻을 내렸다. 우연한 사건이었지만 그것을 계기로 미국은 남부와 북부라는 전혀 이질적인 두 지역으로 나뉘어 발전하게 된다. 그들이 원래 계획대로 버지니아 지역에 정착했더라면 미국의 역사가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메리카 대륙에 첫 발을 디딘 이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완전히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윌리엄 브래드포드의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에 관하여>라는 글을 읽어보면 그때 상황이 눈에 선하다. 겨울은 다가오는데 앞에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원시림이고 뒤는 천신만고 끝에 건너온 바다다. 숲에서는 언제 ‘야만인’들이나 야생짐승들이 뛰쳐나올지도 모른다.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 순간의 그들의 심정을 잠시 들여다보자.


‘어디로 눈길을 돌리든 (천국을 향한 곳 외에는) 그들은 어떤 외부 사물들에서도 위안이나 만족을 거의 얻을 수 없었다. 여름이 끝났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날씨에 찌든 모습으로 그들 위에 솟아 있었으며 사방은 숲과 덤불로 가득 찬 채 거칠고 야만적인 색깔을 띠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 그들이 건너왔으며 이제는 그들을 문명세계로부터 단절시키는 주된 장벽과 심연이 되고만 거대한 바다뿐이었다.’


그들은 거기에 온 걸 후회했을 것이다. 그들이 떠나온 네덜란드와 영국, 그곳의 친척들과 친구들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하지만 이제 돌아가지도 못한다. 어떻게든 거기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해 결국 살아남았다.


메이플라워를 타고 온 사람들 중 절반이 그 해 겨울에 죽어나갔다. 질병과 기아와 혹한으로 하나둘 쓰러졌다. 그런 그들에게 신이 내려준 축복은 아이러니하게도 원주민인 인디언들이었다. 자칭 문명인인 그들이 ‘야만적이고 잔인한 인간들’이라고 경멸해마지 않은 인디언들이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인디언 부족이 그들의 부족한 양식을 내어주고 사냥법과 옥수수 재배법도 가르쳐주었다.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선의가 훗날 종족말살이라는 참혹한 보상으로 돌아올 거란 건 몰랐을 것이다.


청교도들은 왜 그 멀고 낯선 미국으로 건너갔을까? 그들이 상륙에 앞서서 작성한 <메이플라워 서약>에는 ‘신의 영광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증진 그리고 우리들의 국왕 및 조국의 명예를 위하여’ 건너갔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국왕과 조국의 명예’는 수식어에 불과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간 거다. 흔히들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있다.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중세 말에 교황청의 주도로 벌어진 십자군 원정의 결과 중동의 막대한 부가 교황청으로 흘러들었다. 가톨릭 교회는 빠른 속도로 부패하였다. 교회는 십일조는 물론 온갖 명목으로 신자들의 돈을 착취해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한편 마녀사냥의 광기를 벌여 신자들을 무참하게 처형하였다. 그런 가운데 교황청은 지금의 로마 교황청인 성 베드로 대성당을 새로 지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 판매라는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면죄부를 사면 그 돈이 헌금함에 딸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그 사람이 그 때까지 저지른 모든 죄는 사해진다는 것이었다. 1506년부터 독일에서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다. 그것도 성경의 이름으로 말이다.


0042.jpg


보다 못한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1517년에 비텐베르그에 있는 성당의 출입문에 95개의 주장을 내걸었다.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교회에서 행해지는 일부 의식을 반박했는데, 그것이 유럽에서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불을 지폈다. 루터는 특히 ‘면죄부의 효력이 연옥까지 미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죄는 신자 개개인의 행위의 결과이며 그 속죄 역시 개인의 책임이므로, 죽어 연옥을 헤매는 사람들을 대신해 가까운 사람들이 면죄부를 사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루터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장 칼뱅(Jean Calvin)에 의해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칼뱅의 주장은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으로 원죄를 지었으며,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인간의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자의에 의해 결정된다’였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이 세상에 내보낼 때 누구를 구원하고 누구를 버릴지 미리 정해서 보냈으며,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결정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인간은 신의 은총을 간청하거나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끝까지 신의 뜻을 바르게 행하고 올바르게 살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을 지녔다고 여겼다.


로마 가톨릭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들이 왕과 귀족으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지배계층이었던 반면, 칼뱅의 교리는 당시 새롭게 대두하고 있던 자본가들, 기업가들, 숙련 노동자들 같은 부르주아 계급 사이에서 빠르게 전파되었다. 부르주아들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부를 종교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다. 부는 나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말이다.


칼뱅은 새롭게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이들 부르주아 계급을 가톨릭에 대항해 선교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고, 그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을 교리로 받아들였다. 칼뱅은 근면과 절약의 미덕을 강조하면서 근면성실 노력해 성공한 기업인은 신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식의 해석을 했다. 그런 노력으로 그의 사상은 빠르게 부르주아 계급에 확산되었고, 유럽은 신교와 구교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시작했다.


종교개혁으로 촉발된 신교와 구교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신교와 구교의 본질적인 차이는 크지 않다. 두 교파 모두 성경의 절대성, 예수의 신성, 삼위일체설을 받아들였다. 신교가 구교에 대해 반발한 것은 근본적인 교리가 아니라 가톨릭 교회의 전제적인 조직, 미신적인 의식, 중재자로서의 사제, 성인숭배, 성지순례, 마리아 숭배 같은 것이었다. 가톨릭에서는 신자들은 사제와 마리아의 중재를 통해서만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반면에 신교는 인간과 신의 직접적인 관계를 강조했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유럽 다른 나라들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국왕 헨리 8세의 이혼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문제가 엉뚱하게 종교개혁을 촉발했다. 헨리 8세는 형수인 스페인의 캐서린과 정략결혼을 했다. 당시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였으므로 영국은 스페인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왕세자와 캐서린을 결혼시켰다. 그런데 왕세자가 일찍 죽었고, 영국은 곤란한 입장이 됐다. 스페인의 공주를 데려와서 과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헨리 8세는 형수인 캐서린과 결혼했지만 사이가 좋지 않았다. 캐서린은 여러 번 유산을 했고, 슬하에 딸 매리 하나만 두었다. 아들을 갈망하던 헨리는 앤 불린이라는 궁녀와 가까이 지내면서 아내를 내쫓고 그녀와 결혼할 결심을 했다. 당시 영국은 가톨릭 국가여서 이혼을 하려면 교황의 윤허가 필요했다.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에겐 더더욱 그랬다.


그는 자신이 형수와 결혼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며 그것 때문에 신이 진노해서 캐서린이 계속 유산을 하거나 낳은 자식들이 죽었다고 주장하며 이혼을 호소했다. 그런데 믿었던 교황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헨리 왕이 바람이 난 과정은 저스틴 채드윅 감독이 2008년에 만든 영화 <천일의 스캔들(The Other Boleyn Girl)>를 알 수 있다. 물론 영화니까 그대로 믿을 건 아니지만 당시 영국 궁정의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B-2_sfOWsAAWHPA.jpg large.jpg

수장령


뜻밖에 이혼을 거절당한 헨리 8세는 화가 나서 교황청과 결별하고, 1534년에 ‘수장령’을 발표한다. 이제 영국 교회의 수장은 로마 교황이 아니라 영국 국왕이며, 영국 교회와 교회의 모든 재산은 국왕의 소유이고, 영국의 모든 사제 임명권도 영국 국왕이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태어난 게 ‘영국 국교회(성공회)’다. 한 마디로 종교가 세속 권력에 예속되었다.


영국 신교도들(캘빈의 교리를 믿는 청교도들)이 보기에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완전히 사이비였다. 워낙 졸속으로 개혁을 하다 보니 무늬만 개혁이지 종교의식은 로마 가톨릭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신교도들은 성공회를 단호히 거부했고 왕은 왕대로 그들을 탄압했다. 영국은 청교도들과 왕권 사이의 긴 종교투쟁에 빠져들었다.


국왕에 대항한 투쟁이 장기화되다 보니 청교도 내부에서도 ‘이탈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1609년에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버리고 신교국가인 네덜란드의 레이던으로 이민을 갔다. 10년 정도는 잘 지냈지만 신도들의 정신이 해이해지기 시작하고 또 구교국가인 스페인이 쳐들어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정말 스페인이 쳐들어온다면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벌어질 게 불을 보듯 뻔했다. 당시 유럽은 종교전쟁이 한창이었다. 신교도들과 구교도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기서 ‘퍽’, 저기서 ‘억’하는 상황이었다.


이래저래 위기에 처한 청교도들은 신천지인 미국으로 건너가기로 했다. 일부 사람들은 또 보따리를 싸는 게 싫다면서 남았고, 35명이 메이플라워라는 배를 임대했다. 임대료를 채우기 위해 그들은 영국에 들러 사람들을 더 태워 미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 남아 투쟁하던 청교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1642년에 올리버 크롬웰을 중심으로 혁명을 일으켜 왕을 타도하고 공화정(Commonwealth)을 수립했다. 그 공화정은 크롬웰이 죽은 후인 1660년에 붕괴되고 다시 왕정이 수립되었다.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에 간 것까지는 좋지만, 그들은 오늘날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못지않게 배타적이었다. 오직 자신들만 선민이고 청교도가 아닌 모든 종파의 신자들은 사탄으로 여겼다. 내부적으로도 율법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신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했고, 칼뱅의 교리에 바탕을 둔 강력한 신정일치의 사회를 꿈꾸었다. 정치는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며 비민주적이었다. 모든 사람은 교회의 법에 복종해야 하며 사회법과 종교법은 동일했다. 그들은 영국 국왕에 대항해 종교의 자유를 찾기 위해 투쟁했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종파의 신자들을 지독하게 탄압했다. 종교의 자유는 오직 그들만의 자유였다.


내서니얼 호손이 쓴 <주홍글자>를 보면, 청교도들이 헤스터 프린이라는 한 연약한 여자를 종교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가혹하게 인격 살해했는지, 그리고 청교도 목사의 표본인 아서 딤즈데일이 얼마나 독선적이고 위선적인 인물인지 알 수 있다. 그는 헤스터와의 사이에서 아이까지 낳고는 오히려 그녀를 단죄하는데 앞장서며 모든 신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평생 위선 속에서 살아가는 그 마음은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했지만, 그것이 그의 위선적인 삶을 이기지는 못했다.


미국의 청교도들은 개인의 도덕적 선을 절대시했다. 만물에 대한 유일한 판단의 근거는 도덕적 선에 있었다. 그들은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엄격한 계율에 따라 도덕적 삶을 살고자 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도덕적 목적을 지녀야 하며 도덕적 규범의 결함은 개인의 인격적 결함으로 귀착되었다. 인간의 모든 행위의 궁극적 책임은 사회가 아니라 개인에게 있다. 이런 생각은 이후 미국 사회에서 개인주의가 발달하는 하나의 토대가 된다.


미국 청교도들에게는 신은 우주 밖에 존재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인간의 행위에 개입한다. 그것이 신의 섭리다. 이 섭리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 작용하므로 인간에게 우연이나 행운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신의 섭리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우주를 신이 창조한 이래 불변하는 하나의 조직체로 보았다. 이 우주는 신이 자유의사로 종결시킬 때까지 천지창조 이래 같은 모습으로 존재할 것이다. 이런 믿음의 영향으로 미국에는 유독 진화론을 불신하고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295066eb65a52a5525fb3b8ade57f0e1_BxMcnmITe5XEhql2b54FAvFOBtG.jpg


청교도들은 초기의 힘든 정착시기에는 종교적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으나 인디언의 위협이 줄어들고 사회가 안정되어 갈수록 내부의 결속이 약화되고 해체되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독선적이고 억압적인 교리와 지키기 힘들 정도의 엄격한 생활의 강요 및 목사들의 전제적 지배는 많은 신자들에게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교회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남아있는 사람들의 신앙은 형식화되어 갔고 새로운 신자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나의 종파로서의 청교도는 18세기 초에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미국 정신의 토대로서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청교도들은 노동을 가장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여기고 열심히 일함으로써 비교적 짧은 기간에 경제적 안정과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부를 신의 은총으로 해석해서 거리낌 없이 과시했다. 물질적 성공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누구든 신분이나 지위와 관련 없이 근면성실하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미국의 꿈(American dream)’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점차 수단과 방법을 도외시한 채 부의 획득 그 자체를 선으로 보는 도덕적 혼란을 야기하고 물신숭배와 물질만능주의를 낳았다.


그뿐만 아니다. 뉴잉글랜드에 신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열정에 사로잡힌 그들은 자신들 앞에 가로놓인 자연과 인디언들을 제거해야 할 장애물로 인식했다. 그런 생각은 훗날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황폐하게 만들고 인디언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며 구체화되었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과도하게 신의 섭리로 해석하면서 자신들이 경멸했던 원주민들 이상으로 미신과 편협한 사고에 빠져들었다. 한 예로 청교도 목사인 코튼 매서에게는 모든 것이 신의 섭리였다. 심지어 복통과 치통조차도 자신의 죄에 대한 신의 처벌로 해석했다. 지나치게 엄격한 교리와 지키기 힘들 정도의 도덕적 청결성에 대한 요구는 그들이 끝임 없이 자기불신을 하게 했으며 죄의식을 낳았다. 또 신경과민증으로 몰아갔을 뿐만 아니라 표리부동한 태도를 낳았다.


또한 자신들이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강한 믿음으로, 모든 비판을 차단하고 자신의 믿음을 절대시하는 아집과 자신들의 믿음과 배치되는 모든 것을 사탄의 행위로 몰아가는 지독한 배타성과 독선을 낳았다. 그들의 그런 사고방식은 오늘날까지 보수적인 정치 이념과 결탁한 기독교 근본주의로 미국 백인들의 의식 깊숙이 잠재되어 있다. 그들에겐 오로지 자신들만이 선이며 나머지 모든 것은 악이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조지 부시다. 그가 8년 동안 한 일이라고는 미국과 세계를 조지고 부순 것 밖에 없다.





지난 기사


콜럼버스의 두 얼굴, 미국의 두 얼굴

먹기 위해 찬양하는 백인 정복자

영국신랑과 포카혼타스





naemaeumdaero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