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로프의 종자은행

2018-10-21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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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kolay Vavilo.jpg

     니콜라이 바빌로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Вави́лов, 1887 ~1943)

 

1900넌대 초 전세계의 인구가 증가하자 한정된 토지에서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해야 할 필요성이 늘었다.
러시아 중부에서만 1920년과 1924년, 1936년 두 번에 걸쳐 가뭄이 들었다.

레닌은 빈약한 기금으로 구호 활동에 치중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 기금을 응용하여 응용 식물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다음에 올 기근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이 시작할 때다."

레닌은 이 임무를 니콜라이 바빌로프Nikolay Vavilo 에게 부여하였다.
부유한 기업가의 아들로 태어난 바빌로프는 전문지식을 가진 덕분에 볼셰비키 혁명에서 살아남았다.
레인은 교육받은 인텔리겐차를 비판했지만 소비에트 농업 현대화를 위해서는 과학에 기초한 접근방법을 이용해야 된다고 믿었다.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전 세계에서 종자를 수집하였다.

바빌로프는 식물 교배 연구 뿐만 아니라 종자 수집에 열정을 다했다.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표본을 1톤씩 수집하였으며 밀, 보리 ,옥수수, 콩 같은 작물이 지역마다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
예를 들어 곡물이 익는 시점이 빠르거나 늦고, 서리가 내린 뒤의 생존 가능성이 다르며  해충이나 질병에 대한 내서이 다르다는 사실에 깊은 이해를 얻었다.

바빌로프는 씨앗의 형태로 이러한 특징들을 무기한 보관할 수 있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으며 교배를 통한 새로운 종을 만들어 냈다.
그는 러시아의 척박한 기후에 특수하게 맞춘 작물, 그리고 끊이지 않는 치명적인 식량 위기를 이겨낼 품종 개발을 꿈꿨다.

몇 년 후에는 바빌포프는 레닌그라드 시내에 있는 차르의 궁전을 세계에서 가장 큰 씨앗은행과 연구 시설로 탈바꿈시켰으며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현장 연구소에서 직원 수백명이 지원 활동을 벌였다.

레닌그라드의 중앙 종자 보관소 말고도 소련 전역의 육종소 36개소가 있었으며 종자들은 이곳에 분산되었다.
1935년도 이르자 바빌로프 연구진이 수집한 작물과 야생 근연종의 수는 14만 8000 ~ 17만 5000품종에 이르렀다.


 
          Nikolay Vavilo2.JPG

 




1941년 6월 22일 히틀러의 군대가 소련 국경을 돌파하였다.
9월이 되자 이들은 레닌그라드 근방까지 진격하였다.

히틀러는 하인츠 브뤼허 휘하의 친위대인 루슬란트자멜 코만도 를 창설하였다.
이들의 유일한 목표는 레닌그라드와 소련 전역의 연구소에서 바빌로프의 종자를 탈취하는 것이었다.

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는 독일인들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지역에 정착시킬 계획을 세웠다.
브뤼허는 이들 지역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려면 바빌로프의 종자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제일 처음 위험에 처한 것은 종자가 아닌 감자였다.
바빌로프는 안데스 산맥에서 6000품종의 감자를 수천 킬로그램을 채집해 왔다.

하지만 감자들은 종자 상태로 보관하기 힘들어 감자를 심었다가가 새로 수확하는 방법으로 보존하고 있었다.
바빌로프의 연구진은 파블롭스크(레닌그라드 남동쪽 30km 떨어진 실험 농장)에서 해마다 감자를 재배하여 거둬들였다.

아브라함 Y 카메라즈와 올가 A 보스크레센스카야는 
밭으로 달려가 독일군의 포격이 완전히 밭을 파괴하기전 
각 품종마다 몇개씩 주워담으려고 최선을 다해서 상자를 채웠다.

이 작업의 중요성을 아는 소련군 병사들의 도움을 얻어서 
레닌그라드 시가지의 이사아키예스카야 플로샤디 광장(성 이삭 광장)로 상자를 날랐고
독일군이 파블롭스크를 점령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연구소원들은 종자와 감자는 헤르젠가 44번지의 건물에 보관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가장 중요한 품종을 도시 바깥으로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총 10만점의 이상의 표본과 5톤 이상의 종자를 보낼려면 한번에 조금씩 날라야 했다.
라도가호가 얼면 종자 일부를 가지고 우랄산맥까지 대피시킨 다는 계획이 에숴지고
다른 종자들은 마지막 남은 길을 따라 도시를 탈출하는 사람들의 주머니와 짐가방에 넣기로 했다.

수많은 종자 표본의 일부가 두겹 상자에 담겨 기차로 운반되었다.
표본은 기차에 실렸으나 이미 너무 늦었다.
6개월의 시간이 흐른 뒤에 종자들은 열차에서 내려져 헤르센가 44번지로 돌아왔다.
극소수의 종자만이 멀쩡한 상태로 돌아왔고 연구원들은 원래의 장소인 헤르센가 44번지에서 최대한 지켜내기로 결정했다.

1942년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면서 식량 부족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제 동료인 러시아인들도 종자에 위협적이 되가고 있었다.
레닌그라드 시 정부는 식량이 30일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육체노동자들에게 빵과 밀기울을 하루 250그램을 지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125그램씩 지급했다.
보관소에 일하는 사람들은 125그램을 지급받았다.

종자보관소는 유전자의 역사를 담은 사고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식량 창고였다.
헤르센가 44번지에는 쌀과 밀, 감자를 비롯한 수많은 종류의 곡물 수톤이 보관되어 있었다.
굶주림에 시달린 사람들이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자 침입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침입자는 사람만이 아니었다.
레닌그라드의 쥐들은 고양이를 사람들이 잡아 먹자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도 보관소의 존재를 알게 되자 공격해 왔다
종자를 담은 봉투와 나무 상자를 쏠기 싲가했다.
그러자 직원들은 보관용기를 금속 용기로 교체하고 최대한 꽉 감쌌다.

16곳의 보관실에서 직원들은 한번에 종자 하나, 상자 하나씩 일일이 점검했다.
포격으로 창문이 날아가 널판지를 댄 탓에 보관실은 어두었고 직원들은 등유 램프의 불빛 아래서 작업을 수행했다.
쥐가 한마리 없음이 확인되면 보관실은 밀봉되었다.
매일같이 직원들은 보관실의 밀봉 상태를 점검했고 3~5명이 직원들이 하루 24시간 건물에 상주했다.
나중에는 아예 스스로를 감금한채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러는 동안 수십만명의 러시아인들이 굶주려 죽었다.
배급은 빵이 아닌 엿기름가루, 셀룰로오스, 송아지 가죽으로 바뀌었고 그것만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했다.
900일간의 봉쇄 기간에 레닌그라드에서는 150만명이 사망했다.
또한 굶주림은 혹한과 같이 와서 얼어죽기 일수였다.

연구원들도 그들과 같이 춥고 굶주렸다. 그들은 둘러싼 것은 막대한 식량이었다.
이 식량창고에서 이들은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장 문제는 감자를 땅에 심어 보관할때 였다. 
감자는 얼면 죽기 떄문에 자신들은 난방할 떌나무가 없지만 감자들은 난롯불로 보관되고 있었다.

직원들은 나중에 보관실에 혼자 들어가지 않았고 항상 누군가와 동행했어야 했다.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감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42년 겨울이 되자 바빌로프에게 직접 훈련을 받은 드미트리 이바노프의 상태가 심각해졌다.
그는 벼 품종을 담당했으며 가장 많이 품종을 수집한 채집가였다.
그러나 그 쌀들 옆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다음해 1월초.. 그는 살포대에 둘러싸인채 타자기 앞에서 사망했다.

땅콩 전문가 알렉산드르 슈추킨은 책상에서 사망했다.
바빌로프의 연구 수첩을 관리하던 글라이버는 그 수첩 앞에서 굶어 죽었다.
허브를 담당하던 게오르기 크리에르도 사망했다.
이어서 귀리 전문가 릴리야 로디나, A 말리기나, A 코르준, 레온트예프시키, 셰글로프, 코발레프스키등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봉쇄 기간중 바빌로프 식물유전자연구소의 직원 30명이 사망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목숨과 바빌로프 종자 중 종자를 선택한 것이다.

이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바빌로프의 종자는 수십년이 자나도록 살아남았고 러시아 농업의 부흥을 이끌게 된다.
스탈린의 어리석은 농업 정책으로 퇴보를 거듭하여 1972년에만도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밀 1000만톤을 수입했지만
바빌로프의 종자와 그의 사명을 계승한이들이 노력하여 그가 채집한 종자중 400여 품종이 현재 러시아 전역에서 자라고 있다.



그런데 바빌로프의 종자들과 연구원들이 레닌그라드의 포위속에서 처절한 고통을 격는 동안 바빌로프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1940년 우크라이나의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식물을 채집하던 바빌로프는 스탈린 동지의 명령이라는 사람들에게 끌려갔다.
바빌로프는 내무인민위원회에 구금되었고 외국에 대한 첩자 행위와 멘델과 다윈의 잘못된 과학을 지지했다는 혐의로 심문받았다.

알렉산드르 크바트는 바빌로프를 처음으로 신문하기 시작했고 이후 심문은 무려 400여차례 2000시간에 가까웠다.
그러한 고문에 결국 1940년 8월 24일 바빌로프는 '반 소련 우익단체'인 노동자농민당의 당원임을 자백하였다.
그러나 고문이 중단되지 않았고 동료와 친구인 레오니트 고보로프와 게오르기 카르페첸코를 같은 당원이라고 불떄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바빌로프는 끝까지 메델과 다윈의 이론을 지지하였고 심문관의 주장을 부정했다.
결국 바빌로프는 간첩죄로 처형을 언도받았고 1941년 7월 9일 집해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처형장으로 이송 도중에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했고 
바빌로프와 다른 죄수들은 동부 사라토프 아스트라한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종자들은 여전히 레닌그라드에 있었는데도 죄수인 바빌로프가 이송된 것이다.

1943년 1월 26일 고문과 이질로 몸이 쇠약해진 바빌로프는 굶주림과 괴혈병으로 사망했다.
1년 넘도록 먹은 것이라고는 카샤(물과 우유에 곡물을 넣어 끓인 요리)와 절인 생선으로 연명한 탓이었다.
누구보다도 러시아인의 식탁을 위해 싸운 인물이 영양실조로 사망한 것이다.


                   트로핌 리센코.jpg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 (Трофи́м Дени́сович Лысе́нко 1898년-1976년)

바빌로프를 숙청한 스탈린의 명령은 어리석은 소련의 농학이론 때문이었다.
멘델의 유전학등을 부정한 이러한 이론을 만든 이는 바로 트로핌 리센코였다.

농부 출신인 리센코는 출신 성분부터가 소련 정부의 구미에 맞았다.
리셴코는 일부 밀 품종을 파종 전에 추운 곳에 보관하여 마치 겨울을 지내는 것처럼 하면 소출을 늘리 수 있음을 밝혀냈다.
이 접근법은 춘화 처리라고 하는데 이 방법 덕분에 이른 봄에 재배할수 있는 종자의 수가 증가하였다.
이것은 통제하에 겨울을 흉내 내는 방법이었다.

1933년 리센코는 오데사의 전연방선종유전학연구소 연구원이 되어 
유전학이나 자연 선택 같은 서구의 이론을 신경쓰지 않고 작황을 개선할 맨발의 과학자 세대를 훈련시켜야 된다고 제안했다.
춘화처리만으로도 소련 농업을 개선할수 있으니 식물 육종, 유전학, 진화따위는 필요없고, 종자 수집을 위해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교육이 아닌 자신의 밭에서 연구하여 과학자가 되었다는 배경에 노력과 영감만으로 수확을 늘릴 수 있다는 믿음은 
리센코를 소련 농업의 상징이자 희망으로 떠오르게 하였다.

리센코는 춘화한 종자를 들고 유전학이 허위라고 선언했다.
리센코를 오데사 연구소장에 앉힘으로서 스탈린은 리센코가 소련 농업이 갈길이라 공언했고 
이 의미를 다른 이들은 모두 알수 있었다.

바빌로프도 처음에는 리센코의 춘화 처리 방식이 효과적임을 인정했으나 이후 리센코 방식의 문제점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바빌로프는 여기에 더해서 스탈린에게 유전학적으로 리센코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했으나 이는 결국 자신의 파멸을 불러왔다
스탈린은 격노하여 바빌로프에게 종자를 수집하기 위한 외국 탐사가 낭비이며 들판의 노동자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선언했다.

전후 소련의 제대로된 농업연구는 중단되었다.
유전학과 진화에 따른 육종 연구는 중단되었고 소련의 교과서는 리센코의 견해에 따라 수정되고 대학 과정도 수정되었다.
바빌로프의 숙청만이 문제가 아니라 현대 유전학과 진화생물학에 대한 소련의 연구도 명맥이 끊겼다.
소련의 농업은 1953년까지 스탈린이 사망하는 순간까지 퇴보하였다.
스탈린 사후에도 그 회복은 매우 더뎠다. 소련의 유전학은 특히 농업분야는 30년이 퇴보하였다.

1972년 미국에서 수입한 천만톤의 밀은 종자는 적색경질겨울밀로 원래 러시아에서 재배하던 품종이었다.
리센코와 스탈린이 농업에서 저지른 실수는 이후 소비에트 공산주의 몰락의 단초였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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