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 독재자들

흔히들 말하길 국민은 그 국민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손으로 뽑은 지도자가 다른 외부 세력이나, 혹은 내부의 권력에 의하여 물갈이되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고 특별한 일도 아니다. 허나 그렇게 만들어진 지도자들 대부분은 그 국민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지도자이며, 자신을 위해서 국민들을 괴롭게 만드는데 많은 노력과 자원을 쏟기 마련이다. 그 대표적인 국가가 칠레였다. 한때 최초로 민주적인 투표를 통한 사회주의 정권을 만들어내었던 국가는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심과 망상에 빠져든 미국과 자신들의 주머니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는 것을 용납지 못하는 자본가들에 의해서 끔찍한 과거를 가지게 되었다.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사나이가 만든 이 피비린내 나는 과거는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1970년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여 자유주의 정당이 주도하고 있던 칠레의 총선에서 한 이변이 일어났다. 그 이변은 라틴 아메리카 최초로 무력이나 강제적인 힘이 아닌 민주적인 투표과정을 통해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지도자가 탄생했다. 그 이름은 살바도르 아옌데 고센스, 소아과 의사로 시작하여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된 남자였다.

살바도르 아옌데의 가문은 본디 뿌리깊은 좌파 성향의 집안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인 라몬 아옌데는 칠레 최초의 비종교적인 학교를 설립한 사람이었고, 그의 아버지인 살바도르 아옌데 카스트로 변호사 또한 급진당의 핵심 당원으로 활동했었다. 이런 집안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살바도르 아옌데 또한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며 학생운동을 하면서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사회주의에 귀의했다. 이러한 정치적 성향 덕에 그는 옥살이를 했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사회변혁에 매진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버지인 카스트로 변호사가 사회주의 공화국을 무너뜨린 군인들에 의하여 살해당한 일과 보수적인 병원들에게 취직을 거부당하고 병리학 조수로 살면서 빈민들의 해부하는 일을 맡았던 그가 빈민들이 얼마나 병에 쉽게 노출되고 비참하게 사는지에 대해 깊게 성찰하게 된 이후였다.

 

1970년 당시 칠레의 정치 상황은 진보주의 정당들이 서로 분열하여 대립하는 과정에서 이러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사회당과 공산당은 인민연합을 결성하였는데, 공산당의 후보였던 파블로 네루다가 스스로 물러나는 것으로 살바도르 아옌데가 후보로 임명이 된다. 그는 선거에서 전임자였던 호르헤 알레산드리 전 대통령과 선거를 치러 2%의 차로 승리하였으나 칠레의 법 상 과반수가 넘어야만 인정이 되었기에 선거의 결과는 의회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다행이도 의회 또한 사회당을 지지하였고, 그는 마침내 칠레의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 지도자가 남미에 탄생했다는 것은 오히려 불행이었다. 남미는 전통적으로 미국의 깊은 개입을 받는 땅이었으며 당시의 미국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물결이 밀려오는 것에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히스테리를 부리는 냉전시대의 미국이었다. CIA는 칠레의 군부를 움직여서 이러한 선거를 무효로 돌리려는 시도를 벌였는데 그 시도가 바로 르네 슈나이더 장군을 납치하려는 시도였다. 르네 슈나이더 장군은 헌법주의 독트린의 신봉자로 군대는 국가의 주권을 수호하는 것이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이였기에 그를 제거해야만 칠레의 군대를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결국 르네 슈나이더 장군은 자신을 납치하려는 이들에게 격렬히 저항하는 과정에서 총상을 입었고 3일 만에 세상을 뜨고 만다.

이러한 파란 속에서도 살바도르 아옌데는 기독교 민주당과의 공조를 통하여 1970 113일에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에 오른 칠레는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멸칭을 받을 정도로 다국적 기업들과 미국에 의한 수탈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그는 사회주의를 향한 칠레의 길이라는 정책 실행에 착수하게 되는데 그 내용의 골자는 구리 광산과 같은 핵심 산업 시설에 대한 국유화와 국가 토지의 5분의 1의 국유화(이 작업은 전임자들의 기초가 닦여져 있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영양실조에 걸린 아동들에 대한 무상 우유 급식(이는 아옌데의 개인적인 바람이었다는 말과 당시 칠레의 축산업을 지배하던 네슬레와 협약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시행했다는 말이 있다.)이었다. 기본적으로 국민들의 빈부격차를 줄이고 국유화한 기업과 토지를 통하여 일자리를 창출, 민중들의 생계유지를 최우선으로 잡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였는지 일시적이지만 칠레는 산업 성장 12%, GDP8% 성장했고, 인플레이션에 34%에서 22%, 실업률은 3% 줄어들었다.

그러나 앞서서 말했다시피 최초로 민주주의 투표를 통해 탄생한 사회주의 국가를 인정할 수 없었던 미국과 자신들의 재산을 국유화함으로서 빼앗아간 다국적 기업들이 이들의 성장을 하하호호 웃으면서 축하해줄 일은 만무했다. 그들의 지속적인 압박에 의하여 칠레의 에스쿠도화가 인플레이션이 140%까지 올라갔으며, 정부 예산 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모르고 떨어져 내렸다. 결국 아옌데 정부는 가격 통제를 강제했고 이는 상점에서 생필품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사라진 물건들은 지하시장을 통하여 거래되는 일을 낳았다. 별 수 없었던 아옌데 정부는 디폴트를 선언하고 임금을 올리고 물가를 강제적으로 고정시키는 것으로 인플레이션을 잡고자 노력했지만, 이는 기득권층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오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정부에서 임금을 계속해서 올렸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19728월 한 달 동안 오른 기본 소비재의 가격 편차가 무려 120%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이 난리 통에 미국은 칠레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해버렸는데 칠레 경제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던 구리의 가격을 대량으로 풀어버리면서 가격 폭락을 일으킨 것이다. 66달러에 달했던 구리 가격은 순식간에 48달러까지 떨어져버렸고, 이는 칠레 경제에게 사실상 사망선고를 내린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경제를 엉망으로 만든 것으로도 이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그들은 아옌데 정부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파업, 태업, 물가인상 조작 등 칠레 경제를 파멸시키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중에서 가장 큰 파업은 197210월에 있었던 파업이었는데, 이 파업은 트럭 기사들이 주도한 것으로 이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사업가, 몇몇 노조가 가담하여 국가가 사실상 정지 상태에 머무르자 아옌데 정부는 강제적으로 트럭을 징발하여 상황을 해결하고자 노력했으나 칠레 항소 법원에서 이를 불법이라고 선고하고 트럭을 모조리 되돌려줄 것을 명했다. 이 기간 내내 칠레에서는 계급들 간의 갈등이 끊이질 않았는데, 대부분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기키고자 노력하는 자본가들과 잘 살고 싶었던 노동자들의 대립이었다.

 

이러한 사단에도 아옌데는 1973년에 전보다 더 많은 표를 받음으로서 자신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미국도 이 사회주의 국가가 생각보다 더 단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결국 미국은 197311월에 군부 쿠데타를 지원하였고, 이 쿠데타는 성공한다. 쿠데타의 우두머리는 그 유명한 피노체트였고, 그는 국경과 공항을 폐쇄하고, 국회와 방송국을 장악했으며, 모든 정치활동을 정지시켰다. 또한 좌파에 가담했다고 알려진 인물들과 좌파 정치인, 예술가, 시민 여하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거나 혹은 반군부세력은 모조리 총살에 처했다. 쿠데타 속에서 아옌데 대통령은 대통령 궁에서 끝까지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시민들에게 라디오를 통하여 마지막 고별사를 전한다.

 

이번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내가 이제 박해 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내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 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의 희생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 행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그 직후 그는 자살했으며, 후일 증언에 의하면 머리가 쪼개져 뇌수와 뇌가 바닥과 벽에 흥건히 뿌려졌다고 한다. 그의 시체는 피노체트 군에 의하여 불태워지고 재와 뼈는 내다 버려졌다. 그가 사망한 그 한 주 동안 칠레에서는 삼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온갖 악재 속에서 자신이 지향하고자 했던 바를 끝까지 밀고나가려고 했던 아옌데였지만 그에게도 단점은 존재했다. 그에 대한 비판은 칠레의 정치 세력에 조금씩 달라지는데, 일단 아옌데가 속해있던 온건 좌파는 아옌데의 개혁을,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했다는 것이다. 또한 국유화를 행하면서 아옌데 정권에 반발 심리를 가지게 된 기득권층을 제대로 일소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도움을 받고자 하였기에 당시 연립 정당이었던 기독교 민주당의 지지를 받지 못하여 제대로 개혁을 성공하지 못한 실패한 정권이라 평했다. 그의 반대 세력이었던 우파 정권은 아옌데의 정부가 그저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정권이었다고 평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구리를 풀 확률이 큰 상황에서도 이러 대처를 전혀 하지 않았고, 거기다가 오일쇼크가 일어나기 전에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차관들이 다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국유화를 통해 경제를 더욱 악화시킨 아옌데 정권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정부였다는 말이다.

 

비록 그의 방식이 잘못 되었든, 혹은 외부의 방해로 실패했든 그는 현재 칠레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뽑히며 시대에 의하여 살해당했을지언정 자신의 이상과 칠레의 빈민들을 위하여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칠레를 바꾸고자 노력했었다. 그렇기에 그는 위대했었다.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