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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최근 여러 논란을 보던 중, 누군가 댓글로 '여성분들이 나서서 자신이 느끼는 공포나 경험을 공유해주면 좋겠다'라고 하셨던 기억이 났어요. 여기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본인들은 그런 케이스를 들어본 적이 별로 없다구요.

 

도움이 될지, 역풍이 불지 모르겠지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기억이 나는 대로 써 볼게요(쓰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바바리맨 따위는 생략합니다).


 

다행히도, 제 아버지는 전혀 폭력적이지 않으신 분입니다. 한 번도 저에게 체벌을 하신 적이 없지요. 저뿐 아니라, 제 남동생에게까지도. 심지어 기르던 애완동물들에게까지도. 해서, 저는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별로 없었던 축에 속합니다. 그저 신문이나 뉴스, 영화 등에나 나오는 이야기인 줄 알고 있었어요.

 

다행히도, 저는 성폭행(강간/강간에 이르기 위한 물리력 행사/폭행 등의 의미로)을 당해본 적은 없습니다. 성추행을 당해본 적은 있고요.

 

제 경험담이, 여자들이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공감하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골목길에서

 

대학교 때, 하필이면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가 입대하는 날이라, 논산 훈련소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학교 근처에서 여자친구들이 사준 위로주 ㅎㅎ 자리를 파하고, 집에 가는 중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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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골목길에서 뒤에서 누군가 와락 껴안더라고요. '응? 오빠인가?'라는 것이 제가 처음 했던 생각. '아닌데. 오빠 오늘 입대했잖아'가 제가 두 번째로 했던 생각.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때 즈음, 제 뒤를 껴안았던 손이 제 가슴을 주무르더라고요. 저는 소리를 지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요. 그리고 나서 타다닥. 뛰어가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다지 나이가 들어 보이진 않더군요. '중학생 정도 되겠다'란 생각을 했지요.

 

신고해야겠다는 생각도 못 했고, 집에 와서 엄마에게 얘기했을 때 '그러니까 일찍 좀 다니지'라고 타박이나 들었고 ㅎㅎ 그래도 가슴이 타겟이었던 걸로 봐서는, 아마도 여자라서 당했겠죠. 다행히 그 이후에 밤길이 많이 무섭다거나 하진 않았어요.

 

 

버스에서

 

이건 너무 흔한 얘기이지만, 역시나 대학생 시절에 버스에서 강제 부비부비를 당했죠. 버스나 지하철 공간에서 뒤에 두가 바짝 붙으면, 당연히 사람이 많아서 그리되었다고 생각하잖요?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이 별로 없더라고요. 그리고 뒤에 붙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리듬 운동을 한다는 것을 느낀 것도 대략 그 시점이었고요.

 

항상, 그 시점을 다시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소리 지르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그런 사람은 신고를 해야 하는데 말이죠. 하지만, 그 때의 저는, 그냥 그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웠고, 싫었고, 그래서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버렸죠.

 

이건, 아마도 여자라서 당했겠죠? 하긴, 우리집 강아지 보니까, 중성화 수술시켰는데도, 성별 안 가리고 아무거나 붙잡고 부비부비하긴 하던데 ㅎ 그래도 그 사람은 강아지는 아니니까요.

 

그리고 이 때 까지도, 그냥 재수 없게 걸려서 기분 나쁘다. 정도였지, 공포는 아니었죠.

 


거리에서

 

위의 두 개는 확실히 성추행 카테고리인데, 이번 것은 무슨 카테고리인지 모르겠네요. 들어봐 주세요.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회식이 있는 날이었어요. 차가 있었기에 저는 술을 마시지 않았죠. 회식 자리에서 조금 일찍 일어나서 큰길 건너에 있는 주차장에 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떤 남자가 오토바이를 스윽 끌고 내 앞에 대더니 "집에 가요? 집에 태워다 줄까요?" 하더군요. "아, 내가 모르는 사람 오토바이를 왜 타요?"라며 짜증스럽게 대답했고, 그 사람은 머쓱해 하더니 그냥 갔어요.

 

이건, 길거리 헌팅 당했을 때도 항상 했던 대사예요. "내가 모르는 사람이랑 왜 차를 마셔요.", "내가 모르는 사람한테 왜 전화번호를 줘요." 뭐 이런 거.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이란 말이죠. 그리고, 전 별로 겁도 없는 상황이었고.

 

생전 처음 보는 여자한테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라니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꿍시렁 꿍시렁 대면서 횡단보도를 건너서,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어요. 주차장까지 가는 길은, 어둡고 인적이 없는, 주택가 골목길이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이 씨발년아, 니가 그렇게 잘났냐. 어? 사람 무시하니까 좋냐? 어?“



거절한 길거리 헌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호러로 장르가 바뀌는 순간이죠. 상냥하게 "어머 너무 감사한데요~ 근데 제가 지금 다른 곳에 약속이 있는 참이라. 죄송해요:)"라고 대응하지 않았던 것은 나의 잘못이었을까요.

 

갑자기 식은땀이 나더군요. 머리가 복잡했어요.

일단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걸어갔죠.

오토바이 위의 그 사람은 계속 따라오며 욕을 해댔구요.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을 해야 될 거 아냐, 이 씨발년아. 아 별 거지 같은 게 날 다 무시하네“


 

“아, 무시당하기 싫으면 따라오질 말던지.”는 지금 생각이고 -_- 그 때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으니, 어디든 전화를 해야 하나. 신고 전화를 하겠다고 하면 저 사람을 더 자극하는 것일까. 신고해서 출동을 한다 하더라도, 그 시간까지 저 사람을 내가 제압할 수는 없는데, 어떻게 하지..’

 

‘오토바이를 타고 있으니, 오토바이를 밀어서 넘어뜨려 볼까. 오토바이 무게가 있으니까, 깔려서 버둥거려 주면, 그 사이에 내가 뛰어서 도망가면 되지 않을까. 근데 혹시 머리부터 떨어져서 크게 다치면 어떻게 하지. 만약에 제대로 넘어가지 않으면 자극만 하는 게 되겠지. 어떻게 하지. 지금이라도 아까 기분 상하게 해서 미안했다고 빌어 볼까. 지금 이 상황에서, 차 있는 곳까지 그냥 무시하고 간다고 하더라도, 차에 타는 순간 저 사람을 따돌릴 방법이 없는데’

 

미치겠더라고요.

 

어쩌면 그 사람은 그냥 자기가 무안했으니까 나를 놀려주고 싶었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그 사람은, 날 조금 무섭게 하고, 위협하고 싶었을 뿐이었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난 그가 날 어디까지 해칠 준비가 되어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

 

말에서 그칠까.

날 때리려고 할까.

때리는 것에 그칠까.

날 강간하려고 할까.

날 강간하는 데서 그칠까.

거기서 더 나가려고 하지는 않을까.

 

다행히 난 운이 좋았어요. 앞에 불이 켜진 음향기기 대여점이 있더라고요. 영업할 시간은 훨씬 지났는데 유리창 너머도 아저씨들 세네 명이 술을 마시는 듯한 모습이 보이더라구요.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서 '이상한 사람이 따라와요. 도와주세요' 했죠. 정상적인 남자들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의협심을 발휘해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고요.

 

아저씨 두 명 정도는, 밖에 나가서 그 남자와 약간의 실랑이를 하는 소리가 들렸고, 나머지 한 명은 나를 달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잘 기억이 안 나요. 이제 안전하다 생각하고, 긴장이 확 풀렸었나 봐요. 그 남자가 돌아가고, 아저씨 중 두 명이 절 주차장까지 데려다주셨죠. 혹시 근처에 그 남자가 숨어있다가 또 괴롭힐 수도 있으니까요.

 

한 분이 '운전할 수 있겠어요? 내가 집까지 운전해줄까요?' 물으셨어요. 감사한 제안이었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분인데, 그 상황에서 핸들까지 맡기고, 닫힌 공간에 둘이 있게 된다는 것이 그다지 좋은 생각인 것 같지는 않더군요. 정중히 사절하고, 다음 날 밝은 낮에 감사 인사드리러 오겠다고 했고요.

 

마지막 이야기는, 외형상으로만 보면 아무 피해도 없어 보이죠. 그 사람은 나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했으니까요. 그저 따라오면서 욕을 몇 마디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마지막 사건이 가장 공포스러웠어요. 트라우마를 남긴 것도, 마지막 사건이죠.

 

가장 더러웠던 기분은, 저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더란 말이죠. 내 힘으로 해결할 수가 없어요. 그 날 폭행도, 강간도, 살인도 당하지 않은 건, 우연히 고마운 아저씨들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 거기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지, 내 힘으로 물리친 것이 아니니까요.

 

다음번에 또 그런 일이 있으면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구나. 그게 진짜 공포죠. 길거리에서 뒤에 발소리가 들리면 신경이 곤두서게 된 것도 그때 부터인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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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세 번. 저 일이 있고 나서, 벌써 한 10년 넘게 흐른 것 같네요. 그동안 세 번. 눈빛이 이상하리 만치 무서운 남자들을 만났어요. 그런 사람들이 혹시라도 3초 이상만 날 쳐다보면, 온몸의 피가 차게 어는 것 같은 느낌이죠.

 

그런데 그 상황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죠. 그냥, 그날 내가 운이 좋아서, 아무 일 없이 넘어가 주길 바랄 뿐. 혹시라도 나에게 말을 걸면, 이번에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대답해줘야지, 라고 생각하면서요.

 

그러고 보니, 길거리를 걷다가, 정신이 나간 것 같은 할머니에게 맞은 적도 있군요. 하지만 할머니는 무섭지 않아요. 막연하게, 내 몸이 대단한 위험에 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겠죠.

 

보통 여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아요. 떠올리면 기분이 더럽거든요. 자신의 무력감을 다시 되새기며 곱씹고 싶지 않으니까요. 가끔은, 큰마음 먹고 신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ex. 남자친구) 얘기를 꺼냈는데 '너 인기 있었다고 자랑하는 거냐. 너한테 잘하라고 유세 떠는 거야?' 이런 반응을 보면 의기소침해지기도 하지요. 저게 인기 자랑이라고 생각하는 게 너무 억울하구요.

 

내가 직접 겪은 건 아니라도, 남사친들이 많은 술자리에 합류했다가, 그 자리에 없는 여자애를 씹는 모습이라도 한 번 보게 되면, 흠 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삼가게 되기도 하고요.

 

많은 여성분이 겪으시는 강력범죄는, 그나마 운이 좋아 피해온 것일 수도 있겠어요. 해서, 평소에는, 당연히 항상 저 공포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랬다가는 신경쇠약이 생기겠죠.

 

실제로, 강간이나 폭행을 당하신 여자분들의 공포는 얼마나 더 클지 상상도 잘 되지 않아요. 극복하고 일상생활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단 생각이 들지요.

 

조선대 의대 폭행 사건이라던지,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 그리고 부산에서의 각목 폭행.. 등의 소식을 들으면, 내가 그 어찌해볼 수 없는 무력한 자리에 있는 것처럼 온몸의 힘이 쭈욱 빠지네요. 그리고 그럴 때는 앞의 저 기억들이 다시 하나하나 되살아나고요.

 

피해는 한 번이었지만, 그 자리의 공포는 여러 번 되새기게 되는 거죠.

 


그리고 강남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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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한 3일 정도 감정의 동요가 매우 심했던 것 같아요. 울기도 많이 울고요. 끝없는 공포와 분노가 밀려오더라고요.

 

단지 여자라서는 아닌 것 같아요. 남자분들 중에서도, 게이 성폭행을 당해 본 적이 있는 분들은 공포를 느끼고, 여자분들 중에서도, 저런 경험이 없었던 분들은, 공포를 잘 모르시더군요.

 

그리고 어느 정도는 이해해요.

어느 시점까지는, 나도 무서운 게 별로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







편집부 주


위의 글은 독투불패에서 납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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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투불패 및 자유게시판(그외 딴지스 커뮤니티)에 쓴 필자의 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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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화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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