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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교에서 언론학을 공부했었다. 1년을 학부생으로 지낸 뒤 2학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전공 수업을 듣기 시작했는데, 언론학이 생각만큼 재미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영화 제작이나 평론가 같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막연히 지망한 언론학은 막상 접해보니 몹시 다른 분야였다. 방송 장비를 다루는 일도 재미가 없었고, 관련 지식들도 이래저래 나와는 맞지 않았다. 더구나 외환위기 이후 경제난으로 일자리 문제가 심각해진 상황에서 선배들 사이에는 ‘정치외교학과든, 문헌정보학과든, 신문방송학과든 어차피 다들 보험회사로 취직하더라~’는 농담이 오가고 있었다. 주위의 친구들도 전공과 상관없이 모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이후에도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하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래, 일단 먹고 사는 데 무리 없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자. 결심한 그 날, 나는 안방문을 벌컥 열고 외쳤다.



“엄마, 나 선생이나 할래!”



티비를 보며 마늘을 찧고 있던 엄마는 몹시 기뻐했다. 2년 전에는 죽어도 싫다던 애가 느닷없이 정신을 차려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는 말을 이후로도 몇 번이나 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수능을 봤다. 평소 관심이 많았던 역사 교과의 중등교사가 될 생각이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그랬다. 중등교사 선발 인원이 너무 적어 4년 후에 자칫 개고생을 할 수 있다고. 그래서 교대를 지망했다.


그렇게 입학한 교대의 수업 내용 대부분은 정말 깜짝 놀랄 만큼 깊이도 재미도 없었다. 3년간 대충 학점을 채워가며 학교를 다니다가 4학년 때부터 임용 시험 준비를 했다. 다들 그러는 것처럼 유명 강사들에게 수십 만 원의 강의료를 내고 시키는 대로 외웠다. 6학년 미술 몇 번째 단원의 학습목표가 조형미와 자연미라느니, 새타령은 중중모리장단이라느니 (자진모리던가?)하는 당장 몰라도 아무 상관 없는 잡스러운 정보를(지식 아님) 달달 암기해 임용시험에 합격했다. 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2월 졸업 후 며칠 지나지 않은 3월, 내가 사는 광역시에 있는 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여기까지가 내가 교사가 된 이야기다. 내 모든 결심의 순간마다 고귀하고 성스러운 아우라, 세속적인 욕망과 개인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순교자적 태도가 느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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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이나


교사는 신성한 사람들이 아니다. 특별히 정의롭고, 봉사 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이 몰려드는 직업도 아니다. 경제난과 궤를 같이해 교직은 이십여 년 사이에 인기가 높아졌으며, 최근 수년간 임용 시험 경쟁률도 매우 치열했다. 하지만 이건 사회의 젊은층이 너도 나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살신성인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 아니라, 경제적인 불안 속에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높은 연금이 보장되는 직업을 선호하기 때문에 나타난 사회적인 현상이다. 아,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안정적인 경제적 보상,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휴가 따위 조금도 고려치 않고, ‘내 몸 하나 불살라 자라나는 꿈나무들을 키워 내리라!’ 고 결심해 교사가 되기를 택한, 초지일관 지사적인 인물들도 있다. 다만 아직까지 내가 직접 만난 적은 없다.


먹고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거 어차피 다들 매한가지다. 교사라고 해서 그런 이유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건, 먹고 살아 보겠다고 교직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 중 일부는 어느 순간 자신들의 범속함을 깡그리 잊고 교사의 권위에 멋대로 초법성을 부여하고, 교사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마땅히 존경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점이다.



교직을 바라보는 관점

 

‘왜 학교에는 이상한 선생이 많은가 1 ’의 댓글들 속에 두고두고 내 뇌리를 떠나지 않던 단어 하나가 있었다.



 은사(恩師): 가르침을 받은 은혜로운 스승



내가 예로 든 학창시절의 이상한 선생님을 칭하며 한 현직 교사가 ‘은사’라는 단어를 썼다. 쓰신 분 나름의 맥락이 있었겠지만 그와 별개로 나는 이 ‘은사’라는 단어 하나에 격분을 하고 말았다. 16년 동안 학생으로서, 10년간 교사로서 일하며 느꼈던 깊은 빡침 분노가 파도처럼 몰려왔기 때문이다.


첫 번째 글에서 언급했던 이상한 선생님은 단지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반 친구의 머리를 두꺼운 책으로 수차례나 내려치며 폭언을 했다. ‘노이로제 증상을 보인 중년 교사’, ‘증상을 개선하기 전에는 절대 교직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 이 순화된 언어를 써서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 인간적 연민에서 현재의 내가 베풀 수 있는 호의의 최대치다. 중요한 것은 ‘학생이었던 나’는, 그 분을 은사라고 부를 뜻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학생의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은 ‘은사’라는 칭호는 어떤 의미도 없다. 교사들끼리 자화자찬하는 식으로 서로를 은사라고 칭하거나, 학생들에게 ‘너희들을 가르쳐준 선생님이니 당연히’라는 식으로 존경심을 강요하는 것은 꼴사나운 문화와 억압적인 권력관계를 재생산하는 행태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교육학에서는 교직을 세 가지 관점으로 바라본다.


 성직, 노동직, 전문직.


이중 교직을 성직으로 보는 관점은 동서양을 막론해 교육계의 가장 오랜 문화다. 서양에서는 성직자가 교사였다는 역사에 근거해 출발했고, 동양에서는 군사부일체,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사은지대 (스승의 은혜가 크다), 천덕사은 (하늘의 덕과 스승의 은혜가 같다) 과 같은 표현들이 이런 관점과 맥을 같이 한다.


교직을 성직으로 보는 관점은 교직의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모순된 구조 속에서 이 관점은 교직에 초월적인 장막을 둘러 사회의 비판과 변화요구에 반응을 더디게 하고, 교사가 휘두르는 폭력에 면피를 씌우는 매우 이상한 방식으로 작용해 왔다.


교사의 입장에서도 교사를 사회로부터 유리시키는 이런 직업관은 시민으로서의 ‘기본권 침해’로 악용됐다. ‘교사는 신성한 교실에서 수업에만 전념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 는 말은 사실 ‘당신들은 입 다물고 교실에 쳐 박혀 시키는 대로만 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특히 한국사 국정 교과서 문제와 같이 교사들의 발언이 중요한 이슈에서조차 교육기본법과 국가공무원법 등으로 교사들의 집단 행위를 금지하는 한국 사회 시스템은 교사가 공익을 위해 존재하는지, 지배층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지에 근본적으로 의문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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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수도원이 아니다



교사의 직업윤리

 

교직을 성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 비판의 여지가 많다고 해도 교육이 자유, 실천, 지식, 연대, 평등,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 등 인간으로서 가장 소중한 부분을 형성하는 데 몹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교사를 성직자, 노동자, 전문가 중 어떤 것으로 생각하든 교직을 택한 이상 반드시 지켜야 할 '직업윤리'가 있다. 교사들의 직업윤리를 체계화하는 작업이 지금 내가 이 게시판을 빌려 해야 할 일은 아니다. 다만 내가 그동안 개인적으로 가장 지키기 힘들었던 직업윤리 두 가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해 보고 싶다. 교육의 질을 수치로 측정하는 것을 거부할 윤리 그리고 오지랖을 떨어야 할 윤리다.



 1) 교육의 질을 수치로 측정하는 것을 거부할 윤리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행사나 연수에 참가하면 주최 측 인사의 시작과 끝은 대체적으로 ‘사회가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신성한 교육현장의 교사로서 자부심을 갖고 학생들의 긍정적인 인성 함양을 위해 노력해 달라’는 말들이다. 하지만 이런 번지르르한 말들은 그들이 제시한 학교 평가 지침 속에서 1초도 머물지 못한 채 사라진다. 현재의 학교 평가는 교육 당국이 학교들을 평가, 관리, 감독, 통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설령 그것이 교육의 질 향상이라는 좋은 의도를 갖고 시작했더라도, 교육의 질과 성과는 단기간에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수량화해 측정하려다 보니 부작용과 부패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예를 들어, 학교 평가의 주요 지표 중의 하나로 ‘방과 후 학교 참여율’이 있다. 처음에 근무했던 학교의 경우 학부모들의 소득수준이 중상위 계층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당시 그들은 방과 후 프로그램보다는 학원을 보내기를 선호했다. 교장, 교감이 평교사들을 달달 볶기 시작했다. 어떤 반은 참여율이 80%인데 왜 다른 반은 이거 밖에 안 나오느냐, 각 반에서 정말 최선을 다한 거 맞느냐고. 달달 볶인 교사들은 교실로 돌아와 학생들을 닦달하기 시작한다. 대놓고 권유하는 건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으니, 담임들 사이에 참여율을 높이는 비법들이 입소문을 타고 돌았다. 참여하는 학생을 공개적으로 칭찬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줬더니 참여율이 높아졌다, 참여율이 이만큼 높아지면 학급 칭찬 점수를 높여서 피구 등의 보상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등. 학교가 강매의 기술을 연구하는 곳이 아닌 이상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팝스(PAPS: Physical Activity Promotion System)라는 학생 건강 체력 측정 제도 또한 수년 동안 학교 평가의 주요 지표 중의 하나였다. 수치화하기 쉬우니 줄 세우기 평가에 아주 제격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심폐지구력, 순발력, 유연성 등이 학교 평가의 지표가 되는 것이 근본적으로 말이 되는 발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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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학교평가지표 가이드북

출처 -한국교육개발원 


대부분의 학교에서 체육 교육은 몇몇 체육 과목 교사들이 담당한다. 체육 시간에 최선을 다해 교육을 해도 일주일에 겨우 두세 번 있는 체육 수업으로 단기간 내 학생들의 체력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런 상황에서 ‘팝스 결과가 좋지 않아 학교 평가 결과가 낮게 나왔습니다’ 따위의 부담을 받게 되면, 담당 교사들이 날이 서 측정 과정에서 학생들을 압박하거나, 측정 결과를 조작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외에도 사이버가정학습 진도율, 교사들의 연수 시간 총합 등으로 학교들을 줄 세우는 방침들은 현장에서 엄청난 부작용을 발생시켰다.


표준화된 노동력 생산과 체제에 대한 맹목적 순응에만 몰입하는 현재의 제도권 교육은 신성한 교육 현장이라 일컬어질 자격이 없다. 신성하기는커녕 교사들이 학생들을 인격이 아닌 수량화 시켜야 할 제품으로 인식하도록 한다. 교육 현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이 그들의 계획을 강요하기 위해 만든 생산성의 지표들에 교사들은 저항해야 한다. 그들이 측정할 수 없고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학생들의 존엄한 인격을 숫자놀이에 무방비하게 노출시키는 것은 교사로서 지켜야 할 직업윤리를 명백히 위반하는 행위이다.

 


 2) 오지랖의 윤리


학교에 이상한 교사가 있는 것처럼 회사에, 사회 도처에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회사 이웃 부서의 이상한 사람에게 직접 찾아가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며 항의하고 필요하다면 언쟁까지 벌여가며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서 사원으로서의 '직업윤리'를 어겼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떤가(평소 가깝게 지내는 다른 학교 초등교사의 사례다). 함께 근무하는 교사 한 명이 몹시 이상한 성격이다. 일단 동료들에게 기본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고, 대여섯 명 정도가 함께 쓰는 사무실에서 사적인 전화를 아주 큰 목소리로 한 시간 이상 해댄다. 더 큰 문제는 교실 안에서 발생한다. 영어 과목 교사라 원어민과 협력 수업을 하는데, 말이 협력 수업이지 수업을 전적으로 원어민 교사에게 맡겨버리고 자신은 교실 뒷자리에 앉아서 책을 본다. 학생들이 자신의 평화로운 독서에 방해될 정도의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야-악! 야-악!’ 하는 배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고함을 질러대는 게 수업 시간에 그 교사가 하는 일의 전부다. 수업 중 학생들에게 문제 풀이를 시키고 자신은 개인 블로그를 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 모든 사태를 지켜보고 말해준 원어민은 분란을 만들기 싫어하는 보통 사람이고, 학생들은 선생님이 뒤에 앉아서 책을 본다던지 개인 블로그를 하는 걸 오히려 좋아한단다. 소리만 질러대는 선생님한테 야단도 안 맞고, 공부 안 하고 놀 수 있으니까. 그래서인지 학부모들로부터 민원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담임교사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학생들로부터 전해 들어 대충 알고는 있는데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는 이래저래 몹시 난처하다. 이 교사는 교원능력개발평가에 학생이나 학부모가 ‘수업 시간에 화를 내지 말아 주세요’, ‘소리를 지르지 말아주세요’ 라는 멘트를 많이 남긴 걸 보고 내 지인인 교사에게 ‘도대체 왜 애들이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학부모들이 뭘 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며 황당하고 억울하다는 반응만을 보인다. 사교육은 구경도 못 해본, 학교 수업이 학습기회의 전부인 학생들이 많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장기적인 학습 결손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모든 걸 알게 된 교사가 이 상황에 직접 개입해 오지랖을 떨지 않는 건 앞의 예와는 달리 직업윤리 위반이다. 학생들 특히 초등학생들은 자신들의 존엄과 학습할 권리를 스스로 지키기에는 너무 어리다. 자신들이 다치고 있다는 사실,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시간과 기회를 날려 버리는 경우도 많다. 물론 다른 교사의 교실 상황에 대한 개입은 복합적인 이유로 몹시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 생각만 해도 심장과 뒤통수가 뻐근해질 정도로 부담스러운 일이고, 접근방식도 다방면으로 굉장히 섬세한 배려를 기해야 한다. 그럼에도, 원칙적으로 교육 현장에서 교사는 내 학생, 네 학생을 따져가며 교육해서는 안 된다. 서로에게 꼰대질을 하자는 말이 아니라 ‘교육의 중심을 학생’에 놓고 교사들이 서로 배우고, 나누고, 필요하다면 날 선 비판도 할 수 있는 통로를 열자는 뜻이다. 당장은 이게 교권 침해, 전문성 침해처럼 비춰질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들의 전문성 발전에 좋은 영향이 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이 오지랖은 내가 근무하는 학교뿐 아니라, 이웃 학교, 나아가 지역과 국가의 경계까지도 허물어야 한다. 내가 내는 목소리 하나가 얼굴 한번 본적 없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교사들은 입 다물고 하라는 대로만 하라’ 는 교육 당국의 명령에도 저항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교사가 지켜야 할 직업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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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할 만큼 위대한 스승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정작 그 위대한 스승들은 선생 소리를 듣는 것도 겸연쩍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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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


나는 위대한 스승이기는커녕 내 몸 하나 추스르기도 바쁜 보통 사람, 보통 교사다. 내가 학생들의 존엄함과 그들의 명예를 지켜주고 싶어 하는 것은 절대로 내가 위대해서가 아니다. 그들을 지켜주고 싶은 만큼, 인간으로서 나의 존엄함과 교사로서의 나의 명예를 지키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위대한 스승은 못 되도 몹쓸 교사는 되지 말자고 생각하는 내 진심만 알아준다면 학생들이 내 그림자 위에서 널뛰기를 하든, 그림자로 전을 부쳐 먹든 무슨 상관인가. 그런 허울에 불과한 권위 따위 내가 직업윤리를 지키며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교사는 신이 아니다. 교장도, 교육감도, 교육부 장관도 신이 아니다. 교육환경을 만드는 것은 신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들과 특수한 이해관계를 갖는 인간들이다. 교사의 권위, 교육 시스템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고 인간이 만든 환경의 부산물에 불과한 것들을 바이블인 양 휘둘러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또박또박 증언하듯, 성스러운 신의 장막을 두르고 있던 교실은 그 어떤 곳보다 폭력이 난무하는 장소였다. 난무하던 폭력의 많은 부분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진화되어 재생산되고 있다. 누구 좋으라고 있는지 모를 성스러운 장막 따위 걷어 내 버리자. 교실에 필요한 건 신의 장막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신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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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