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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결하고도 정교하며, 동시에 충격적인 소설은 오랫동안 독자들의 마음과 꿈 속에 남을 것"



우리나라 작가인 ‘한강’이 저서 <채식주의자>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 상 인터네셔널(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 부분을 수상했다(정확히는 영어 번역자와 한강 둘이 받았다). 당연히 언론에선 한국 최초니 뭐니 하며 엄청 조명해줬고, 현재도 조명하고 있는 중이다. 베스트셀러에 한강의 책이 줄을 서있는 것은 물론 어떤 서점엔 한강 코너까지 만들어졌다고 한다.


음, 맨부커 상 타기 전부터 알았던 작가 한강을 알았던 사람 소온? 장담컨대 별로 없을 거다. 한국 문학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에겐 익숙할지 몰라도 한강은 상을 받기 전까진 대중적인 작가가 아니었으니까. 아마 여기저기서 한강, 한강하고 울기만 할 거라고 생각한다.


꺼삐딴 리 같은 나는, 지금이 내가 나서야 할 자리임을 알았다. 한강알못(한강을 알지 못 함)이지만, 내가 바로 이 구역의 한강잘알(한강을 잘 앎)이라는 마음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인 한강을 소개하는 척 덕심을 뽐내기로 했다.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여기저기 좋아해달라고 영업하는 게 진정한 팬 아니겠나(아니라면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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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강을 빠, 아, 아니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다. 글이 내 스타일이다. 처음 접한 한강의 단편집 <노랑무늬 영원>의 충격은 엄청났다. 섬세하고 차분한 문체지만, 그 문체에 실려있는 의미가 강렬했다. 글 속에 담겨 있는 힘이 엄청나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모른다.


목이 말라서 눈을 뜬 차가운 새벽, 기억할 수 없는 꿈 때문에 흠뻑 젖은 눈두덩을 세면대 위의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리라는 것을 모른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당신의 손이 거푸떨리리라는 것을 모른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뱉어보지 않은 말들이 뜨거운 꼬챙이처럼 목구멍을 찌르리라는 것을 모른다.


<노랑무늬 영원> 中



이 정도로 못 느끼겠다고? 더 설명해달라고? 국문학도라 키보드만 잡으면 논문이 나오니까 밑에서 설명할 거다. 절대 귀찮아서는 아님.


한강 한정으로다가 본격 시류를 타는 꺼삐딴 빠순이가 되기로 했지만, 문학에 관심이 전혀 없었던 사람에게 한강을 추천하는 게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순수문학에 가까운 글들을 써내는 한강이라 통속문학에 익숙한 사람들은 일찌감치 읽는 것을 포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스트 생각일 뿐 쓰긴 쓸 거다. 한강이 왜 ‘한강’인지를 만국민이 알아줬으면 좋겠으니까. 이 글을 읽고 님들이 ‘한 번 쯤 한강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만들 거다.



1. 작가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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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강의 책 뿐만 아니라 ‘작가 한강’을 좋아하는 포인트를, 논문 쓰는 심정으로다가 하나하나 설명해보겠다.


1)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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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강의 아버지는 한국 문학의 권위 있는 소설가 중 한 명인 한승원 작가다. 대표작으로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다산>, <추사> 등이 있는데,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한 마디로 유명한 사람이다. 이제는 아버지보다 한강 본인이 더 유명해졌지만, 굳이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건 한강이 작가가 된 데에 아버지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문학의 피가 꽃을 피운 거라고 볼 수 있겠다.


2) 문체


한강의 대표작으로는 맨부커 상을 수상한 <채식주의자> 말고도 <바람이 분다 가라>, <소년이 온다>, <노랑무늬 영원>, <희랍어 시간> 등이 있다. 한강의 시 혹은 소설을 관통하는 한강의 문체는 참 특이하다. 시로 등단했기 때문인지 시를 읽는 것 같기도 하고 소설을 읽는 것 같기도 하다.


어두운 숲이었어. 아무도 없었어. 뾰족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해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어. 분명 일행과 함께였던 것 같은데, 혼자 길을 잃었나봐. 무서웠어. 추웠어. 얼어붙은 계곡을 하나 건너서, 헛간 같은 밝은 건물을 발견했어.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간 순간 봤어. 수백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걸.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내리고 있었어


<채식주의자> 中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체는 아닌 것 같으다.


국어 시간에 졸지만 않았어도, 수능만 봤어도 알 수 있는 부분이지만, 보통 시와 소설은 문체가 확연히 다르다. 시에서 쓰는 문체 따로 있고, 소설에서 쓰는 문체 따로 있다. ‘청산에 살어리랏다’와 ‘자연에서 살란다’는 엄연히 다르지 않나(아니라면 머리를 조아리겠다).


하지만 한강은 소설에서 시를 쓴다. 평론가들이 ‘시적인 소설’이라고 표현하는 한강의 소설은 꼭 시 같다. 시를 노래하듯 속삭인다. 분명 소설인데 서정성도 들어가있다. 글타고 처음부터 끝까지 시 같은 것도 아니다. 시에서만 볼 수 있는 문체와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문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같은 챕터 안에서 일어나는 갑작스런 문체의 변화(시 문체에서 소설 문체로의 변화 혹은 반대)는 독자로 하여금 다양, 밀도, 긴장감 느끼게 한다. 한 마디로 지루할 틈이 없다. 롤러코스터에서 평지를 지날 땐 오, 한 개도 안 무서운데, 했다가 뚝 떨어져서 믿지도 않는 신을 부르짖는 느낌이랄까.


혹자들은 한강의 이러한 문체 때문에 한강을 단순한 소설가 이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한강의 소설이 어렵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나는 이 섬세한 문체를 매우 사랑하기 때문에 혹자들의 의견은 듣지 않겠다. 원래 어른은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거랬다.


3) 광주와 인간의 폭력성
 

작가 한강에게 전라도 ‘광주’는 매우 중요한 장소다. 광주 출생임에도 1980년 이전에 서울로 상경해 5월의 광주를 직접 경험하진 않았지만, 한강의 문학에서 광주는 "끊임없이 되태어나고 있"는 곳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강은 5월의 광주를 다룬 책 <소년이 온다>를 집필한 후 가진 인터뷰(링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게(1980년 5월의 광주) 제 삶이나 인간을 대하는 태도에 굉장히 큰 영향을 끼쳤다는 걸 발견하게 됐어요. 그걸 깨달은 후로는 무엇이 됐든 글쓰기를 통해 이걸 해결해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한강에게 있어 광주는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인식'을 가지게 된 계기다. 광주에서의 일은 한강으로 하여금 '내 눈에 보이는 세계는 굉장히 아름답기만 한데 그 속에 이런 식의 폭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게' 했다. 실제로 한강은 자신의 저서에서 지속적으로 인간의 폭력성과 근원에 대한 질문들을 던져오고 있다.


한강의 광주에 대해 말하기 위해선, 한강이 '광주를 지나친' 소설 <소년이 온다>에 대해 얘기하는 게 더 빠를 것 같기도 허다.


<소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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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의 광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때 죽은 소년 ‘동호’의 마지막 기억들을 이어붙이면서 그 당시를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소년’은 동호를 가리키며, 순결함, 깨끗함, 고귀함, 인간에게 있어서 훼손되면 안 되는 것들을 의미하기도 헌다.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15살 중학생 동호는 도청 상무관에서 시신 수습하는 일을 돕는다. 그 때 대대적인 학살이 예고되었고, 함께 일을 하던 대학생들은 동호에게 집에 돌아갈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동호는 일을 계속했고, 결국 죽음을 맞는다.


동호를 비롯해 대학생들, 광주에서 목숨을 잃은, 혹은 목숨은 부지했다고 하더라도 고문을 당했던 본인들과 희생자 유가족들은 30년이 지난 시점에도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한강은 광주를 다룬 <소년이 온다>에서부터 인간의 폭력성에 대해 묻는다. 한강은 이 소설에서 당시 광주뿐만 아니라 그 때로부터 30년 이후를 서술하며, 그 때의 기억이 현재까지 이어진다는 관점 아래, 우리에게 폭력성이 남아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와 함께 한강은 인간의 폭력성에 맞서는 연대를 표현하기도 한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자신들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과 투쟁, 결국 죽게 되지만 그들에게 있어 광주항쟁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강렬한 의지였다는 것이다.


이런 한강의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물음은 <채식주의자>에서도 이어진다.



2. <채식주의자>


서론이 매우 길었지만 한강을 이 정도 알아야 맨부커 상을 받은 <채식주의자>도 알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이제 진짜 화제작 <채식주의자>를 알 시간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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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감 쩐다


<채식주의자>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책이다. 문학에 관심 없는 친구 하나는 이 소설을 읽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소설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이 세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다. 주요 소재인 ‘채식’은 이 세 개의 소설을 모두 관통하고 있다.


첫 단편 ‘채식주의자’는 주인공 영혜가 이유 없이 채식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영혜는 채식을 하면서 사회의 질서와 점점 멀어지고, 가족과 사회의 질서로부터 벗어난다. 두 번째 단편 ‘몽고반점’은 영혜와 형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실수로 영혜의 벗은 몸을 본 형부는 영혜의 몸에 있는 푸른 몽고반점을 본다. 형부는 이런 영혜를 영상으로 남기며, 이 과정에서 형부와 영혜는 관계를 맺는다. 둘의 관계를 영상으로 본 영혜의 언니 인혜는 영혜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마지막 단편 ‘나무 불꽃’은 영혜의 언니 인혜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나무 불꽃’에서 영혜는 채식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회의 질서 속에서 평범한 삶을 유지하는 인혜는 이런 영혜를 가장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 세 개의 단편 속 영혜는 음식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인간이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필수 요소 중 하나이며, 이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을 포기하는 것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영혜는 이것을 거부함으로써 정체성을 얻는다.


1) 채식의 의미


주인공 영혜가 채식을 하는 건 꿈 때문이다. 영혜는 누군가를 죽이는 꿈을 꾼다. 그것도 죽고 죽이는 연쇄적인 살생을 하는 꿈이다. 이 꿈을 꾼 뒤 영혜는 정신적으로 혼란한 상태를 겪고, 혼란의 상태를 벗어나고자 냉장고에 있는 고기들을 모두 버린다. 육식은 다른 생명을 해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 영혜의 꿈에서 나타나는 연쇄적인 살생은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사회 시스템을 빗댄 거라 할 수 있다.


영혜는 어린 시절, 자신의 다리를 문 개를 잡아먹은 적이 있다. 이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을 처벌하는, 사회의 질서를 의미한다. 즉, 영혜가 개를 잡아먹은 것은 사회의 질서를 영혜가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영혜는 살생에 관한 꿈을 꾼 뒤 내면화했던 사회의 질서를 거부하기 시작한다. 육식에 대한 거부가 사회의 일반적인 질서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여지면서, 영혜는 작게는 남편과 가족, 그리고 크게는 사회로부터 격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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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채식’은 단순히 기호가 아니라, 사회의 질서를 거부하는 움직임이다. 즉, 사회가 계속해서 유지시켜오고 지켜온 지배 질서와 문화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것이다.


영혜의 가족 내에서의 사회의 지배 질서는 아버지라는 인물로 대표된다. 아버지는 사회에서의 남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혜의 아버지는 영혜에게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고 한다. 사회의 질서를 거부하는 영혜에게 억지로 사회를 받아들이게끔 하는 것이다. ‘정상인’을 만들기 위한 아버지와 아버지의 행동이 상징하는 것은 남성 중심의 사회 질서다.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영혜의 채식은 사회의 지배 질서이자 인간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인간 중심적 사고와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거부하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에서 생산해내는 기본적인 관념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원래 상태로 돌이키려는 것이다.


2) 몽고반점


<채식주의자>를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독자들의 대부분은 이 ‘몽고반점’을 챕터를 이해하지 못한다. 형부와 영혜와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 왜죠? 라고는 묻지 않겠다. 혼날 것 같으니까... 여하튼 ‘몽고반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의 몽고반점의 의미와 형부가 ‘예술가’라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여기서 예술가는 틀에 박힌 관념과 질서를 벗어난 존재다.


몽고반점은 영혜의 몸에 있는 점으로, 대체로 푸른색이다. 채소, 식물의 이미지와도 맞닿아 있는 몽고반점은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의 몸에 존재하면서 영혜의 존재를 드러낸다.


보통 '폭력성'하면 떠오르는 색은 빨간색이다. 그에 반해 식물과 몽고반점은 푸른색이다. 이 몽고반점을 보고, 영상 '예술가'인 형부는 영감을 받는다. 관념과 질서를 벗어난 형부는 영혜의 ‘채식’이라는 중심에서 벗어난 사고를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다. 영혜의 몸에 있는 ‘몽고반점’을 특별하게 생각해 반응하는 것은 영혜의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의 지배 질서로부터 벗어난 두 사람이 관계를 맺는 것은 사회의 가족제도로부터 벗어나는 탈 중심적인 행위와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사회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형부를 경찰에 신고하고, 이들을 미쳤다고 생각하며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들의 행위는 지배적인 틀에서 벗어나고, 지배 질서를 거부한다는 데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많은 독자들이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은연중에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람을 피라는 건 아니고...)


3) 채식에서 거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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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나무 불꽃’에서 영혜는 채식을 넘어 식물처럼 물만 섭취하려고 하며, 자신이 완전한 식물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신적인 탈신이다. 영혜는 사회의 질서에 거부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질서에 대해 완전한 거부를 하려고 한다. 완전한 결백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혜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모든 사회와 인간의 질서에 대한 거부, 즉,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거부가 영혜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한강은 영혜가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모든 폭력을 거부하는 결백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한가, 그랬다가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한강은 여기에 확실한 답을 내려주지 않고, 독자들에게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3. 한강, 참 어렵지만서도


혹자는 한강이 인간의 폭력성에 대해 물으면서도 확실히 답을 내려주지 않는 것에 대해, 답을 독자들에게 생각하게 하는 데에 불만을 토로할 수도 있겠다.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근원적 물음, 말부터 어려운데 답까지 내리라니 장난하냐능! 이라는 생각을 하지 아니할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에 명확한 답을 내릴 필요는 없다. 관찰하고 생각하고 돌아보다가,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고 성찰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 있으니까. 한강이 5.18을, 인간의 폭력성을 섬세하게 관찰했듯 나 자신에게도 질문을 던져보는 거다.


육식은 폭력적인가 하는 단순한 물음부터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회의 지배 질서에 대한 의문, 그 속에 묻어 있는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의문. 그리고 나와 내 삶을 둘러싼 폭력성에 대한 의문. 다시 말하지만 명확한 답은 없고 내릴 필요도 없다. 한강 본인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한강이 제기한 물음에 대한 '사유'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으다.

여기까지가 맨부커 상 수상의 바람을 타고 온 꺼삐딴 덕후의 한강 소개문이다. 이 글이 모두를 한강잘알로 만들어주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채식주의자>를 들춰볼까 하는 생각을 했으면 됐다. 좀 두서없는 글이 된 것 같은데 요는 하나다. 한강 읽어라, 두 번 읽어라.


P.S: 작가 한강 본인과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 모두에게 수상 추카드린다는 말씀 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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