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케인스의 "일반이론" 읽기 기본 카테고리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생계가 막막해진 노동자들은 물론, 사업가나 정치가들도 멘붕상태이긴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경제학자들에겐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들에겐 해답을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나, 있어서는 안 되기에 있을 수 없는 상황 앞에서 그저 무기력하게 시장의 자기조절기능을 믿고 기다리라는 조언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주가는 반토막에 반토막에 반토막을 거듭했다. 전세계 무역량의 2/3 이상이 깎여나갔으며, 급등한 실업률은 좀처럼 20% 아래로 떨어질 줄 몰랐다. 자유로운 무역이 세계평화를 보장하리라는 호언장담은 이미 옛말이었다. 위기가 닥치자 가장 열렬하게 새로운 평화체제를 주창해오던 국가들부터 그 체제를 싫어하게 되었다. ‘검은 목요일’이니 ‘검은 화요일’이니 명칭을 붙이는 것도 더 이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매일이 ‘글루미 선데이’였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20세기 전반기를 통틀어 보면 세계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1938년의 경제는 규모로도 분명 1913년보다는 커져있었고, 라디오, 영화, 자동차, 냉장고, 비행기 등이 개발되거나 일상화되기도 했다. ‘월급만 빼고 모든 게 다 오른다’는 푸념 마냥 삶을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발전했던 세상이었다.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바의 실질적 최저수준이나 노동자들의 생산성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데도 고용의 양이 크게 변동하는 현상을 우리는 흔히 경험한다. 호황 때에 비해 불황 때에 노동자들이 더 투쟁적인 것도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호황 때에 비해 불황 때에 노동자들의 물적 생산성이 더 낮은 것도 아니다. 경험으로 확인되는 이러한 사실들은 고전파의 분석이 적절한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데 우선적인 근거가 된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지음, 이주명 옮김,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 ‘2장 고전파 경제학의 공준’, 필맥, p.25


<인터스텔라> 덕에 일반이론과 특수이론의 차이에 대해선 열분들께서 훨씬 더 잘 아시리라.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 속칭 <일반이론>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솔솔 느껴진다. 케인스는 고전파 경제학의 유산을 물려받은 당시의 경제학이 현실감이 결여된 특수이론이라 생각했다. 토목의 제왕, 녹색뉴딜 등으로 가히 좋지 않은 이미지를 품고 계신 분이 많으시리라 예상하지만, 늘 그렇듯 케인스 역시 뭔가 우왕~스러운 특별난 이야기를 했던 건 아니었다. ‘이런 열 가지 오래 사는 것들 같으니. 기다리라니, 도대체 언제까지? 나 죽고 나서 또 다른 천년 동안?’이라는, 뭐 그런 매우 상식적인 반응이었다라고 할 수 있겠다.

말이 나온김에, 약간만 이론스러운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자. 전에도 말했듯 나님은 경제학에 대해선 X또 모르므로 막막 믿으시면 곤란하겠다. 생각해보니 그닥 다른 것도… 음음.

고전파 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어떻게 해야 부를 증대시킬 수 있느냐였다. 유사 이래로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우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언제나 존재해왔으니, 사실 그다지 색다르달 건 없는 질문이었다. 다만 아담 스미스는 ‘해쳐먹는 것도 어느 정도 것이지, 그러고도 밤에 잠이 오니?’라는 빡침을 꾸욱 누른 채, 사회적 분업과 경쟁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전체의 부는 집중될수록 줄어든다’라는 원리를 이끌어내려 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1780년대를 거쳐 19세기에 접어들면서, 크고 알흠다운 것을 사랑하는 경향은 더욱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이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이 리카도였다. 그는 더 많은 생산을 위한 더 많은 자본에 너무 꽂히신 나머지, 자본가의 이익은 상품가격을 낮추므로 소비자의 이익이기도 하다라는 결론으로까지 밀고 나간다. 비록 땅으로 이득을 챙기는 지주들이 주요타겟이긴 했지만, 자본가들의 이익과 부딪친다면 임금노동자들의 희생도 얼마든지 요구될 수 있었다.

졸라 아이러니는 리카도가 이미 자신의 이론이 전통적인 제로섬 게임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거다. 그래서 그에게 성장이란 거의 당위나 다름이 없다. 그나마 분배상의 갈등을 유예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기 때문이었다. ‘다소의’ 고통이 따르더라도 성장은 멈추지 않으며, 또한 이롭다는 걸 믿어야 했다.

시간이 갈수록 불평등은 심해져 갔다. 그리고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도 보다 날카롭게 인식되었다. 20세기에 이르면 이제 인간의 합리성이라는 용어는 거의 수천년전 신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이름처럼 낯설게만 들렸다. 제1차세계대전과 대공황은 결정타였다. 슬슬 케인스가 등판할 차례. 그는 고전파 경제학이 말하는 ‘시장’이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포문을 연다.


이 세상을 떠나 자신들만의 정원을 가꾸러 간 그들은 우리가 기존의 상태를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놔두기만 하면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최선의 세계에서도 최선인 결과가 실현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 우리가 원하는 경제의 작동방식을 고전파의 이론이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가 실제로 그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풀기 어려운 문제를 아예 배척해버리는 가정을 하는 것이다.
- ‘3장 유효수요의 원리’, p.51-52


고전파 경제학에 따르자면 더 훌륭하고 더 멋지고 더 쌔끈한 상품을 얼마나 많이 또 얼마나 싸게 생산할 수 있을까가 문제였을 뿐, 아무리 좋은 상품을 만들어낸다 한들 사줄 사람이 있을까를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어떠한 생산자가 실패하는 이유는 순전히 소비자들에게 만족스러울 만큼의 상품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능력과 필요를 갖추었으면서도 일하지 않는 사람 역시 존재할 수 없었다. 실업자란 곧 무능력자나 게으름뱅이를 의미했다. 시장법칙은 실업문제에 대해 대략 세 가지 정도의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처방을 허용해주었다. 알아서 자활의 길을 찾도록 내버려두거나, 우연히 마음씨 좋은 자선가의 눈에 들도록 내버려두거나, 그도 아니라면 그냥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거나. 그래야만 수요공급법칙을 교란한다던가, 혹은 사회 전체의 행복’량’ 증가에 지장을 주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었다. 씨바, 괜히 400번을 맞아야 어른이 된다느니(프랑스 속담), 천 번을 흔들려야 한다느니 따위의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니었던 거다.

불평등에 대한 분노를 넘어, 실업이 거의 전쟁과 동급의 위기로 여겨졌던 시대에 이런 이야기들은 당연히 한가로운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소비자들에게 만족을 주는 상품이 없어서, 혹은 수백만, 수천만의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시장이 아작났던 게 아니었다. 케인스가 기존의 경제학자들에게 가하는 반박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간결했다. 도대체 생산을 왜 하는 거냐, 소비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 근데 그 물건들을 누가 사주는 거냐, 그저 상품을 만들어내기만 하면 사주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부터가 잘못이었다라는, 뭐 그런.


자명한 것을 다시 말하자면, 소비는 모든 경제활동의 유일한 결말이자 목적이다. 고용의 기회는 필연적으로 총수요의 크기에 의해 제약된다. 총수요는 오로지 현재의 소비로부터 생겨나거나 미래의 소비를 위해 현재 하는 준비로부터 생겨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수익을 내면서 물자를 미리 공급해서 충족시킬 수 있는 소비는 미래로 무한정 미뤄질 수 없다.
- '8장 소비성향: I. 객관적 요인들', p.135


케인스는 고전파 이론이 성립하기 위해선 최소한 두 가지의 전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우선 소득과 소비가 같아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임금이 순전히 고용인과 피고용인들 사이의 평등한 협상에 의한 결과물이어야 했다.

물론 둘 다 비현실적이다. 특히나 두 번째는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아담 스미스의 말처럼 대개 생계가 더 급박한 피고용인 쪽이 불리한 위치에 놓일뿐더러, 계약상태나 노조의 유무, 정부의 입김과 언론의 장난질까지, 온갖 변수들이 협상장에 끼어들기 마련이다. 기술이나 조직의 혁신이 언제나 인간의 노고를 줄이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직종별 임금수준은 사회적 인식에 의해 미리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 전통적인 이론은 기업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교섭이 실질임금을 결정하며, 따라서 고용주들 사이에 자유로운 경쟁이 존재하고 노동자들 사이에 자유로운 경쟁을 제약하는 결속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노동자들이 원하기만 하면 고용주들이 제공하는 고용의 양에 대응하는 노동의 한계비효용과 일치하게끔 자신들의 실질임금을 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2장 고전파 경제학의 공준’, p.26


더욱 심각한 전제는 첫 번째였다. 고전파 이론은 사람들이 100만원을 벌면 100만원을 쓰고, 1000만원을 벌면 1000만원을 남김없이 다 써버린다는 가정 하에, 재화가 흐르는 물처럼 멈추지 않고 돌고 돌면서 완전고용이 이루어진다고 멋대로 상상해버린다는 거다. 그럼 케인스가 이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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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수능 이래론 본 적이 없는 그래프 때문에 당황하지는 마시길. 그냥 억지로 맹근 거에 불과하다. 암튼, 케인스에게 소득과 소비의 관계는 대충 이런 거다. 버는 돈이 많아질수록 씀씀이도 늘어난다. 그렇다고 버는 돈을 전부 다 써버리지는 않는다. 소득이 늘어나면 소비도 늘어나지만, 그만큼 쓰지 않고 남겨두는 부분도 함께 늘어난다. 이를 저축이라고 부른다. 저축에 대한 케인스의 정의는 좀 포괄적이라, 단지 장롱 속에 숨겨두는 비상금이나 은행예금뿐만 아니라, 채권이나 설비처럼 흔히 투자라고 불리는 것들도 저축에 포함된다. 그냥 쉽게 대략 소비되지 않는 부분, 위 그림에서 파란색을 저축이라 이해하시면 되겠다.

만약 버는 돈보다 씀씀이가 크다면, 즉 주황색의 경우에는 비합리적인 소비라 할 수 있다. 근데 빨간색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소득이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소비가 없는 사람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이상 밥도 먹어야 하고 옷도 입어야 하고,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러한 실업 혹은 준실업 상태에선 상품가격이 비싸건 싸건, 그런 건 부차적인 문제이다. 비빌만한 언덕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거다.

그렇다면 파란색 부분은 어떨까. 고전파 경제학에서는 이를 절제의 미덕으로 칭송해왔고, 현재에도 여전히 그렇다. 기업의 경우에는 비용절감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경우에는 한때 유행했던 재테크와 같은 이름으로, 명칭만 조금씩 바뀌어왔을 뿐. 하지만 케인스는 이에 대해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사회적으로 보면 저축은 미덕이 아니라 과소비보다도 더욱 위험한 해악에 가깝다는 거다. 오잉?


개인의 저축이라는 행위는 이를테면 오늘 저녁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행위가 일주일 뒤 또는 일년 뒤에 저녁식사를 하거나 부츠 한 켤레를 사겠다는 결정을 필요로 하거나 어떤 특정한 날에 어떤 특정한 것을 소비하겠다는 결정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미래의 소비행위를 위해 준비하는 일을 더 하게 하지 않으면서 오늘의 저녁식사를 위해 준비하는 일을 덜 하게 한다. 그것은 현재의 소비수요를 미래의 소비수요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러한 수요의 순감소다.
- ’16장 자본의 본성에 관한 여러가지 관찰’, p.258-260


뭔가 말이 되는 것도 같고 억지 같기도 하고, 아리까리하다. 그럼 다음 그림으로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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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키우는 걸 너무 좋아들 하시니까, 아예 먹음직스러운 파이를 대령해드렸다. 이 파이의 크기에 화폐단위를 붙여보기로 하자. 이 때의 단위는 실질가치를 의미한다. 그리고 매번 파이가 10%씩 커진다고 상상해보자.

일단 파이의 총 크기는 6000원이다. 세 여성분들께서 가위바위보든, 가열찬 노력에 의해서든, 아무튼 파이를 위의 그림처럼 각각 나눠먹었다. 이 때 1000원은 살기 위해 최소한으로 필요한 소비이고, 그 이상의 소득에 대해서는 뚝 잘라 절반을 저축해둔다고 생각해보자. 자,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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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 파이의 크기가 커졌다. 정말로 비율에 맞춰 파이의 크기도 키웠다. 어? 근데 파이가 쪼개져 있네? 맞다. 여자 2호와 여자 3호가 앞서 아껴둔 부분을 감안해야 하는 거다. 뭐 그런가 보다 하고, 다시금 들뜬 마음으로 나눠먹으려 보니 어라, 왠걸. 분명 파이는 커졌는데 나눠먹을 수 있는 부분은 줄어들었다. 이런, 이게 어케 된 거야. 세 분께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신다. 새로운 파이를 어케 나눠먹어야 할까. 다행히도 ‘손해를 보기는 싫지만 다들 마찬가지겠지?’ 정도의 합리적 사고를 하실 수 있는 분들이라고 또 다시 가정키로 하자. 그에 따라 애초의 소득비율에 맞춰 고통을 분담하기로 했다. 그럼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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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잔~ 또 파이의 크기가 커졌다. 근데, 씨바… 나눌 수 있는 부분은 더욱 줄어들었다. 무려 모두가 똑같이 불만스러운 양보를 감수했는 데에도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누가 가장 피를 봤는지는 금방 눈치채실 수 있겠다. 여자 1호는 이제 대출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녀가 진 빚은 여자 2호와 여자 3호의 저축으로부터 나오며, 역설적으로 나눠지는 파이를 조금이라도 더 키우는 데에 기여를 한다. 전문용어로는 거품이 끼기 시작하는 거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금융으로 귀결된다는 말의 의미는 이런 식으로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여자 1호를 쥐어짤 만큼 쥐어짜다가 결국에는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는 거다. 말이 좋아 시장퇴출이지, 그냥 열심히 고생하다 안 되면 죽으라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아마 여자 2호는 다음 차례가 되겠지. 더 이상 짜낼 데가 없으면 거품이 터지는 거고. 케인스가 금융시장을 괜히 카지노판에다 비유했던 게 아니었던 것.


오늘날 가장 숙련된 투자를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갖고 있는 개인적 목적은 미국인들이 아주 잘 표현한 대로 ‘출발의 총성이 울리기 전에 남보다 먼저 뛰어나가는 것’, 즉 대중의 의표를 찌르는 것과 이를테면 불량하거나 감가되고 있는 주화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사회적으로 이로운 투자정책이 가장 수익성 있는 투자정책과 일치한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 (…) 세속의 지혜는 관습을 거슬러 성공하는 것보다는 관습을 따르다가 실패하는 것이 평판에는 더 낫다고 가르친다.
- ’12장 장기예상의 상태’, p.191-194

(따라서 우리의 논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부의 성장이 흔히 상정되듯이 부유한 사람들의 절제에 의존해 이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에 의해 방해를 받을 가능이 더 크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 나로서는 소득과 부에 상당한 정도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사회적, 심리적으로 정당화해줄 근거가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존재하는 것과 같이 격차가 큰 불평등에 대해서는 그러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믿는다. (…) 인간 개개인이 동료시민을 함부로 다루는 것보다는 각자 자신의 은행잔액을 함부로 다루는 것이 낫다.
- ’24장 마무리하는 글: 일반이론이 지향하는 사회철학에 대해’, p.454-455


다시 한 번 지나치게 단편적으로 도식화해 버렸다는 점을 알려두어야겠다. 간간히 수학기호를 동원할 때마다 ‘아~ 씨바, 이딴 식의 설명이 다 무슨 소용이람’이라며 허무감을 토로하는 케인스라면, 겨우 이 정도 땜에 무덤에서 다시 뛰쳐나오시지는… 설마 않겠지? 흠흠.

암튼 재밌는 건, 당시 그는 빨간물이 들었다는 비난에 시달렸지만, 정작 그 스스로는 자신이 기득권에 속한다고 생각했고 또 이를 부정할 마음도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이후 케인스는 자본의 구원자로 평가되었고, 노동(혹은 토지)을 시장에서 사고 파는 상품으로 취급하는 게 인간(혹은 자연)을 사고 파는 상품으로 취급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이라든지, 혹은 과연 물건의 가치가 사람들 사이의 정서와 무관하게 정해진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 등, 주류경제학에 가해지는 여러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경제학도 결국에는 사상이라는 케인스의 결론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졸라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보상받는다, 같은 거뜰도 그런 예라 할 수 있겠다. 거창한 제목과는 달리, 사실 <일반이론>에서 무언가 확고한 경제학 이론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에겐 이론이 얼마나 일관성을 가지고 논리정연하게 정리되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확고한 신념이라든지 투철한 사명감 같은 거랑도 거리가 멀었으며, 오히려 그러한 것들로 인해 너저분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고 믿었다. 이론의 역할은 불의를 당연시하고 정당화하는 데에 있지 않았다. 부에는 책임이 따르며, 따라서 공공에 의해 그 책임이 다루어져야 한다는 게, 어쩌면 그가 말하고자 했던 유일한 일반이론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책만 파다 보니 어째 점점 셀리그만과 닮아가는 것 같다. 이런 건 좋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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