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탈자]나주부대 학살 기본 카테고리

1950년 한국전쟁은 인간의 바닥을 시험하는 전쟁이었다. 전국 도처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한 학살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바닥인 사건이 있었다. 

1950년 7월 21일 미군과 국군은 대전 전투에서 참패했다. 대전이 뚫리자 호남은 무인지경이었다. 호남에는 경찰력와 우익 외엔 마땅한 군부대도 없었다. 해남군수와 경찰서장, 해남지역 우익인사들은 일찌감치 전황을 예상했다. 그들 또한 우두머리 이승만과 똑같이 행동했다. 7월 16일, 22일에 걸쳐 보도연맹원 최소 350명을 학살하고 7월 23일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도망쳤다. 인민군은 7월 29일에야 해남군에 들어왔다.

한편 북한군은 광주를 점령한 후 전남 동부지역으로 향했다. 구례, 순철, 벌교, 여수가 점령되었고 일부는 경남 진주까지 향했다. 전남 서부지역에 있던 경찰과 우익인사들은 해남군수처럼 재빠르지 못했다. 퇴각로가 막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해남-완도로 이어지는 남해안 서쪽 끝을 통해 제주도로 들어가려고 했다.

7월 23일 나주 경찰서장 김탁배는 경찰과 우익청년을 모았다. 약 200명쯤 되는 그들은 이후 ‘나주부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나주부대는 7월 25일 오전 4개 방면으로 흩어져 해남에 들어갔다. 그때 해남에는 ‘인민군이 온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해남읍 해리에 나주부대가 들어서자 주민 가운데 일부가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다. 나주부대원들은 그들을 뒤쫓아가 해리에서 7명을 사살했다. 다른 나주부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해남읍 수성리에서도 인민군으로 오인한 주민 4명을 사살했으며, 구교리에서도 3명을 사살했다. 남동리 쪽으로 향한 부대는 6명을 사살했는데 병으로 누워서 피난을 못 간 사람도 집에서 사살했다. 해남읍 읍내리에 진입한 나주부대원들은 해남철공소에서 몸이 아파 피난가지 못한 사람을 사살했으며, ‘우리가 누구냐’라고 묻고 ‘인민군이다’고 답한 모자를 끌어내 사살했다. 해남읍 성내리에서는 근처를 지나가던 최대집 씨가 정지명령을 듣지 않았다고 사살했다.

7월 25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불과 4시간 동안 각지에서 민간인 40명을 살해한 나주부대원들은 오후 2시에 해남읍 마산면 상등리에 들어섰다. 각지에서 학살을 저지르고 다시 모인 나주부대는 자신들이 인민군으로 오해를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주부대는 상등리에서 ‘인민군이 오니 마을회관 앞으로 빨간 완장을 두르고 환영 나오라’고 마을 방송을 했다. 마을 주민 수십 명이 “인민군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갑자기 나주부대원들은 ‘우리는 경찰’이라며 기관총을 난사했다. 이때 6명이 살해당했다. 곧이어 사망자의 가족 등이 항의하자 다시 9명을 죽였다. 상등리에서만 15명이 죽었고 이 가운데 1명은 대검에 찔려 죽었다. 

7월 27일까지 해남에서 민간인 55명을 학살한(노무현 정부 당시 경찰은 '자체조사' 결과 나주부대 학살로 35명이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나주부대원들은 완도군으로 향했다. 완도군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나주부대원들은 가는 곳 마다 인민군을 칭했고, 텔레비전도 없던 당시 사람들은 복장으로는 인민군인지 국군인지 경찰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일설에는 나주부대원이 인민군복을 입고 있었다고도 하는데 북한군과 전투를 하지 않은 나주부대원이 어떻게 인민군복을 입었는지 파악할 수 없다). 

7월 26일 완도에 먼저 도착한 나주부대원들은 소사(사환. 면사무도 등에서 심부름을 하던 말단)을 시켜 “완도중학교에 인민군 환영행사가 있으니 모두 모이라”고 전했다. 이에 상당 수의 주민이 완도중학교에 모이자 나주부대원들은 ‘우리는 경찰이다. 공무원과 경찰가족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이에 불안을 느낀 몇몇이 도망가자, 추격해서 사살하고 일부 주민은 구금한 뒤 사살했다. 

인민군으로 위장해 사람을 죽이는 것에 재미가 들렸는지 나주부대원들은 7월 29일 배에 아예 인공기를 달고 완도군 이포리 선착장에 상륙했다. 근처에 있던 주민 10여 명이 이를 구경하고 있었고, 이들을 체포해 경찰서로 가는 도중에 만난 주민 20명을 포함, 30명을 아무 이유도 없이 연행했다. 연행하던 중 반항하거나 항의한 6명을 경찰서 마당에서 사살했다. 이후 완도 여러 섬을 돌면서 인민군으로 오인한 주민들을 살해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47명 완도군 주민들이 살해됐다. 일부 지역에서는 우익인사를 체포해 앞세우고 마을로 들어서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나주부대는 주민들이 도저히 믿을 수밖에 없게끔 속이고 마을로 들어가 주민을 학살했다.

이런 나주부대의 마수에도 온전히 마을을 지킨 곳이 있었으니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였다. 남창리 주민들도 나주부대원을 보고 인민군으로 오인해 20여 명이 나와 있었다. 나주부대원 가운데 이모 씨가 남창리 출신이었다. 그는 부대 지휘자에게 수차례 간청해 남창리에서는 주민희생자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나주부대는 8월 1일 완도군에 완도, 강진, 장흥, 함평, 화순, 진도에서 도망쳐 온 경찰이나 우익인사를 규합해 완도군 청산면에 최후 저지선을 마련했다. 이 때에도 각 섬을 돌며 주민을 연행해 청산 지서와 제주시 추자면에서 살해했다.

한편, 일찌감치 도망쳤던 해남군수와 해남경찰은 10월 6일 다시 해남에 도착했다. 적군이 오기 무려 6일 전에 부임지에서 도망쳤던 이들은 비무장한 주민들 앞에서만 군림했다. 이미 보도연맹 학살과 나주부대의 학살로 피범벅이 된 해남을 또 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인민군에 협력했다는 막연한 이유로 곳곳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이미 해남에 적극적인 좌익행위자와 인민군 가담자는 지리산으로 가거나 북한으로 도망친 뒤였음에도 말이다.

따라서 남은 주민들을 상대로 구체적인 혐의 보다는 사적인 감정에서 보복행위가 이어졌다. 유족들에 따르면 해남군 수복 이후 1951년까지 해남경찰과 우익의 보복으로 약 1400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해남군 산이면 지서장이었던 최기명은 자신의 아내가 좌익에게 죽었다는 것을 이유로 이미 조사 결과 인민군 부역혐의가 없다는 것이 밝혀진 이들을 포함해 20여 명을 마음대로 사살했다.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어 대통령까지 보고돼 결국 최기명 지서장은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2012년 2월 17일 법원은 무려 62년 만에 나주부대 희생자 유족 38명에게 국가가 총 27억 5371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유가족 1명 당 평균 1억 원도 채 안 되는 금액이지만 이건 민간인 희생자 유가족 가운데 역대 최고액이다. 

다음엔 이승만의 양자 김창룡에 대해서 얘기해 보도록 하겠다.

*편집부 추신: 이협우 기사도 '인간이탈자'시리즈에 넣어 주십시오. 제 책도 함께 ^^; 
(http://www.ddanzi.com/index.php?mid=ddanziNews&search_target=title&search_keyword=채현국&document_srl=3575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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