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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2월 17일, 필리핀을 점령한 일본군 사령부 명의로 ‘필리핀 교육개혁지침’이 발표된다.


1. 필리핀인들에게 대동아 공영권의 일부로서 새 질서를 이해하게 하고 일본과 필리핀의 우호 관계를 선전해야 한다.
2. 과거 서구 국가들, 즉, 미국와 영국(필리핀은 영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의 식민 문화를 뿌리 뽑고 자주성을 지닌 새 필리핀 문화로 대체한다.
3. 민중의 사기진작을 위하여 과도한 물질주의를 포기하게 한다.
4. 영어에 관련된 교육을 중단하고 일본어 교육을 확대한다.
5. 초등교육과 직업교육을 확대한다.
6. 민중들에게 노동애(愛)를 고양시킨다.



기술적으로는 일본인과 필리핀은 협력국가였다. 하지만 일본은 필리핀을 서구인들의 식민정책에 의해 노예정신이 숙달된 노예로만 보았다. 그러면서 일본인 특유의 물질을 배제하고 정신을 강조하는, 변조된 일본식 동양 사상이 필리핀 식민정책에 잘 먹혀들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필리핀인들은 일본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이미 서구와 식민지배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일본의 기만적 프로파간다는 겉으로는 군사지배와 함께 잘 먹혀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 전혀 먹혀들지 못했다. 필리핀인들은 단지 협력하는 척을 했을 뿐 어떤 것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상품작물과 광업산물을 수출하고 미국으로부터 대부분의 공산품을 소비하던 필리핀 경제구조 또한 문제였다. 주둔군의 보급품을 조달하기위해 극심한 경제적 착취가 가해졌고, 일본인에 대한 반감은 광범위하게 퍼져갔다. 



협력자와 레지스탕스


외국에 대한 억압과 지배에는 언제나 ‘협력자와 레지스탕스’라는 프레임이 생긴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외국인 점령자에 대해 협력하고, 어떤 이들은 저항한다. 그러나 혁명과 반동의 프레임과 마찬가지로, 이는 단순한 선악의 구별이 아닌 각자의 물질적 이해관계와 정신적 기반에 뿌리를 둔다. 필리핀도 그랬다.


일본에 협력했던 이들이 단순하게 일본의 프로파간다나 허황된 약속에 넘어갔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의 최선이 일본과의 협력이라고 보았기에 협력했던 것이다.


당시 유력 정치인중 하나인 베니그노 아키노(Benigno Aquino Sr.)를 보자(필리핀 현직 대통령인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3세는 베니그노 아키노의 손자다). 다른 정치인 유력자들처럼 미국 식민 통치하에서 1917년 의회에 진출했으며, 1935년 체제에서 퀘손 정부의 농‧상업부 장관을 맡았다. 그는 일본통치하에서 칼리바피(kalibapi)라는 친일정치조직(우리의 국보위 쯤 된다)의 수장이었고, 일본에 의한 괴뢰조직인 필리핀 독립위원회의 부의장이었다. 미국 진주 후 친일 혐의로 재판을 받지만 정치적 영향력 덕분에 몇 주 후 방면이 된다. 1947년 심장마비로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과 손자에 의해 독립영웅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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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도 있다


이전 편에서 언급한 필리핀 독립영웅이자 필리핀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이 시기에 일본의 협력자로 변절한다. 그는 필리핀의 공보매체에 실린 수많은 친일논설과 대중연설을 통해 필리핀의 제1반역자로 이름을 올리지만, 미국의 점령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단죄를 피한다. 비슷한 과정을 거쳐 그 또한 필리핀 독립영웅으로 평가받는다.


일본 아래서 필리핀 정부 수반이 된 필리핀의 민족주의자 호세 라우렐(Jose Laurel)은 미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린 백인들의 반복되는 소리에 지쳐버렸습니다. 그건 단지 약한 이들을 착취하기 위한 가면에 불과합니다.”


그에게 있어 미국이란 선량한 가면을 쓴 착취자는 겉으로 드러난 일본인 점령군보다 더 큰 위협이었고, 일본군 점령에 협조하며 사회를 개혁하는 방안이 민족주의자로서 더 나은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1943년, 그는 다시 이렇게 이야기 한다.


“독일의 패망 후 연합국이 일본의 종말을 만드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아마 6년이면 독일을 패망시킬 것이고, 4년이나 그 이상의 시간이 흐르면 일본과의 전쟁도 끝날 것입니다. 우린 6년 후가 아니라 그 이전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미국인들의 기만적 통치에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었던 민족주의자 엘리트들은 일본을 기회로 보았다. 경제 구조를 변경시키고 필리핀의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는 것이 민족주의적 목표이기도 했지만, 그들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런 복잡한 셈법 속에서 친일행위와 변절이 있었다. 미국이 돌아온 후에는 그들에게 다른 정치의식이 심어진다.


한편, 지방각지에선 자발적 게릴라들이 조직되었다. 북 일로코스에서는 Roque Ablan과 Feliciano Madamba가 미국계 회사의 노동자와 광부들로 게릴라를 조직했다. 바탄에서 탈출한 장교들과 노동조합들에서도 게릴라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침략자에 저항하는 필리핀의 용기와 저항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미국의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필리핀 독립의 깃발을 들고 일제에 협력하는 엘리트들과 미국 게릴라의 깃발을 들고 일제에 저항하는 민중의 구도는 분명 단순한 선악의 프레임은 아니었다.


1944년 10월 20일, 루존 재탈환 작전의 사령관이 된 맥아더의 미국군은 포격과 함께 필리핀의 동남부 섬인 레이테(Leyte) 해안에 상륙한다. 그와 같은 날 라디오를 통해 맥아더의 필리핀의 미군의 재진주 성명이 발표되었다.


“필리핀 민중들이여, 내가 돌아왔습니다. 전능하신 신에 영광을 통해 우리 군이 필리핀의 땅을 다시 밟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3일 뒤 그는 필리핀 식민주정부(Common wealth Government)가 다시 세워졌음을 발표한다.


1945년 1월, 미국이 마닐라 북부 팡가시난의 링가엔에 상륙했을 때, 이미 그곳은 필리핀 게릴라들에 의해 정리되어 있었다. 미국군과 필리핀 게릴라들은 빠르게 남으로 진출하여 2월 4일 마닐라에 입성했고, 조직적 저항이 불가능하다 판단한 일본군들은 밀림과 산악지형으로 도주한다. 맥아더와 미국은 필리핀의 경제와 정치를 전쟁 전으로 돌려놓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했지만, 미국 식민지 체계로의 회귀이기도 했다.



게릴라들 그리고 Hukbalahap


일본은 단 3년 동안의 식민지 통치를 했을 뿐이지만 광범위한 저항을 만들어 냈다. 물론 그 배후에는 미국에 대한 믿음이나 미국이 필리핀을 재점령 했을 시 뭔가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기회주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게릴라 조직의 근본적인 힘은 민중들이 경제‧문화적으로 일본에 갖고 있던 반감이었다.


미국이 필리핀을 재점령하자, 부역자에서 게릴라로서의 신분세탁이 이루어졌다. 일례로 1945년에 1100명이었던 막사이사이(여러분이 아는 그 막사이사이)의 게릴라 조직이었던 ZMD의 인원은 2년 후 10441명에 이른다. 누락된 이들을 끼워 넣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로비를 통해 신분을 세탁하기 위함이었다. 다른 게릴라 조직도 마찬가지였다. 필리핀 엘리트가 이해관계에 따라 친일부역자가 된 것처럼 그들은 똑같은 이유로 게릴라가 되었다.


필리핀 게릴라 조직들이 모두 미국의 깃발을 들고 미국의 귀환을 기다리던 건 아니다. 조직은 민족적 정서나 민중의식에 더 많이 기대고 있었고, 맥아더의 귀환 후에도 그의 지휘에 100%따르지 않은 조직도 있었다. Hukbalahap은 좀 더 민중적인, 민중의 계급의식이 자생적으로 나타난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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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필리핀 재점령 이후 일련의 충돌들 인하여 맥아더는 Hukbalahap을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으로 인식한다. Hukbalahap의 두 가지 정책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역 위원회를 만들어 의사를 결정했으며, 친일 부역자 지주에게는 소작농들이 쌀을 바칠 필요가 없다며 거부했다. 이는 미군의 재점령 이후 재빠르게 친미주의자로 전환한 지방의 유력가들과 구 체계를 복원하려는 맥아더에게는 위협으로 여겨졌다. 공산주의자란 딱지는 편리하게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1945년 6월 15일의 Mariano Balgos의 성명에 따르면 Hukbalahap은 공산주의자와는 거리가 있는 조직으로 보인다.


“우리와 미국을 떨어뜨려 놓고 우리와 필리핀 민중을 떨어뜨려 놓으려는 불온한 시도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Hukbalahap은 결코 필리핀 식민주 정부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르히오 오스메냐(Sergio Osmena)가 이 정부의 합법적이고 정당한 대통령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전에 반대하며 또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사회화된 산업이나 국가자본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동맹에서 민주주의적 산업화를 통한 우리 국가의 진보를 추구합니다.”


Hukbalahap은 반일 전선에 선봉에 섰던 필리핀 민중의 자생적 게릴라 조직이었다. 필리핀 농촌인구의 대부분인 소작농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맥아더에 의하여 공산주의자 반군으로 낙인찍히면서 필리핀 내전의 단초가 된다. 그들은 미국을 위해서 게릴라전을 조직했고, 이후에는 미국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조직한다.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1953년 막사이사이 때다. 내전은 필리핀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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