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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부석설화

치술령 망부석에 관해 울산과 경주, 두 도시가 서로 자기 시에 위치한 바위를 망부석이라 논쟁 중입니다. 그래서 저는 두 곳 모두 찾아갔습니다. 먼저 경주의 망부석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경주시와 사람들이 말하는 망부석은 아닙니다. 향토 사료를 근거로 경주시 외동읍 외동리의 망부석을 찾았습니다.

먼저 설화의 주인공인 박제상에 관해 알아보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박제상 혹은 김제상의 실제 사건을 토대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미해(눌지왕 셋째아들)는 바다를 건너와 강구려(康仇麗 , 신라 눌지왕 때의 관리, 왜에 잡혀있었다)에게 먼저 나라에 알리게 하였다. 왕은 놀랍고 기뻐서 백관에게 명하여 굴헐역(지금 울산의 한 역)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왕은 친아우 보해와 함께 남교에서 맞이하고, 대궐로 들어가 잔치를 베풀고 국내에 크게 사면령을 내렸으며, 제상의 아내를 책봉하여 국대부인으로 삼고, 그의 딸을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았다. 논자가 말하기를, “옛날 한나라 신하 주가가 형양에 있다가 초나라 병사의 포로가 되었을 때 항우가 주가에게 말하기를, “네가 나의 신하가 되면 만호의 녹을 받는 제후로 책봉하리라.”라고 하니, 주가가 꾸짖으면서 굴복하지 않다가 초왕에게 살해되었는데, 제상의 충렬은 주가에 못지 않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제상이 떠날 때 부인이 소문을 듣고 뒤쫓았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망덕사의 문 남쪽 모래 위에 이르러 드러누워 길게 부르짖었던 까닭에 그 모래사장을 장사라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돌아오려 했는데, 부인이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그 땅을 벌지지라고 하였다. 오랜 뒤에도 부인이 그 사모함을 이기지 못해 세 딸을 이끌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었다. 그리하여 치술신모가 되었으니, 지금도 사당이 있다.

눌지왕 10(427)에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진 눌지왕의 동생 보해를 구해낸 김제상(삼국사기에는 박제상)이 다시 왜에 인질로 잡혀있던 눌지왕의 아들 미해를 구하고 왜왕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입니다.

삼국사기도 삼국유사의 기록과 대체로 일치하지만 연대상 눌지왕 즉위 직후라는 점, 미해(미사흔)가 눌지왕의 동생으로 되어있다는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박제상(朴堤上)은 시조 혁거세의 후손이며 파사 이사금의 5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아도 갈문왕(갈문왕 : 왕이 되지 못한 왕의 형제)이고, 아버지는 파친찬 물품(物品)이다.

(생략)

미사흔이 도망한 것을 알고 드디오 제상을 결박하고 배를 달려 추격하였으나, 마침 안개가 연기처럼 자욱하고 어둡게 끼어 멀리 바라볼 수가 없었다. 제상을 왜왕의 처소로 돌려보내니,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 보냈다가 곧 사람을 시켜 섶에 불을 질러 전신을 태운 후에 목 베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고 대아찬을 추증하였으며 그 가족에게 후히 물품을 내렸다. 그리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제상의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여 보답하였다. 이전에 미사흔이 돌아올 때 6부에 명하여 멀리까지 나가 맞이하게 하였고, 만나게 되자 손을 잡고 서로 울었다. 마침내 형제들이 술자리를 마련하고 마음껏 즐길 때 왕은 노래와 춤을 스스로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냈는데 지금(고려) 향악의 우식곡이 그것이다.

눌지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의 신라는 왕세자들을 타국에 볼모로 보내야 할 만큼 국력이 약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나물왕(나물 마립간)의 동생인 실성왕이 백제의 인질이었다 신라로 돌아와 왕위에 오릅니다. 실성왕은 자신을 백제의 인질로 보낸 원한으로 나물왕과 그의 아들 눌지왕을 제거하려다 실패합니다. 눌지왕이 자신의 삼촌인 실성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쿠테타였기에 권력은 위태로웠을 것이고 지지세력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박제상의 박씨 세력이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나물왕(내물왕)시절에 굴욕적 협력관계였던 고구려와 왜와의 관계가 눌지왕대에는 달라지게 됐습니다. 굴욕적 외교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잡혀있던 왕자들을 빼내오는 역할을 박제상이 한 것 같습니다. 새로운 외교관계를 통한 왕권강화가 필요했던 눌지왕을 위해 박제상이 죽음을 당하면서까지 그 역할을 수행했을까요?

박제상의 야망

박제상은 파사 이사금의 5세손이라 합니다. 파사 이사금을 끝으로 박씨 세력은 왕위에 오르지 못합니다. 박씨 세력을 대신해 석씨 세력이 김씨 세력과 번갈아 가며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파사 이사금 이후의 왕위 계승자들을 보면 파사 이사금 뒤에 김씨 세력인 아달라 이사금이 왕위에 오릅니다. 다음 왕위는 석탈해의 아들 구추각간의 아들 벌류 이사금이 오르게 되고 그 뒤로 조분 이사금, 첨해 이사금까지 석씨 세력이 세 번의 왕위를 가져갑니다.

그 뒤에는 다시 김씨 세력인 미추 이사금이 이어 받고 기림 이사금, 흘해 이사금이 왕위에 오릅니다. 그 뒤에 왕위는 석씨 세력이 왕위에 올라야 하는 시기였으나 김씨인 나물 이사금이 왕위에 오릅니다. 석씨 세력이 왕위에 오를 시기에 계속해서 김씨 세력이 왕위에 오르니 석씨 세력은 반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석씨 세력은 김씨 세력의 내분을 이용해 다시 왕위에 오르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신라 정치의 중심에서 밀려난 박씨 세력인 박제상이 등장한 것입니다.

실성왕과 석씨 주도의 신라가 대외적으로 친왜반백제였다면  눌지왕은 반왜친백제의 입장을 취한 것 같습니다. 그런 정치적 상황에서 박제상이 눌지왕의 외교관 역할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박제상의 입장에서도 눌지왕을 지지함으로써 박씨 세력이 다시 신라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서 발돋움할 기반을 마련하려 했을 것입니다. 두 세력이 번갈아가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석씨세력과 김씨세력이 결혼동맹을 통해서였습니다. 미사흔(미해)이 왜에서 도망해 온 뒤에 박제상의 딸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김씨세력과 박씨세력의 결혼동맹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문헌상으로 살펴본 눌지왕대의 신라의 정치적 상황과 박제상에 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민중들의 입으로 전해진 망부석설화(치술령설화)는 어떤 의미였는지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망부석설화

박제상이 대마도에 가면서, 아내에게 대마도에 검은 구름이 덮여 있으면 자신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라 했다 합니다. 아내는 대마도가 보이는 치술령에서 남편을 기다렸습니다. 검은 구름이 덮여 대마도가 보이지 않자, 아내는 남편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서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합니다. 아내는 새가 되어 날아가(혹은, 아내가 딸들과 함께 새가 되거나 바위가 된다) 은을암(隱乙岩)에 날아가 숨었고, 남편을 기다리던 바위는 망부석이라고 하였답니다. 아내가 떨어질 때 새가 되었다고 하여 마을의 이름은 비조(飛鳥)가 되었다 합니다.

(혹은, 아내가 몇 마리 비둘기가 바위 위에 앉아있는 것을 본다. 아내는 비둘기를 한 마리 잡아 말을 외우게 하여 소식을 전하려고 하다가 그만 떨어져 죽는다. 아내의 원혼은 비둘기가 되어 남편에게 날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무정한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죽었노라고 전한다).                [한국구비문학대계]

삼국사기에서 박제상의 행적과 죽음을 정치외교적으로 다루었다면 승려 일연의 삼국유사는 돌이 된다거나 새가 된다는 기이(奇異)한 이야기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설화는 남편 박제상을 따라 죽음을 선택한 열부의 이야기입니다. 설화에서 박제상의 아내가 바위가 된 것과 아내와 딸들이 새가 되어 날아갔다는 이야기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 경주시 외동읍 외동리의 망부석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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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외동읍 망부석.

 

경주시 외동읍 외동리의 망부석입니다 저는 이 바위가 망부석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암바위이며, 이 바위 뒤쪽에 다른 암바위 두 개가 더 있습니다. 그래서 부인과 두 딸과의 이야기에 들어 맞습니다.

또 바위 밑을 보면 이곳에서 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실제 망부석에서 적은 양의 물이 흐르기 시작하지만 사진으로 판별하기 어려우 다른 사진으로 대체했습니다. 사진 우측은 망부석에서 흐르는 물이 아니라 망부석 밑 바위의 사진입니다. 계곡이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암바위이고 물이 흘러 나온다는 점이 담양의 장군바위와 유사합니다. 그래서 이곳은 옛 시대에 어떤 신앙적인 장소였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담양의 장군바위처럼 기자신앙일 수도 있고, 천신제나 기우제를 올리던 곳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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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부석 위쪽의 바위와 그 윗 부분>

그런데 마을 어르신이 말하는 망부석은 이 바위가 아니라 조금 더 위쪽에 있다 합니다. 올라가보니 커다란 바위가 있었습니다. 바위 위쪽은 넓고 평평합니다. 산신에게 제례를 올리기 적당한 크기의 바위입니다. 그래서 경주의 망부석에 대한 제 결론은 토착신앙과 관련된 제례가 행해지던 이곳과 바위가 망부석이라 생각하게 됐습니다. 바위 위는 넓고 평평해 종교 의식을 행하는 제단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마을 어르신들이 이 바위를 망부석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현장에 맞춰 해석해 보면 노래와 춤을 스스로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냈는데 지금(고려) 향악의 우식곡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치술신모가 되었으니, 지금도 사당이 있다.”라는 점을 해석해 보면 왕이 주관하거나 참석한 제천의례를 행하던 곳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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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대, 구글검색>

삼국유사의 망부석설화에서 박제상의 처는 치술신모로서 산신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전하고 있습니다. 또 죽어 새가 되었다 하는 것은 치술신모가 천신과 연결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새가 천신의 전령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천신이 새를 통해 그의 말을 전하는 소도지역을 표시하는 솟대(긴 장대 끝에 새의 조각이 달림)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기록과 설화, 현장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지역이 제천의례가 행해졌던 소도(蘇塗)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박제상과 그의 아내 치술신모가 되었다는 망부석설화는 정치적종교적 관계에서 탄생되었을 것입니다. 또 이때까지 신라는 불교보다는 토착신앙이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도 확인된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훗날 지증왕의 부인이나 황후인 연제부인 박씨의 아들 법흥왕이 불교를 수용하고 승려가 된 것입니다. 이후 박씨세력이 정치 주도세력이자 토착신앙의 상징적인 존재인 치술신모의 후손이 신라의 불교의 국교공인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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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은을암 隱乙庵>

울산의 망부석을 찾아가기 전에 박제상의 처와 딸이 새가 되어 숨었다 전해지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척과리의 은을암(隱乙巖)을 찾았습니다. 작은 암자가 그 옆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암바위입니다. 옛 부터 지금까지 천신제를 올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남의 장군바위나 경주의 망부석처럼 바위에서 물이 흐르지는 않지만 새가 숨었다는 동굴이 보입니다 

그런데 은을암 옆에 암자가 생긴 이유는 후대에 토착신앙인 치술신모와 불교와의 융합을 위해서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당시에는 은을암(隱乙岩)으로 바위()를 상징했었을 것입니다. 토착신앙의 제례장소에 불교 암자를 세워 은을암(隱乙庵)이라는 암자의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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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 기념관>


치술령 초입에 있는 박제상 기념관입니다. 이곳에는 치산서원이 있었으나 조선 영조 21(1745)에 박제상과 그의 처와 딸을 기리기 위해 서원을 건립하였다 합니다. 서원안에는 박제상을 모시는 충렬묘와 신모사, 두 딸을 기리는 쌍정려가 있었으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毁撤)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박제상 기념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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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치술령 망부석>

설화에서 박제상의 처가 대마도 방향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어 바위가 되었다는 망부석 입니다. 하지만 울산 치술령의 망부석은 장군바위나 망부석, 며느리바위의 특징 보다는 망향석(望鄕石)이나 관망대의 역할을 하던 곳으로 생각됩니다. 왜()나 가야, 혹은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석씨세력에 대한 군사적 방어를 위한 관망대였다고 생각됩니다.

울산 망부석은 경주의 망부석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경주의 망부석이 토착신앙적인 역할이었다면 울산의 망부석은 정치군사적인 역할이었다 생각됩닏. 망부석이 있는 이곳 위치상으로 판단하건대, 수도인 경주를 왜와 가야에게서 군사적으로 방어해 주는 군사전략 요충지였을 것입니다. 신라 김씨 왕조의 세습을 가능하게 했던 박제상의 역할은 정치∙외교적 뿐만 아니라 군사적 도움도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치술령 망부석설화의 의의

경주의 망부석은 토착신앙의 성지와 같은 곳이었으며, 울산의 망부석은 정치군사적 목적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느 바위가 진짜 망부석이냐의 논쟁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역할을 가지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이 두 역할이 매우 중요 했으니까요. 경주의 망부석을 통해 토착신앙의 믿음이 강력했던 신라사회가 고구려백제보다 늦게 공인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면, 울산 망부석을 통해서는 박제상의 박씨 세력과 결혼 동맹을 통해 김씨 왕조가 세습될 기반을 마련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제상의 부인이 치술신모로서 토착신앙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치술신모가 된다는 것이 신라 사회에서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 또 강력한 지지를 받던 신라의 토착신앙은 어떻게 불교로 전환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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