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그리고 교회 세속적 성서읽기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사도행전 2장 42~47절)


1

많은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성령에 대한 이미지는 대체로 추상적이며 뭔가 초현실적이다. 성령을 생각할 때면 거의 어김없이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모습을 연상한다. 성령의 능력이나 은사 하면 또 방언을 주로 떠올린다. 이렇듯 성령을 떠올릴 때면 그 분위기가 판타지 문학 같거나 아니면 다소 주술적이다. 오순절에 예수의 제자들이 마가(Markus)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 마치 불의 혀가 갈라지는 듯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했다는 그들의 체험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또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문자적인 묘사에 치중하여 그것을 열광적으로 추구하든지, 아니면 감상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겨 그다지 강조하지 않는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신약성서가 이런 초월적 사건을 본격적인 교회의 출발로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라고 하는 것이 성령을 통해서 시작되었고 성령의 힘으로 유지되고 운영되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이를 유식한 말로 ‘성령의 능력으로 일치된 교회’라고 한다. 법과 윤리가 일반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한다면 교회에서는 이러한 역할 바로 성령이 한다는 것이다.


2

20세기 초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켕(Émile Durkheim)은 종교가 갖는 공동체적 특성에 주목하고 종교연구를 통해 사회의 본질과 특성을 발견하고자 했었다. 그에 따르면 종교에는 세 가지 기본적인 요소가 있는데, 바꿔 말하면 종교는 이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바로 신앙, 의례, 공동체다.


‘신앙’은 기본적으로 대상을 전제한다. 기독교 신앙의 대상, 믿음의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다.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우리가 대할 때는 일상적인 태도와는 다른 특별한 태도, 즉 존경, 그리고 조심하는 마음을 가진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할 때 취하는 평소와는 다른 태도는 마음가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구체적으로 규정된 의례(Ritual), 즉 예배를 통해 표현된다. 이런 예배의 중요한 작용 중 하나는 사람들이 함께 모임으로써 공통의 감정을 갖게 되고 공통의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서로 각각 다르다. 나이와 성별, 출신과 직업, 살아온 과정, 생각과 행동 등 모든 것이 다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한곳에 모여, 하나의 예전을 통해 하나의 대상을 향해 예배를 드린다. 방금 이야기에서도 자연스레 드러나고 있지만, 종교에는 신앙과 이를 표현하는 의례만으로는 부족하고 실재 종교가 있으려면 공동체가 필요하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공동체를 ‘교회’라고 부른다.


이 같은 교회가 사람의 필요나 신앙생활의 편의를 위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것이 아닌,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하는 사도행전의 보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바로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일치된 공동체’라는 의미다. 즉 성령 안에서 일치를 경험하고 이를 구현하는 집단이 바로 교회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성령 안에서의 일치’는 관념적이거나 심리적인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상징적인 것도 아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개념이다.


3

오순절에 예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 성령이 강림했고 이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사도행전 2장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에서 와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각각 자기네 지방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그들은 놀라, 신기하게 여기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우리는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이고,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이고, 또 나그네로 머물고 있는 로마 사람과 유대 사람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과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데,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소.”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라서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하면서 서로 말하였다.

(사도행전 2장 4~12절)


성령을 받은 예수의 제자들이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지방의 언어들로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하나님의 큰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각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소위 불 받아서 방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령으로 인해 언어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사람들 사이에 그 출신과 언어, 그리고 문화적 배경에 구애받지 않고 소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벨탑 사건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교만한 인간이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을 때 서로 분열했다. 한껏 교만을 떨고 우쭐했다가 결국 하고자 하는 바 목표에 이르지도 못하고, 오늘날 우리가 토플, 토익 준비하느라 지금, 이 고생을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위로부터 내려온 성령은 이렇게 서로 갈라진 자들의 차이를 무력화한다.


‘성령 안에서의 일치’라고 하면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드나? 여전히 뭔가 추상적이고, 천상적이고, 그래서 손에 잘 안 잡히고, 잘 와 닿지 않고, 여전히 막연한가? 어쩌면 그것은 서두에서도 언급했듯 우리가 성령에 대해서 떠올릴 때 너무 초자연적인 것, 초월적인 것에 치중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의 일치’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이라는 건 다음을 통해 알 수 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사도행전 2장 44~45절)


교회의 시작과 동시에 그 안에서 매우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바로 재산의 공유다. 사도행전이 이를 성령이 강림하여 교회가 시작된 뒤 일어난 첫 번째 사건으로 기록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 자체가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이 교회 안에서 이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누가(Lukas, 사도행전의 저자)는 보았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언급들이 신약성서의 다른 곳에도 등장한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골로새서 3장 11절)


이것은 모두 바울 자신의 말은 아니고,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에서 행해지던 신앙고백이었고 바울 역시 이런 신앙고백의 전통을 전해 받아 이를 다시 자신이 전도한 교인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일치된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막연한 개념이 아니다. 현존하는 그리고 실재하는, 사람들 간의 모든 차별과 구분이 교회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허물어지고 무력화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들이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기 전 사회적 위치가 구체적으로 나열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대인, 헬라인, 종, 자유인, 남자, 여자…


이런 것들을 기준으로 해서 사람들을 나누고 구분하고 때로는 차별하기도 한다. 그런데 위에서 보았듯 이 같은 나열이 신약성서에, 특별히 바울서신에 자주 나온다.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데 있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는 의미다. 교회는 다양한 사회적 위치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 안에 동시에 경계 없이 모여있는,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공동체였다. 그 안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냐고 했을 때 우리 각자가 세상 속에서 어떤 신분과 어떤 위치에 있든지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함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된 공동체이며 이를 근거로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라고 자신을 규정했다.


4

‘성령을 통한 일치’,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 됨’은 이런 것들을 못 본 척 그대로 놔두고, 그저 구호나 표어로만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다. 성령은 바로 이렇듯 실재하는 모든 차별과 구분의 요소들을 모두 무력화하는 힘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능력은 마찬가지로 경제적 차별, 좀 더 구체적으로는 빈부의 구분 역시 무력화한다. 이것은 단지 심정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더욱 겸손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이 자족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러한 차원에서 그친다면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은 참이다. 그렇다면 성령은 단지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며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5

여기서 잠깐 옆 길로 새서 십일조 이야기를 잠시 해보겠다. 아니 그냥 귀찮아서 링크를 걸겠다.


http://www.ddanzi.com/add3328/77288172


6

다시 돌아와서 에밀 뒤르켕에 따르면 종교는 사람들에게 이타적 태도를 보이게 하는 근원이 된다고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서도 이렇게 말했을까 싶긴 하지만 아무튼 종교는 이기주의를 억제하고 희생적이고 공평하도록 하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공동체 구성원들이 하나가 되자면 반드시 그들을 구분하고 나누며 더 나아가 차별하는 실체를 드러내고 이를 무력화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만으로 쉽게 되지 않으며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뤄진다고 고백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일치’라는 이상을 위해 ‘재분배’라는 구체적인 실천을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하는 모델을 사도행전은 제시하고 있다.


7

교회사에서 종교개혁 이후 하나님에 대한 자신만의 개인적이고 고유한 체험,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 등이 주목받고 강조되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보이는 신앙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매우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개인의 구원이 보다 강조되고 이에 덧붙여 세상 속에서 개인의 축복이 각 교인의 중대한 관심사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공동체라고 하는 것, 즉 교회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앞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의 필요나 신앙생활의 편의를 위한 집단인가? 즉 각자의 신앙생활을 더 잘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신앙 동호회인가? 아니면 외부를 향해 우리의 힘과 조직을 과시하고 어떤 압력을 행사하기 위한 결사체인가?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47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자들이 성령 안에서 차이와 차별을 허물고 하나가 되었을 때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이로 인해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났다는 것.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종교와 사회가 서로 분리된 별개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고, 또 신앙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다양한 생각체계 중 하나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지만 사실 종교와 사회는 본질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또 분리될 수 없으며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신앙을 요청한다. 이 시대가 교회 안에서 모든 차별을 폐하고 우리를 일치케 하는 성령의 능력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에밀 뒤르켕은 종교가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Funktion)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기능이면서 동시에 역할(Rolle)이기도 하다. 기독교인의 역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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