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못설화 마지막, 서동설화의 의의 기본 카테고리

용신화(龍神話)


공주 용못은 장자연못 이야기에 용의 승천이 더해졌습니다. 수신(水神)을 상징하는 용이 연못과 결합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자연의 순리로 장자의 부도덕함을 응징하는데 인격적인 용을 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용과 관련된 연못설화 중에서 부여 궁남지와 익산 마룡지 연못은 장자와 망부석 이야기가 빠지고 용과 결합해 아이를 낳는다는 출생담이 더해진 서동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서동설화입니다.


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이다. 어머니가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과부로 살다가 그 못의 용과 관계하여 낳았다. 어렸을 때 이름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다.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늘 마를 캐다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이 그로 인해 이름을 지었다.


망부석설화와 서동설화에서는 남편의 부재 이외에는 딱히 연관성은 없어 보입니다. 장자 이야기가 사라지고 편모와 가난이라는 불우한 환경이지만 용의 아들로서 비범함을 가진 인물로 신화의 주인공이 됩니다. 신화가 시작된 곳으로 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부여 궁남지와 익산 마룡지에서도 똑같이 무왕의 탄생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백제에서 무왕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한 명뿐입니다. 다른 지역의 연못이면서 어떻게 한 사람의 출생설화를 동시에 가질 수 있었던 것일까? 진짜 무왕이 출생한 곳은 어디인지 알아보기 위해 부여 능남지로 향했습니다.


궁남지.gif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궁남지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왕 353월에, 궁궐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 리에서 물을 끌어들였으며, 네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물 가운데는 섬을 축조하였다합니다. 무왕이 조성한 궁남지에서도 무왕의 출생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무왕 출생시기에 연못이 존재했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궁남지와 마룡지에 무왕의 출생설화가 동시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일까.  단서는 왕흥사라는 사찰입니다.


부여와 익산에는 같은 사찰명인 왕흥사가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왕 35년에 강가에 위치한 왕흥사(王興寺)가 낙성되었합니다. 삼국유사 미륵사 창건에 대한 기록을 보면 국사에는 왕흥사라 하였다라 합니다. 익산 미륵사(왕흥사) 또한 왕흥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여 규암면에 소재했던 왕흥사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법왕 2(600)부터 창건을 시작해서 무왕 35(634)에 완공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발굴조사 결과 목탑 심초석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의 기록을 통해 위덕왕 24(577)에 창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근 발견된 미륵사탑 금제사리봉안기의 기록에기해년(己亥年, 639)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라 되어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의 왕흥사는 지금의 익산 미륵사터를 가리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마룡지에 대한 기록에서도 세상이 전하기를, 서동대왕의 어머니가 집을 짓고 살던 곳이다라 합니다. 결국 동시대에 수도인 부여와 군사경제적 요충지인 익산에 같은 이름의 서로 다른 왕흥사가 있었으며 실제 무왕의 출생지인 익산 왕흥사 인근 못 근처에서 출생했다는 말이 구전으로 전해지면서 부여의 왕흥사가 있고, 무왕이 축조한 궁남지의 연못으로 인해 와전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무왕은 왕궁인 부여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천도 하려던 익산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왕자가 부여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익산에 태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마룡지로 가보겠습니다.


 

익산마룡지와 생가터.gif


마를 팔던 소년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와의 국경을 넘은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 살았다는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연동마을에 있는 마룡지와 서동의 생가터입니다. 서동의 생가터는 거주지였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생가터 서북쪽에 용샘이라는 우물이 지금까지도 남아있습니다. 무왕의 어머니가 물을 긷고 빨래를 하던 곳이라 전해집니다.


헌데 삼국유사를 제외하고 서동이 곧 무왕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삼국사기에 무왕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름이 장()이고 법왕(法王)의 아들이다. 풍채와 거동이 빼어났고 뜻과 기개가 호방하고 걸출하였다. 법왕이 즉위한 이듬해에 죽자 아들 장이 왕위를 이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처럼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와의 혼인으로 백제와 신라는 평화로워야 할 두 나라에는 무왕 3(602)에 신라와 군사 충돌이 있습니다. 서동설화에 따른다면 결혼동맹으로 평화로워야 할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이는 반대의 상황입니다. 역사 기록으로으로 생각하자면 서동설화는 완전히 창작된 이야기인 것 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설화는 허구와 사실을 결합해 이야기 형식을 통해 민중들이 권력자에게 전달할 목적으로 창작된 것이라면, 왕의 출생신화는 민중들과 다른 귀족계급에게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 하기 위해 자신을 신격화해 당위성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성공담인 서동설화 또한 후자의 역할을 위해 지어진 이야기로 왕권의 당위성과 강화에 부합하는 관점에서 서동설화를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무왕설화


서동은 무왕인가


익산 마룡지 근처에 살던 여인이 서동(무왕)을 낳았다는 것은 두 경우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서동이라는 말 자체에 서자인 아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래서 왕위 쟁탈전에 밀려난 서동과 그의 어머니가 익산으로 귀양 비슷한 처지였다는 점으로 해석할 수도 있게고, 훗날 왕비가 되는 사택씨 가문이 익산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이었고 그들이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 서동과 그의 어머니를 볼모로 잡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는데 훗날 왕위 계승자로 만들어 서동과 사택씨를 결혼시킨 것이 아니냐는 해석입니다. 이렇게 해석해야만 겨우 마를 캐 팔던 소년이 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무왕의 할아버지 혜왕과 아버지 법왕(혹은 위덕왕)이 차례로 1년만에 죽었다는 것은 당시 백제가 정치적 혼란기였음을 말해줍니다. 그런 상황에서 무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사택씨와의 결혼동맹을 통해서 였습니다. 당시 가장 강력한 정치주도세력은 사택씨였습니다. 그래서 무왕은 결혼 동맹을 위해 사택씨족의 선택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택씨는 지속적인 정치주도권을 위해 무왕이 필요로 했었다는 판단 했을 것입니다. 마륵사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를 통해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적덕의 딸이 왕비임이 확인됩니다.


그래서 설화에 등장하는 선화공주, 진평왕, 지명법사는 실제 인물을 대입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상징성을 표현했다고 판단됩니다.  .


선화공주


삼국사기에 신라 진평왕의 딸은 맏딸 선덕왕과 무열왕의 어머니 천명부인(天明夫人) 외에는 없습니다. 실제 존재 했으나 역사에 누락됐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었다면 무왕 재위기간 42년동안 13번의 전쟁을 벌일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듭니다. 13번의 신라와 전쟁을 제외하더라도 무왕 재위 전기간에 걸쳐 신라와의 간헐적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2번의 전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백제가 선제공격을 가했다는 점에서 결혼동맹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설화를 보면.


미륵사 창건설화


하루는 왕(무왕)이 부인(선화공주)과 함께 사자사로 가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배하였다. 부인이 왕께 이르기를, “이 곳에 큰 가람을 세우는 것이 진실로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지명법사가 있는 곳에 가서 못을 메울일을 의논하니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우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미륵 삼회를 법상으로 삼아 전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고 하였다. 진평왕은 여러 장인을 보내 이를 도왔다.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다.


 

익산미륵사지터.gif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 절터와 사찰 내 저수지

미륵사지저수지.gif

복원한 익산 미륵사지 저수지

  • 지역 설화 : 지금은 미륵사지터가 있었다 하여 미륵산이라 불리지만 과거에는 용화산(龍火山)이라 했다 합니다. 용이 불을 뿜어 산불이 잦았다 합니다. 아무래도 용신사상이라는 토착신앙의 성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륵사지를 창건하면서 사찰 내에 큰 저수지를 조성하는것에 지역민들은 열렬한 지지를 했다 합니다.

삼국유사 미륵사 창건설화에는 선화공주의 제의에 의해 창건되었다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미륵사(왕흥사)의 착공시기는 법왕 2(600)이고 완공된 시기가 무왕 35(634)입니다. 그렇다면 미륵사지 창건과 관련된 설화는 무왕이 아니라 법왕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법왕마저 짧은 재위기간과 의문의 죽음으로 무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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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百濟王后佐平沙宅積德女種善, () 백제왕후(百濟王后)인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 <금제사리봉안기의 왕후에 관한 기록>


미륵사 금제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의 왕후가 사택적덕의 딸이라 나옵니다. 그렇기에 서동설화의 선화공주는 역사적으로는 허구적 인물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설화의 등장인물들과 역사적 사실이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해서 서동설화의 이야기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기는 합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설화와 삼국사기의 백제와 신라의 기록에는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금제사리봉안기에서 언급되는 사택씨 가문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가장 주도적으로 대()신라전을 일으켰던 세력이었습니다. 한성시대 이후부터 중심세력으로 커지기 시작했으며 웅진시대에 이르러 가장 강력한 백제의 정치세력이었던 사택씨는 줄기차게 신라와의 전쟁을 일으킵니다. 가문의 명운을 건 것처럽 보일 정도로 신라와의 전쟁에 집착했습니다.


 그렇다면 삼국유사기록으로는 신라에 우호적(어어야 하는)인 무왕과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는 적대적인 사택씨, 그리고 혜왕과 법왕의 이른 죽음을 통해서 생각해보면 사택씨가 왕권을 좌우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병령 집결지를 논산에 정한 것입니다. 병력을 지원할 곳은 풍부한 농토지역인 익산이 적합지였고 그곳에 미륵사를 지어 지원역할을 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수도인 부여와 익산 중간의 논산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켜 대 신라전을 벌이려 했다는 점입니다.


지난 딴지기사 참조

http://www.ddanzi.com/index.php?mid=ddanziNews&search_target=user_id&search_keyword=csshim&document_srl=86318851


대 신라전을 위해서 호남평야와 김제평야는 군량미 조달에 필요한 지역입니다. 오랫동안 신라와의 전쟁으로 세력이 약화되어가던 사택씨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익산출신과 결혼동맹을 통해 백제 중심세력을 확(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고히 하고 대신라전을 지속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굉이무덤 : 익산시 낭산면 구평리에 굉이 마을이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또 미륵사지에서 남서쪽 1킬로 미터에는 굉이무덤(고양이 무덤)이 있었다 합니다. 이곳에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절의 스님들의 횡포가 심했다 합니다. 가혹한 수탈에 심지어 결혼을 위해 가마를 타고 신랑집으로 가는 신부마저 빼앗았다 합니다. 어느 노인이 이곳을 지나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해결할 방도를 알려 주었다 합니다. 미륵사터가 쥐의 모습이니 황금으로 만든 고양이를 남서쪽에 묻으면 그런 일이 없어진다 했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 노승의 말에 따라 금으로 만든 고양이를 땅에 묻고 무덤을 만드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사찰은 퇴락되고 스님들도 떠나게 되어 사람들은 평안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굉이 무덤은 찾을 수 없었고 여전히 부여에서 익산으로 내려오는 미륵산 서북쪽 마을을 아직도 굉이 마을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무왕 윗대인 혜왕과 법왕이 재위 1년만에 죽었다는 것은 당시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무왕은 법왕의 장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왕위에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사택씨와의 결혼동맹을 통해서였으며 기록에서도 사택씨 세력은 결혼 동맹 이후 물적, 인적 제공을 받아 신라와의 전쟁을 지속적으로 벌일 수 있었습니다.


무왕의 재위 후기에는 왕후인 사택적덕의 딸 보다는 후비들과 함께 했다고 전해집니다. 삼국사기 무왕 39(638)의 기록에는 봄 3월에 빈()과 더불어 큰 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가 639년의 일이니 왕은 궁남지에서 빈과 더불어 있었고 왕후는 금마 미륵사지에 머물러 있었다고 판단되는데, 이것은 무왕은 신라와의 전쟁에 그리 관심이 없었다는 것과 사택씨가 신라와의 전쟁을 위해 익산을 주도적으로 경영하려 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혼 동맹을 통해서, 무왕은 왕위를 사택씨는 익산을 얻게 된 것입니다. 서로 얻을 것을 얻은 이후에는 멀리하려 했다고 보입니다.


 부여팔각정.gif 청양금정우물1.gif

백제말 당시 혼란한 내부의 상황을 반영하는 부여의 팔각정과 청양의 금정리 우물입니다. 부여의 팔각정 우물은 커다란 돌 덮개로 막아 놓고 사람들이 들어 올려 물을 얻을 수 있게 했으며, 청양 금정리의 우물은 백제의 의자왕이 이 물만 마시기를 고집했다고 합니다. 당시 물도 쉽게 마시지 못하던 의자왕의 상황을 말해 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금정리 우물은 지금의 발달된 도로로도 대략 30여 킬로 떨어진 곳입니다. 청양의 금정리 우물물을 매일 길러 다음 날 새벽에 의자왕이 마셨다 합니다정치적인 상황도 그러하지만 금정리 우물물의 맛은 좋았습니다


또한 의자왕의 태자 책봉이 무왕 재위 33(632)에 이루어진 점. 그리고 일본사기에 무왕이 즉위한 뒤의 상황을 보면 당시 백제의 정치적 상황을 알 수 있다.

지난해 11월에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이 돌아가셨습니다. 또 백제의 사신이 곤륜의 사자를 바다에 처넣었습니다. 금년 정월에, 국주모(國主母)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또한 제왕자인 교기(翹岐) 및 동모매(同母妹) 여자 네 명과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마흔 명 정도의 고명한 사람이 섬으로 쫓겨났습니다


의자왕은 자기의 어머니이자 국모인 사택씨가 죽자 마자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택씨와 완전히 갈라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택씨 세력과의 일정한 협상을 통해서 왕위에 오를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택씨 세력은 지속적으로 신라와의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하지만 의자왕대에서도 익산은 정치, 군사의 주도 지역은 아니었으며 천도를 실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의자왕 또한 무왕과 마찬가지로 사비성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의자왕의 어머니인 사택씨 사후에 사택씨 가문은 이후 정치적 주도권을 잃게 되었으며 이후 백제는 패망하게 됩니다.


무왕신화 혹은 서동설화


삼국유사의 무왕신화가 무왕이 자신의 왕위 승계의 정당성을 위한 설화인지 서동설화로서 신라 선화공주와의 사랑이야기인지 따로 나뉘어 생각해보면, 무왕신화는 즉위 이전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할아버지 혜왕과 아버지 법왕이 2년만에 죽음으로 공석이 된 왕위를 갑작스레 앉게 된 것도 의문입니다. 무왕이 꼭 왕이 되어야만 하는 정당성을 위해 왕위 계승 이전에 무왕의 신화가 만들어졌다고 생각됩니다. 무왕이 왕위에 앉기 위해 얻어야 할 정치세력인 익산을 자신의 출생이나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 국조신화와 같은 신화를 만들어야 될 다른 이유라 하면, 사택씨의 볼모로 였거나 장자가 아닌 서자이기에 모친의 고향에서 평민으로 살아가야 했던 이유로도 만들어 졌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익산은 왕위를 계승하는데 필요한 지역임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특히나 김제평야와 호남평야의 농경지역인 이곳에서 지지를 얻으려면 말입니다.


그래서 익산지역 출신이자 풍농의 상징인 용신과 결합된 자신을 지지해 달라는 무왕이 민중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을 것입니다. 서동설화의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민중들이 만들어 무왕에게 들려주려던 신라와의 평화의 메시지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나중에 일연이 어떤 사건(동성왕(493)이 신라 비지의 딸과 혼인한 것)을 가져와 서동신화에 붙여 넣었다 생각됩니다. 이렇게 해석해야 무왕출생신화와 서동설화는 해석의 타협을 이루게 된다 생각합니다. 설화 자체만으로의 해석으로는, 왕위를 얻으려는 무왕과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통한 대화가 아닐었을까하는 생각입니다.


혹은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그렇게 주장해야만 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일연 시대의 정치적 상황이 그렇게 기록하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일연은 승려의 입장에서 사찰의 폐지를 막기 위해서, 혹은 몽골과의 대립적인 정치환경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인 익산지역의 반신라, 반고려 정서로 인한 분열을 막기 위해 평화의 상직적인 이야기를 넣어 사찰 창건설화를 새로이 만들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오직 기록자인 일연만이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역사와 설화가 얽힌 이 부분은 앞으로도 발굴과 연구가 필요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장자못설화, 용못설화, 서동설화를 통해 연못설화의 특징과 상징적 의미에 관해 이야기 했습니다. 장자못설화는 삶의 애환과 권선징악을 통해서 자신들의 애환을 담았다면 용못설화는 수신(水神)이 연못에 살고 있다는 토착신앙적 이야기 였으며, 무왕신화(마룡지설화)는 민중들의 애환을 해결할 구세주의 탄생이라는 신화였습니다.


장자못설화처럼 악행으로 부와 생명을 잃기도 하고, 금도끼은도끼처럼 부를 얻기도 합니다. 또 장화홍련전처럼 복수를 한 뒤에 원님의 딸로 재생되기도 합니다. 서동설화처럼 물의 상징성을 통해 인간을 신격화 하기도 합니다. 연못설화는 물의 특성에 따른 이야기가 창작되어져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확인해야 할 것은 장자 연못의 망부석이 탈락하고 용신과 결합된 출생담으로 교체된 것입니다. 이 교체는 어떤 의미일까.

2편 바위설화에서 이 문제를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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